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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소리를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삼소(박종모)
현)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풍류방에서 정악특강 2020. 08. 20
<1>
<2>
<3> 뒤풀이
김정수 선생님이 수정(修正) 보완(補完)해 주셨습니다.
수년전 매일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2시간 동안
국악방송국의 ‘솔바람 물소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전통음악 전 장르를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 했었다.
물론 녹음방송이었다.
-이삼 스님과의 일화(逸話)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위해 대금 불기는 지양(止揚)하고,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이론 중심의 강의를 계속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저의 음반 20개를 선물로 준비해 왔다.
-가진 영상회상의 ‘가진’은 ‘갖추었다’는 뜻이다.
국악(國樂)이란 무엇인가? 1-(06:28)
정확하게 서지(書旨)적 사실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미도 문화사 간행 “음악대사전”에서는 국악을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또는 ‘고전음악’이라 했고,
삼성문화재단 간행의 “새우리말 큰사전”에서는
‘우리나라의 고전음악 즉 향악 아악 당악 속악’이라
정의 하고 있다.
아악(雅樂)이란? 1-(08:38)
고려 예종 때 중국에서 들어온 음악과
조선 초기 성균관의 문묘 제사에 쓰인 음악만을 말한다.
송나라 사악(詞樂)은 한자 가사(歌詞)가 붙어있던 음악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곡(曲)에 노랫말(가사)을 붙인 것으로,
아름다운 시(詩)를 붙인 사악은 송나라의 속악(俗樂)이었다.
이 속악이 고려 예종 때 들어와서 이후에 둘로 나누어졌는데,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과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이에 속한다.
종묘제례악은 세종 때 만들어졌으나 세조 10년에 처음 연주 되었다.
당악(唐樂)이란? 1-(12:06)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속악으로 가사가 달려 있었다.
오늘날에는 <보허자>와 <낙양춘> 2곡만 남아 있다.
우리 음악의 음계는 중심음이 Eb인데, 당악은 C음 이다.
속악(俗樂)이란? 1-(13:08)
말 뜻 그대로 음악의 향유(享有) 계층이 대중이라는 의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 계급이 아니면 음악을 즐길 수 없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그 자녀교육에 있어 무술을 제일 먼저 가르쳤고
이후로 어학, 수학, 웅변술, 천문학 등의 제왕학(帝王學)을 가르쳤는데,
마지막에 가르친 것이 인간의 감성을 순화시키는 음악이었다.
서양에서는 음악 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존중하고 신성시 여겨
음악회 갈 때는 예(禮)를 갖추기 위해서 반드시 정장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음악회가 퇴근시간에 맞춰 7시 30분쯤 시작되지만,
서양은 음악회 시간이 빠르면 8시 늦으면 10시에 시작되는데,
퇴근 후 씻고 식사하고 정장을 한 후 음악회에 가기 때문이다.
‘국악’ 이란 명칭은 언제 처음 사용 되었을까? 1-(19:52)
일제는, 1900년대 초 서울대 이병도박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찬란했던 한국의 역사를...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덧대어 초라하게 편찬(編纂) 하였다.
일제는 ‘우리 정신 짓밟기’의 일환(一環)으로 1907년
‘장악원’을 ‘이왕직 아악부’로 직제(職制)를 개편하면서
음악 명칭도 비하(卑下)하려는 의도로 ‘국악’이라 하였다.
역사 공부를 해보면 ‘가슴을 칠 노릇’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급 문화는 하급 문화를 흡수-변용-발전한다. 1-(20:33)
양복 문화가 한복 문화를 흡수한다.
이는 우수한 문화가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저급한 문화의 여러 요소를 흡수 변동(變動) 발전시켜 나가는
문화의 속성을 나타내는 한 예로서 ‘문화적 변동’이라 한다.
고려 예종 때(AD 1112년) 들어온 송나라의 사악(詞樂)이
300여년을 거치면서 조선 초기에 향악(鄕樂)화 되었는데,
박연 등에 의해 다시 주나라의 대성아악으로 돌아간 것이다.
겉으로는 아악의 정리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음악적 퇴보다.
주나라 때인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경
공자 맹자 노자 등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중국 역사상 가장 융성(隆盛)한 문화(文化)를 꽃 피웠는데,
이 때에 동양의 문학(文學) 철학(哲學) 음악(音樂) 등
동양학의 기초가 되는 한문화(漢文化)가 만들어졌다.
서주(西周 : 기원전 1046~770)와 동주(東周 : 기원전 770~256)
국악을 하셨던 선생님들의 국악(國樂) 정의 1-(26:31)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음악 전부를 국악이라 한다.’
그러면 아악 당악 향악 속악이 다 들어간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의 허구(虛構) 2-(00:01)
중국이 손바닥 만 한 나라를 왜 여러 번 쳐들어 왔겠는가?
동북방에 있는 거대한 나라였기 때문에 쳐들어 온 것이다.
-발해만(渤海灣) 근처에서 수많은 백제(百濟) 유물이 나왔다.
1982년 노무현 정권 때의 <동북아역사재단>과
식민사학의 거두(巨頭) 이병도(李丙燾) 박사의 망언(妄言)
-단군조선을 신화(神話)로 만들어 이전 역사는 다 지웠고,
우리의 역사 강역(疆域)을 대동강 이남으로 한정(限定)했다.
백선엽(白善燁) 장군은 일제 앞잡이인가?
아니면 6.25를 승리로 이끈 구국(救國)의 영웅인가?
이전 행적(行蹟)이 어떠하든
이승만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로 건설한 사람이고,
백선엽장군은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를 만든 사람이고,
박연은 무너진 우리 음악을 정리한 사람이라고
후손들에게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국악”이란 명칭이 언급된 사료(史料) 2- (11:20)
① 중종실록(中宗實錄) (제11대 재위 1506~1544)
중중반정으로 즉위하여 연산군의 폐정(弊政)을 개혁하였다.
② 선조(宣祖) (제14대 재위 1567~1608)의 수정록(修整錄)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수정본이 존재하는 실록으로,
율곡(栗谷) 이이의 십만 양병설 등이 기록된 실록이다.
수정은 1592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유관(有關)하다.
③ 순종(純宗) (제27대 재위 1907~1910)
원년인 1907년, 일본 사람이 조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직(李王職)으로 격하(格下)하고
황실 음악기관인 장악원의 직제(職制)도 개편(改編)하여
한국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국악사’라 하였다.
국악과 아악 2-(19:36)
지금은 국악이지만, 이전에는 그냥 악(樂)이었다.
아악은 궁중을 중심으로 한 양반계층의 음악이다.
음악이란 서민들이 향유(享有)하는 것이 아니었다.
음악은 숙명적으로 남을 즐겁게 하는 것 2-(21:00)
우리나라는 음악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연주자들의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
서양의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대가들은
그들을 후원하고 지원해준 왕이나 귀족들을 위해
작곡(作曲)을 하거나, 연주(演奏)를 하였다.
인간문화재의 공식 명칭과 현 상황 2-(22:11)
인간문화재라고 하는 예술가들의 공식 호칭은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지급되는 국가지원금의 공식 명칭이 ‘생계유지비’다.
일본의 문화재급 예술가 대우는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된다.
-지금의 우리 현실은 ‘기예능보유자’들이 그간의
교육사업에서 보여준 자업자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아악(雅樂)과 정악(正樂) 2-(27:20)
아악은 궁중(宮中)음악인 당악, 향악, 아악을 말하고,
정악은 가곡, 가사, 시조, 풍류음악(영산회상)을 말한다.
-판소리 등은 정악의 반대 개념으로 속악(俗樂)이라 한다.
-오늘날은 아악 정악 속악을 통틀어 ‘국악’이라 한다.
오늘날 한국 음악의 분류 2-(33:08)
한국 민족음악 또는 한국 전통음악
영산회상(靈山會相)이란 2-(35:11)
1759년(영조35년)에 서명응이 세조 때의 음악을 모아
편집한 대악후보(大樂後譜)에 들어있는 악보(樂譜)인데,
1400년대의 음악을 악보로 남긴 곳은 우리가 유일하다.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가? 보통 민족이 아니다.
우리 민족(民族)의 실체를 밝히다 2-(37:20)
우리가 백의(白衣)를 사랑한 민족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평화(平和)를 사랑한 민족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기상이 뛰어나고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한 예로, 동양에서 우리만큼 복싱 챔피언이 많은 나라는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악기는 무엇일까?
기법(技法)적으로 가장 발전해 있는 바이올린이다.
이 악기를 극복할 수 있는 민족은 우리와 유태인뿐이라 한다.
독일의 국보 바이올린인 ‘과르네리’ 이야기 2-(39:35)
독일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인을 상대로
이 악기를 맡겨서 연주하고 보관할 사람을 뽑는데
몇 해를 계속해서 선발된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
우리는 무슨 민족인가? 2-(40:47)
우리는 한(韓)민족이다.
중국 여행을 해보면 한(漢)보다 한(韓)이 훨씬 더 오래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한자(漢字)는 한족(韓族)이 만든 것을 우리만 모른다.
중국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통탄(痛嘆)할 노릇이다.
일본 나라현 정창원(正倉院)의 비밀 2-(45:20)
정창원은 일본의 국보를 보관하는 보물창고다.
내가 1990년대 정창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대금 중금 소금과,
가야금과 거문고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삼죽은 안 보여주고 가야금만 보여주었는데...
기타처럼 어깨에 메고 켤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말은 행진할 때 사용되었던 악기라는 뜻이다.
상상도 못한 것이었고, 역사가 바뀔 일인 것이다.
◆ 정악대금 계보(系譜) 2-(47:04)
기록에 나오는 인물 중 현재 우리가 연주하고 있는
대금 정악의 최고(最古) 연주자는
①정약대(鄭若大)인데, 헌종(憲宗 재위 1834~1849) 때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이었다.
1848년에는 어영청(御營廳)의 세악수(細樂手)였고,
1907년에는 직제(職制)가 개편되어 고취수였다.
-세악수(細樂手)의 세(細)는 ‘가늘다’는 뜻이 아니라
음정이 높다는 뜻이다. 세악(細樂)은 행진곡이다.
-고취수(鼓吹手)는 두드리고 부는 군악대를 말한다.
②김천룡(金千龍 1905~1945)
이왕직 아악부 2기생이며 녹성의 스승이다.
1928년 11월 3일 최초로 경성방송국에서 방송했을 때 출연했다.
김천흥 선생의 형님이고, 용인대 김정수 교수의 부친(父親)이다.
죽농(竹濃) 김계선(金桂善 1891~1943)은 아악부 아악수였는데,
청성곡, 평조회상, 상영산에 능통하여 독주음반을 많이 남겼다.
기량이 대단해서 오죽하면 별명이 ‘아악부의 김간판’이었고
관악기라고 생긴 것은 배우지 않았는데도 모두 잘 하였다 한다.
장악원에서 사범을 한 적은 없고, 기방에서 대금을 불었다.
③녹성(綠星) 김성진(金星振:1916~1996)
‘무형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의 초대 ‘기예능보유자’이다.
나와 정나례 선생은 녹성(綠星) 선생의 계보를 잇는다.
정약대(鄭若大) 선생의 일화(逸話) 2-(51:14)
세악수(細樂手)들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근처에 살았다.
매일 인왕산(仁王山)에 올라가서 도드리를 불었는데...
-왜 도드리를 불었을까? 연습곡으로는 ‘도드리’가 최고다.
한번 불면은 나막신에 돌을 하나씩 주어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막신에서 풀이 돋았다는 전설이 있다.
나막신에 돌이 얼마나 들어갈까?
얼마를 넣어야 나막신을 가득 채울까?
도드리 한 번 부는데 정확하게 6분 40초 걸린다.
-그만큼 많이 부셨다는 이야기다.
대금이 솔로악기로 등장한 이야기 2-(53:49)
대금은 솔로 악기로 사용된 기록이나 사실이 없었다고 전한다.
유명한 연주가가 나오면... 연주한 바로 그 음악과 그 악기가
유명한 독주 음악으로, 또 인기 있는 독주악기가 되곤 한다.
당시 경성방송국 최고의 스타는 김준현 선생이었는데,
그분이 매일 방송에 나와서 피리를 불었다.
가농(茄濃) 김준현(金俊鉉 1918~1961)
1931년 14세에 아악부원양성소 4기로 입소, 전공은 피리.
정악뿐만 아니라 민속기악, 가사, 시조, 속요에
이르기까지 뛰어났고, 특히 수성가락은 신운이 넘쳤다.
-녹성(綠星) 김성진(金星振) 선생과 동기(同期)다.
피리가 왜 피리일까?
피리는 한자(漢字)로 필률(筆篥)인데, 중국 발음이 ‘삐리’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는 악기는 다 ‘피리’라 한다.
1910년~1920년대 경성방송국의 방송(放送) 편성표를 보면
국악방송이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편성(編成)되었고,
서양음악방송은 한편 정도 편성되었다. 이러한 시절에
경성방송국에서 제일 유명한 음악중 하나가 피리연주였다.
그런데 가농(茄濃) 선생이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자,
대타(代打)로 녹성(綠星) 선생이 들어가 대금을 불었는데,
‘어? 피리보다 이게 나은데?’ 라고 대중들이 환호하여
그 다음부터 김성진 선생이 계속 방송에 나와 가지고
경성방송국 전체에 매일 대금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고,
이후로 대금이 화려한 무대에 독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대금정악 기예능보유자 조창훈 2-(58:54)
초대 기예능보유자인 녹성 선생이 돌아가시고
제2대 보유자인 용인대 김응서교수를 거쳐
제3대 기예능보유자로 조창훈 명인이 되었는데,
당시 본인이 심사위원장을 맡아
조창훈 명인을 지명(指名)토록 심사(審査)하였다.
조창훈(趙昌勳 1941~ )
1955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1기생 졸업
196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 역임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 기예능보유자
제도권 생활을 20대 후반에 끝낸 이후로는
지방으로만 다니며 학원이나 연주무대로 생활을 하셨다.
6년 선배인 그분하고 저하고는 사형제(師兄弟)간이 된다.
정악대금 계보(系譜)의 그 다음으로는
국악고등학교 대금 실기 교사와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를 역임했고,
제1호 종묘제례악 기예능보유자로 종묘제례악 보존회 이사장이며
초대 <대금연구회> 이사장 이셨던 이상용(李相龍 1942~) 교수이다.
그 다음이 소정(小亭) 김정수(金晶洙 1947~) 본인(本人)인데...
본인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1961년 국악사 양성소에 입문 한 후 졸업,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한국음악학 석사를 취득하였으며,
국립국악원 연주원(演奏員)과 연구원(硏究員)을 거쳐
추계(秋溪)예술대학교 국악과 대금전공 실기 교수와,
본교 교육대학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평생을 대금 연주자로, 대금 실기 교육자로
60여년 이상의 세월을 대금음악의 보급과 계승을 위해
이바지 하였다는 자부심(自負心)과,
또 평생을 수많은 악단에서, 연주회에서, 악회에서
대금을 연주하며 오직 대금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 중 한명이다.
그런 사람을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신다.
차와 음악
전 세계에서 차를 마시는 민족이 한 둘이 아닌데,
모두가 자기네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신다.
따라서 차와 음악은 일미(一味)가 아니겠는가?
차선일미(茶仙一味)라는 말이 있다.
차선일미(茶仙一味) : 차(茶)와 선(仙)은 한 가지 맛이다.
다도(茶道)와 선도(仙道)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不二一如)
음악이, 조상들이 물려준 훌륭한 문화유산 이듯이
차 또한 조상들이 물려준 귀중한 전통문화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서로 만나게 해주면 좋지 않겠는가?
시대에 따라 가치(價値)가 바뀌듯이 전통도 바뀌어 간다.
차 문화는 상당히 근대화 되어 있었지만
차를 마시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21세기의 새로운 다악(茶樂)을 만드는
‘차와 우리음악의 다리 놓기’라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다악(茶樂)이 만들어지게 된 비화(秘話) 3-(03:20)
<우리나라 3대 다도 협회>
1.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 (1979년 1월 20일 설립)
전국의 차인회를 총 망라(網羅)하는 연합.
2. 사단법인 한국다도협회 (1983년 10월 13일 설립) -부산 중심
부산여대 설립자인 설송(雪松) 정상구(鄭相九) 박사가 창립.
광복이후 부산에서 활동한 문학인이자, 교육가이며 정치인이다.
3. 사단법인 한국차문화협회 (1991년 4월 12일 창립)
이길례씨가 창립.
사업 당시 3단체의 회장
차인연합회 : 박권흠(朴權欽 1932~ )부산 동래 출신,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장
다도 협회 : 정상구(鄭相九 1925~2005) 경남 창원 동면 출신, 5선 의원
차문화협회 : 이원홍(李元洪 1929~ ) 경남 고성 출신, KBS사장 관료
* 차인들은 절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
그러나 차와 다악(茶樂)이라는 새로운 전통 창조를 위해서
3협회 단체장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적(奇蹟)이 일어났다.
* 차례(茶禮)는 술이 아니라 차(茶)로 예(禮)를 올리는 것이다.
티타임(Tea Time)이란 것은 고려 광종 때 생긴 것이다.
음반(音盤)은 매년 1개씩 10개를 만들었다. 3-(11:00)
음반에는 시간제한이 있어서 5곡 이상은 못 넣는다.
제가 듣기에도 좋은 음악이 꽤 많이 있다.
-다악(茶樂) 제1집에 나오는 글.
다악(茶樂)을 통한 차(茶)문화 발전을 기대하며
동서양 각국의 차 마시는 풍경을 보면 떠오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풍부한 차 문화와 함께 아름다운 전통음악이 있으나,
근·현대의 힘겨운 역사 속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잠시 잊었을 뿐입니다.
이제 자연과 함께 건강을 찾는 우리에게 한 잔의 차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곳에 음악이 있습니다.
1982년 한국음악 창작의 전통을 따라 연주자들이 모여
우리 고유 음악언어에 뿌리를 둔 창작음악을 추구하여 온
저희 <한국창작음악연구회>가
생활 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의 발견과 그 보급을 위하여
"차와 우리 음악의 다리 놓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작업은 차 문화 활성화에 다도음악이 기여할 수 있다는
300만 차인과 음악인의 공감(共感),
다악(茶樂)과 차 문화의 상호발전에 대한 기대와 함께
차인들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창작된 다도음악이 효과적으로 보급될 수 있도록
공연과 더불어 CD를 제작하였습니다.
한국창작음악연구회는 21세기 한국문화의 총체적인 모습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계음악계와 활발한 교류를 갖고 다악 공연의 장을 해외로 넓혀 나가려 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의 노력이 우리 차와 우리 음악을 포함한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을 새롭게 하기를,
그리고 이 음악이 차인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정수 <한국창작음악연구회> 회장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1 차향이제(茶香二題) -황병기
2 차음악(茶樂) -이건용
3 녹향송(綠香訟) -백병동
4 합주곡 제8번 다심삼매(茶心三昧) -김희조
이상 <다악 1집>의 4곡을 올리려 하였으나
‘저작권 위반 의심’으로 올릴 수 없음을 양해(諒解)바랍니다.
퉁소 단소(短簫) 태평소(太平簫)의 소(簫) 3-(17:06)
簫 -퉁소 소, 순(舜)임금 음악 이름, 16관-팬플룻(Pan plute)
소(簫)는 종적(縱笛), 금(笒)은 횡적(橫笛)이라는 뜻이다.
금슬(琴瑟)의 금(琴)은 ‘고’라고도 하는데,
판때기 위에 줄을 얹었다는 뜻이다.
琴 -거문고 금, 7줄 / 瑟 -큰 거문고 슬, 25줄
동이(東夷)라는 말은 수서(隋書)에 나온다. 3-(22:14)
우리가 활쏘기에 강한 이유
방탄소년단과 아리랑, K-pop, 사물놀이
우리음악은 쩔뚝음악(3분박)이다. 3-(25:34)
중국음악은 4균박(均拍)이다.
애국가(愛國歌)의 음악적 평가 3-(27:18)
첫 박에 강박(强拍)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16소절이 똑 같이 반복될 때 이를 표절(剽竊)이라 한다.
헝가리(훈족) 악기와 우리 악기는 거의 같다.
문화의 속성 3-(32:07)
우리 5음계는 5방(方)에서 온 것이다.
.
동안(童顔)의 비결 3-(35:30)
지휘 하는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장수한다.
창작(創作)하는 고뇌(苦惱)의 작곡가들은 요절(夭折)한다.
-점과 선으로 화폭을 가득 채운 고흐의 그림.
-도드리 즉 환입(還入)형식도 이와 같다.
‘정약대(鄭若大) 선생님의 일화(逸話)’ 뒷 담화 3-(39:46)
도드리장단은 6분 40초 안에 끝나야 한다.
<대금연구회> 3-(42:36)
제가 대금연구회 2대 이사장을 역임했는데, 제 제자(弟子)이자
국악 실내악단 ‘슬기둥’ 대표였던 이준호(1960~2019) 교수가
4대 이사장을 할 때의 사업 중에서 제가 정악대금 수업을
‘진도 국립국악원’에서 하기로 하였지만 안타깝게 취소되었다.
-애주가에 풍류객이었던 이준호 작곡가.
넓은 간격의 지공 그 어려움 3-(48:40)
* 5분 동안 손가락 풀기
자연친화적이며 소리가 아름답고 미분음까지 다 내는,
외국인도 깜짝 놀란 최첨단 웰빙악기가 바로 대금이다.
대금 훈련방법의 일반적인 잘못 3-(50:25)
욕심이 너무 앞서 있다. 걷기도 전에 뛰려고 한다.
걷기를 충실히 하면 저절로 뛰어진다. 그런데...
걷는 연습은 안하고 뛰는 것부터 하려니 힘든 것이다.
뛰는 것은 보지를 말고, 6개월만 걷는 연습을 해 보시라.
한 음을 길게 뻗지도 못하면서 다음 음으로 넘어가려 한다.
① 대금을 하모니카 잡듯 하여 롱톤을 연습한다.
② 서양악기인 트럼펫도 처음에는 롱톤 연습부터 한다.
③ 한 음이 충분히 소리가 나면 다음 음으로 넘어간다.
청 울리기 3-(54:00)
우리 때 초보자는 청구멍을 안 뚫은 채 도드리를 배웠고,
한 3개월 연습(演習)해서 완전히 소리가 났다 그러면 그때
선생님이 청공을 뚫어주셨고, 그 이후에 여민락을 불었다.
그러면 여민락 소리가 빵~ 터진다.
도드리 잘 부는 방법 3-(54:48)
첫째로 도드리를 외워야 한다.
외운다는 것은 외워질 만큼 많이 불었다는 이야기다.
도드리가 외워진 후 청구멍을 뚫으면 청소리는 저절로 난다.
우리 때는 신문지를 씹어서 청구멍을 막고 테이프로 감았다.
둘째로 대금을 불 때 진동(振動)을 손가락으로 느껴야 한다.
좋은 쌍골죽에 내경을 페인트로 칠하면 진동을 느낄 수 없다.
* 대금 소리가 나는 원리 3-(56:41)
바람을 통속에 불어넣어, 운지로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것.
계속 회전하고 있는 바람의 마찰(摩擦)방향이 운지로 바뀌게 되면
서로 다른 바람과 바람이 부딪치면서 진동과 소리가 나온다.
* 대금의 발성법 3-(57:28)
손가락에 힘이 많이 들어가면 지공을 제대로 못 막아서
운지를 통해 바람의 진동 방향을 원활하게 바꿀 수 없다.
한소리를 길게 내는 롱톤 연습만 잘하면 끝난다.
그 다음에는 6개 지공을 막는 소리가 “퐁퐁” 나게 연습한다.
6개 지공을 순서대로 막을 때 구멍 막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꾹 참고 3개월만 한 후, ‘태중태황태남’ 연습만 또 반복 한다.
주의할 점은, 연주 속도를 늦추지 말고 정상속도로 연습한다.
김성진 김기수 선생님은 두주불사(斗酒不辭) 3-(1:03:45)
녹성(綠星) 김성진(金星振) 선생님은 대금을 잘 부셨지만,
김기수 선생님은 다방면에 천재적 소양(素養)을 가지고 계셨는데,
만약 죽헌 선생님이 안계셨다면 오늘날 국악은 없었을 것이다.
죽헌(竹軒) 김기수(金琪洙:1917~1986) -작곡가 교육자.
당신의 음악철학 “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
국악 창작의 효시(嚆矢)이시며, 대금 단소 거문고 가야금
해금 피리 성악 등 정악의 악보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그리고 정간보를 보고 노래하고, 소리를 듣고 악보에 적을 수 있는
시창청음(視唱聽音)을 교육하기 위해서 교재인 <대마루108.66>을
1979년에 출판(出版)하셨는데, 현재까지 15판이 출간(出刊)되었다.
*‘순천태양’님이 여민락카페의 ‘대마루108악보’ 방에 잘 정리해 두었다.
모든 것을 툴툴 털고 자유인이 되다 3-(1:05:40)
제가 2013년도에 정년퇴임을 하면서, 평생을 모았던
테이프 악보 책 등 모든 자료들을 연구실에 그대로 놔두고
‘누구라도 가지고 싶은 사람은 다 가져가라.’하고 나왔다.
그런데 고향 부산에서 저를 음악감독으로 내려오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이미 모든 자료들은 제자들이 다 가져갔고...
대금 한 자루는 안 버리고 남아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천맥(天脈)의 선생님 어깨 기공치료 3-(1:13:30)
비엔나 아카데미의 ‘수석졸업’ 3-(1:22:10)
졸업시험을 하루 8시간씩 사흘을 보는데,
고전 현대 창작 3가지 곡을 암기(暗記)해야 하고,
그 과정을 Pass하면 그 이름이 ‘수석졸업’이다.
즉, 수석(首席)을 한 것이 아니라 졸업장 이름이다.
하루에 8시간 분량을 외워서 연주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음악이란 극기(克己)다. 3-(1:23:58)
음악이란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을 도(道)라고 한다.
박환영 교수와 박종기 선생 3-(1:26:55)
부산대학교에서 대금을 가르치는 박환영 교수는
직계(直系) 문하(門下)이다.
대금산조의 창시(創始)자이자 ‘진도아리랑’을 작곡한
박종기(朴鍾基 1880~1947)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인
박병천(朴秉千 1933~2007) 선생의 종조부(從祖父)이시고,
박환영(1957~ ) 교수는 박병천 선생의 아들이다.
이 집안은 250년 이상 무업(巫業)에 종사한 가문으로
문화관광부가 ‘전통예술명가’로 지정(指定)하였다.
쌍골죽 이야기 3-(1:34:36)
장점 : 내경이 고르기 때문에 음정이 바르게 나온다.
대소리는 반쌍골의 맹죽이 훨씬 좋다.
녹성(綠星)선생님의 대금 관리법 3-(1:38:46)
청가리개 사용법 3-(1:40:02)
청가리개는 청 소리를 반향(反響) 시켜서
안으로 다시 넣어 대금을 진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청뚜껑을 열어놓고 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4 정도 닫고 불어야 한다. 전공자는 거의 닫는다.
-산조대금은 음색이 날아야 하니까 다 열어놓고 분다.
-백동(白銅)이 진동(振動)을 제일 잘 받아주기 때문에
청가리개 재료로는 백동(白銅)이 제일 좋다.
백 원 동전 만드는 게 백동이고 녹이 쓸지 않는다.
좁은 땅덩어리에 사투리가 많은 이유 3-(1:46:27)
우리 민족의 음악성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영산회상을 불 때 상령산과 중령산의 어법이 달라야 한다.
대금 보관법 3-(1:48:29)
대금을 안 불 때는 기름통에 넣어 보관했다.
-정나례 선생 대학시절 목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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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과 회원모두 건강들 하신지요 무더위에 잘승리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