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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집결장소 : 2017년 7월 23(일) / 경춘선 가평역(11시)
◈ 참석자 : 9명 (종화, 창수, 윤환, 원무, 윤상, 삼환, 문형, 양기, 천옥)
※ 우천으로 카톡 및 전화상으로 협의, '굴봉산' 산행은 못하고 가평역에서 하차 '남이섬' 가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남이섬'으로 이동, '남이섬'을 탐방, 음악 감상과 걷기 운동 실시함(나 원장 승선요금 협찬).
◈ 동반시 : "주점에서" / 김립(김병연)
◈ 앞풀이 : 생불고기에 막걸리 / "한우명가"< 가평역 근처, (031) 581-1592~5 >
※ 동반시
"주점에서" / 김립(김병연)
천리 길 나그네 겨우 지팡이 뿐이니
남은 돈 일곱 닢 오히려 많다 하겠네
주머니 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자 다짐했건만
석양에 주막을 만나니 아니 마시고 어쩌리
※ 김립(金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삿갓. 그의 일생은 여러 가지 기록과 증언들이 뒤섞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6세 때에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평안도 농민전쟁 때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자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에 피했다가 사면되어 부친에게 돌아갔다.
아버지 안근(安根)이 화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그는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장원하게 되었다. 그 뒤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의 자식이라는 세상의 멸시를 참지 못해 처자식을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 남이섬(南怡島)
조선 세조 때에 무관인 남이장군의 묘가 있다고 하여 '남이섬'이라 했다. 총면적은 약 46만 ㎡이며, 둘레는 약 5km이다. 청평 댐 완공으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완전한 섬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경춘관광주식회사'에서 본 섬을 매입하여 관광지로 조성했다. 남이장군이 묻힌 장소는 정확하지 않으나 관광회사에서 돌무더기에 흙을 덮어 봉분을 덮고 잘 꾸며 지금의 묘를 만들었다.
섬 내에는 밤나무·포플러나무를 둘러 심었고, 중앙부에는 잔디밭과 오솔길이 조성되어 있어서 전원의 풍치를 느낄 수 있다.
각종 레저시설과 동물원, 유선장 등 각종 오락시설 및 숙박시설, 식당 등이 잘 정비되어 있고, 특히 유람선, 모터보트, 수상스키 등이 있어 젊음의 낭만과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져 있다.
● 남이섬의 유래
앞섬이라는 뜻의 남섬으로도 불렸던 남이섬 지명의 유래는 남이섬 북쪽 언덕의 돌무더기에 남이장군이 묻혀있다는 오랜 민간전승에 기인하여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 천우기행(穿牛紀行) 및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 등에 따르면 이러한 민간전승 내용과 함께 일찍이 남이섬을 남이서(南怡嶼)로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島가 큰 섬을 가리키는데 반해 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섬을 뜻한다. 수재 민병도 선생은 1965년 남이섬 조성 초기, 남이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장군의 기상을 기리기 위해 돌무더기 주위에 봉분을 쌓고 추모비를 세웠는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다. 한편 남이장군의 행정상의 진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위치하고 있다.
● 유니세프 어린이친화공원 남이섬
나미나라공화국 남이섬은 2010년 12월 세계에서 14번째, 한국에서는 최초로 유니세프 '어린이친화공원'(Unicef Child Friendly Park)에 선정되었다. 유니세프를 통한 후원활동과 남이섬세계책나라축제 등 남이섬의 어린이 정책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결과였다. 남이섬은 사단법인장애인인권포럼에서 선정한,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리한 관광지인 'Easy Place'에 선정되기도 했다.
◈ "남이장군"(南怡將軍)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에 있는 남이(南怡) 장군묘는 가묘이다. 조선 초기 무신 충무공 남이(1441∼1468)장군의 묘소는 부인과 함께 쌍분묘로,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야산(산145번지)에 위치한다. 1973년 7월 1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남이장군은 세조 3년(1457)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조 13년(1467)에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봉해진 후, 여진을 토벌하여 이등군공에 올랐으며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 하여 28세 때에 처형 당하였다. 그 뒤 순조 18년(1818)에 복직되었으며,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닳이며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 시는 남이장군(南怡將軍)이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인데, 웅장하고 기세가 넘치는 詩이다. 그렇지만 이 시가 나중에 후환(後患)이 된다. 간신인 유자광(柳子光)은 이 시의 한구절을 이렇게 고치고 남이를 역모죄로 몰아 죽인다.
南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원래는 위와 같은 것인데, 유자광이,
男兒二十 未得國 (남아이십 미득국)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이렇게 고쳐 남이장군은 참수 당한다. 유자광이 '평'(平)을 '득'(得)으로 고친 꾀가 가히 모략의 천재 솜씨라 할만하다. 그렇지만 유자광은 그 후에도 자신의 출세와 부귀를 위해 남을 모함 한다. 그렇지만 결국 귀양가서 소경이 됐으며, 궁하게 살다가 죽고 만다. 도대체 자신의 나라에서 간신 노릇하는 신하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일까?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남이 장군은 결국 누명을 쓰고 죽었다. 세조는 눈은 보이되 볼 수가 없고, 귀가 있되 들을 수가 없는 밥병신이다. 1818년이 되어서야 남이장군의 누명이 벗겨져 병조판서에 복직 되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 했지만 그는 조선의 신이 되었다. 20세에 불과한 나이에 이렇게 기개있는 시를 지었다는 것이 대단하였다. 조선시대 세조(수양대군)의 총애를 받던 남이는 재위 14개월에 불과한 예종때 유자광의 모함으로 죽는다.
남이는 태종(이방원)의 네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이다. 세조에게는 고모의 아들 즉, 고종사촌 이었다. 세조는, 맏아들인 의경세자(덕종)의 동생인 예종은 유약, 정사에 능하지 못한 반면 남이는 강직하고 무인의 기질이 있어 그를 총애하여 27세 나이에 '이시애 난' 등을 평정한 공로로 병조판서에 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