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천 산책
대문을 나서면 바로 수원천이라 산책을 자주 한다. 수원천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심 속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우리 집이 화홍문과 가까이 있어 경기대 방면이나 팔달문 쪽 중에서 정하면 된다. 경기대 쪽을 선택하여 천천히 걸어 본다. 늘 가까이서 보고 걷는 길인데도 만날 때마다 자연은 새로운 모습으로 맞이해 준다.
예전에는 빨리 걸어야 운동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 시간을 재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지금은 운동을 위한 걷기가 아니라 급할 것이 없다. 내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발길을 옮기다 보면 빨리 걸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 네잎클로버를 찾기도 하고 성큼 자란 잎새와 어제의 꽃망울이 꽃으로 벙글어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반가워하기도 한다.
조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조팝나무꽃은 조경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피었을 때 더 예쁘다. 정원사가 조경하여 일정한 크기로 키를 맞추어 놓으면 매력은 뚝 떨어진다. 수원천 산책길은 날 것 그대로라 좋다. 네잎클로버를 찾았던 장소에 가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세 잎 클로버만 있다. 무심코 걸을 때 불쑥 얼굴을 내밀다가도 막상 찾으려 하면 숨어버린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라서일까. 더 친근한 느낌이다. 길가에 세 잎 클로버는 얼마든지 있어 행복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
하천가에 철쭉이 활짝 피었다. 흰철쭉은 아직 봉우리가 피어오르고 있다. 흰색 제비꽃이 아는 체를 한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라색 제비꽃은 보이지 않는다. 얼른 사진 한 장을 찍으며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붓꽃도 잎새가 제법 크게 자라 있다. 버드나무는 연둣빛이 햇빛에 반짝 빛나고 담쟁이 또한 아기 손가락처럼 연약하게 줄기를 뻗고 있다. 노란 민들레가 예쁘게 피었다. 그 옆에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기 직전의 한 송이와 이미 날아가고 꼬투리만 남은 흔적이 보인다. 미국 제비꽃과 개불알꽃도 지천으로 퍼져있다.
수원천은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 수원천을 걸을 때면 모수길 이라는 푯말이 자주 보인다. 왜 모수길 인지, 모수길은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지 궁금해하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나의 의문이 수원평생학습관에서 진행하는 ‘수원 팔색길 연구동아리’를 알게 되면서 한 번에 풀렸다. 수원은 백제시대에는 ‘물길의 근원이다’ 하여 모수국이라 불렸다. 수원 팔색길 중 수원천은 제1색 길인 모수길의 일부분이라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수원에 살면서 지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부끄러웠다. 주변에 관심을 두고 조금씩 알아가면 나의 산책이 더 풍요로울 것 같다.
수원천에는 다리가 많다. 경기대 쪽으로 올라가면 수원천 제1교인 경기교가 있다. 집 근처의 방화교에서 경기교까지 다녀오는 게 나의 1코스 산책길이다. 다음은 화홍문과 남수문을 지나 구천교까지가 2코스이다. 방화교를 출발해서 제16교인 구천교까지 다녀오면 된다. 화홍문을 지나는 산책길은 1코스와 다른 느낌이다. 화홍문은 수원 팔경 중 제7경 화홍관창의 주인공이다. 화홍문 수문에 쏟아지는 물보라가 아름답다지만 평소에는 물보라를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쉽다. 일곱 색깔 무지갯빛의 홍예문, 밤의 화홍문은 몽환적인 불빛과 함께 한층 멋스럽다. 바로 옆의 용연을 들러 연잎의 푸르름을 느껴볼 수 있고 여름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연꽃을 만나는 행운과 마주하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용연과 화홍문을 중심으로 수원천의 징검다리를 건너다니며 자유로운 놀이를 즐겼다. 그곳이 우리 집 마당이고 정원이었다. 멋진 성곽은 늘 한가하고 조용했다. 요즈음은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청춘들이 많이 찾는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용연은 방화수류정과 더불어 화홍문과 어우러져 수원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준다. 용연의 연못에 방화수류정의 정자가 비친 사진은 누가 찍어도 멋진 작품이 된다.
화홍문의 현판은 예서체의 대가 유한지의 서체로 알려져 있다. 건물이 주는 아름다움과 현판이 잘 어울려 화홍문이 더욱 돋보인다. 화홍문을 뒤로 하고 남수문 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화홍문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아주 낮은 다리가 있다. 다리 근처에는 작은 물고기가 많이 산다. 그곳을 지날 때면 늘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게 된다. 어릴 때 물가에서 고무신으로 잡고 놀던 송사리 떼 같기도 한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정조가 사랑한 수양버들이 화홍문에서 매향 교에 이르는 구간에 줄지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봄이 오고 있음을 버드나무의 물오름에서 제일 먼저 알게 된다. 아직 겨울인가 싶을 때 버드나무를 보면 봄이 오고 있다고 나무가 말해준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스라이 수채화의 은은한 연두가 ‘봄이 오고 있어요’라고 속삭인다.
매향교를 지날 즈음 청둥오리 가족이 산책을 나왔는지 여럿, 눈에 띄었다. 조금 걸을 때마다 흰색 깃털의 백로도 자주 나타났다. 미동도 없이 한참을 서 있더니 갑자기 물속에 잠수, 순식간에 물고기를 낚아챘다. 산책할 때마다 청둥오리와 백로가 자주 등장하여 발길을 여러 번 멈추게 된다. 수원천이 자연 친화적인 하천이라는 증거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고여 있는 듯한 물가 쪽에는 팔뚝만 한 잉어가 펄떡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구경하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발길이 무거워질 무렵, 드디어 목적지인 제16교 구천교에 도착했다. 수원천은 계속 이어지는데 나는 이곳 이상을 가보질 않았다. 종착점은 아닌데 여기서 멈추는 나를 보면서 경계를 정하지 말자고. 저 너머 세상에도 관심을 두자고 다짐해 보았다. 언젠가는 더 멀리 산책하는 나를 상상 하며 왔던 길을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