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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금부터 궁 입구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들어가 좀 쉬시지요.
왕: 알았다. (퇴장)
(왕비와 몸종들 등장한다)
왕비: 왜 아직 안오는 거야?
몸종1: 바로 온다고 했습니다. 마마.
왕비: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 무심한 인간이 뭐가 좋다구……. 얘들아.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지 모르겠다. 평생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몸종2: 저기 옵니다.
(재간이 등장하여 왕비 앞에 무릎을 끓는다.)
왕비: 네가 걸음이 빠르다고 했느냐?
재간: 그렇습니다.
왕비: 전령보다 먼저 가야 한다. 홍동지에게 일러라. 생명이 위험하다고, 어디로 잠시 피해 있으라고 해라. 곧 다시 연락을 할테니 기다리고있으라고.
재간: 알겠습니다.
(왕비 퇴장. 재간이는 다른쪽으로 퇴장하다 맹 대장을 만난다. 그를 보고 흠칫 놀란다.)
맹 대장: 왜 그렇게 놀라느냐?
재간: 네, 사실은……. 저…….
맹 대장: 다 알고 있다. 홍동지에게 내 말도 좀 전해다오.
재간: 예.
맹 대장: 산으로 돌아가라고 일러라.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말라고. 여기는 그자가 살 곳이 못된다.
재간: 알겠습니다. (달려나간다.)
맹 대장: (재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서 멀쩡하게 잘사는 것을 공연히 불러들여 쓸데 없는 화근을 만들었구나.
(퇴장)
6. 매사냥
(왕이 자리에 앉아있고 시녀 장, 내관, 박사가 그 앞에 서있고 전령이 엎드려있다.)
내관: 폐하께 그때의 상황을 소상히 아뢰어라.
전령: 네, 그러니까. 제가 아군의 진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반란군은 모두 도망가 그림자도 안 보 이더군요. 홍장군께 폐하의 말씀을 한마디도 안 빼놓고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알았다 며 철군 명령을 내리시더군요. 그리고는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죽은 자들의 시체를 거두는 일, 병장기들을 챙기는 일을 독촉하셨습니다. 막상 철군 준비가 다 되었는데 홍장군의 모습이 보이질 않지 뭡니까요?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병사들 사이에 왔다갔다하던 양반이 눈 깜짝 할 사이에 모습을 감추셨으니 말입니다. 그래 병사들을 풀어 천지사방을 다 뒤졌습니다마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 고연 놈이 아니더냐? 저를 위해 잔치상까지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병사들만 남겨 놓고 어디로 도망쳤단 말이냐?
시녀 장: 저는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그 놈이 뭔가 큰 일을 칠거라 는걸.
내관: 역심을 품었습니다. 역심을!
박사: 역심이라니요? 그 무슨 얘기요, 내관?
내관: 홍동지가 애당초 대왕폐하 주무시는 방앞에서 얼쩡거릴 때 이미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마는 불행 중 다행으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돌아오려고 생각해보니 무언가 마음에 걸렸던 게지요. 그러니 줄행랑을 놓은 것 아닙니까?
박사: 홍동지는 두 차례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웠소. 역심을 품었다는 건 모함이오.
왕: 그런데 어째서 쥐도 새도 모르게 줄행랑을 놓았냔 말이야?
박사: 무슨 사고가 난 게 아닐까요?
왕: 이놈이 역심을 품은 게 틀림없어. (몸을 떨며 ) 무서운 일이다. 궁 입구의 수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라. 담장 둘레에도 요소요소에 궁수들을 배치하라. 쥐새끼 한 마리라도 얼씬 거리는 것은 무엇이든 쏴 죽여라.
내관: 네 알겠습니다.
시녀 장: 폐하. 이제 그인가 생각 만해도 온 몸이 떨리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왕: 내가 누구냐? 이 나라의 왕이다. 왕이 너를 이렇게 감싸고 있는데 무서운 게 뭐 있냐?
(이때 왕비 등장한다.)
왕비: 폐하.
왕: 왕비!
왕비: 멀리 서역에서 미희들이 도착했습니다.
왕: 지금 중요한 국사를 논하고 있는 중이오.
왕비: 그동안 너무 과로하셨습니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시간 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마음 껏 즐기십시오.
왕: 왕비, 갑자기 왜 이러시오?
왕비: 재미있는 구경은 여럿이 할수록 좋은 법이지요.
(왕비의 손짓에 따라 수레에 탄 일곱 미희들 너풀거리는 일곱개의 천으로 몸을 가리고 춤을 추며 나타난다. 왕은 넋 놓고 미인들의 춤을 감상한다. 수레는 천천히 구르며 무대를 가로질러 지나간다.)
왕비: 오늘은 내가 이 자리를 양보하리다. 자!
(시녀 장, 물끄러미 왕비를 쳐다본다.)
왕비: 왕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내가 허락을 했다. 무엇을 망서리는냐?
시녀 장: 왠지 두렵습니다.
왕비: 무엄하구나. (시녀 장이 자리에 앉자) 서역 일곱 미희들의 일곱 빛갈 무지개 춤판을 놀기 전에 우선 놀음바치들의 여흥이 잇겠습니다. (왕에게 고개 숙여 절한다)
(놀음바치들이 휘장에 쌓인 인형극 수레를 밀고 들어와 매사냥 막을 시작한다.)
박첨지: 평안감사께서 꿩사냥을 온다네.
마을사람: 사냥을 온대야?
박첨지: 그래. (창) 날이 좋아서 들 구경 가니, 그 산골짜구니가 썩 좋구나. 나니니요, 니나 난실 니해요. 거들거들 거려서 놀아들 보세……. 쉬이 (악기 소리 그친다.)
평양관속: 여봐라, 박가야.
박첨지: 아, 누가 날 찾나?
마을사람: 저 평안감사께서 이 곳 산경치가 좋다고 구경을 오셨으니까 가보게
박첨지: 예예
평양관속: 네가 박가냐?
박첨지: 예. 박간지 안간지 됩니다.
평양관속: 얘, 여기와서 산경치를 보니까 좋기는 하다.
박첨지: 예.
평양관속: 평안감사께서 매를 가지고 꿩사냥을 왔오.
박첨지: 예.
평양관속: 그러니까 몰이꾼 하나 사주게.
박첨지: 네. 아 여보게.
마을사람: 응.
박첨지: 아 평안감사께서 여기 산경치가 좋아서 꿩사냥을 왔는데, 몰이꾼 하나 사달라네. 그 하나 사주까?
마을사람: 자네 조카 홍동지를 불러주게.
박첨지: 글쎄 부르긴 부르지마는 그 놈이 발가벗었는데 발가벗은 것도 괜찮을까?
마을사람: 하여간 불러가지고 저 사령님한테 바른대로 이놈이라고 말해보게.
박첨지: 그럼 불러주게.
마을사람: 산너머 뒨둥아. 산너머 뒨둥아. 얘, 산너머 뒨둥아! 대답이 없네 그려.
박첨지: 대답이 없어? 그럼 내가 불러볼까? 홍 장군 어디 계시오?
(이때 휘장 속에서 홍동지의 몸이 불쑥 위로 솟구쳐 오른다.)
왕: 아니 저건…….
내관: (무관들에게) 무엇들을 하느냐? 저자를 잡아라.
(검둥이와 잡종, 홍동지에게 달려드나 발에 차이고 주먹에 얻어 맞아 일격에 쓰러진다.)
왕: 너는……. 어째서 그속에서…….
홍동지: (왕에게 다가가 왕관을 벗겨 집어 던지고 머리채를 잡으며) 나쁜놈.
왕: 네가 …….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박사: 왜 이러는가. 홍 장군?
홍동지: 모두 무릎을 끓어라.
(홍동지의 호령에 모두 재빨리 무릎을 꿇는다.)
홍동지: 너는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다.
왕: 너야 말로…….
홍동지: (주머니에서 화살을 꺼내며) 이건 뭐냐?
왕: 그건 ……. 내가 한게 아니다.
홍동지: 그럼 누가 했느냐? (왕이 손가락으로 내관을 가리키자) 그래서 너는 몹쓸 인간이다. 이끝에 독을 발랐다고 하던데 한번 시험해보자.
왕: 제발 .내가 잘못했다. 목숨만…….
(홍동지는 화살척으로 왕의 목을 긋는다. 잠시 후 왕은 쓰러진다.)
홍동지: 이 자는 마땅히 자기 갈 길을 간 것 뿐이다. 백성을 헐벗고 굶주리는데 이자는 허구헌날 잔치와 향락 속에 파묻혀 살았다. 도둑이 늘어 난다고 젊은이들을 붙잡아다 군대를 키우고 궁의 담을 높였다. 쓸데 없는 의심에다가 겁은 많아가지고 (화살을 들며) 이따위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스스로의 명을 재촉했다. 이 자의 죽음으로 모든 불행을 마무리 짓자. 더 이상의 희생은 없다. 지금 이시간부로 궁을 떠나고 싶은 자는 모두 떠나라. 남은 사람끼리 새로 왕을 뽑자. 그에게 새 나라를 맡기자. 모두가 다 잘 먹고 잘 살지는 못 하더라도 함께 나누어 먹고 나누어 쓰는 세상으로 만들어보자. 그것이 진정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겠는가?
제 삼막.
1.새나라.
(재간과 이쁜이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이쁜: 어때? 이 옷이.
재간: 어울리지가 않어.
이쁜: 멋있지 않어?
재간: 광대 한테는 광대 차림이 좋은거야.
이쁜: 광대 옷이 따로 있냐?
재간: 난 이 옷이 불편해 죽겠다. 맹 대장이 장관을 맡았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건 잠깐이야. 우린 곧 떠나게 될거야.
이쁜: 떠나긴 어디로 떠나?
재간: 맹 대장이 그랬어.
이쁜: 벼슬이란 오르기도 어렵지만 그만두기도 쉽지 않은 법이야.
재간: 두고봐.
이쁜: 하지만 홍장군께서 임금님이 되시고나선 정말 살기가 좋아졌잖아? 부역이 없어지고 세금도 줄고 군대도 줄이고……. 토지와 식량을 없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모두 얼마나 좋 아하니?
재간: 누가 아니래?
이쁜: 폐하는 참 너그러우시더라. 너 내관이 궁을 떠날 때 봤니?
재간: 무얼?
이쁜: 그동안 내관 자라에 있으면서 모은 재물을 모두 들고 나가려고 했잖아? 그러다가 문지기에게 잡혀서 폐하앞으로 끌려 왔다구. 그런데 폐하께서 뭐라 그랬는지 알아? ‘네가 더럽게 모은거니 네가 모두 가져가거라.’ 이러시더라구.
재간: 이쁜이 너 쓸데 없이 이소리 저소리 참견질하며 다니지마. 그러다가 언제 크게 다친다.
이쁜: 내가 뭘?
재간: 여긴 무서운 데야. 몸 조심하라는 얘기야.
이쁜: 넌 너무 걱정이 많아 탈이야.
재간: 미리 걱정해 둬서 탈날 것 없지. 가자. 맹 대장: 기다리실라.
이쁜: 맹 대장이 아니라 장관님이야.
2 . 무치.
(홍동지가 혼자 뜨락을 거닐고 있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다.)
홍동지: 이제 서서히 나라의 틀이 잡혀가는 구나. 백성들은 온순하고 국경은 평화롭다. 신하들은 충성심에 넘치고 궁안은 활기에 차있다. 인간 중에 나만한 힘과 용지를 가진 자 없고 또 그 중에 나만한 지혜와 식견을 가진자 없으니 왕의 그릇으로 어디가 부족한가? 이제 정치는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홍동지의 이름 석자만 들어도 나쁜 마음을 먹던 자들이 겁에 질려 마음을 착하게 돌려 먹는다 하지 않던가? 역시 인간의 세상으로 나오기를 잘했다. 그때 맹 대장의 말을 쫓아 그냥 산속으로 들어갔더라면 지금 이 나라 꼴이 뭐가 됐겠는가? 이 쯤 됐으니 이제 내 신상의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지. 우선 그 동안 소홀했던 책읽기를 계속하자. 그리하여 가이 없는 학문의 세계를 방황해야겠다. 장가도 들어야 할것 아닌가? 왕이 홀몸이라고 주위에서 말들이 많다던데. 문제는 시녀 장이다. 아직도 그 여인만 보면 뼈골이 녹신녹신해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니 말이야. 한 나리의 왕이 되어 한낱 연약한 여인앞에서 그토록 쩔쩔매서야 쓰는가? 그러니 어쩌면 좋은가? 박사와 의논해 봐? 아니면 맹 대장한테 얘길 해? 아니야. 왕의 체통을 세워야지. 쉽게 약점을 보여선 안되다. 그럼 어떡하나? 시녀 장을 멀리 쫓아버려? 그게 좋겠다. 눈 앞에서 사라지면 그런 해괴망칙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것 아닌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생각난 김에 해치우자. 이봐라. 시녀 장을 들라 이르라. (사이) 그런데 무슨 핑계로 그 여인을 쫓아 버린단 말인가? 밑도 끝도 없이 그냥내치면 그 또한 우습지 아니한가? 무슨 좋은 방도 없을까?
시녀 장: (등장하며) 부르셨습니까, 폐하?
홍동지: (당황한 빛을 보이며) 오, 시녀 장, 내 그대와 긴히 상의 할일이 있소.
시녀 장: 예
홍동지: 사실은……. 저 ……. 시녀 장…….
시녀 장: 무슨 말씁이옵니까, 폐하?
홍동지: (아랫도리를 자꾸 내려다 보며 비틀다가) 내가. 할말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데…….
시녀 장: (웃으며) 폐하. 한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홍동지: 얘기하시오.
시녀 장: 자고로 왕은 무치라 하였습니다. 이는 왕은 어떠한 행동을 하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뜻이옵니다. 저 같이 미천한 것에게 무슨 말씀인들 못 하실 것이 없는 줄 아옵니다마는 …….
홍동지: 아, 그렇소? 좋은걸 알려줘서 고맙소. 사실은 말이오. 내가 말이오. 그대만 보면 말문이 막히고 몸이 이상해 지는데……. 그래서 말이오.
시녀 장: 옥체를 보살피고 심기가 불편하시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저의 임무이옵니다. 헌데 왕꼐서 그런 불편을 겪으시는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었으니 죽어 마땅하옵니다.
홍동지: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다 내가 못난 탓이지.
시녀 장: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면 오늘 저녁 저의 방으로 납시어 주옵소서.
홍동지: (당황하는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응. 그래. 그러지. (주위를 둘러보며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시녀 장의 뒤를 따른다.)
시녀 장: (웃음과 함께 교태를 보이며) 폐하, 왕은 무치라 하였습니다.
홍동지: 그래, 왕은 무치라. (걸음걸이를 고치며) 명심하지. 왕은 무치라.
(홍동지와 시녀 장, 사랑가를 부르며 놀고 있다.)
왕비: 잘들 놀고 자빠졌다. 사내들이란 다 저 모양인가? 왕은 무치라구? 저를 왕의 자리에 앉혀준 게 누군데……. 나를 궁중 한 구석에 쳐박아 놓고 저만 즐거우면 그만인가 정말이지 사내란 계집에게 빠지면 체면이구 뭐구 다 없어지나? 남의 떡이 커 보인다더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저 계집이 대체 무언데 늘 내자리에 앉는단 말인가? 하지만 열계집 싫다는 놈 없다던데 저 치는 어찌된 판인지 마냥 저 년 한테만 홀려서 저러니 알다가 모를 일이다. 저 계집이 어디가 그렇게 좋지? 지가 나보다 예쁘면 얼마나 더 예쁘고 젊으면 몇 살이나 더 젊다고…….
(홍동지, 겉옷을 걸쳐 입으며 등장.)
홍동지: 이것이 사랑인가? 처음에 지나가는 바람에 잔물결이 일듯 가볍게 흔들리더니 나의 가슴은 어느 새 질풍노도에 휘감기며 거친 호흡을 몰아쉰다. 시간이 여기서 멈추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랑의 노예가 된 것인가? 하지만 이런 것이 노예라면 골백번이라도 서슴치 않고 나서겠다. 아, 가슴 뛰는 이 비밀스런 즐거움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시녀 장을 왕비로 맞아들여야겠다. 나의 반쪽을 메꿀 수 있는 여인으로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전왕의 애첩이면 어떠냐?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그까짓 예의범절이며 윤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모두 인간이 정해 놓은 것 인데 인간이 바꿀 수도 있는 법. 그래도 혼례는 성대하게 치러야겠지? 당장 날을 받아야겠다.
왕비: 가당치 않은 일.
홍동지: 무어라구?
왕비: 옛 일을 잊으셨습니까?
홍동지: 옛 일이라니?
왕비: 내가 일국의 왕비의 몸으로 무엇이 부족해 지아비를 저승의 어둠으로 내몰았겠습니까? 무엇때문에 뼈와 살을 깎는 아픔을 견뎌내며 폐하를 그 자리에 모셨겠습니까? 폐하의 인물됨, 군주다운 풍모와 천하 남아로서의 기질이 이년의 눈을 멀게한 것입니다. 그때는 꿈이 있었지요. 페하를 천하제일의 제왕으로 만드는꿈. 천하 제일의 제왕의 귀여움을 받으며 세상 모든 부귀 영화와 권세를 누리는 꿈……. 폐하께서는 그 꿈을 저버리시고 엉뚱한 데다가 애정을 쏟아부으시니 이년의 복장이 메어 터질것 같습니다. 지아비를 몰아내던 때의 아픔은 이 아픔에 비하니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홍동지: 꿈은 한낱 꿈일뿐, 꿈이 모두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왕비: 꿈이 있기에 현실이 있는 것이지요. 꿈이 있기에 희망도 있고 희망이 있기에 삶이 있는 것이지요.
홍동지: 자고로 선왕의 비를 다시 왕비로 맞는 일은 없었소.
왕비: 선왕의 애첩을 끼고 자는 일은 있었습니까?
홍동지: 무엄하다!
왕비: 그년은 폐하를 죽이라고 선왕에게 애원을 하였지요. 또 폐하를 고문대에 올려 놓았던 일도 있었지요. 모두 잊으셨나요?
홍동지: 잊지 않았어. 모두 기억하고있어.
왕비: 그런데도 그년이 그리도 좋으시던가요?
홍동지: 지껄이면 다 말인 줄아는가?
왕비: 그리도 매사에 밝으신 분이 어째 이 일에만은 이토록 어두우십니까?
홍동지: 물러가라.
왕비: 옥석을 가릴 줄 아셔야지요. 왜 굴러 들어오는 복을 스스로 차버리십니까? 정말 답답합니다.
홍동지: 말같지도 않은 소리.
왕비: 제가 두 눈을 뜨고 있는 한 그 년은 안됩니다.
홍동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왕비: 절대로 안됩니다.
홍동지: (발작적으로) 물러가란 말이다!
(왕비는 홍동지에게 가볍게 눈인사하고 퇴장한다.)
홍동지: (다시 자리에 주저 앉으며) 무서운 일이다. 욕망앞에는 염치고 체면이고 다 소용 없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전 왕이 살아있을 때도 욕정에 눈이 어두워 나에게 추근거리지 않았던가? 그때 저를 생각해서 주리를 트는 아픔을 참아내며 입도 뻥끗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왕비가 되겠다니? 선왕의 비로서 그만큼 예우를 해주 면 됐지, 무어가 부족하단 말인가? 괘씸한 것. 대체 저 것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그대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여 없앨 수도 없는 일. 하지만 그 정도에 물러설 내가 아니다. 나는 홍동지다. 한때 자연의 왕이었던 홍동지……. 이제 인간의 왕이 되었는데 누가 나의 뜻을 꺾을 수 있단 말이냐?
3. 역전.
망치: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가 나는 군. 눈물 꿈을 꿨다.
아이: 꿈 얘기 좀 듣자.
눈물: 속옷만 입은 아이가 밖에서 놀고 있는거야.
아이: 아이라니? 내 얘기 하는 거야?
눈물: 아니, 너 말고 진짜 아이말이야. 꼬마 아이.
아이: 으응, 난 또…….
눈물: 아이가 무섭다고 기겁을 하는데 보니까 큰 멧돼지 한마리가 화살통 같은 입을 세우고 달려오고 있지 뭐야? 그 아이 엄마가 엉겁결에 몽둥이를 들어 심하게 내리쳤지만 꿈쩍도 않더라구, 누가 옆에서 갖다준 도끼로 여러번 찍고 또 찍고 그러고 나서 들여다보니까 도끼에 찢긴 어깨쭉지에 피묻은 속옷이 너덜거리는데 피투성이가 된 아이이 모습이 아니겠어?
아이: 우웩, 웩……. 그럴 수가 있어?
눈물: 하지만 그런일이 일어났어.
아이: 너무하잖아?
눈물: 그런 일이 일어났다니까 그래?
망치: 그런일이 일어났다는 거 아냐?
아이: 정말로?
눈물: 그래 정말로, 꿈에서.
아이: 큰일 났다.
망치: 우리가 망친거야.
눈물: 우리는 돕자고 한일인데.
망치: 어떡할래?
아이: 홍동지를 구하자.
망치: 어떻게?
아이: 산으로 돌려 보내자.
망치: 어떻게에?
아이: 나도 몰라.
눈물: 그럼 어떡해?
망치: 생각해봐.
아이: 생각이 않나.
눈물: 빨리 생각해!
아이: 생각이 안 난다니까.
망치: 저기 누가 온다. 튀자.
(도깨비들 퇴장. 왕비와 몸종 1,2가 보따리에 무엇을 싸들고 등장.)
왕비: 여기다 좋겠다. 모두 꺼내거라.
(몸종들이 보따리를 풀어 호동지의 모습의 제웅과 저필묵 등을 꺼내 상위에 돌려 놓는다.)
몸종1: 사주를 몰라서 어쩌지요?
왕비: 그까짓 것이 사주랄게 뭐 있겠는냐? (잠시 생각하다가) 반인반수 홍동지라고 적어라. (몸종1은 종이에 반인반수라고 적어 제웅의 둥에 붙이고 이를 작은 상위에 올려 놓는다. 왕비는 상 앞에 앉아 주문을 외우고 바늘을 끄내 제웅의 머리 여기저기에 꼽는다.)
왕비: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효혐이 있을 것이다. 네가 얼마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몸종에게) 잘 지키고 있어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퇴장)
4. 불신
(홍동지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아래 박사와 맹 대장, 재간과 이쁜이 늘어서 있다.)
맹 대장: 불가하옵니다. 폐하.
홍동지: 왜?
맹 대장: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홍동지: 전례가 없다고 안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내 그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다마는 시녀 장이 왕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구절은 본일이 없었다. 누가 그런 구절을 읽은 일이 있는가? (사이) 박사는 그런 글을 본적이 있소?
박사: 없습니다.
홍동지: 그러면 박사는 이일을 어찌 생각 하시오?
박사: 왕비는 폐하의 반려자입니다. 폐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택하시는 것이 옳은 줄 아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폐하의 나라입니다 폐하께서 법은 정하시면 그만입니다.
홍동지: 고맙소. 당장 혼례 날자를 받도록 하시오. 가능한 한 빨리 좋은 날자로 잡아주시오.
맹 대장: 불가하옵니다. 폐하.
홍동지: 어째서 자꾸 불가하다고만 하는가? 정
당한 이유를 대라.
맹 대장: 그 여인이 왕비가 되면 파탄이 일 것 입니다.
홍동지: 파탄이 인다고? 네가 대비의 사주를 받은 게로구나?
맹 대장: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씁이옵니다.
홍동지: 그러면 왜?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할것 아니야? 신분이 낮아서 그러한가?
맹 대장: 그것도 한 이유가 되지요.
홍동지: 그렇다면 그대는 자신이 장관감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맹 대장: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홍동지: 왜?
맹 대장: 저는 천한 광대일 뿐입니다.
홍동지: 네가 나는 어찌 생각하느냐? 산짐승과 뛰어 놀던 나는 천한 속에서도 가장 천한 자이겠구나? 내가 왕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맹 대장: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홍동지: 못된 것. 네가 역심을 품었구나! 이봐라, 목에 칼을 채워 독방에 넣어두어라. 내 곧 심문을 할터이다.
(재간과 이쁜이, 맹 대장을 데리고 나간다. 박사도 이들을 따라 나간다.)
홍동지: 인간이 저 하기에 따라 귀하고 천함이 나뉘는 것이지, 어디 날때부터 귀천의 구분이 따로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것! 그러니 너에게는 평생
광대: 노릇이 걸맞는 것을……. 저자가 그토록 어리석었던가? 아니, 그렇지가 않았다. 저 자가 비록 광대이긴 하지만 영특하기로 소문난 자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정말로 대비와 내통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저치들은 대비 앞에서 인형놀음을 하며 그 여인과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다. 내가 궐 밖에서 곤경에 처해있을 때 대비의 전갈을 가져왔던 것도 저 패거리 중 하나였다. 인간들이 그럴수가 있을까?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내가 저희들에게 벼슬을 주고 그만큼 대우를 해주었는데 설마 나를 따돌리고 저희끼리 역모를 했을라구?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 그자의 입에서 파탄이 일어난다는 소리가 나왔겠다? 그건 대비를 염두에 두고 나를 협박하는 수작이 아닌가? 그렇다면 역시…….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믿을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진실을 밝혀내야겠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무작정 욱박질러서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는가? (사이) 왕의 노릇도 하기 쉬운게 아니로구나, 왕이 장가 한번 간다는데 웬 말들이 그리 많지?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말, 말!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 뒤에 무슨 흉게가 숨어 있는지, 저희들끼리 무슨 쑥덕공론을 하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으니. 그렇다고 한놈한놈 모두 쫓아다니며 무슨 얘길 하는지 감시할 수도 없고……. 또 감시한들 뭐하나?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마음속까지 쫓아 들어갈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어쩐다? 누구 같이 좀 의논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박사, 그자는 이래도 응, 저래도 응, 믿을 수가 없어. 시녀 장은 이번 일에 당사자란 말이야. 그 광대 패거리들……. 그것들은 모두 한통속이고, 그렇다고 아랫것들 붙들고 이러니저러니 할 수도 없는 노릇, 답답하구나! 공연히 인간 세상에 나와 골머리를 앓는게 아닌가? 산 속에 살때는 이런 고민은 없었다. 혼자 있어도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다. 그때 산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으면 쓸데없이 목에 힘 줄 일 없고 골치아픈 책도 없고, 말도 없고, 글도 없고 보기 싫은 쌍판떼기들도 없고……. 얼마나 좋을까? (사이) 헌데 갑자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생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5.꿈
(홍동지의 비명에 시녀 장 뛰어 들어온다.)
시녀 장: 폐하!
홍동지: 아닙니다. 마마. 아.시녀 장……. 시녀 장!
시녀 장: 어찌된 일이옵니까. 폐하? (홍동지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힌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왕관을 홍동지의 머리에 씌워준다.)
홍동지: 어? 어.어디 갔어?
시녀 장: 무어 말씀입니까?
홍동지: 아니, 내가 꿈을 꾸었는가 보아.
시녀 장: 무슨 꿈이옵니까?
홍동지: 이게 무슨 소리냐?
시녀 장: 무슨 소리 말씀입니까?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요.
홍동지: 그래? (사이) 응, 이리 가까이 좀 오게. (시녀 장의 손을 잡으며) 그대를 왕비로 맞아들이겠소.
시녀 장: (복받쳐 오르는 기쁨에 흐느끼며) 폐하……. 폐하!
홍동지: (시녀 장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노래를 불러주오.
(시녀 장은 홍동지를 쓰다듬으며 다시 사랑가를 부른다.)
홍동지: 오늘 당장 혼례를 올려야 겠다. 장관을 들라 이르라.
시녀 장: 폐하, 장관은 옥에 가두시지 않았습니까?
홍동지: 아, 그렇지. 그럼 박사를 불러라.
시녀 장: 하오나 폐하.
홍동지: 뭐가 걱정인가?
시녀 장: 대비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홍동지: 대비? 대비가 뭐 말라비틀어진 대비냐! 이 나라의 왕은 나다. 내가 좋고 네가 좋으면 그만이다.
(박사등장.)
박사: 부르셨습니까, 폐하.
홍동지: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만지며) 박사.
박사: 예. 폐하.
홍동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소. 오늘이라도 혼례를 올려야 겠소.
박사: 알겠습니다. 준비를 서두르지요.
홍동지: 고맙소. 그런데 아까부터 이게 무슨 소리지?
박사: 무슨 소리 말씀이옵니까?
홍동지: 방금 저 소리.
박사: (시녀 장에게)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시녀 장: 못들었는데요.
홍동지: 저소리, 저소리가 안 들려? 저건 영조가 아니냐?
박사: 사람을 시켜 알아 보겠습니다. (퇴장.)
홍동지: 꼬리로 바람을 가르는 저 소리가 안 들린단 말인가? 저 놈이 지독하게 빠른 모양이다. 벌써 저기 까지 갔구나. 하지만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 내가 누구냐? 어떤 무서운 싸움에서도 단 한번 뒷걸음질 쳐본 일이 없었다. 나보다 더 센 팔과 다리는 아직 본일이 없다. 네가 나의 혼례를 축하하러 왔느냐? 와라. 네 놈 쯤은 단 한방에 끝내줄 수 있다. 벌써 숨이 차 허덕거리는구나. 한번 붙어보지도 못하고……. 꼴좋다. (웃는다.)
시녀 장: (홍동지에게 매달리며) 폐하, 고정하옵소서.
홍동지: 놔라. 저 놈이 반격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느냐?
박사: (달려 들어 오며) 폐하,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 하였으니 잠시만 참고 기다리십시오.
홍동지: 알아볼 필요도 없다. 저 놈이 벌써 꼬리를 감추고 도망하지 않느냐? 그러면 그렇지. 이 홍동지 앞에서 감히 어느 놈이 행패란 말인가?
시녀 장: 폐하, 안으로 들어갑시다. 잠시 몸을 눕히시지요.
홍동지: (시녀 장을 뿌리치며) 그럴 틈이 없다. 지금 공부할 것이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어떻게 쉴 수가 있겠는가? 별은 왜 저녁이면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빛나는가? 달 속엔 누가 사는가? 그것들은 긴 낮 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가? 땅 속에는 무엇이 계속 파고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있을까? 궁금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닌데 쉬라구? 안돼. 이 의문들을 풀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겠다. 박사 ……. 박사와 의논해봐야겠다. 아, 참을 수가 없다. 끌과 망치를 가져와라. 내 머리를 쪼개서 그 놈을 잡아다오. 한 두 놈이 아니구나. 불개미다. 불개비떼다. 이놈들을 잡아야겠다.
박사: (시녀 장에게) 폐하께서 신열이 있으신가 짚어 보시오.
홍동지: 어서 끌과 망치를 가져오라는데 무얼 꾸물 거리고 있느냐? (이마에 손을 대보는 시녀 장을 밀어 넘어뜨리며) 너는 누구냐?
시녀 장: 폐하, 고정하옵소서.
홍동지: 나는 홍동지다. 나더러 폐하라고 하는 너는 누구냐? 나를 반역자로 물아 죽이려는 거지? 안되지.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아무리 모진 고문을 해봐라. 자백할게 없는데 무슨 자백을 하라는 거냐? 자 얼마든지 때려라. 또 때려봐. 그까짓 매쯤에 억지 고백을 할 줄 아느냐? 나를 죽이겠다구? 그래도 안된다. 묵숨이 두려워 거짓 고백할 내가 아니다. 나는 홍동지다. 반역을 하고 싶으면 왜 숨어서 하겠느냐? 떳떳하게 앞에서 하지. 차라리 내 머리를 쪼개서 그안을 들여다 봐라. 만일 아무 것도 없으면 어쩔테냐? 내 그때는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테다. 아이구 머리야. 이놈의 불개미떼들. 모두 밟아 죽여야지 (발을 구르며)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닌다. 배신자들. 너희들 얘기를 믿을수가 없다. 가슴을 열어라. 왜 도망을 가? 숨기는 게 없다면 왜 떳떳하게 가슴을 못 내밀지? 더러운 것들. 그렇게 살면 인생이 즐겁더냐? 죽어라. 죽어. 너희같은 놈들은 백번 죽어도 모자란다. (숨을 헐떡이며) 지독한 놈들이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구나. 왜 이렇게 답답하지? (의관을 벗어 던지며) 안돼겠다. 독약을 뿌려아지. 독약. 독약을 어디에 두었느냐? (퇴장)
(박사도 허겁지겁 홍동지를 따라 퇴장한다.)
시녀 장: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 드디어 오기는 왔구나. 그런데 왜 하필 이런때 저런 해괴망칙한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홍동지가 벗어던진 의관을 집어들고) 옷은 왜 또 벗어붙이고 난리야? 옛날 버릇 다시 나오는 건가? 저런 상태로 혼례를 제대로 올릴수 있을런지 걱정이다. 자고로 행운이란 만나기도 어렵지만 옆에 붙들어 두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겠다. 빨리 서둘러야겠다. 이런일일수록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 (퇴장)
7. 길 떠나는 세 도깨비.
망치: (노래조로) 큰탈랐다아 똥탈났다아 어떡하니이 난 몰른다아…….
눈물: (아이에게) 모두 네 잘못이야.
아이: 왜 내 잘못이니?
눈물: 네가 시작한 일이잖아?
아이: 그렇다고 내 잘못이야?
망치: 아무 잘못도 아니야. 일이 그렇게 됐을 뿐이지.
눈물: 왜 생각을 안해?
아이: 생각이 안나는 걸 어떻게 해?
눈물: 불쌍하지도 않아?
망치: 모두 소용없어. 이제 구제 불능이야
(눈물은 울기 시작한다.)
아이: 울지마.
눈물: 슬픈데 어떻게 안우니?
아니: 이건 순전히 인간이 우릴 실망시킨 거야, 슬퍼할 것 없어.
눈물: 바보야! 그러니까 슬픈거야.
망치: 이제 어디가서 놀지?
아이: 산으로 가자. 깊은 숲속에 짐승들이 많잖아?
망치: 야! 도깨비 위신이 있지, 짐승들하고 어떻게 노냐?
아이: 너 짐승이 인간 보다 훨씬 낫다. 몰라?
망치: 정말?
아이: 빨리 가자. 이러고 있다간 우리까지 돌아버리겠다.
(세 도깨비, 하늘을 날아 사라진다.)
8. 독침
(홍동지, 옷을 벗은 채 보료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고 그 옆에 시녀 장이 앉아 있다. 약간 떨어져 박사가 서 있다.)
홍동지: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루황 집우 집주 넓을 홍 날일 달월 어……. 으음……. 선생님, 이게 무슨 자더라?
박사: 영자입니다. 찰영.
홍동지: 그래 맞다. 찰영 누루황……. 이게 무슨 자지?
박사: 진자입니다. 별진.
홍동지: 별진? 별진……. 으응……. 젠장, 공부가 어려워 골치가 아퍼. 공부가 ……. 왜 해? 쳇 (책을 집어 던지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며) 선생님,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러께. 공부 열심히 할께.
박사: 이제 공부는 그만 하셔도 됩니다. 폐하!
홍동지: 폐하? 폐하가 왔어요? 잘못했어요, 폐하. 나……. 머리가 아퍼. 머리……. 때리지마……. (벌떡 일어나며) 피……. 피다.
시녀 장: 폐하!
홍동지: 폐하! 피가나. 머리가 아파.( 박사에게) 폐하, 머리가 아라.
박사: 자리에 가서 누우십시오.
홍동지: 으응 (자리로 가서 누우며 시녀 장의 손을 잡는다. 눈을 감으며 엄마야). 폐하가 공부하지 말래.
(홍동지는 시녀 장의 가슴에 손을 넣는다 시녀 장 울며 홍동지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홍동지를 잠재운다.)
홍동지: 엄마야……. 엄마……. 잠든다.
(왕비 등장)
왕비: 이웃나라에서 온다던 의원은 어찌 되었소?
박사: 예. 이제 곧 도착 한다고 전갈이 왔습니다.
왕비: 좀 어떠신가?
시녀 장: 잠이 드셨습니다.신열이 높으십니다.
왕비: 여전히 헛것을 보시더냐?
시녀 장: 그러하옵니다.
왕비: 그동안 국사에 너무 정신을 쏟으신게야. (머리를 짚어보며) 불덩이 같지 않으냐? 찬 물수건으로 계속 열을 식히거라.
시녀 장: 예
(전령 등장)
전령: 도착하셨습니다.
왕비: 어서 안으로 모시어라.
전령: 안으로 듭시라신다. (의원 등장하여 홍동지의 머리맡에 앉는다.)
왕비: 병세에 대해서 들으셨지요.
의원: 예 (몸의 이곳 저곳을 만져 보고 맥을 짚으며) 뇌 속에 균이 번진 것 같습니다.
왕비: 어찌하면 좋겠소?
의원: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왕비: 그래요?
의원: 예. 그런데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 …….
왕비: 어떤 위험인가요?
의원: 침을 바로 뇌 속까지 짚어 넣는 겁니다.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박사: 그렇다면 곤란하지요.
시녀 장: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의원: 없습니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있어다 오늘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왕비: 그렇다면 그 방법을 쓸 수 밖에 도리가 없지 않소?
의원: 그렇습니다.
박사: 의원께서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의원: 예예?
박사: (왕비에게) 이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는것이 순서라 여겨집니다
왕비: 박사! 왕의 생명이 이 분 손에 달려 있소.
의원: (자리에서 일어나며) 저는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의논하셔서 결정이 되면 알려주십시오.
왕비: 결정은 내가 한다. 지금 시술을 해 주시오.
의원: 예. (의원은 침통에서 긴 침을 꺼내 홍동지의 머리에 꽂는다. 홍동지는 움찔하더니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홍동지: 무울. 물.
(시녀 장은 대접에 물을 가져다 홍동지에게 바친다. 왕비와 의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홍동지의 옆에서 물러난다.)
홍동지: (놀라서 물그릇을 떨어뜨리며) 너……. 내……. 내……. 내관……. (의원은 가발을 벗고 수염을 뜯어낸다. 내관이 의원으로 변장을 한것이다. 홍동지는 일어나 비틀거리며 내관에게 다가간다.)
내관: (됫걸음치며)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봐라. 독을 묻힌 침이 네 뇌속에 꽃혀 있지 않느냐? 네가 역적질을 하고도 무사할줄 알았느냐?
홍동지: (비틀거리면서 내관에게 다가가) 너……. 아……. 아……. 간……. 아아…….
왕비: 어디 할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홍동지: 나……. 아……. 아홉……. 어……. 이……. 억……. (홍동지는 천지를 흔드는 커다란 비명을 지르더니 시녀 장에게 다가간다.)
홍동지: 어……. 어……. 엄마야.
시녀 장: 폐하! (홍동지는 큰 나무둥치가 넘어가듯 쿵 소리르 내며 쓰러진다. 시녀 장은 홍동지에게 매달려 운다.)
왕비: 사람이건 짐승이건 은혜를 모르는 것은 죽어 마땅하다. 짐승 같은 것을 데려다 사람을 만들어 줬더니……. 온갖 풍파만 일으키다가 결국은 그렇게 끝나는 구나. 내 한때 그토록 마음을 쏟았건만 모두가 헛일. 어디 인생에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이 하나나 있더냐? 그래서 인간이란 근본이 좋아야 하는법. 힘도 지혜도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이 불쌍한 것의 장례나 잘 치루어 주어라. (왕비 퇴장한다. 내관도: 왕비를 따라 퇴장하고 박사와 전령도 이들의 뒤를 이어 퇴장한다.)
9. 죽은자를 위하여.
(맹 대장을 비롯하여 놀음바치들이 창을 하며 인형극 무대를 밀고 나온다. 모두 관복을 벗고 예전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불사건립막이 진행되는 동안 시녀 장만 홍동지 옆에 엎어져 흐느껴 운다.)
창: 어, 화상이 절을 짓네.
어, 화상이 절을 짓네.
어, 화상이 절을 지어라.
어, 화상이 절을 지어.
절을 지어라, 절을 지어.
어, 화상이 절을 지어라.
(상좌중들 나와 절하고 절을 짓는 동안 창이 반복된다. 절을 다 짓자 상좌 중들 절을 뜯는다.)
어, 화상이 절을 헌다.
어, 화상이 절을 헌다.
절을 헌다. 절을 헌다.
어, 화상이 절을 헌다.
(무대가 어두워지도록 창이 계속되고 그 속에 시녀 장의 비명. 이어 건강한 아이의 울음소리, 아기 홍동지가 시녀 장의 치마 속에서 기어나와 아장아장 걷는다. 용마를 타고 비상하는 아기 홍동지.)
[ 끝 ]
漢江(한강)은 흐른다. (二十二(이십이)경) 柳致眞(유치진) 作(작)
許圭(허규) 演出(연출)
나오는 사람들
정철 (안화백의 문하생 二十四(이십사)세 <벽돌>이란 별명)
안희숙 (六.二五(육.이오)직전에 정철과 약혼했던 여대생, 二十三(이십삼)세)
최정애 (안화백의 부인, 납치 미망인, 희숙의 올케, 三十五(삼십오)세)
달이 (최정애의 어린 딸)
미쓰 클레오파트라 (여자 소매치기 三十(삼십)세)
미꾸리 (직업적인 소매치기, 클레오파트라와 동거, 三十八(삼십팔)세)
소장 (전재민 구호소란 간판을 붙인 협잡배 三十五(삼십오)세)
로오즈매리 (희숙의 여고동창 본련<백련>, 소장을 숭배하는 땐스홀가수)
삼룡 (전재민구호소 사동)
성경할아버지 (예수교 노인)
부산 손님 (모리상 三十(삼십)세)
똘만이 (부산손님의 부하)
두더지 (다리 병신)
정보원
점장이
슈우샤인보이
철의 종제
땐서 A. B. C. D.
기타 외국 군인들. 악사. 지나가는 사람들 등등
환경
수도 서울을 재침한 공산군이 UN군에게 격퇴당한지 얼마 안된 四二八四(4284)년
(一九五一(1951)년) 사월 초, 아직 추울때.
시가전으로 폐허화 된 서울은 바리케이트, 가시, 철망 등에 묻혔고, 공산군이 버리고 간 각종 포, 탄피는 물론 시체까지도 노변에 방치 되었다.
이것들을 치우지 못할만큼 아직도 전선은 바쁜 것이다.
노변가옥들은 가옥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성한 집일지라도 탄흔을 입지 아니한데가 없다.
서울의 한 외곽인 미아리고개 서 편은 아직도 적의 준동지대다.
야간이면 때때로 UN군은 그 상공에 조명탄을 밝힌다. 그리고 거대한 포문을 연다. 이 포는 서울 시내에서 쏘기 때문에 그때에는 시민들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전화를 사전에 피하려는 초조한 마음은 그들로 하여금 지하로 숨게 하고, 때로는 한강를 건너게도 한다.
이 연극은 서울 동대문시장 부근에서 벌어진다. 당시 서울 장안은 인적이 끊어져 있어 명동 거릴지라도 대낮에 지나다니기가 무시무시 했고 종로 네거리 조차도 호젓했다. 그러나 동대문 시장 부근만은 제법 사람이 모였다.
장이 섰기 때문이었다. 이 장은 잔유 서울 시민들의 유일한 생명천이었다.
혹자는 이 장에 의거해서 돈 벌이를, 혹자는 이 장에 써 장을 봐 먹음으로써 그 생명을 부지했기 때문이다.
무대
나자로 된 두 한길.
하나는 동대문 시장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 <페이트>칠한 매춘굴로 통했다.
이 두 한길에 끼인 반파괴된 옥상이 있는 벽돌 이층 건물과 이 두 한길 건너편에선 양식 목조 건물과 한국식 고옥.
양식 목조 건물에는 소매치기 <클레오파트라>와 <미꾸리>가 동거하고 있고, 한국식 고옥에는 전재민 구호소란 간판이 붙었다.
그 창과 문은 전당포처럼 철창으로 굳게 무장되었음이 눈에 뜨인다.
중앙 벽돌 건물의 이층에는 안희숙과 그 올케인 최정애가 그의 딸과 같이 들었고 그 아랫층엔 성경할아버지가, 그리고 방공호에는 두더지가 그의 어린것과 같이 산다.
성경할아버지는 이 연극의 진행중 항상 양지에서 두꺼운 돋보기를 통해 성경책을 읽고 앉았다. 그래서 이 별명을 얻은게다.
이들은 누구나 시장을 뜯어먹기 위해서 시장 부근의 빈 집들을 임시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길 가에는 바리케이트, 가시철망, 호, 흐트러진 벽돌 등 격전지였음을 연상 시킨다.
장: 一(일). 한길
멀리서 울려오는 포소리와 기관총 소리에 막이 열리면 캄캄한 무대.
포탄 가까이 날아와 떨어진듯 땅을 뒤흔들며 큰 건물이 허물어지는 소리 난다.
한 구석 방공호에서 자던 두더지, 아이를 안고 무대 중앙으로 기어나와 갈바를 몰라 부들 부들 떤다. 또 한방의 포탄 휭, 비단을 찢는 소리를 내며 머리위를 난다. 가까운 건물에 적중, 또 와르르 허물어지는 소리 난다. 두더지, 고함을 치고 도망해 버린다. 포소리 조용해지며 무대 차츰 밝아진다.
사월 초순의 어느 추운날 아침이다.
삼룡은 <영양본위 전재민 구호소 직영 식당>이라고 써 붙인 야대에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쓰레기 식료품을 가마에 끓이면서 명랑한 유행가를 부르고 있다.
아이: 어머니? 날 장가 보내주우
뒷집 아가씨: 시원스런 그 눈매, 오늘도 날 보고 방그레 웃었어요. 이자식 주착아, 너 그 무슨소리? 귀걸이, 핸드빽, 나이론 치마, 보는대로 조르는 계집애의 그 얌치, 부지런히 버얼께, 하루를 두곱으로……. 그러면 일 없어요. 그까짓것 넉넉해 아니 어머니 그 눈매가 이뻐요.
삼룡: (외친다.) 싸구려 쩔쩔 끓는 꿀꿀이 죽이 싸구려.
희숙: 자기 처소에서 나타나 무대 중앙 적당한 곳에 담배파는 목판을 차려 놓는다. 야대 앞으로 나아가 죽을 사먹는 등이 꼬부라진 늙은이 하나, 그는 성경할아버지다. 두더지 끈으로 어린것을 이끌고 힘없이 들어와 전재민구호소로 간다. 빈집에서 괘종을 훔쳐 온 게다. 때마침 구호소 소장 나온다. 말쑥하게 차린 부산 손님과 그의 똘만이 따랐다. 이 두 사람의 옷차림은 딴 세상 사람 같다.
소장: (부산 손님에게) 그러면 최후로 한마디 하겠오. 그 값으로 저 물건을 가져갈려거든 가고 싫거든 그만두슈.
두더지: (괘종을 소장에게 내밀며) 소장님, 이거를 사줍세.
소장: (괘종을 받고 지전 한 장을 던져준다. 두더지 그 돈을 UN죽 한그릇과 바꾸어 어린것과 나누어 먹는다.)
부산손님: 이것봐요. 시계 하나에 UN죽이 한그릇. UN죽이란건 부대에서 쓰레기를 공짜로 얻어다가 끓인것, 이러니 저 모아놓은 물건이란건 모두 공짜가 아니냐 말요.
소장: 에케 여보! 그 쓰레기가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몇 다리를 거치는지 알기나 허슈?
부산손님: (지전 한장을 점장이에게 내던지고 운수보는 야바위판을 돌려 보드니 선뜻) 맡았소! 그 값에! (똘만이에게) 치러!
똘만이: (돈 한뭉치를 소장의 옷 밑에 은밀히 넣어주며) 부대에서 받은거니까 틀림없을 거요. 그래도 세 보슈.
부산손님: 그대신 한가지 청이 있소. 혹……. (소장을 한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귓속말을 한다.)
소장: (심각한 얼굴로 변하며) 음 뭐가 좋을까?
부산손님: <다이야>반지 같은게 있었으면 이를데 없겠는데…….
소장: 그런게 쉬워야죠. 더구나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이란 보시다시피 끼니를 걱정하는 죽데기들 뿐인걸.
부산손님: 아따 구문은 두둑히 낸다는데.
손님: 노력해 보죠
부산손님: 꼭 믿겠소. 그리고 저 물건은 이따 실어가리다. 가자. (똘만이 데리고 퇴장. 점장이 들어와 운수보는 야바위판을 차려 놓는다.)
삼룡: 옵쇼. 옵쇼. 쩔쩔 끓는 꿀꿀이죽이요! (하고 떠들썩하게 외친다.)
소장: (돈뭉치를 어찌할 바를 몰라) 이걸 어디다 두나? (하고 쩔쩔매더니 자기의 처소로 살짝 들어간다.) 아까 들어와서 외국 군인의 구두를 닦고 있던 슈우샤인보이, 돈을 받아 야대위에 놓는다.
삼룡: <예, 고맙쉬다> 하고 죽을 한그릇 떠 준다.
희숙이, 사장쪽을 바라보고 섰다. 삼룡은 담배 목판을 갖다 감춘다. 그래도 희숙은 모른다. 이번에는 희숙의 손에 든 책을 빼앗는다.
희숙: (깜짝 놀라)아니 이자식이…….
삼룡: 거기 뭐가 있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거야?
희숙: 이리 줘 (책을 빼앗으려 한다. 그 책의 표지에는 정 철 지음. 수상록이라 썼다. 그의 애인 정철이가 六.二五(육.이오)전에 써 보낸 러브레타를 모아 놓은 것이다.)
삼룡: (수상록을 펴서 한귀절 읽는다.) 우이동 멀다더니 당신과 걷는 길은 지척이구려.
희숙: 저런!
삼룡: (더욱 과장된 제스처를 쓰며) 아아. 사랑이란……. (막힌다.) 이게 무슨 글짜야? 한문 아냐? 사랑-이-란…….
희숙: 정말 안 줄테야? (쫓는다.)
삼룡: 자아 빼았아 보지 (놀리며 달아난다.) 전재민 구호소 소장 자기 처소에서 나온다.
소장: (이 광경을 보고) 이 자식아!……. (벽력같은 소리에 삼룡 덜컥 선다. 희숙 수상록을 획 빼앗아 간다.) 헹 제 주제에 수캉아지라고……. 이자식아 여긴 이래봬도 전재민을 위해서 신성한 구호사업을 하는데야. 그리고 네놈은 그 직원이구. 그런데 그 사명을 망각하고……. (하면서 머리를 쥐어 박는다.)
슈우샤인보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솥째로 들어다 놓고 죽을 퍼먹으려다가) 아이 뜨거워! (하고 비명을 지른다.)
소장: 저런……. (하며 구두닦이 목판을 밟는다.)
슈우샤인보이: (구두닦이 목판을 잡아빼며) 아저씨이.
소장: (더 힘주어 밟으며) 쌔벼먹은 죽값부터 내놔라.
소장: (더 힘주어 밟으며) 쌔벼먹은 죽값부터 내놔라.
슈우샤인보이: 한숟가락두
소장: 딴소리 하믄 이 목판 팔아 넘긴다. 다른놈 한테.
슈우샤인보이: 정말 미쳐 한숟가락두 못 떠먹었어요.
소장: 그럼 좋다……. (목판을 야대위에 놓는다. 슈우샤인보이, 할수없어 지전 한장을 꺼낸다. 그제서야 구두닦이 목판을 내던져 준다.)
슈우샤인보이: (목판을 지고) 깟뎀……. 싸나가 뱃치……. (깔깔거리며 달아난다.)
소장: 저눔이! (삼룡이가 내주는 돈상자를 쏟아 놓고는 모인 돈과 죽솥에 남은 죽을 비교해 보더니) 죽이 이것밖에 안 남았는데 매상고가 겨우 이거? 손님들한테 죽을 또 가뜩 가뜩 떠준 거로구나?
삼룡: 소장님이 접때 사발에 철철 넘게 떠 주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소장: 이런 맹추. 손님들 앞이구. 그리고 난 주인이니까 그런 소릴 했지.
삼룡: 그럼 그것도 또 공갈이었어요?
소장: 이눔아. 네놈은 고용인야. 주인이야 무슨 공갈을 치든 네놈은 고용인답게 안달을 부려야지. 그래야 수지가 맞잖어? 내 소릴 알아듣겠냐?
삼룡: (부루퉁해 가지고)……. 야
소장: 이런 융통성 없는건 첨 봤어. 첨 봤다니까. 이때에 매춘굴에서 땐서들 손에 타월과 대야를 들고 나온다. 목욕 가는 길이다.
땐서 A. B. 뭘 야단이슈. 소장님?
소장: (당황하여)……. 음 죽을 되도록이면 많이 꾹꾹 눌러서 철철 넘게 떠주랬지. 모두 주우리고 있으니까…….
땐서들: 암 그래야죠. 정말 다르셔 자선가는 호호…….
땐서들 시장쪽으로 모두 퇴장. 여자 소매치기인 클레오파트라.
조금전에 나타나 자기의 동료인 미꾸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미꾸리는 그가 기대하고 있는 반대쪽 방향에서 쫓긴듯 초조히 들어 온다.
미꾸리: 사고다. 짜브(나으리)가 달렸다.
클레오파트라: 쉬……. (하고 눈짓) 미꾸리 얼른 벽에 붙어 선다. 정보원이 나타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정보원에게 눈을 찔끔하며 빙그레 웃어 보인다.
정보원의 퇴장을 기다려 미꾸리, 클레오파트라의 같이 양식 목조건물의 현관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로오즈매리, 매춘굴 골목에서 나타난다.
삼룡: (큰소리로) 자. 맛좋은 꿀꿀이 죽이 한그릇에 십원야! 꿀꿀이 죽이 막 나간다.
로오즈: 이것 또 맡아주슈 (하며 돈뭉치를 내놓는다.)
소장: (세어보며) 오오. 딸라두 섞였구……. 간밤에 누구 하나 물었군?
로오즈: (뾰로통해지며) 창피스럽게 그따위 더러운! 그 돈 도로내요!
소장: (변명하듯) 본인 역시 로오즈 매리를 약간 넘겨다 보고 있으니까 자연 관심이 쏠려서 한 소리야. 노하지 마아.
로오즈: 정말 이눔의 직업을 그만둬야 할 텐데……. 요즘 부산의 방값이 어떻다죠?
소장: 말 마아. 나들이 오르는게 집값이래. 피난민 사태에…….
로오즈: 큰일 났는걸. 여기 더 있다간 아주 패찬 똥갈보로 전락하고 말겠어.
소장: (쪽지에 도장을 찍어주며) 자아 영수증 (손가락으로 숫자를 지시해 보이며) 그동안에 믓게 본전이 이거고 이자가 이거 오오케?
로오즈: 음. (고개를 끄떡해 보인다.)
희숙: (로오즈 매리를 보고) 얘. 백련아. 어떻게 된 일이냐? 아직 철이가 안뵈는구나.
로오즈: (이상하다는 듯이) 그럴리 없는데
희숙: 분명히 철이였지?
로오즈: 암. 나하곤 국민학교 동창인데 못 알아 볼리 있어?
희숙: 어디 있더라구?
로오즈: 과일 도매상 있잖어? 거기서 짐부리고 있었어.
희숙: 내가 한번 가보고 와야겠군.
로오즈: 가만있어. 저기! (손가락질 한다. 철 두리번 거리며 등장) 아니 어딜 돌아다뉴?
철: 어디야? 어디랬지?
희숙: (철에게 가까이 가며) 이게 누구야?
철: (희숙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오오. 희숙이 (덥석 껴안으려 한다.)
희숙: (돌아서며 얼굴을 싸고 느낀다.)
철: 여기 있는줄을 모르고 저쪽만 찾아 다니었지.
로오즈: 호호호……. 죽자 살자하던 약혼자끼리 이 전투지구에서 만나다니 이게 바로 활동사진이 아니고 뭐냐?
철: 고마워 백련이.
로오즈: 난 여기선 로오즈 매리라고들 불러. 저 땐스홀에서 벌어 먹고 있으니까. 이따가라도 또 봐요. 희숙아 뭐가 부끄러우냐? 라브씬 계속해라 호호호……. (하고 퇴장)
철: 희숙이, 눈물 씻어. 역시 옛말이 옳구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헌데 이게 무슨 일야? 희숙이가 예서 담배장사란 도저히 믿을수 없는 일인데…….
희숙: 철인 어떻게 돼서 여기서 노동을 하고 있지?
철: 서울에 기어든지가 오늘이 사흘이야. 물론 목적은 희숙이의 소식을 알자는 거였지. 희숙이 집엘 난 먼저 찾아 갔었지. 아주 싹 쓸었더군. 거긴 물어볼래도 지내가는 개미새끼 한마리 있어야지. 그래 단념하고 노자를 벌어 가지고 남쪽으로 가려던 참야. 희숙일 찾아, 희숙인 여전히 이쁘군. 헌데 왜 이렇게 혈색이 나뻐? 퍽 말랐구…….
희숙: 누구나 다 그렇지. 이 난리엔…….
철: 왜 피난가지 않고 아직 송장 냄새가 가시지 않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이 전투지구에 머물러 있어? 윙윙거리는 저 소리엔 어떻게 견뎌?
희숙: 예라도 있었으니까 철이를 만나게 된것 아냐?
철: 날 기다렸군?
희숙: 음.
철: 아아 멋이다.
희숙: 철인 낙동강 전선에서 어떻게 살아났누?
철: 희숙인 거기서 어떻게 살아났어?
희숙: 얘기 보따릴 털어 놓으려 들믄 하루 이틀두 모자라.
철: 나도 그래. 이 가까이 어디 조용한덴 없나? 좀 앉아서 얘기 해야지.
희숙: 저 이층으로 올라갈까? 저기가 비었기에 임시로 들어있어.
철: 하던 일 치워 놓고 올께.
희숙: 그럼 예서 불러, 그새 나도 이걸 걷어치울테야.
철: (발끝을 돌리며) 음.
장: 二(이). (양식 목조건물의 실내) 클레오파트라는 침대에 드러 누웠다.
미꾸리: (편지를 읽다가 휙 일어나며) 오늘은 왜 이렇게 재수가 없어? 짜브한텐 쫓겼고 쌔빈것은 헛것이구……. 에이 참……. (실내를 왔다 갔다 한다.)
클레오파트라: 저렇게 달달거리니까 복이 달아 날 밖에--
미꾸리: (벽에 붙여 놓은 <그라프> 를 가리키며) 언제 목표액에 도달하는냐 말야. 큰 새낀 중학엘 들다고, 부산선 돈 보내라 재촉이구. 포소린 또 심해 오고……. 클레오파트라 괴뢰군이 또 밀고 오면 어떡허지?
클레오파트라: 미쳐, 그런소리 마아. (술을 마신다.)
미꾸리: (편지를 또 한번 읽어보며 혼자서 웃는다.) 내 아들놈이 했어. 글씬들 좀 얌전해.
클레오파트라: 그런것 다 소용없어. 나도 해 본 장단야.
미꾸리: 자식이 소용없다?
클레오파트라: 벌써 십여년 전 일야. 난 어쩌다가 새낄뱄어. 이게 참 귀여웠어. 허지만 내 직장 때문에 킬 수가 있어야지. 할 수 있나. 남의 집에 맡겼지. 그리고 삼년후에 찾아갔더니 이 에미를 아주 몰라 보지 않어? 그동안 얻어 먹은 암죽에 팔려 에밀 왼통 잊어버린 거야. 그땐 난 생각했지. 인간이란 동물은 혈육이 아니고, 물질에 좌우된다는걸
미꾸리: 그래서 소매치기로 나섰군?
클레오파트라: 음. 돈을 가져야 사람 구실을 하기 때문이야.
미꾸리: 됐어. 그래서 알뜰한 내 짝이지(클레오파트라의 궁둥이를 두들겨 주고는 술을 킨다. 술잔을 주며) 더해 한잠 자구. 저녁에 또 긁으러 나가게-- (커어튼을 친다.) 이 때에 현관에서 <노크> 소리, 미꾸리 문을 열어 준다.
소장 등장
소장: 아니 대낮에 뭣들 해? (커어튼을 척척 걷는다.) 참 형씨, 편지 봤수? 내가 아까 저 문틈으로 떨어트려 났었는데…….
미꾸리: 예 이것? 고마워
소장: 고맙단 인사는 부산서 온 손님에게.
미꾸리: 유엔군 부대에 납품한다는?
소장: 예, 예. 놈팽이가 부산서 가지고 왔다우 이번에 또. 부인 한가지 상의할 일이 있는데……. 저어 다이야 반지는……. 몇개나 가지고 계시던가요?
클레오파트라: 내가 무슨 그런 (잡아 뗀다.)
소장: 아따 내가 소개해 드린것만 해도--
클레오파트라: 그걸 어쩌자는거요?
소장: 파시라는 겁니다.
클레오파트라: (눈이 둥그래지며) 미쳤수?
소장: 그 부산 손님이 이번엔 군에 납품한 대금을 부산에서가 아니고 이 현지에서 그것도 수표가 아니고 현금으로 받았다는 군요. 돈을 받아 놓고 보니 그게 여간 어마어마한 무더기래야죠. 하여튼 큰 푸대로 이거라니까. (하면서 자기의 손가락으로 숫자를 제시해 보인다.) 미꾸리와 클레오파트라 혀를 내두른다.) 아직 은행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송금할 수는 없고 부산까지 운반하자니 도중에 위험하고……. 그래 뭐건 가지고 가기 쉬운걸 그 값어치만 살 수 없겠느냐는 거요.
클레오파트라: 그만두슈. 다이야가 있으면 내가 다 사겠소. 나 역시 비상시를 위해서 그걸 장만하거요. 지니기 쉬우니까-
소장: 아따 이 마담이 왜 그렇게 맥혔담! (하면서 귓속말을 한다.)
클레오파트라: (흐뭇이 느끼며) 그게 쉬울까?
소장: 그 이익 분배에 나도 한몫 끼어만 준다문 무슨 꾀를 쓰던지 마담더러 그자와 접촉할 기회를 만들죠.
클레오파트라: 어떻게?
소장: 그건 내겨 맡겨 주슈.
미꾸리: 그러면 됐지 뭐.
클레오파트라: 해 보죠.
소장: (미꾸리에게) 형씨, 저걸 좀……. (푸대를 가리킨다.)
미꾸리: 이것이 씽(돈)이요?
소장: 그 푸대 속에 이렇게 --(하며 클레오파트라와 미꾸리에게 자기의 손가락을 잡혀 준다. 두사람 놀란다.) 그러니까 두 캐럿짜리 다이야반지 세개만……. (하며 손을 벌린다.)
클레오파트라: 눈을 감으슈. (소장 눈을 감는다.) 임자도 (미꾸리도 하라는 대로 한다.) 돌아 서슈. 날 봐서는 안돼. (소장과 미꾸리, 눈을 감고 돌아서자 스커어트 밑에서 얼른 다이야반지 세개를 내어들고) 자아.
소장: (받으며) 이 다이야반지는 틀림없이 도로 찾아가가시도록 그 기회를 만들어 드릴테니 그게 성공될 땐 상금으로 저 푸대속에 든 돈의 삼분의--일은……. (자기를 가리킨다.)
클레오파트라: (고개를 끄떡해 보인다.)
장: 三(삼). (벽돌건물의 이층방)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희숙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 이 가사는 정철의 <수상록> 의 글의 일부이다.
삭풍은 왜 살을 여위는가?
봄바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여름비는 왜 세차게 내리는가?
은빛 구름을 가을 하늘에 날리기 위해서--
님의 눈초리는 왜 맑은가?
죽은 낭구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
올케인 최정애, 그의 딸 <달이>를 데리고 들어온다.
헙수레한 남자, 외투에 방한 모, 일터에서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의 허리에는 돌깨는 망치, 손에는 저녁 찬거리. 희숙은 몸치장에 열중한 나머지 올케가 들어온 줄도 모른다.
달이: (희숙에게 달려가며 반가히) 고모!
희숙: (깜짝 놀라) 애구 미안해요 언니.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있어서……. 오늘 수입은 얼마나 되죠. 달아, 추웠겠구나.
정애: (바짝 모양을 낸것을 보고)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희숙: 가다 오다 넝마를 벗어보는 것도 좋잖우? 이 지옥에서--
정애: (다급히) 고모 무슨 소식을 들었구려?
희숙: 응?
정애: 나도 이걸 사왔는데, 뭔지 알아맞혀 보지. (바쁜듯이 종이를 벗겨 중절모 하나를 내놓으며) 달이 아버지 해야.
희숙: (눈이 둥그래지며) 오빠의? 어머나! 언니 어찌된거유? 납치된 오빠가 살아왔수?
정애: 아씨부텀 말해 봐. 왜 모양을 내는지--
희숙: 언니 부텀!
정애: 꾸……. 꿈을 꾸었어.
희숙: 누가?
정애: 내가.
희숙: 언제?
정애: 간밤에. 꼭 생시와 같았어. 달이 아버지가 압록강 부근 어느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다가 온다나. 기차를 타고 거기서 서울까지--곧장. 남북 통일이 돼서 경의선이 개통됐던 모양이지? 헌데 모잘 쓰지 않아서 초라해 뵈겠지. 그래 오다가 고물상에서 이걸 하나--
희숙: (흑흑 느끼며) 틀림없이 오빤 살아 오실거유. 언니가 이렇게 생각 하는데 안 와?
정애: 암 오고 말고 그래야 우리도 남쪽으로 피난가지. 이 고생 고만허구(눈물을 씻으며) 자아 인제 작은 아씨의 차례야
희숙: 저 정말은……. (말을 끌어내다가 계속 못하고) 그만 둘테야.
정애: 뭔데?
희숙: 언니, 용서해 주겠수?
정애: 말을 해야 용서구 뭐구 있지
희숙: 오빠와 관련있는 사람야.
정애: 행여나 작은아씨하고 약혼했던 철이란……. (희숙 시선을 피한다. 얼른 알아채고) 아니, 그 자야?
희숙: 왜? 안돼?
정애: 우리 집안을 망쳐 놓은 그 악질! 제자로서 스승을 이북으로 납치시킨--
희숙: 그건 우리가 이성을 잃은 六.二五(육.이오) 때의 일 아뇨? 언니?
정애: 그자완 제발 만나지 말아 주우, 부탁이야. 이때에 한길에서 <희숙이> 하고 철의 부르는 소리 들린다.
정애: 바로 저자야! (당황해 한다. 희숙 한길을 내려다 본다.) 제발 좀 못 오게--
철: (어느새 문을 열고 나타나 정애에게 반가이) 사모님! 정애, 증오에 불타는 눈으로 철을 쏘아보며 꼿꼿이 섰다.
희숙은 어쩔줄을 모른다.
달이: (별안간) 엄마! (하고 자지러지게 울며 정애의 목에 꽉 매달린다.)
철: 아니 달이가 왜? (달이를 안으려 한다.)
달이: (벌에 쏘인듯이 기급을 하여 고함친다.) 싫어, 인민군 싫어! 싫어! 싫어!
정애: (가만히 그러나 떨리는 소리로) 나가요, 얼른! (무색한 철, 어쩔줄 모른다. 벽력같이) 냉큼 나가지 못해!
희숙: 언니!
정애: (달이를 꼭 안은채) 왜 안나가! 자식마저 죽이지 못해 이래? 얼른 나가! 나가요!
철 층계를 내려간다. 쏜살같이-- 희숙 그의 뒤를 따른다.
장: 四(사). (한길)
희숙: (따르며) 철이! 철이! 어디로 이렇게 내빼는거야? (하며 간신히 추격하여 철의 앞을 막아선다.)
철: 비켜! 희숙이 비켜!
희숙: 언니가 너무했어. 살아 온 사람에게-- 노하지 마아. 철이 노하지 마아
철: 사모님이 너무한게 뭐야? 내가 나빳어! 왜 내가 죽지않고 살아왔담. (운다.)
희숙: 철이
철: 지금도 난 기억하고 있어. 六.二五(육.이오)때 난 놈들의 협박에 못견디어 선생님의 숨어 계신델 알으켜 줬어. 그래 놈들은 천장 위에 숨어계신 선생님을 강제로 모셔내 왔어. 선생님을 잡아간 자는 놈들이었지만 그걸 방조한 자는 나야. 그 뿐인가? 이렇게 살아는 있지만 그때 난 희숙이마저 여자 의용군으로 나가는걸 방관했어.
희숙: 내 말은 빼 주어.
철: 왜?
희숙: 난 철일 원망해 본적이 없으니까!
철: 거짓말야! 인간이면 원망해야 돼. 달이는 천진하기 때문에 제 감정을 속이지 않는거야. 그래 나를 얼씬도 못하게 하는거야. 사모님이 날 내쫑는건 당연해. 난 살아선 안되는걸 살았고 와선 안될 델 왔어. 단지 희숙이가 보고 싶은 일념에서 전후사를 다 잊고…….
희숙: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우리가 여기서 낙심하면 어떻게 해? 철이, 내가 언니한텐 양핼 구할테니 낙심 마아. 언닌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했을 뿐더러, 원체 이해성이 많은 분이니까. 그때 경우를 잘 말하면 양해하실거야. 六.二五(육.이오) 전엔 그 언니가 얼마나 철일 찬양했다구. 오빠 문하생으로는 제일이라구 누구에게나 그랬는걸.
철: 한번만 용서해 주시문 난 어떻게 해서라도 그 속죄는 하련만……. 아냐 그만둬……. 아무래도 난…….
희숙: 가만 있어 철이. 내가 다 알아 할테니 (철을 밀어내 보낸다.)
장: 五(오). (벽돌 건물의 삼층방)
이층에서 희숙과 철의 대화를 엿듣고 섰던 정애는 희숙이 올라 오는것을 보고 방 한구석에 피해 선다.
희숙, 방안에 썩 들어서며
희숙: 언니!
정애: 이봐요 작은아씨! 용서를 하믄 납치된 사람이 살아 온대요? 그렇지 않다믄 내겐 용서란 생각할수 없는 일요. 도저히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일요.
희숙: 나도 철이의 잘못을 뻔히 알아요. 허지만 나는 그를 미워 할수가 없어 언니. 날봐서라도 좀 더 널리 생각해 주구려.
정애: 안돼 밤이면 잠이 들기전에 난 줄창 성경 말씀을 외웠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러나 난 내 분한 마음을 달랠수가 없었어. 달래기는 새려 점점 머리를 더 치켜드는것을 어떡해? 내 가슴속에는 납치당한 이에 대한 애정보다 때로는 납치시킨자에 대한 증오감이 더욱 불타고 있는걸, 그 불은 정말 아무도 끌수 없어.
희숙: 언니. 계집애로서 할 소린 아니지만 내겐 자나깨나 철이 생각 뿐이었오. 내가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당했을 적에도 모두들 날 죽는다. 했지만 난 살아 철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하늘에 기도 했었수. 그랬더니 기적적으로 나는 살아났어. 철인 내게 일종의 신앙이라 해두 과언이 아뇨.
정애: 그게 무슨. 오빠에 대한 의리로서도 그런 소릴 감히--
희숙: 죄스런 말이지만 억울하게 납치당한 오빠보다 철이 생각이 더욱 간절히 날 사로잡고 있음을 난 느꼈어요. 이래선 안 된다! 이건 의리가 아니다. 죄다! 해 봤지만 어쩐지 그랬어요. 그러니 언니 아무래도 우린 결혼해야겠어. 더구나 이렇게 죽지않고 다시 만난바에야--
정애: (눈이 둥글해지며) 결혼을 해? 그자하고…….
희숙: 결혼날짜까지 잡아 놨다가 六.二五(육.이오)가 터져 못한게 아뇨? 오빠가 택해 주신 약혼자였으니 오빠두 용서하실 거예요.
정애: 작은아씨. 깊이 생각해 보우. 설사 주위 환경이 용납된다 해두 작은아씨의 입장은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우? 첫째, 작은아씨의 가슴에 받은 상처를 어떻게 해? 여자로서 있을게 없으니 말이야. (희숙 정신이 썩 돋아난듯 자기의 젖가슴에 손을 얹는다. 숨소리가 달라진다.) 지금은 그자가 작은아씨의 육체의 비밀을 모르니까 그렇지 만일 결혼해 봐. 빨갱이가 닥치면 왼쪽으로 흰둥이가 돌아오면 바른편으로 왔다갔다 하는 위인이 오죽이나……. 더구나 작은아씨의 뱃속엔 파편까지--
희숙: 그만……. 그만해요! 그만! (격한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고 흐느낀다.)
정애: ……. 아니, 내가 너무 지나친 소릴 했나봐. 작은아씨. 용서해요. 작은아씨!
희숙: 으아! (솟구치는 울음을 그치지 못해 마침내 딩굴다시피 몸부림치는 동안에 음악이 곁들려……. F.O
장: 六(육)
익일 새벽, 아직 깜깜하다.
조명이 국부에 F.I 거기엔 두더지 그의 어린것과 겹쳐서 자고 있다. 소장 전재민 구호소에서 나와 하품을 한다. 철 등장.
철: (이층을 향하여) 희숙이-- (하고 부른다.)
소장: (종을 흔들며) 자아 시민 여러분 거리를 청소 합시다. 비를 들고 나오십시요. 우리의 서울을 우리가 깨끗이 해야 합니다. 여기는 전재민 구호소 특별 선전반 입니다. (미꾸리 기타 이웃 사람들 비를 들고 나온다. 희숙이 자기방에서 힘없이 내려온다.)
철: 어찌됐어. 희숙이! (희숙, 대답을 할 듯 하다가 못하고 얼굴을 싸고 집 뒤로 피해간다. 철 따른다.)
소장: 야. 두더쥐야! 얼어죽지 못해서 예서 자냐? 일어나라 일어나! (하며 발길로 찬다. 아무 반응이 없다.) 이새끼 정 안 일어날테냐? (한번 더 모질게 찬다.)
두더지: 으아! (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지른다. 소장 기겁을 한다. 어린것도 놀라서 운다.)
소장: (어이가 없는듯) 저 작식 미치지 않았어? 두더지 어린것을 이끌고 사라진다
성경할아버지: 소장님 부산 손님한테 말해서 저 사람을 추럭에 좀 태워 주슈. 함경도에서 밀려 나오다가 제 여편넬 잃어 버렸대요. 부산으로 가 봤으문 하는데 누가 아는체나 해 주어야지 그러니 미칠수 밖에--
소장: 추럭에 빈 자리가 있으문 물건 하나라도 더 실어다 팔려고 들지 누가 사람을 태워 준대요?
성경할아버지: 모럴거야 인심이--
희숙과 철이, 힘없이 다시 등장
철: 사모님께서 그렇게 강경히 우기실 줄 알았어.
철 깊은 생각에 잠겨 벽에 기대 선다. 한길을 청소하던 이웃사람들. 뿔뿔히 제 처소로 사라진다.
철: 희숙이, 차츰 살아가는 동안에 사모님한텐 내가 내 정성으로써 사죄할테니 우린 여길 떠나 아무데고 가서 결혼해 그래야 우린 조석으로 만나보기라도 하지. 여기서야 이대로 어떻게 살겠어. 희숙이 아무말 말고 같이 내빼, 지금이라도 좋아, 응?
희숙: …….
철: 왜 대답을 안해?
희숙: 그건 못해!
철: 응?
희숙: 철이, 나같은 하잘것 없는건 아예 잊어버리고 좋은 색시 골라서 결혼해. 그래야 철인 행복해. 난 이 말을 철일 위해서 하는거야.
철: 다따가 그런 소리가 어딨어! 왜 그래? 나하고 결혼 안할 참야? (희숙 대답이 없다.) 왜 말이 없어! 말을 해, 그 이유를!
희숙: 사 사랑이 식었어
희숙: (더욱 정색하여) 농담이 아니야
철: 뭐! (하고 놀라더니 별안간 큰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농담을 해도.
철: 사랑이 식어졌으문 어제 날 그렇게 반갑게 맞아 줄 수 있어?
희숙: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살아온 이 마당에야 이웃인들 그 만큼은…….
철: 왜 이 허튼소리야?
낙동강 전선 비오듯 쏟아진 그 치열한 포탄 속에서나 인민군 분대장을 죽이고 산에 몰려 있을때에도 나는 일시 반시도 희숙일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나를 찾아 주는 인사가 그래야 옳아? 더구나 어젠 결혼까지 할 생각을 해 놓고…….
희숙이, 그러지 말고 날 불쌍히 여겨 줘. 희숙이가 버림 난 정말 의지할 데가 없어. 이 난리에 날 예까지 생명을 부지케 한것두 희숙이었고, 내가 내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몇번 죽으려 하다가도 희숙이 땜에 결단 못했어. (억지로 희숙이 손을 끌어다 입술에 대며) 난 희숙일 이렇게 사랑해 희숙이!
희숙: 이게 무슨 억지야. 결혼할 수 있는 여자가 나뿐이 아닐텐데. 제발 이렇게 추근추근히 굴지 마아.
철: (달래듯이) 희숙이, 바른대로 말해. 희숙이한테 무슨 번민이 있는게 아냐? 그래, 그렇지? 내게 말못할 비밀이 있어서 지금 내게 거짓부렁을 하고 있는게지? 단적으로 말해서 희숙일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사내가 있다든가. 그렇잖으믄 혹…….
희숙: 쓸데없는…….
철: 그렇잖다면 희숙인 무슨 실수로 여자로서 가장 위해야 할 정조를 더럽힌 일이 있단 말야? 좋아 정조쯤 더럽혀도 좋아! 난 이해해 질서고 윤리고 그런건 안락한 세상에서나 찾을 것이지. 터뜨려지는 포탄 앞에선 도저히 부지될 수 없는거야. 거긴 이성도 선악도 존재하지 못해. 우리가 죽음의 계곡에 밀려 있던 이 몇달 동안의 일은 그건 모두가 불가항력야. 나는 뭐고 용서해. 나만 용서하면 그만 아냐?
희숙: 만일 용서로써 씻어질게 아니라면?
철: (정생하여) 정말 무슨 일이 있는게군 그래? 아니 어린애가 생겼어?
희숙: 그럼 어쩔테야?
철: 뭐? (눈이 둥그래진다. 그 눈에는 눈물이 솟는다. 삐쭉거리는 입술을 깨물며) 좋아! 어린게 있어도 좋아
희숙: 안돼. 무슨 소릴해도 안돼.
철: 이름을 대. 희숙이 하고 좋아한 사내가 누군지 알려 줘.
희숙: 그런것 물을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어.
철: 그가 누군지 알으켜만 주면 난 그를 찾아가 그를 단념시킬 테야. 내 이 간절한 심정을 설파하면 그도 날 동정해 줄거야. 그래 그는 희숙일 내게 양보할거야. 희숙이! 그 이름을 알으켜 줘. 제발 소원야 (하고 애원한다.)
희숙: (울며) 놔요. 놔! (뿌리치고 이층으로 달아난다.)
철 희숙의 뒤를 쫓으려다가 주춤 선다. 벽을 안고 몸부림치며 흐느끼더니 <에이 빌어먹을……. > 하며 매춘굴 골목으로 사라진다.
장: 七(칠). (매춘굴 안의 홀)
홀은 활짝 핀 벗꽃 복숭아 꽃 등 가화로 뒤덮혔다.
네온 불빛에 구슬픈 <재즈 송>을 흥흥거리는 로즈 매리…….
땐서를 안고 도는 손님들
그 중에는 부산 손님과 그의 똘만이 미꾸리 클레오파트라, 전재민 구호소 소장 등, 그 밖에 외국 군인들도 끼었다.
철은 혼자서 양주를 켜고 앉았다. 춤이 끝나자.
로오즈: (철에게 달려와서) 어머나! 누군가 했더니 바로 정 철군……. 나의 국민학교 시절의 동창생이구먼. 웬일야! 희숙일 두고 혼자 나왔으니? 나하고 한번. (하며 춤을 청하는 자제를 취한다.)
철: (아무 대꾸도 없이 술만 따른다.)
로오즈: 옳아! <휘안세> 하고 다툰게군? 그렇지? 그럴수도 있지. 이봐. 장난으로 배운 노래와 춤으로 내가 지금 벌어먹고 사니. 참 짖궂지. 세상도? 호호호…….
철: (독한 술을 한숨에 켜고 빈 잔을 내민다.)
로오즈: 술은 안먹어. 먹으면 탈선하니까. 처녀의 꿈을 포기하기에는 나는 아직도-- 호호호……. (철에게 술을 쳐 준다.)
부산손님: (가까이 가서 인사하며) 미스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 (거만하게) 누구시던가요?
부산손님: 아따. 수주일 전 내가 서울 올라왔었을 적에도 뵈었죠. 바로 이 홀에서…….
클레오파트라: (생각난듯이) 예! 예! 부산서 오셨다던?
부산손님: 옳습니다. 호왈 부산 손님 입니다. 댁에선 그때부터 쭉 서울에--
클레오파트라: 난 서울을 사랑해요.
부산손님: 왜요?
클레오파트라: 언제나 나는 약한자의편이니까요. 서울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미망인이거든요. 그렇게도 호화롭던 거리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죠? 명동거리에 나가 보셨나요? 개미새끼 한마리 없잖아요? 그리고 그 참혹하게 부서진 모습! (글썽거리며) 정말 기맥혀요.
부산손님: 부인도 훌륭한 시인이십니다 그려.
소장: 아문요. 서울이란 거대한 시체에 눈물을 쏟기 위해서 예서 고생을 하고 계신걸요.
클레오파트라: (비스듬히 앉아 눈을 스르르 감으며 외운다.) 산아는 전화입어 벌의 집 같애도 한강은 흐른다. 쉬일사이 없이 이 몸은 포탄맞아 누더기 같애도 한강은 속삭인다. 가슴 속 깊이 한강은 나의 넋, 님의 젖줄기! 한강이 흐르는 동안 우린 살아 있다.
손님들: (철을 제외하고) 부라보!
부산손님: (술잔을 쳐들며) 가련한 서울을 위해서.
손님들: (철을 제외하고는 따라서) 우리 서울 만세! (치켜든 술잔을 일제히 비운다.) 이때에 밴드는 옛날을 추억하는 슬픈 곡으로 응한다.
부산손님: 부인 저 곡에 맞춰서 한번…….
부산손님 클레오파트라에게 춤을 청한다. 클레오파트라 눈물을 씻고 응한다.
부산손님 상대를 위로하듯 꽉 껴안고 돈다.
홀안에 있는 손님과 땐서를 모두 도취한 듯 짝을 지어 춤춘다. 그러나 철만은 혼자서 술만 켠다. 로오즈매리의 노래에도 애조가 넘친다.
철: 그런 죽어가는 소린 질색이다. 다른 곡! 다른 곡! 막 때려 부시는걸……. 자아 부셔라! (혼자 나서서 미친듯이 지르박의 춤을 춘다.) 반주 지르박의 곡으로 변한다. 로오즈 매리 신이 나서 철의 상대로 나선다. 다른 손님들 따라서 춤춘다. 광선이 어슴푸레 해지며 광기가 홀을 뒤덮을 때에 부산 손님 갑자기 소리친다.
부산손님: 가만! 불 좀 켜! 불 좀!
음악이 중지되며 춤도 중지된다.
전등불이 환하게 다시 밝아진다.
여럿이: 뭐야! 뭐가 어찌된거야? 무슨 사고야?
부산손님: (자기의 호주머니를 털어 내며) 소매치기를 당했소? 지갑이 없어졌어!
일동: 소매치기? (하며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본다.)
부산손님: 얘야. 홀 문을 닫아 걸어라!
똘만이: 예, (하면서 밖으로 통하는 <도어>에 막아선다.)
철: (부산 손님에게) 형씨. 예 있는 손님을 모조리 도적놈으로 몰작정이요?
부산손님: 그런게 아니라…….
철: 그런게 아니라면 왜 문을 닫아 거는거야?
똘만이: (툭치며) 이봐! 도적을 잡지 말란 말야?
철: 뭐 어째? (웃통을 벗는다.)
똘만이: 이 조무래기가! (대들려니까 싸우지 못하게 모두들 막는다.)
소장: (부산 손님에게) 대관절 뭘 잃으셨나요?
부산손님: 아까 소개해 주신--
소장: 다이야반지?
부산손님: 바로 지금 춤추다가-- (하며 클레오파트라를 쳐다본다.)
클레오파트라: (펄쩍뛰며) 어머나! 이런 벼락을 맞을! 그럼 내가 훔쳤단말야?
부산손님: 미안하지만 좀……. (하며 밝은데로 끌고 나온다.)
클레오파트라: 없으면 어쩔테요?
부산손님: 난 확신하오.
클레오파트라: (두 팔을 쩍 벌리고 나서며) 자아 뒤져봐요 얼른요! (부산손님 어이없는듯 가만히 섰다.)
소장: 여자의 몸이라 손대기가 조심스러우신가 봐. 땐서들 중에서 누구나…….
로오즈: 속시원히 흑백을 가려야 할 테니까 누구나 수고 좀 하지.
땐스 A: 그래! (하며 나선다.)
클레오파트라: 아냐 다른 사람은 내가 용서 안해 본인이 뒤져요.
부산손님: 실례합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클레오파트라의 몸을 뒤진다. 없다.) 웬 일이야?
클레오파트라: 이런 불한당! (빰을 친다.)
철: 에이 엉터리! (부산손님의 멱살을 끌고 한대 먹인다. 부산손님 나가 떨어진다.) 똘만이 철에게 덤빈다. 치고 받고 한동안 치열한 격투! 결국 똘만이를 문밖으로 차낸다. 부산손님 기겁을 하여 도망친다 모두들 통쾌해서 웃는다.
클레오파트라: (철의 목에 매달리며 승리자처럼 소리친다.) 자아 오늘 저녁엔 이 홀 내가 맡았다. 술이다! 실컷 마셔요. 왜 음악이 죽어가?
기운차게 북작거리라니까. 경쾌한 곡이 쏟아진다. 철은 클레오파트라를 끌어 안고 자포자기적인 춤을 춘다. 클레오파트라 신이 났다. 색정적이며 퇴폐적인 춤이 한동안 계속 되면서 무대를 돈다.
장: 八(팔). (양식 목조 건물의 실내)
미꾸리 훔쳐온 지갑 속에서 다이야 반지 셋을 찾아낸다. 불빛에 비쳐 보더니 회심의 웃음을 웃는다.
미꾸리: 갈데 있냐? 백팔백중이다. 헤헤헤…….
이때에 현관에서 노크소리와 함께 소장 썩 들어선다.
소장: 형씬 정말 미꾸리야! 그 머저리가 홀 문을 닫아 걸기에 <야 이거 하발이다> 했더니 어느새 형씬 이렇게…….
미꾸리: (다이야 반지를 내 보인다.)
소장: 됐어 약속대로 빨리 내 모가치를……. (하며 손을 벌린다 미꾸리 숨겨놓은 푸대 속에서 돈뭉치를 하나를 내준다.)
미꾸리: (소득표의 그래프선을 연장시키며) 꽤 올라가는데!
소장: 형씬 못 봤겠지만 그 자식의 빤치! 쓸만해 사내로서.
미꾸리: 누구?
소장: 아까 홀에서 우릴 위해서 놈들을 녹크아웃 시켜 준 덥치말야. 여간 피래미 여남은 덤벼야 어림 없겠든데 사내자식이 그쯤 돼야 해!
미꾸리: 내가 못본게 유감인데.
소장: 굉장해!
미꾸리: (바깥을 살피더니 문을 열어 준다.)
소장 한길로 나온다.
장: 九(구). (한길)
미꾸리 망을 봐 주는 동안에 소장 돈뭉치를 들고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클레오파트라에게 몸을 맡기고 나타난 철. UN죽 파는 야대를 짓묀다. 소장 다시 나온다.
소장: (철에게 대들며) 이봐! 왜 깡을 부려? 서울 시민은 굶어죽일 심뽀야?
철: 이게 어디서 썩다 나온 뼉다구냐? (소장을 메어치려 한다.)
클레오파트라: 안돼! (하며 말린다.)
철: 에이 빌어먹을!……. (저재민 구호소 창문의 쇠창살을 잡아 비튼다.)
소장: 저 개고기! 저 쇠창살이 없어선 내사업이 안되는데!
미꾸리: (쇠창살이 엿가락같이 휘어지는것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클레오파트라를 꾹 찌른다.) 쓸만하지?
클레오파트라: (철의 손목을 끌며) 여보게 젊은이. 이리 와 좀 쉬어. 들어가서…….
철: (벽돌 건물의 일부로서 파괴되다 남은 높은 벽을 가리키며) 저 벽은 뭣하자고 혼자 건공중에 서 있는거야? 싱겁게! 못나게! 외롭게! 궁상맞게! (팔을 걷고 대들며) 이 자식아 물러나! (하고 울음섞인 소리로 기를 쓴다.)
클레오파트라: 왜 이래?
철: (여전히 소리친다.) 꼴보기 싫다. 물러나라거든 물러나!
클레오파트라: 미쳤군! 그런 똥배짱 부리다간 고타꼴 가!
철: 죽음이 무서우면 뭣하러 네미 뱃속에서 나와!
클레오파트라: 그렇다구 사서 생죽음 할거야 없잖아!
철: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운다.) 이제 하직이다. 캔바스하고도 색채하고도 내가 그리던 모든 꿈하고도 하직이다! (벽돌 쓸어뜨리러 간다. 클레오파트라 철을 붙든다.) 놔요! 놔! (뿌리친다. 클레오파트라 나둥그라진다.)
미꾸리와 소장: (막으며) 안돼! 그러나 철은 어느새 대들어 우뚝 솟은 벽을 민다. 벽 휘청거린다. <에이 뒤어져라> 하며 육탄이 되어 어깨로 벽을 받는다. 벽돌 비오듯 우르르 쏟아진다. 하늘이 진동하는 소리를 내며-- 클레오파트라 등 일제히 기겁을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