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기꺼이 새장에 갇히는 것이 사랑이듯 나영규가 계획을 준비하는 것도 사랑이고, 김장우가 때때로 계획을 바꾸는 것도 사랑이다. 이모가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사랑, 이모부가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도 사랑이고, 어머니가 자진하여 불행에 발을 디뎌 무릎에 힘을 주는 것도 사랑이다. 진모가 그리던 모습과 닮아 가는 것도 사랑, 비둘기가 울음으로 읍소하는 것도 사랑이다. 저마다 자신의 최선으로 생산한 사랑의 형태에는 죄가 없다. 모순과 모순 사이 나의 마음이 닿는 어떤 모순을 선택하는 모순만 남을 뿐이다. 선택의 반대편 어느 모순은 이미 제시된 것이므로 지금 나의 선택이 종국에도 옳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 것 말고는 더 할 일이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p.296)’ 2024년 7월 8일 월요일, <모순>을 읽고.
나. 이도경 후기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15쪽)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22쪽)
주체를 나로 놓고 보면, 그러면, 중요도가 확 달라진다. 내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남동생의 인생도 가끔씩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52쪽)
내 마음대로 해석한 김장우의 전화 메시지 때문에 나는 쉽게 하늘색 전화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동전은 넘치도록 많은데, 뒤에서 빨리 끊어달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조용조용 꽃가지를 흔들고 있는 라일락은 저리도 아름다운데, 밤공기 속에 흩어지는 이 라일락 향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기만 한데 (79쪽)
“해질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 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 (94쪽)
낯선 길에서 슬픈 일몰을 맞더라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해진 아버지였다. (96쪽)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142쪽)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 (152쪽)
그 애를 그렇게 방치할 수 없었다. 푸르른 일몰의 시간, 사방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는 그 시간, 그 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들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었고 그랬으므로 푸르른 일몰의 시간은 숙명적인 우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153쪽)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73쪽)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195쪽)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 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206쪽)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중략)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218쪽)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 (229쪽)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 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295-296쪽)
다. 전종범 후기
김장우와 나영규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진진의 모습과 최종 선택이 모순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돌아보면 그 선택에도 '이유가 존재하는구나.' 생각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도 모순된 상황이 많다고 느끼는데, 돌아보면 모순은 개인의 사고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책이었다.
라. 서무결 후기
최대한 천천히 읽어 줄 것을 당부한 책이었지만, 몰입감이 상당해 앉은 자리에서 그 당부를 지키기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진진, 진모, 어머니, 아버지, 이모, 이모부, 주리, 주혁 모두 각자의 ‘다른 삶’에서, 각자의 다른 ‘쇠창살 문’에서 어쩌면 치열하고 어쩌면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가며 인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벌이는 투쟁을 같이 경험하며 모처럼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또, 제 안에 있던 ‘적절한 순간에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리는 것’에 대한 갈망을 확인할 수 있었고, 사랑이란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으로 (사랑을) 새롭게 정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장우와 영규 사이에서 차차 감정을 정립해 나가는 진진을 보며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던 와중에 갑작스레 선사된 반전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를 반전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왔던 진진의 마음이었고, 진진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도 더욱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마주하자마자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선생님들과 나누니 더욱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