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헌종효정왕후가례도감의궤
1847년에 있었던 헌종과 효정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1831년생으로 15세인 효정왕후가 간택에 참여하였으므로 효정왕후 보다 한 살 아래인 16세인 경빈김씨도 충분히 간택 참여가 가능한 나이입니다
의궤에는 간택일자, 간택에 참여했던 처녀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의궤에는 간택일자 그리고 간택에서 선발되었던 처녀들이 아버지 관직명 아버지 성명과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1847.4.22. 초간택에서 7명, 1847.4.26. 재간택에서 3명을 선발하였습니다. 洪在龍의女, 申泰運의女, 鄭基承의 女를 선발 하였습니다
4.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
1837년에 있었던 헌종과 효현왕후 혼례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입니다. 효현왕후 간택 시 간택 참여자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물론 간택 처녀 명단에 김재청의 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는 1832년생인 경빈이 우리나이로 6세에 불과하므로 간택에 참여하기에는 어린나이입니다
- 간택 참여자 등 명단 생략-
5.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에는 효정왕후 간택일자에 왕이 머물렀던 곳, 간택당일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간택(1847.4.22.), 재간택(1847.4.26.) 그리고 삼간택(1847.9.9.)이 있었던 날의 승정원일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승정정원일기에는 초간택,재간택시 선발자 명단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물론 이 내용은 의궤 기록과 일치합니다
6. 정미가례시 일기
1847(정미년)에 있었던 헌종과 경빈김씨의 혼례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가례일시, 가례시 사용한 물품 등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헌종과 경빈김씨 가례와 관련 내용으로 여기서는 구체적인 내용 등은 생략 합니다-
7. 영조의 정순왕후 간택 참여
신병주 교수는 雅田이라는 블로그에서 영조의 정순왕후 간택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926년 강효석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 이라는 책에는 정순왕후가 왕비 후보자로 뽑혀 국왕인 영조 앞에 섰을 때의 일화라 합니다.
.
신병주 교수는 영조가 정순왕후를 간택할 때 일화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간택과 정순왕후의 지혜〉
1925년 강효석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 이라는 책에는
정순왕후가 왕비 후보자로 뽑혀 국왕인 영조 앞에 섰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먼저 정순왕후는
다른 후보자들과는 달리 방석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는데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방석에 부친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당시 간택을 할 때 후보자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하여
간택된 사람의 부친의 이름을 의자의 방석에 적어 놓았던 것이다.
또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혹은 산이 깊다, 혹은 물이 깊다 하였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하였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물건의 깊이는 가히 측량할 수 있지만 인심은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어 영조가 꽃 중에는 어떤 것이 제일 좋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왕비 후보들은 저마다 복숭아꽃, 매화꽃, 모란꽃이라고 대답하였지만,
정순왕후만은 목화꽃이라고 답하고,
‘다른 꽃들은 모두 일시적으로 좋은데 오직 목면은 천하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습니다.’라고
당시 비가 오고 있었는데, 국왕은 다시 후보들에게 궁궐의 월랑(月廊)의 수가 얼마냐는 질문을 던졌다.
후보들은 저마다 위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넷의 숫자를 세었지만,
정순왕후는 홀로 머리를 내리고 침묵하고 있었다.
국왕이 너는 알았느냐고 묻자,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간택을 받을 당시 정순왕후는 속이 깊고 지혜로운 규수의 면모를 보여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일화가 『대동기문』에 전한다.
그런데 『대동기문』에는 정순왕후가 왕비로 뽑힌 후에 상궁이 옷의 칫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고 추상같이 말하였다.
왕비로서의 체통을 그대로 지키고자하는 정순왕후의 뜻이 나타난 것이었다.
지혜로움 속에 내재하는 추상같은 면모,
어쩌면 이런 모습이 세도정치기 폭풍의 중심에 있었던 정순왕후의 캐릭터가 아닐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헌종 이전에도 국왕이 간택에 참여한 전례가 있게 됩니다
왕이 간택장소에 참여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저는 연구를 해보지 않아서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Ⅲ. 경빈김씨와 헌종의 사랑이야기 어디서 나왔나?
이상과 같이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헌종과 효정왕후 가례를 국가의 공식 행사보고서인 의궤 뿐 아니라 승정원일기에 명확히 간택 참여자의 이름까지 기록해 두었으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다만 어떻게 이러한 내용이 마치 사실인양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은 김용숙의 《조선조 풍속연구》에서
이 내용을 기록하였고 이 자료를 다른 자료들에서 여과없이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 자체가 그럴듯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김용숙의 《조선조 풍속연구》 내용과 김명길 상궁의 《낙선재 주변》에서 나오는 내용을 보면 궁중에서는 분명 헌종의 삼간택 이야기가 떠돌았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확한 사실도 아닌데 왜 이러한 이야기가 돌게 되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카더라는 이야기가 무척 많습니다.
지엄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라도 이 역시 사람 사는 곳이기에
~카더라 이야기 또한 비일비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관계되는 일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증대시키게 되고 때로는 근거없는 이야기가 사실로 둔갑할 때도 종종 있곤 합니다.
어쩌면 어느 시기인지 모르나 누군가에 의해 경빈김씨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 야기가 주위 궁녀들에게 전파되었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1900년대 초반까지 살았던 효정왕후와 경빈김씨가 생존해 있을 때 이 이야기가 생겨났는지 아니면 돌아가신후에 생겨났는 가입니다.
만약 생전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두 분은 모르고 계셨는지 아니면 알고 계셨는지 이것도 궁금해집니다
Ⅳ. 結語
이상과 같이 헌종과 경빈김씨의 사랑 이야기 중 일부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저는 확인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그간 알려진 이야기 중 효정왕후 간택(재간택과 삼간택) 시 경빈은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간 우리에게 알려진 이야기는
1970년대초까지 생존했던 궁인 출신 여인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궁인 출신 여인들은 실제로 궁궐에서 살았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의 증언은 무척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증언 내용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승정원일기,가례도감의궤에 간택 참여자의 명단까지 명확하게 기록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인하지 않고 궁인 출신 여인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 부분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창덕궁에서 관람객에게 해설을 하는 분들은 경빈김씨가 효정왕비 간택 때 삼간택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창덕궁 관련 각종 책자 등도 향후에는 이 부분에 대한 수정 보완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전해오는 이야기로 인식하고 이를 사실로 받아드리려면 우리가 할 수 잇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사실관계 확인을 하면 좋겠습니다.
효정왕후는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후사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대를 잇지 못하게 되자 후궁 간택 과정을 지켜 보아야 했으며
이로 인해 말로는 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세상을 뜬 후 전혀 사실도 아닌 이야기가 후세들에 의해 궁궐에서 떠돌고 있다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
경빈은 간택을 통해 빈의 지위에 올랐지만 왕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버리고 본인은 대를 잇지는 못한 채 살았던 삶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경빈은 살아있는 동안 늘 효정왕후에 대한 마음의 짐을 평생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경빈 또한 본인과 왕비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가
자신이 살았던 낙선재에서 후손들에게 회자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
경릉(景陵)-24대 헌종(憲宗)과
정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
[재위기간 1834 ~ 1849. 부인 3명, 자녀 1녀]
○ 경릉(景陵)-의 특징
경릉은 24대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세분이 나란히 모셔진, 조선왕릉 유일의 3연릉이다.
원래 선조의 목릉이 있던 자리였으나 지금의 목릉으로 옮겨가고 빈자리에 정비 효현왕후가 먼저 들어오고 헌종이 예장되었으며 나중에 효정왕후가 안장되어 유일하게 3연릉이 되었다.
선조의 목릉과 숙종의 명릉도 왕과 정비, 계비를 한 곳에 배치하였지만 다소 떨어진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조성한데 비하여 경릉은 3개의 봉분을 한자리에 나란히 하고 난간석으로 연결한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ㅇ 낙선재(樂善齎)를 지은 헌종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장남이다.
4세 때인 1830년(순조 30) 5월 6일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그 해 9월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며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승하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였으므로 실제의 정사는 할머니이며 순조비인 안동 김씨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였으며 헌종비 역시 안동김씨 집안에서 맞아들이는등 그동안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극에 달하였으나 15세에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 신정왕후의 영향력을 벗어날수 없었으니 정국은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대립과 각축으로 어지러웠으며 어머니인 풍양조씨 조대비가 흥선대원군과 연합하여 고종을 등극시킴으로서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어린 임금 헌종은 두 명의 왕후와 세 명의 후궁을 두었다. 11살인 1838년(헌종 4)에 간택령을 내려 효현황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1843년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그 후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한 간택에 참여하였고 최종결정권을 가진 대왕대비에 의하여 효정왕후 홍씨가 결정되었지만 헌종의 마음은 삼간택에서 낙선한 경빈 김씨에게 있었다. 계비 효종왕후가 3년동안 후사가 없자 이를 핑계로 헌종은 마음에 두었던 김씨를 불러들여 정1품 빈에 책봉하니 그녀가 경빈김씨이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창덕궁내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하고, 같은 창덕궁 내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 하였으며 자신과 경빈의 처소에는 일절 단청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유(許維)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헌종은 이곳에서 예술과 사랑을 누리는 생활을 2년도 채 하지 못하고 1849년(헌종 15) 6월 6일 23세의 어린 나이로 후사없이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조선사회의 총체적 위기
헌종시대는 내우외환으로 후기 조선사회의 붕괴조짐이 드러나던시기였다. 안으로는 순조 때 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여파로 관리임용의 근간이 되는 과거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인 삼정(三政 군정, 전정, 횐걱)의 문란 등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재위 14년간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는 등 민생의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순조때 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기해박해(己亥迫害1839,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辟派)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로 이러져 훗날 외교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연안에 빈번하게 나타나기시작한 이양선의 출몰로 민심이 소란해지는 등 내우 외환이 그치지 않았다.
○낙선재(樂善齎)를 짓고 풍류를 즐기다
어린 임금 헌종은 두명의 왕후외 세명의 후궁을 두었다. 11살인 1838년(헌종 4년)에 간택령을 내려 효현왕후를 왕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1943년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그 후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한 간택에 참여하였고 최종 결정권을 가진 대왕대비에 의해 효정왕후 홍씨가 결정되었지만 헌종의 마음은 삼간택에서 낙선한 경빈 김씨에게 있었다.
계비 효정왕후가 3년 동안 후사가 없자 이를 핑계로 헌종은 마음에두었던 김씨를 불러 들여 정 1품 빈에 책봉하니 그녀가 경빈 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