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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61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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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향' 가족 여러분!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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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곰곰이 되새겼다.”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성모님의 말씀이나 태도, 하느님을 향한 자세를 보십시오.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침묵, 기도, 철저한 겸손, 앞 뒤 따지지 않는 순명,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구세주 잉태 예고 앞에 성모님의 말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장 38절)
아기 예수의 탄생 앞에: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장 19절)
예루살렘 순례 길에 소년 예수를 겨우 되찾고 난 후 이해할 수 없는 언행 앞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장 51절)
그 외에도 성모님께서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태도(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엄청 서운할 말씀):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골고타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저 함께 눈물 흘리시며, 함께 아파하시며, 함께 기도하시며 마냥 서계셨던 성모님...
성모님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도 드믈 것입니다. 그녀의 생애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 불가사의한 일들, 어쩌면 억울하고 속 터지는 일들로 가득 찬 파란만장하고 특별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단 한번도 No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불평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서 힘들다, 괴롭다, 못살겠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의 다양한 국면, 이런 저런 기묘한 초대, 모든 이해 못할 일들 앞에서 성모님은 한결같이 Yes였습니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해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앞뒤 따지지 않은 무조건적인 순명, 하느님 계획에 대한 전적인 믿음, 단순한 Yes가 결국 이 세상 구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인류의 어머니, 결국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출중한 외모, 뛰어난 학식, 타고난 재능, 내놓으라하는 가문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지극한 겸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 어린이 같은 단순성으로 인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올 한해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는 다양한 삶의 국면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것 못지않게 여러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 기가 막힌 일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여겨질 일들도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슬퍼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럴 때 성모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하느님의 초대 앞에 앞뒤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그저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우리의 응답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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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찬미 예수님!”이었다>
2019년 가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찬미 예수님!”이었다
허윤석 신부님은 평화방송 ‘성모 마리아는 누구의 어머니신가’란 제목으로 한 영성특강에서 당신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간추려봅니다.
허윤석 신부가 어렸을 때 동생이 성당에 복사를 서기 위해 가다가 무면허 운전기사가 모는 트럭에 다리를 깔려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허 신부의 어린 시절은 오락실과 가출한 아이들과 노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집이 비어있으니 가출한 아이들의 거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생 때 허 신부도 취객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고 생사의 길목에서 사경을 해매야 했습니다. 의식은 흐려지고 손발이 차가와지고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몰려와 분명 죽음에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주 작고 온화한 빛이 점차 커지더니 성모 마리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허 신부의 머리에 강복해 주시고 손을 잡아주셨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의 혼수상태 끝에 허 신부는 깨어났고 그때 성모님께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라 불렀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어머니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분이라 누구라도 성모 마리아를 만나면 어머니라 부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허 신부는 그때부터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고 어머니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기도하는 학생으로 변했습니다.
한 번은 새 어머니에게 매일 구타당하는 것이 싫어서 가출한 친구와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다음 날 자기 생일인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묘지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허 신부는 신자도 아닌 그에게 묵주를 쥐어주며 함께 묵주기도 하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땅 속에 묻혀 있는데 어디 또 어머니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천국에 계실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허 신부는 루르드 성모님의 메시지를 인용하며 누구도 회개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날 함께 자고 다음 날 학교에 갔습니다. 그 친구와 같은 반이었는데 점심시간에 갑자기 그 친구의 새 어머니가 교실로 들어와 아이의 뺨을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가출해서 새엄마 걱정을 끼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손에 어제 받은 묵주를 꼭 쥐고 “죄송해요. 다시는 가출 안 할게요. 그리고 다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을게요. 미워하면 엄마를 볼 수 없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새 어머니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나도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나도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하며 울었고 그 친구와 허 신부도 울고 담임선생님도 울었습니다. 새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매를 많이 맞으며 자라서 그러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허 신부의 친구는 성모 마리아를 사랑했던 제자의 이름인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고 새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사건 이후로 새 어머니를 어머니로 받아들여 행복한 가정이 되었고 지금은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새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친어머니 옆에 나란히 묻혀있고 그 중간엔 성모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성모 어머니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하느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또한 자비이고 용서이고 평화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평화를 전해준다면 그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낳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손님을 맞이합니다. 가난한 목자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이 낳으신 하느님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또한 목자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당신 아드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하느님의 자녀들로 새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허윤석 신부님도 성모 마리아와 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우선 가정 안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비뚤어질 수 있었는데도 성모 마리아를 통해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잉태된 자비와 용서를 친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자비와 용서가 아기 예수님입니다. 친구도 그 자비와 용서를 보고 믿고 새로 태어났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구는 또 자신의 새어머니를 새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낳은 자비와 용서로 새어머니의 성모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신자분은 자신의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사처럼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하여 1년에 30명 이상을 선교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찬미하는 예수님을 통해 또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하는 삶이 성모 마리아의 삶이고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우리도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잉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평생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사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먼저 찬미하고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모성을 닮는 길은 온 삶이 “찬미 예수님!”으로 집중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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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새해 첫 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복음: 루가 2,16-21: 여드레 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평화는 마음의 질서가 잘 잡힌 조화로운 상태이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문란하면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이 질서가 올바로 정립되어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마음의 질서의 조화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夫要生者必死요 期死者得生하리라.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여(루가 1,38 참조) 당신 자신의 신적인 모성의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신적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 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바쳐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 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 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 날 이 한 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 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더욱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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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희망>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16-21)
여기서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은, 아기에 관해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한 말을 가리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천사가 한 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오늘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
2) 구유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가 메시아다.
3) 메시아께서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을(구원을) 주실 것이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찾아낸 다음에는 천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또는 자신들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안 믿고 있다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본 다음에야 비로소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었는데(루카 2,15), 그것은 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본 것은 “작고 약한 갓난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그 아기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메시아께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로 오셨다고 말했고,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기가 자라서 나중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게 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 일은 전적으로 ‘그냥 믿는’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말한 대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내고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구유에 누워 있는 그 아기가 자라서 나중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서 ‘희망’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이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망’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될지 안 될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내가 바라는 대로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입니다.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내가 믿고 있는 그 일이, 믿는 그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은 사실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망’은, 복권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그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당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당첨되면 정말 좋겠다.”라는 불확실한 일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이미 당첨된, 그러나 아직 당첨금과 교환하지는 않은,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복권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우리는, 지금 내가 주님께 청하는 그것이, 또는 그 일이, 청하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런 희망과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빈말’입니다.) 여기서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라는 말씀은, 앞에서 말한, “희망이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이다.”라는 말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희망’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주님께서는 구원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믿고 희망하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구원이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라는 말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구원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희망과 믿음에서 인내심이 생깁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구원이 완성되면 희망의 역할이 끝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을 맞이해서 여러 가지를 희망하고, 계획합니다. 그 희망과 계획에 대해서, 신앙인은 다음 두 가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1) 지금 나의 희망과 계획은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인가?
2) 나의 희망은 믿음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가?
자기의 희망을 말씀드리는 기도를 주님께 바치면서도, 주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청한다면, 즉 허무하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소원만 빌고 있다면, 그것은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는 ‘헛된 일’입니다. 또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희망하고 청하면서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면, 즉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확신도 없이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받을 준비를 안 해서 주시는 것도 못 받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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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류성태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교우 여러분들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 한 해도 늘 주님의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인 이날 우리 교회는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예전에는 이날을 천주의 모친 성모마리아 대축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기서 천주의 모친이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성모님의 아들이신 인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에 대해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 축일은 구원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기념하고,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예수님을 맞아들이도록 해주신 거룩한 어머니께 드리는 특별한 존엄성을 찬미하는 날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날은 갓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한 번 경배를 드리고, 천사의 기쁜 소식을 다시 들으며, 평화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하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시 시작된 새로운 한 해를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 안에서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천사들을 통하여 구세주가 탄생하셨음을 전해 들었고, 자신들이 들은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천주 강생의 현장을 찾아간 것입니다.
길을 떠난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아기에 관하여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이는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찬미한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아기가 이 세상을 구원한 구원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이 땅에서 이룰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보고 있는 아기가 어떠한 분이 될 것인지를 목자들은 명확하게 전달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주변의 많은 이들은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기억과 말씀을 간직하는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마음속에 하느님의 뜻을 고이 간직하고 그것을 곰곰이 되새기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품은 우리 신앙인들이 취해야하는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이신 성모님께서 이러한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목자들은 자신들이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과 자비 앞에서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목자들과 성모님의 태도입니다. 먼저 목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목자들에게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려주십니다. 그러자 목자들은 그 즉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기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가치를 전해 들었을 때 취해야 하는 결단의 자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을 것입니다.
한편 성모님께서는 목자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움 대신에 그분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말씀을 들은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말씀을 되새겨 복음이 곧 내 자신의 자양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그러한 자양분인 것입니다.
이어서 목자들은 하느님께 찬양하고 찬미하며 떠나갑니다. 이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를 되새기면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취해야 하는 자세를 나타내는데, 그 자세는 바로 감사와 찬미와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자들과 성모님의 자세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 성모님께서는 지극한 겸손과 순명으로 우리에게 신앙의 산 증인이자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한 생을 살아가셨습니다.
이러한 그분의 삶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이를 삶 안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자세이며, 구원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 성경을 소중히 여기며, 그 말씀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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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박종수 요한 세례자 신부님]
성모님 대축일을 맞이하여 천주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성모님과 함께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께 편지를 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은 어머니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자랍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 위하는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밥은 먹었니?”
“학교는 잘 갔다 왔니?”
“별 일 없었니?”
“아침에 양치는 했니?”
“숙제는 했니?”
또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학교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 되어라.”
“공부 열심히 해라.”
“밖에 나가서 신나게 놀되 너무 격하게 놀지는 말아라.”
“음식은 천천히 씹어 먹어라.”
이런 관심은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70대 노인이 되어서도 집 밖을 나가려고 하면 어머니는 “차 조심해라!” 하고 걱정해 주십니다.
이런 어머님의 말씀들을 우리는 가끔 ‘잔소리’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수많은 말씀들을 할 정도로 자녀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면 정작 어머님들은 자신을 돌볼 시간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잔소리’ 라고 여기며 인상을 찌푸릴 때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걱정으로 주름이 늘어갔습니다. 어머니가 해 주신 밥 먹으면서 튼튼해지고 건장한 성인이 되어갈 때에 어머니는 점점 약해지셔서 약봉지를 끼고 살게 되셨습니다.
내가 세상의 많은 지식을 알아갈 때에 어머니의 지력은 점점 쇠해져서 때로는 조금 틀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어머니를 답답하게 여기기도 하고,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주름도, 어머니의 약해짐도, 어머니의 틀림도 모두 “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해진 어머니는 아직도 그런 나를 위하고, 그런 나를 위해 묵주를 잡고 계십니다. ‘엄마’ 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저희들은 늘 부족한 자녀입니다. 늘 부족한 자녀이지만 오늘만큼은 어머니를 위해 묵주를 잡습니다. 자신을 돌보기보다 자녀를 한 번이라도 더 돌보시려는 어머니, 자녀가 퉁명스러워도 그런 자녀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 사랑이신 어머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먼저 이 땅에서 자녀들을 위해 모든 노력을 하시고 지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님들! 그리고 지금도 자녀 사랑이 한창인 우리 어머님들! 자녀들의 기도가 늘 부족하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늘 어머니인 성모님과 함께 영적인 기쁨을 충만히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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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근 베드로 신부님]
새해 첫날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의 축복이 청취자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그리고 온 세상에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우리는 세계평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 가지 기원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은 그 첫째 기원을 옛말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듯이 가정의 평화와, 식구들의 건강을 달라고 기원합니다.
가정이 평화로우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정에 평화가 없고 불화하고, 부부지간에도 맨 날 싸움만 하고, 부모 자녀 간에도 서로가 불목 하여 이해하기보다는 이해 받기를 바라기에 대화는 저 멀리 강 건너 가고, 그래서 결국 집안이 평화롭지 못하면 일터에 가더라도 마음이 편치 못하고,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도 제대로 찾지 못하면서 어디 가서 세계평화를 운운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지난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지내지 않았습니까? 한 해의 처음과 마지막에 세계평화의 날과 성가정 축일을 지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의 성가정의 평화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 가정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세상에 평화를 안겨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인 민수기 6장24절-26절의 말씀에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모든 모임은 각자가 다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서로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서로가 포용하며 그것을 존중해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존립원칙이며, 이해 받기만을 바라기보다는 이해 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의 원칙인 것입니다.
평화로운 관계란 서로 완전한 신뢰와 존경, 깊은 이해가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이렇게 상호 존중과 깊은 이해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목동들이 평화롭게 지켜보는 광경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 평화를 깊이 담아두었다는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척박하고 보잘것없는 가난한 땅에서 집도 없이 마구간에서 소, 말들의 밥통인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평화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적인 평화의 원칙을 갖고 계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쉽게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평화의 아기를 잉태하시고 낳으신 분을 기억하여 오늘 우리는 천주의 모친 성모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천주의 모친, 즉 하느님의 어머니란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그 말씀을 낳으신 분을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평화의 왕이신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새해 첫날의 기도지향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는 평화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먼저 상대방을 자기보다 높여주고, 상대방의 인격을 믿어주고, 그 뜻을 먼저 들어주는 자세가 평화의 자세입니다.
모든 평화의 원칙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고, 우리가 진정 평화를 원하고 사랑한다면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비움으로써 상대방을 존중하며 그 인격을 보호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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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해 첫날을 여는 기도>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갈라티아 4,4-7 (종살이에서 자유로)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루카 2,16-21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할례와 작명)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새해 첫날을 여는 기도>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을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나를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품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을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품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나를 품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닮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닮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닮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내가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나를 사랑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축복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축복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이 축복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축복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축복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내가 축복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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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강해지는 축복으로…>
고운님들, 202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이 사는 공동체에서 가끔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곳에 있는 어떤 청년은 7살 때에 기차에서 떨어져 앞을 못 보는 장애가 있고,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가 있고, 그리고 아무런 공부를 할 수 없는 정신을 가져버린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빛과 어둠을 감지할 수 있는 아주 미약한 시력이 남아 있어서인지, 방에 불을 켤 때, 사진을 찍을 때, 번개가 칠 때는 자신의 눈이 보인다는 착각하여 뛰쳐나간답니다. 물론 몇 걸음 가지 못해 벽에 부딪히거나 넘어지기 일쑤여서 항상 그의 얼굴과 몸에는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착각이 끝나면 또 일상으로 돌아와 알아듣지 못할 노래를 흥얼거리고 하루를 기쁘게 살아갑니다.
그날도 미사를 하는데, 미사 제대에 촛불이 켜지자 촛불을 향해 달려오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져서 얼굴이 찍히고, 무릎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간단히 치료하고 항상 그랬듯이 성전 맨 앞자리에 앉아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 청년 나이가 30살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행동을 보면서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청년이 넘어져서 성당 의자에 얼굴이 찍히고 무릎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나올 때, 그 순간에 청년이 했던 행동은 목에 걸린 기적의 패가 있는 스카폴라를 꺼내서 입에 대고 십자성호를 긋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개도 안 아프다.”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 청년에게 스카폴라를 걸어주면서 넘어져서 피가 나고 아플 때마다 입에 대고 기도하라.”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빛을 향해 나아가지만, 문득 우리가 빛을 향해 나아가다가 어떠한 역경과 고난을 겪을지라도 멈추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빛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 혼자만이 흥얼거리는 평화의 콧노래가 나오고, 하루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020년 1월 1일 새해 아침 날에,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을 통하여 주신 생명의 빛과 구원의 빛으로 고운님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새해 1월 1일이면 저에게 아프고도 은혜로운 일이 있습니다. 제가 목포 연동성당에서 사목하고 있을 때, 2007년 1월1일 성모님 대축일에 너무나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 6시 미사를 마치고, 밥을 먹고 있는데, 전기 누전으로 성당 전체가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가 불타는 성당을 앞에 놓고 발을 동동거리며 울고 있었고, 저는 그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원망하고, 통곡하고, 하느님이 이러실 수 있느냐? 고” 50분 만에 100평이 넘는 성당이 뼈대만 남기고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았습니다.
저는 그 순간 “성체는, 성체는….” 그러면서 성당으로 뛰어가는데, 소방관 아저씨들이 말리는데 뿌리치고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뼈대만 남아 있는 성당 안을 보니 울음만 나왔습니다. 그리고 감실 쪽으로 갔는데, 구리로 만든 감실은 다 녹아버리고 없는데 그 밑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가서 뒤져보니 성체가 모셔진 성합이 그대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성합이 그을린 데가 하나도 없었고, 성합을 열어보니 성체도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옆에 소방관에게 "이 불이 몇 도 정도나 되냐?"고 물었더니 800도에서 1400도라고 합니다. 그 뜨거운 불길 가운데서 성체께서 견디어 내신 것입니다.
그 성체를 든 성합을 모시고, 성당 뒤편에 미사 드릴 때 쓰이는 물건이 들어있는 제의방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제의방 위에 있는 2층 성가대. 제의방 옆에 있는 출입구 2, 그리고 제의방 앞에 있는 의자들은 전부 다 타 버렸지만, 제의방에는 불조차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불 속에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1400도 불에서 견디어 내신 성체, 그리고 하느님께 거룩한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미사 도구들이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는 미사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뻤던지 미사 도구를 챙겨서 교육관 2층에 제대를 만들어서 미사를 봉헌하러 갔습니다. 옆 본당에서 소식을 듣고 와서 많은 신자분과 함께 미사를 울면서 봉헌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부와…. 하는데 울음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강론 때 그랬습니다.
“1400℃ 뜨거운 불 속에서 견디시고,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신 성체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불 한 가운데에서 전혀 타지 않은 도구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미사의 기적이 여기에서 봉헌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전까지 울음바다, 통곡의 바다, 원망의 바다였던 그 자리가 은혜의 바다, 축복의 바다, 기쁨의 바다, 웃음의 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옆에 있던 소방관이 “천주교 신자들은 다 미쳤다.”라고 합니다. “자기 집이 불났는데, 저렇게 웃으면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니 이상한 사람들이다.”라고 말까지 합니다. 그 화재 사건으로 인해 쉬는 교우들이 나오고, 사랑과 봉사가 저절로 이루어지고, 밤 기도를 하는데 400명 정도가 나와서 기도해서 믿음이 강해지는 것을 보고 그 본당을 떠나왔습니다. 지금은 불탄 그 성전 자리에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2020년 새해 첫날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1400℃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견디어 내신 성체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제사 지내는 미사의 은혜를 느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고통과 상처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약해질 때 낮아질 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강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2서 12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 기가 막혀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목자가 서둘러 가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서 경배하였듯이, 고운님들도 급히 달려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는 하느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자리가 되고, 고운님들에게는 원래의 은총과 축복의 자리로 회복되어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올 한 해도 저는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약한 것이 강해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평화가 고운님들과 함께...
올 한해 고운님들에게 다가올 고통과 상처, 그리고 어떠한 역경이 오더라도 반드시 미사를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모든 것이 축복으로 바뀌는 은혜를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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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63)
♧♧ 시편 69편 2절….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목까지 물이 들어찼습니다."
여기서 ‘물’은 다윗에게 닥친 절대적 위기 상황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목’은 ‘목숨’ ‘영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구절의 의미는 물이 목까지 차올라와 숨을 쉴 수가 없는 것과 같은 매우 위급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큰 곤란이나 위기에 처한 것을 의미하는데 자주 쓰이는 시적 표현입니다.(욥기 22장 11절, 27장 20절. 시편 18편 5절, 42편 8절, 88편 8절, 124편 5절. 참조)
♧♧ 시편 69편 3절…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발 디딜 데가 없습니다. 물 속 깊은 곳으로 빠져 물살이 저를 짓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한 것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한편 시편 69편의 저작 시기를 아도니야의 반역 때로 본다면(열왕기 상권 1장), 이 구절은 자신의 신복이었던 요압과 에브야타르 사제와 자신의 아들인 아도니야와 모의하여 반역을 일으켜 자신에게 대항한데 대하여 이미 늙고 힘이 없는 다윗이 느끼는 무력함과 절망감을 하느님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시편 69편 4절…
"소리 지르느라 지치고 저의 목도 쉬었습니다. 저희 하느님을 고대하느라 제 두 눈마저 흐려졌습니다."
* 소리 지르느라 지치고 저의 목도 쉬었습니다.
‘쉬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르’의 원뜻은 나무가 불에 타버리는 것 또는 물기가 없이 땅이 메마른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느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다윗의 애절한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을 때, 우리들은 대개 실망하거나 절망하기가 쉽습니다.(이사야서 40장 27절. 참조)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더 하느님을 굳게 의지하는 인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께 부르짖는 이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어 당신께서 응답하시고자 하는 때가 되면 저희의 간구를 들어 허락해 주시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18장 1-8절. 참조)
* 저희 하느님을 고대하느라 제 두 눈마저 흐려졌습니다.
‘흐려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라는 말은 ‘파괴하다.’ ‘완성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파괴하다.’ 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한곳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시력을 상하게 된 것을 뜻하는 말로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다윗의 열정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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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0년 경자년을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주님 안에서 모두가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올해에도 참 많은 일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전 세계의 축제인 일본 도쿄 올림픽이 열리며, 국민을 대표하는 봉사자를 뽑는 중요한 선거인 제21대 국회의원선거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할 일이 많다고 올 2월은 윤달로 29일까지 있지요. 하루를 보너스로 더 받게 됩니다.
이런 새해 첫날, 우리는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기념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떠올리면서 새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몇 달 전에 양치하다가 어렸을 때 해 넣었던 치아 하나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니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말해서 이를 뽑았습니다.
이 하나 뽑는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저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더군요. 뽑고 난 뒤의 통증도 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발음이 새는 것 같아서 말하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말할 때 버벅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게 되더군요. 별것 아닐 수 있는 이 하나 뽑는 것도 이렇게 제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큰일, 특히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부터 일어난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가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영광이라며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의연하게 묵묵히 모두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오늘 복음에도 성모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한 해도 기쁘고 좋은 일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일들도 우리와 함께 공존할 것입니다. 그때 성모님의 모습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해보다도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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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내게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회사의 한 여직원이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재고 파악을 위해 냉동창고에 갔습니다. 그래야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지요. 한참을 재고 조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냉동창고의 문이 닫힌 것입니다.
이 문은 창고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라서 안에 있는 자신은 도저히 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없는지 창고 안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누구 하나 와서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영하 25도, 점점 추위를 참기가 힘들었고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냉동창고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회사의 경비아저씨가 문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극적으로 구출된 이 여직원은 경비 아저씨가 어떻게 자신이 여기에 있는 줄 알았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회사에서 저에게 출퇴근 시간에 유일하게 인사를 해주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분명 오늘 아침에 인사했는데, 저녁에 당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되어서 돌아보다가 냉동창고 안에 갇힌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받을 것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으로는 결정적 순간에 필요한 도움을 받기가 힘듭니다. 평상시에도 베푸는 사랑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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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0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새해를 시작하는 모든 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저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모든 분의 소망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새해에는 만나는 모든 분에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성전의 문에 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If you enter here as a tourist, we are hoping that you would exit as a pilgrim. If you enter here as a pilgrim, we are hoping that you would exit as a holier one(만일 여러분이 여행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3가지 유형의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결심은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싹을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씨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왔지만, 그 이유와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고통과 좌절 앞에 무너지는 사람입니다. 삶의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어렵게 뿌리를 내리지만 가시를 견디지 못하고 시드는 싹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온 이유와 목적은 알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물론 이웃의 십자가도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땅속에서 양분을 얻고, 햇빛을 받아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보다 가난을 택하기도 하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하고, 오래 살기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책에서 보았던 글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Life is no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Life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춤추는 걸 배우는 겁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2020년에도 시련의 폭풍우가 있을 겁니다. 좌절의 바람이 불 겁니다. 고독이 심하게 밀려올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포기하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찾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중하게 여기는 출애굽의 이야기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폭풍우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법을 배웠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는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데서 뛰어 내려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명예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권력의 단맛이 워낙 중독성이 강하기에 거부하기 힘든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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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 받은 우리들!>
-영광과 평화, 침묵과 관상, 찬미와 감사-
축복 받은 우리들입니다. 무지로 눈멀어 불행이지 눈만 열리면 어디나 하느님의 선물에 우리 모두 축복 받은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사랑하는 두 형제로부터 받은 두장의 축복 가득 받은 가족 사진 안의 모습들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축복 가득 받은 모습들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어제의 끝은 오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은 경자년庚子年 2020년 새해 첫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참 가슴 벅차게 축복 가득 받는 날입니다. 경자년은 ‘하얀 쥐의 해’입니다. 흰쥐는 쥐중에서도 가장 우두머리 쥐이자 매우 지혜로워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데 능숙하고 생존 적응력까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20년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새벽 성무일도시 다음 아름다운 화답송 후렴과 찬미가로 복된 하루를 열었습니다.
-“동정이신 모친 마리아를 공경하며, 그의 아들 주 그리스도께 조배 드리세.”-
-“1.이사이 뿌리에서 꽃이 피었고 그가지 보람되이 열매맺었네
동정녀 아기가져 아들났어도 언제나 동정으로 어머니로다
2.빛살을 지어내신 빛의 창조주 구유도 마다않고 누워계시네
일찍이 성부함께 하늘 내신분 아기로 모친품에 안겨 계셨네”-
올해 성탄절과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참 많이 보낸 수도원 왼쪽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조형물이었습니다. 벌것벗었던 예수님을 담요로 싼 모습이 참 따뜻하여 다시 찍어 또 여러 분들에게 다음 축하 메시지과 함께 전송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주님, 성가정의 축복 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기도 역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해마다 바치는 기도지만 부를 때 마다 늘 새롭습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여 주님은 오늘 제1독서 민수기 말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한분한분을 축복하십니다.
-“1.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3.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참으로 새해 첫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축복 가득 받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복덩어리 존재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당신 아드님의 영을 보내 주시어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요,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이, 죄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요 참 자유인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자유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감사의 응답입니다. 복음을 마리아와 목자들처럼 사는 것입니다.
첫째, 영광과 평화입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구유 주변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로 주님 성탄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평화!”
바로 탄생하신 예수님의 존재이유는 물론 우리의 존재이유를 말해 줍니다. 영광과 평화는 구원의 양면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위로 눈들어 하늘을 보면 우선 ‘영광’을 생각하고 아래로 땅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평화’부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받으소서”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진 분도수도자들의 모토도 생각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평화가 되어 살 때 하느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평화의 복을 충만히 내려주십니다.
둘째, 침묵과 관상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침묵과 관상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침묵이요 관상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잘 귀기울여 경청하기 위한 침묵이요 침묵에 이어 관상입니다. 참으로 침묵과 관상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너무나 내면 세계가 얕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깊이와 무게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격적 응답이 아닌 감정적 반응이 먼저 나옵니다. 담아 둘 수 있는 깊이와 넓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침묵과 관상의 모범이, 참으로 바다처럼 크고 깊고 넓고 고요한 내면을 지닌 분이 성모 마리아입니다. 모두가 놀라워 하며 피상적 반응을 보일 때 성모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관상의 모범이,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모범이 성모 마리아입니다. 무엇보다 성모님께 이 침묵과 들음, 관상의 덕을 배워야 합니다.
문득 에코백이 생각납니다. 제가 요즘 외출 때 들고 나가는 것은 가방이 아니라 에코백입니다. 참으로 내면은 에코백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든 이것 저것 다 들어가고 무엇이든 넣기 쉽고 찾아 꺼내기도 쉽습니다. 꼭 큰 보자기처럼, 얼마나 넉넉하고 편한지 모릅니다. 정해진 굳어진 틀이 없고 유연해서 그럴 것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군자는 그릇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릇이란 종지, 사발, 항아리처럼 용도가 정해져 있어 서로 통용될 수 없는 물건을 말합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의 내면이 이러합니다. 군자불기, 에코백처럼 참 넉넉하고 편안한 침묵과 관상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입니다.
셋째, 찬양과 찬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응답이 찬양과 찬미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이요 이에 대한 자연발생적 반응이, 사랑의 응답이 찬양과 찬미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찬미가 있어 겸손입니다. 겸손이야 말로 배우는 학인의 기본 자세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는 물로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사람입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사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맑고 밝은 순수한 기쁨의 찬미는 내적 활력의 원천입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아니 총체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부자였습니다.
정말 에코백같은 내면의 부자가 목자들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축복받은 목자들입니다. 모두가 잠든 밤, 맨처음 깨어있다가 예수님 탄생의 축복 소식을 들은 목자들이요, 다시 주님의 성가정을 방문해 예수 아기와 예수님의 양친 마리아, 요셉을 친견親見의 축복을 받은 목자들입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가 목자들의 기쁨을 압축 요약합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얼마나 아름다운 뒷모습인지요! 마침내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라는 이름의 구원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대로 우리의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대신하여 고백합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하여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큰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에코백이 상징하는 것처럼 내면은 참으로 넉넉하고 편안했으면, 너그럽고 자비로웠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강론을 통해 그 답을 주셨습니다. 바로 1.영광과 평화의 사람, 2.침묵과 관상의 사람, 3.찬미와 찬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새해 첫날 여러분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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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해 첫날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제 오늘,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달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미사참례에 오신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의 복의 전달자가 되실 것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가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 해는 세속적인 복을 찾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주어져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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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말씀과 함께 새해를 엽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이 여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대히 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십니다.
제게는 축복이 가득한 새해 첫 날의 말씀들이 일제히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인 "기도"를 향하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마리아의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처음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천사의 "인삿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하셨지요.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속으로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품으셨습니다. 부산하게 말씀을 헤집거나 흩어버리지 않고 그저 침묵 가운데 곰곰이 머무르십니다.
<말씀에 머물러 되새기는 기도>는 말씀이신 분의 현존 안에 온전히 잠기는 기도입니다. 다가오신 말씀을 온 존재로 품다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머리가 아니라 영혼이 감지합니다.
말씀이신 분의 정감이 내게 스며들어 당신을 드러내시면, 이내 문자는 사라지고 문자 안에 감추어졌던 주님의 속성, 주님의 마음이 만져집니다. 그 주님과 하나되어 일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기도입니다. 이때는 무얼 바라거나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지도 않지요. 그저 그분과 사랑 안에 잠겨 사랑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다음은 <축복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백성을 위해 축복을 명하십니다. 타인을 축복하고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직무 사제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아니 하느님의 모상인 모든 사람의 권한이고 의무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하여 대화할 때 우리 시선이 자신의 욕망과 안위에만 고착되어 있지 않고 타인의 선과 유익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도 진심으로 염려하고 응원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참 흡족하시겠지요. 축복의 기도는 축복하는 이와 축복을 받는 이, 아버지를 동시에 행복하게 만듭니다.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성령께 내어맡기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신 성자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현존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성부 하느님을 향해 힘껏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그 영과 하나 된 우리도 함께 아버지를 부릅니다.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호의가 아니면 우리 힘으로 꿈꿀 수 없는 은총이지요.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사도 바오로는 성경 다른 곳에서도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어떻게 도와주시고 이끄시는지 알려 줍니다.
살다 보면 주님 앞에서 무얼 청해야 할지, 무슨 말씀은 드려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순간도 닥치게 됩니다. 이제껏 청한 내 간구가 과연 아버지의 뜻에 맞는 기도였는지 성찰하게 되면서 갑자기 길을 잃은 듯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내 안의 성령께 그냥 맡겨드리면 됩니다. 내 안의 성령께서는 내가 원하는 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정확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자유로이 기도하시도록 방해꾼인 내 자아와 욕망은 잠잠해져야 합니다.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루카 17,17)
매우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목자들의 말과 행동은 순박한 믿음에서 우러납니다. 소박하고 단순한 그들은 이 엄청난 신비의 증인으로 채택된 것에 대해 우쭐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들은 바를 보기 위해 서두릅니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기 위해서"(관상)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가늠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확인 차원이 되어서도 안 되고, 교만의 근거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기도는 그저 믿음이 지시하는 바를 보는 것입니다. 봄! 관상은 우리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게 기꺼이 열어보이시는 은총입니다.
"목자들은 ...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20)
목자들은 들었고, 찾아냈으며, 들은 말을 알려 줍니다. 선택된 증인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지요. 자기들의 몫을 다한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자기들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목자들이 돌아간 제자리는 이전과는 다른 목장, 목초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그곳에 찬미와 찬양이 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의 결과를 외부에서 찾다가 실망하기 일쑤지만, 실상 기도는 기도하는 이의 내면에서부터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바를 본 영혼은 더이상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기도 자체, 봄 자체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루카 2,21)
이 이름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가 각각 알려 준 바 있습니다.(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는 "주님께서는 구원하신다"는 뜻의 히브리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천사의 전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성자의 소명이 그 이름 안에 각인된 것입니다. 기도는 비록 침묵이나 머무름처럼 정적이더라도 이루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품는 그 자체에 완성이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사 말씀들 곳곳에 묻혀 있는 기도의 보물들을 두서없이 꺼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또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올해 우리를 축복 가득한 기도의 곳간으로 이끄시는 듯합니다. 말씀이 기도로 이끄시니 그저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말씀사랑 벗님! 올 한해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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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가치’ 있다고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에 기대를 거신다. 하느님은 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고뇌, 두려움,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의혹, 마음의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 개입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바깥에서 변화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잠재력을 일깨워 일으켜 주시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가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한편 기드온(판관 6-8장 참조)은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 낮은 자존감, 약함, 가족 내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경험한다. 매우 아름답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 활동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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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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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새 종이 그림>
"그 이름 예수"
2020 새 날 새 아침!
깨끗한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지난해 마지막 밤
어둠을 안고 잠들었다 하더라도
과감히 버리시고
새로 그림을 그리도록
새 마음 주신 예수님과 그려 나갑시다.
틀릴까봐
너무 잘하려고 마음먹다가
시작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용기내서 시작하십시오.
틀리고 어그러진 것조차
아름답고 멋진 인생으로
가꾸어 주시는 그 이름 예수와 함께
굳건히 당당히 첫 장을 폅시다.
"인생의 무대에서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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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신
분이십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의 일이
펼쳐집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이 여정을 기쁘게
걸어가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낳으시고 기르십니다.
사랑의 신비이며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의 이 여정은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끝까지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말씀을 믿으셨기에
십자가 곁에서도
꿋꿋하게 계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은
마리아를
순종의 여인이
되게 하며 드디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가는
가장 행복한 새해이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말씀을 받아들인
마리아에게
탄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한 여인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신 믿음의
어머니십니다.
교회는 그 길을
따라갑니다.
새 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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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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