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제5강좌 :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로 끝나는가?
문학을 흔히 언어예술이라고 합니다. 음악·미술·조각·무용·건축 등 예술의 다른 분야와 달리 문학만이 언어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미술·조각·건축이 공간을 차지하는 공간예술임에 반해 문학은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습니다(책은 부피가 그리 크지 않으니까요). 또 음악이 연주를, 무용이 공연을 전제로 하는 시간예술임에 반해 문학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도 다른 점입니다. 문자로 적힌 것이라 틈날 때 읽을 수 있고, 10년 뒤에 읽을 수도 있고, 외국어로 번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의 언어가 있습니다. 지시어와 함축어가 그것입니다. 지시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이나 법령은 반드시 지시어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언어를 다른 말로 과학적 언어라고 하지요. 법조문이 지시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애매한 표현이 있어 자구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면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의 언어는 가급적이면 함축어를 써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지시어는 머리나 이성에 의존하지만 함축어는 마음이나 감각에 호소합니다. 박남철의 詩「언젠가 태양의 바다」에서 함축어를 제일 많이 쓰는 이는 역시 시인입니다. 언어와 사물이 1:1의 관계가 아니라 1:多의 관계를 시인은 지향하지요. 알 듯 모를 듯한 말, 행간에 숨은 뜻이 있는 말, 해석의 여지가 풍성한 말이 문학적인 말(언어)입니다. 그와 아울러 시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입니다. 시는 언어를 구사하되 일상적인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 모순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현대에 들어 점차 가속화되어 언어를 거부하거나 언어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기도 합니다. 시에 사진·그림·만화·악보·화학방정식 등이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시의 언어와 소설의 언어는 꽤나 다릅니다. 시의 언어, 즉 시어는 축소지향의 언어입니다. 한 마디의 말에 여러 가지 뜻을 담고자 애를 씁니다. 정원사가 잔가지를 쳐내어 나무를 더 잘 자라게 하고 보기 좋게 하듯이 쓸데없는 말을 줄이는 것이 시를 쓰는 과정이지요. 앙상한 가지만으로 깊은 뿌리와 무성한 잎까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시가 됩니다.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에 살을 자꾸만 붙여, 앞 절에서 말한 구체성·사실성·개연성을 추구합니다. 확대지향의 언어, 즉 산문이 소설의 언어가 되는 것이지만, 소설도 때에 따라서는 함축적인 언어를 써 축소를 지향할 때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물과 물상을 다 껴안고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말)가 없으면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고, 언어를 통한 인식이 없이는 사물과 물상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언어가 존재를 존재케 한다는 뜻이지요. 언어가 존재를 존재케 한다? 어렵습니까? 말이 있어야 모든 사물과 물상의 존재가 가능하며,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에서 끝난다는 말을 하고자 저는 이때껏 말을 비비꼬아 했나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학에서도 말의 파괴현상이 위험수위를 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이, 비어와 속어가, 외래어와 전문어가 넘쳐나는 것이 문학의 언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김영랑과 김소월, 백석과 만해, 윤동주와 이육사의 시가 지금까지도 국민적인 애송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시는 우리말로 우리 정서를 표현했기 때문이지요. 소설 중에서도 우리말이 풍성한 작품이 많습니다. 김유정의 단편들,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김주영의 『객주』, 몇 년 전에 작고한 김소진의 소설, 젊은 소설가 전성태의 작품…….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에서 끝난다는 점을 누구보다 확실히 가슴에 새기고서 작품을 썼던 우리 문학의 보배로운 존재들입니다.
제6강좌 :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은 다른 것인가?
순수문학론은 문학이 정치나 이념과 상관없이 순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뼈대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적인 가치가 가장 중요하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문학론이 순수문학론의 핵심입니다. 90년대 초까지 진행된 우리 나라 순수·참여 논쟁, 혹은 민족·민중문학론은 그런 대로 점잖고 건강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논쟁이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어 순수와 참여간의 줄다리기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그 대신 대중문학이 순수문학을 뒷전으로 밀쳐내고 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중문학이 순수문학에게 강펀치를 먹이고, 순수문학은 그로기 상태가 되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대중이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엘리트의 반대말인 것은 알겠는데 워낙 포괄적인 개념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계층은 크게 나누어 무학문맹층, 한글 해독이 가능한 저학력층, 영세상인층, 고졸학력 고정봉급자, 자유업자, 고학력 지식인층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것이 온전한 분류법일 수는 없습니다. 이 가운데 대중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지금 사회구성체론을 공부하고 있지 않으므로 곧바로 대중문학 속으로 뛰어듭시다.
문학작품을 평가할 때 흔히 창조적 정신, 진실의 발견, 진정성의 추구 등을 운위합니다. 역사적으로 문학이 대중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 우리는 대중문학-본격문학, 통속문학-순수문학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순수문학 혹은 정통문학은 문학의 진정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대중문학 혹은 통속문학은 상업주의문학이므로 가짜요, 수준 이하요, 저급 문학이요, 장삿속으로 쓰고 출판한 문학일까요? 일단 90년대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봅시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과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은 역사적 인물의 신비화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독자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충분히 주었습니다.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은 신데렐라 풍의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환상성을 결합한 작품인데, 남성 우월주의를 재생산한 문제 있는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남북한 핵 공동 개발과 일본 침략이라는 기본 줄거리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엮어 국민의 반일감정에 호소한 소설인데, 황당무계하기가 환타지 소설 뺨치는 작품입니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역사소설에 추리소설의 요소를 가미한 작품으로, 젊은 작가의 방대한 자료 섭렵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놓고 몇 명 사학자가 딴지를 건 작품이었다고 기억되는데, 논문이 아닌 소설이 꼭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김정현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과 권위가 강조되는 가부장제라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절대적인 선(善)을 눈물로 강요한 작품입니다. 이들 책은 수십 판을 찍었지만 순수문학 진영 작가의 작품집은 상대적으로 판매 부수가 뚝 떨어진 것이 90년대의 출판계 현황입니다.
90년대 대중문학의 대약진은 대중문학의 순기능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대중문학 작품을 쓰는 이들은 주장합니다. 그들은 재미와 위안을 주는 대중문학, 즉 소일거리도 되고 문화적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는 소설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잘 팔리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또한 출판사도 살아야 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팔려고 드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문학이 오락의 기능을 다해 일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면 그 나름의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니냐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이 논리는 출판사들이 앞을 다투어 신문지면을 통한 소설 광고에 나서게 했고, 문예지는 관련 있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자의 홍보지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문학상도 상업적인 계산을 하여 주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한술 더 떠 대형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하여 사재기를 하는 추태를 연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면 독자는 남들이 읽으니까 나도 읽어야지 하면서 사는 경향이 있거든요. 지난 몇 년 동안 사재기를 통해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한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표면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순위 조작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로 드러난 적이 있었지요. 2001년에 마침내 출판협회가 출판사 두 곳을 협회에서 제명하는 초강수를 사용했습니다. 대중문학 작가를 자처한 소설가 이용범은 자신의 소설 『열한번째 사과나무』가 사재기한 책이라는 협회의 주장에 직면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중소설은 영웅주의, 감상주의, 오락성, 현실도피성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 (…) 대개 엘리트 집단은 대중문학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고, 타락한 작가들이나 쓰는 소설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선은 이미 지워져가고 있다. 요즘 문예지에 발표되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스토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멜로드라마이거나 비현실적인 변설과 가벼운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소설에는 아무런 감동도 없으며, 겉멋과 치기만이 '문체'라는 포장지에 가려 있을 뿐이다. (…) 상업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비평가들이다. 그들은 특별한 보수 없이도 출판사나 잡지사에 전속되어 상업적 이익에 봉사한다. (…) 본격문학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문학 엘리트들이 내동댕이친 대중문학이라는 가시관을 기꺼이 내 머리 위에 얹을 것이다. 나는 비평가들을 향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용범은 너무나 당당하게,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에는 대중문학을 향해 비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뼈에 사무친 항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여 무조건 그 문학이 훌륭하다는 그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음 절에서 대중문학론자와 순수문학론자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