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정조 10년) 9월 27일, 전라도 유학 김익현 등이 충장공 정분을 충렬사에 모셔 달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에 정조임금께서는 "충장공 정분을 충렬사에 배향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 제사)하게 하라."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1788년(정조 12년) 10월, 충장공이 충렬사에 배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연기(燕岐) 문중의 정홍달 등은 "어떻게 근본도 알 수 없는 인물의 사당에 우리 조상인 충장공을 모실 수 있단 말인가!"라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충장공의 후손 관계를 다시 조사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조정에서 정홍달의 상소 내용을 정조임금에게 보고하고, 연기 문중의 요청을 받아들여 충장공의 진짜 후손이 누구인지 명확히 재조사하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아래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국조보감》 등 조선 시대 국가가 편찬한 4대 정사(正史) 중 하나인《일성록》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연기 유학 정홍달이 올린 상소를 정조임금께 보고하다
燕歧幼學鄭弘達先世卞正事
연기의 유학정홍달이 선대의 계보를 바로잡아 달라는 일이다.
燕歧幼學鄭弘達上言以爲
"연기의 유학 정홍달의 상언에,
其先祖故相臣苯無子
‘선조 고 상신 정분(鄭苯)은 자식이 없어서
以從兄之子之產立爲後
종형의 아들 정지산(鄭之産)을 후사로 세워서
自是以來世守宗緖
이로부터 대대로 조상의 유업을 지켜왔습니다.
有晉州人鄭重權等
그런데 진주 사람 정중권(鄭重權) 등이
稱其九世祖遵爲苯所生
9대조 정준(鄭遵)을 정분의 소생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故渠家起訟嶺營
그의 집에서 영영(嶺營, 경상감영)에 송사를 일으키자
道臣査得鄭遵親父仁德之名
관찰사가 정준의 친아비 이름이 정인덕(鄭仁德)임을 조사해 내어
刑配重權於慶興矣
정중권을 경흥(慶興)에 형배(刑配,유배)하였습니다.
長興人鄭奎煥者
그런데 장흥 사람 정규환(鄭奎煥)이
僞造磁器誌文
자기(磁器)로 된 지문(誌文)을 위조하여
埋其遠祖之墳
먼 조상의 무덤에 묻어놓은 뒤에
請官掘出
관아에 파낼 것을 청하였는데,
以其九世祖鄭光露卽是苯之子
9대조 정광로를 바로 정분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大抵假托粧撰都不成說
대개 가탁(假托)해서 지어낸 것이 전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故起訟完營則
완영(完營, 전라감영)에 송사를 일으키니,
奎煥潛入京師
정규환이 경사(京師,한양)로 숨어들어
遍謁搢紳誇示僞誌
조정의 사대부들을 두루 찾아뵙고서 거짓 지문을 과시하여
遽至筵白
갑자기 연석에서 아뢰기에 이르렀고,
再昨年奎煥之族奎應上言
재작년에는 정규환의 족속 정규응(鄭奎應)이 상언하여
請以苯配享於渠祖鄭名世之私祠
정분을 그의 조부 정명세(鄭名世)의 사사(私祠,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여
至有賜祭之擧矣
사제(賜祭)한 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伏乞行査得實
부디 조사하여 사실을 캐내어
使倫紀不忒云矣
윤리와 기강이 어긋나지 않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母論彼此曲直
피차의 진위(眞僞)을 막론하고
其爲傷倫紀關風化則大矣
윤리와 기강을 손상시키고 풍속과 교화에 관계됨이 크니,
令兩道明査
양도(兩道)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해서
指一決處之意
하나로 결론지어 처리하게 하라는 뜻으로
請分付該曹
해당 관아에 분부하기를 청하니,
從之
(임금께서)그대로 따랐다.
정조임금의 명을 받아 한 달여간 재조사를 진행한 형조는 장흥 정씨가 정분(鄭苯)의 직계 후손임이 확실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정광로의 묘지석과 《국조보감》 기록을 통해 장흥 정씨가 정분의 혈손임이 이미 증명되었고, 후손을 등용하라는 왕명까지 내려진 사안인 만큼 정홍달이 다시 제기한 적통 문제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당시 형조의 판결문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정조 12년 1788년 09월 29일
▶일성록 제279권>정조 12년 1788년 9월 29일
형조(刑曹)의 판결문(判決文)
刑曹判書 李秉模啓言
형조 판서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因燕歧幼學鄭弘達上言
“연기의 유학 정홍달(鄭弘達)이 올린 상언으로 인하여,
其先祖故相臣 鄭苯宗泒卞別事
그의 선조인 고(故) 상신(相臣) 정분(鄭苯)의 종파를 밝혀 바로잡는 일에 대해
[禮曹以自臣曹指一決處之意覆啓蒙允矣
예조에서 “형조가 단일하게 결론을 내어 처결하라”는 뜻으로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取考公私文跡則
공사(公私)간의 문적(文跡)을 가져다 살펴보니
燕歧之鄭與晋州之鄭
연기의 정씨와 진주의 정씨가
曾以此事訟于嶺營
일찍이 이 일로 영영(嶺營,경상감영)에 소송을 하여
兩皆見斥矣
양쪽 모두 물리침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往在乙酉
지난 을유년에
長興人鄭奎煥因他山訟
장흥 사람인 정규환(鄭奎煥)이 다른 산송(山訟)으로 인하여
自官掘見其九代祖光露墳誌石則
관가에서 그 9대조 정광로의 무덤 지석(誌石)을 파내어 보게 되었는데,
光露以故相之子
정광로는 고 상신의 아들로서
匿跡逃命仍以泯沒
자취를 숨기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쳤다가 그대로 묻혀 잊혀졌으므로
爲子孫者亦不知其爲故相血孫
자손된 자 또한 그가 고 상신의 혈손(血孫)인지 몰랐다가
誌石出後始乃知之呈于禮曹
지석이 나온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어 예조에 바쳤고,
筵臣以此陳達
연신(筵臣, 경연에 참석한 신하)이 이 사실을 가지고 임금께 아뢰어
至有錄用之命
벼슬에 등용하라는 명령까지 내리시어
載在國朝寶鑑則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실려 있은즉
不待推卞無容更議
그러니 사실을 따져서 가려낼 필요도 없고 다시 의논할 여지도 없는 일인데,
今此弘達之追提已定之案
이제 정홍달이 이미 결정된 안건을 뒤늦게 다시 꺼내어
復事煩籲極爲猥越
다시 번거롭게 호소하였으니 너무나 외람됩니다.
請勿施自臣曹勘處
시행하지 마시고 본조에서 직접 알아서 단속하고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
니,
從之
(임금께서)그대로 따랐다.
형조의 판결에 불복한 연기 문중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다시 조정에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주장을 거듭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관한 상소문과 형조의 판결문은 다음 기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