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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에서의 사역
사도행전 19:1-10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1-10 / [에베소에 간 바울]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은 아시아 지방을 거쳐서 에베소에 닿았다. 거기서 몇 사람의 제자를 만나자 바울은 2)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니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성령이 무엇입니까?' 3) `그렇다면 여러분은 침례를 받을 때 어떤 신앙고백을 하였습니까?' 바울이 다시 묻자 `침례 요한이 가르친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그러자 바울은 요한의 침례는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의 침례를 받은 사람은 요한이 말한대로 나중에 오신 예수를 믿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곧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6) 바울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7) 그 자리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8) 바울은 석 달 동안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담대하게 설교하며 그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왜 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설득하는가를 알려 주었다. 9)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거부하고 공공연하게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말을 떠들어댔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는 설교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회당을 떠났다. 그리고 신도들을 데리고 두란노의 강당에서 별도의 집회를 열고 날마다 거기서 설교를 하였다. 10)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아시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다 주님의 복음을 듣게 되었다.
에베소 교회가 성령 세례를 받고, 바울이 두란노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합니다.
그들에게 안수하매(1-7) 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어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에 성령이 있음을 들은 적이 없으며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같은 대답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신앙관은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가졌던 신앙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아볼로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했거나 또는 아볼로로부터 직접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기독교인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제자’라는 말을 그들에게 사용한 것은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도 믿음과 신앙 지식의 분량에 따라 여러 단계가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은 아직 기독교인의 초보적인 수준도 되지 못하는 매우 유약한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을 만남으로 인해 영적으로 성숙한 기독교인들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영적 성장에는 올바른 교사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날마다 강론하니라(8-9) 바울리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서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는 회당의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으며 무리 앞에서 공공연하게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를 비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굳어”라는 말은 ‘완고함과 강퍅에 내버려두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먼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가지고 말씀을 들을 귀를 막아서 복음을 거절하는 소극적인 단계로부터 공적으로 복음을 비방하는 적극적인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복음의 대적자들이 갖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바울은 약 3개월 동안 회당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다가 결국 그들의 방해를 피해 두란노 서원으로 복음의 증거의 장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 절을 통해서 혹시라도 말씀을 꺼리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신앙의 위험 신호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0:17).
주의 말씀을 듣더라(10) 바울이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증거한 결과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주의 말씀을 듣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증거 받은 사람들이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약 3년 동안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루커스 계곡에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소아시아에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적 용 : 복음은 살아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문을 열고 겸손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를 변화시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리고 거대한 철도 왕국을 이룩한 철도 사업가가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가장 실패한 자의 손을 잡고 있구나.’그러자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위대한 철도 왕국을 건설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했을 뿐 아니라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이셨잖아요.’ 그때 사업가는 ‘아들아, 결코 그렇지 않단다. 그 일을 하는 동안에 난 그리스도를 멀리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모든 사람은 다 실패자들인 것이다.’
< 설 교 >
성령 충만을 받으셨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7절
우리는 축복받고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 꿈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날 때부터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래도 누가복음 3장 22절 말씀을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미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았어도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다시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 승천하실 때에도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려면 반드시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사역을 하다가 에베소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만나서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궁금해서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에 그들을 담임했던 분은 아볼로였는데, 아볼로는 학문과 구변은 뛰어났지만 예수님과 복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백성들에게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며 그 뒤에 오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해주자 저희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숫자에 대해서 사도행전 19장 7절에서는 12명쯤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 충만치 않으면 일꾼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대의 유명한 연설가인 아볼로가 목회해도 12명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 충만하게 되면 그때부터 은혜와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의 철학과 성경 원어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꿈을 품고 신대륙에 가서 조지아 주에서 목회를 했는데 3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사실상 목회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의욕이 떨어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8시 24분에 모라비안 교도의 조그만 교회에서 참석해서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전과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해도 그가 가는 곳마다 교인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웨슬레로 인해 세계 최대의 교단인 감리교회가 생겼습니다.
< 성령 충만한 삶의 능력 >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원자의 핵과 같습니다. 핵은 작은 입자지만 그 안에 무서운 폭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연약한 존재라도 성령 능력이 임하면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령 충만할 때 어떤 능력이 생길까요?
1. 자신의 외면을 극복하는 능력
성령 충만하면 겉모습은 똑똑하지 않아도 똑똑한 삶을 살고, 겉모습은 부자가 아니라도 부요한 삶을 삽니다. 그처럼 성령 받은 자에게는 외면의 부족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은 똑똑한 사람이나 소유가 많은 사람보다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 제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를 뽑을 때 주로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지금이니까 그 제자들이 우러러 보이지만 옛날 같으면 3류 인생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까지 목수인데, 당시 23등급의 직업 중에 19번째 가던 직업이 바로 목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불학무식한 사람이 수제자라고 하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장로들이 볼 때는 정말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행의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일행이라고 보겠습니까?
당시 예수님 일행의 몰골을 생각하면 외적으로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게 되자 그들은 엄청나게 쓰임 받았습니다.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약한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 곳에서 임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게 성령의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외모에 많이 신경을 씁니다. 물론 외모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머리를 수세미처럼 하고 다니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외모 지상주의에 빠지거나 외모로 남을 무시하는 마음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외모로 인해서 지나친 열등감에 빠지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외모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생각하고 넉넉한 믿음으로 외모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살면서 받는 상처가 오히려 유머의 소재가 됩니다. 그때에는 어떤 말도 넉넉하게 소화할 수 있는 영적 소화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언제 그런 믿음과 사랑이 넘치게 됩니까? 성령 충만하게 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2. 자신의 내면을 극복하는 능력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내재하는 자기 파멸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자기 파멸의 씨앗이 싹을 내면 그 일을 집어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기 파멸의 씨앗이 싹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자기 극복 능력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저 그 사람과는 절대로 못 살아요.” 그러면서도 사단과는 얼마나 잘 사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사단’과는 잘 살면서 ‘사람’과는 못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함께 못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움직여야 하고, 배우자를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남편 때문에 못산다! 아내 때문에 못산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신 때문에 못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은 모르고 남이 못하는 것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나를 지배하려고 해야 합니다.
■ 옛날에 한 농부가 송아지 뿔이 바로 나라고 매일 송아지 뿔을 때리니까 결국 송아지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억지로 고치려고 하면 가정이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 100% 불행한 사람도 없고 100% 행복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자기 파멸의 씨앗을 성령의 권능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천성이 있습니다. 그 천성 중에는 나쁜 천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성도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좋은 방향으로 잘 이끌 수 있습니다. 사실 믿는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잘 살고 있지만 반대로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곤고한 상태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불평과 원망과 상처가 많고, 남 탓도 참 많이 합니다.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얼마든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신앙이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참을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나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평안과 기쁨과 해방감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 있는 삶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성령 충만함이 없으면 그런 삶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3.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살다 보면 어려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찬양하면 언젠가 꿈같은 축복의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성공이 꼭 선은 아닙니다. 진짜 선은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침묵을 대하고 답답한 마음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까? 왜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 선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까? 반대로 왜 악인들이 저렇게 잘 될까?” 가끔 그런 현실을 목격하면 때로는 야속하고, 답답하고, 실망도 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꼭 거절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삶에서 가끔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와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위기란 위험 속에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위험 속에서 오히려 더 드러나고 더 전진합니다.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역경도 축복으로 변하고, 갈등도 성숙함으로 변하게 됩니다.
부부싸움을 해도 결코 선을 넘지 않고, 말을 절제하고, 곧 화해를 모색하며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더 성숙해지는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부부싸움조차 더욱 큰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드러내고, 갈등 중에서도 사랑을 만들어내고, 역경 중에 더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평온할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유라굴로 광풍으로 며칠 동안 시달리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자 그때 나타나 “여러분! 안심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든 환경에서도 믿는 사람답게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갈릴리 시골 청년들이 예루살렘을 뒤엎고, 나중에는 신앙으로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행동에 자신감도 생기고, 언어 속에 확신도 생기고, 무서운 추진력도 생기고, 어떤 나쁜 평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고, 진정한 행복도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행위와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성령 충만함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4. 환상을 가지고 미래를 대처하는 능력
성령은 꿈을 꾸게 합니다. 꿈이 있는 한 사람은 꿈이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합니다. 모세가 꿈을 가지고 출애굽을 하니까 모든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평했지만 결국 모세 한 사람이 그 민족을 살린 것입니다. 회사를 보면 기업을 일으킨 한 사람의 힘이 불평하는 모든 사원의 힘보다 셉니다. 왜 그렇게 힘이 세게 됩니까? 그가 가진 큰 꿈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령 안에서 꿈을 꾸면 지혜도 생깁니다. 사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싶으면 그 지혜도 구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정당하게 벌면서도 돈을 버는 길을 신기하게 찾아가는 것을 봅니다. 돈을 벌려면 무작정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돈을 버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잘 벌기 위해서 먼저 잘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국내에 10번째 안에 드는 유명한 여행사에서 온 문자 메시지인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태국 푸켓! 폭탄 세일 4박 5일에 99,000원”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여행사라면 “사기일 수도 있겠구나!”하고 지나치겠지만 유명한 여행사이기 때문에 사기 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상식으로는 그 금액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길을 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익을 올리는 길이 있고, 미래를 위한 투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런 사람들이 돈을 법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수익을 내는 길을 정교하게 찾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업을 해도 무작정 하지 말고 기도하며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정복할 수 있는 정교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정교한 길도 보여주실 것입니다. 저도 새벽에 무릎을 꿇으면 그날 하루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꿈은 너무 원대하고 찬란한 꿈입니다.
얼마 전 한 동료 목사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 사이트는 한국 목사님들 사이에는 유명한 브랜드 네임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더욱 큰 도전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이한규의 사랑칼럼’이 최고의 영적 브랜드 네임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칼럼이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이 자살을 포기하고, 절망했던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브랜드 네임으로 발전하길 소원합니다.
또한 저의 궁극적인 비전인 CMA 선교사 훈련학교가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미션센터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들께서도 작은 오병이어의 헌신을 해주십시오. 누군가 한 사람이 헌신하면 헌신의 연쇄작용이 일어나서 꿈과 같은 열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도 누군가 한 사람의 헌신으로 영적 수류탄의 뇌관을 터뜨리면 역사는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선교사가 어느 시점보다 더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미국 CMA는 120년의 선교 노하우를 가지고 훌륭한 선교사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노하우를 한국에 잘 착근하면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교자원국가가 될 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꿈과 그 꿈에 드린 땀과 정성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꿈을 주시고, 거룩한 꿈을 이룰 지혜도 주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대표적인 표시는 꿈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파멸의 씨앗을 자꾸 뿌리지 말고 꿈의 씨앗을 자꾸 뿌려야 합니다. 성령이 주신 꿈과 환상이 있어야 신비로운 인생이 펼쳐지게 됩니다. 꿈이 새롭게 되면 사람도 새롭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도 뚜렷한 꿈이 없으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주시는 환상의 안경을 쓰면 꿈과 목표가 분명하게 됩니다. 기도 시간은 꿈을 날카롭게 다듬는 시간이고, 예배 시간은 절망을 팔고 꿈을 사는 시간입니다. 믿음은 현재의 현실이 어떻든 그 현실 속에서 내일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찬란하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
결론적으로 성령 충만은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는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업과 자녀의 문도 열리고, 건강과 물질의 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 충만함을 주실 것입니다.
■ 부산에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하시는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새벽 네 시에 가족들을 깨워서 먼저 가족 새벽기도를 하고 나서 새벽기도에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전 가족을 깨워서 찬송을 했습니다.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주소서...” 그렇게 한참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찬송을 하는데 사모님이 갑자기 쿵 하고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목사님이 흥분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가 열심히 성령을 구했더니 드디어 너희 어머니에게 성령이 임하여 입신하셨다. 너희들도 준비해라.” 그리고 계속 찬송을 했습니다. 조금 후에 큰아들도 쿵 하고 넘어졌습니다. 곧 이어서 작은 아들도 입신했고, 나중에 목사님까지 입신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에 안 나타났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항상 정확하던 목사님이 왜 안 나타나나?” 그래서 권사님이 급히 사택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새벽기도 시간이 되었어요.” 그런데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모두 쓰러져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성령이 충만한 것이 아니라 연탄가스가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성령 충만함을 추구하다가 목사님이 진짜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사가 바로 지식의 은사와 사랑의 은사였습니다. 원래 그 목사님은 혀가 짧았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설교를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짜증이 나고 교회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어느새 알고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집사님! 안녕하세요? 왜 연약한 교회를 버리고 도망하려고 합니까? 도망가면 안 됩니다. 믿고 갑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년쯤 되서 정말 못 견딜 것 같아 또 옮기려고 하면 목사님이 어느새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집사님! 안녕하세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더해져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혀가 짧아도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있으면 길은 열릴 것입니다. 성도에게 성령 충만이 없는 신앙생활은 불 없는 화로이고, 열매 없는 나무이고, 물 없는 웅덩이입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삶을 원하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 마음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로워지면 습관이 새로워지고, 습관이 새로워지면 운명과 인격조차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 전쟁 중입니다. 끊임없이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 마귀를 사람 혼자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막는 힘인데 그 힘이 어디에서 생깁니까? 바로 성령 충만함을 통해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보다 가장 급선무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만 들어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의식이나 훈련이나 종교의 운동이 아니고 성령으로 인한 생명 운동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성령의 바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바람의 진원지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