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동 풍산김씨의 역사와 도림추원사|宗家 世居地 集姓村 姓氏
豊山 金氏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을 본관으로 하고 있으며, 풍산읍 오미동(五美洞)은 이들 문중이 오백년 간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다. 남쪽으로는 검무산(劍舞山)을 바라다 보고, 동쪽으로는 아미산(峨眉山)이 내려와 아늑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어 한눈에도 이곳이 명당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에도 기와집이 10여채 남아있어 전통시대 위세 있던 동성반촌임을 짐작 할 수 있다.
풍산김씨 15세손인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가 지은 추원록(追遠錄)1)에 따르면 ‘김씨는 풍산이 본관인데 그 어디에서 풍산으로 왔다는 말이 없다. 대개 신라가 망한 후 왕족인 김씨들이 여러 고을에 흩어진 이후 각지의 土姓이 되었는데, 혹 말하기를 우리 김씨도 그렇다고 하나 이는 확인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즉, 언제부터 풍산을 본관으로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은 셈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 때의 판상사(判相事)를 지낸 김문적(金文迪)을 1세(世)로 모시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문적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예라는 설이 있는데 이 역시 확인할 길은 없다. 김응조는 추원록에 ‘시조는 족보에 실려 있지 않아 알 수 없다’라고 하여, 풍산김씨의 근원과 시조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음을 전제한 후 기타 전해오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김문적을 처음 시조로 인정한 것은 임인보(壬寅譜)2)로 그 범례에 따르면 ‘추원록의 기록에 의거하여 판상사공을 1世로 한다.’ 라고 하였는데, 아마 추원록에 기록된 전해오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여 김문적을 시조로 모시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김문적은 묘의 위치조차 전해지지 않으며, 그의 사적 또한 구체적으로 전하여지지 않는다.
오미동과의 인연에 관해서는 현재 세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허백당세적(虛白堂世蹟)3)에는 두가지 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4세 김연성(金鍊成)이 경주에서 현재의 풍산 오미리에 별도의 집을 두었다’는 설과 ‘연성의 아들인 5世 합(盒)과 그의 아들 삼형제 대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송도(개성)에 살던 士族(사족)들을 한양으로 강제 이주시키매 이때 한양으로 옮겨 와서 장의동에 살았다’라는 설이 실려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서주석선생이 쓴 「안동지역 씨족 정착과정」에 ‘풍산김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김문적의 증손자인 4世 김연성이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찬성사를 지냈는데 후에 풍산 석릉촌(石陵村)4)으로 집을 옮기면서 오릉동(五陵洞)에는 별채을 두었고 이후 그의 아들인 5世 합이 진사로 지숙천사(知肅川事)가 됨에 다시 상경하였다’5)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를 종합하여 유추해 보면 아마도 풍산김씨는 경주에서 세를 이루며 살다가 고려왕조의 관리로 나아감에 따라 송도로 진출하게 되었고, 4세 연성 때 오미동에 별채를 두면서 처음 터를 잡았으며, 5세 합이 다시 송도로 진출하며 잠시 비워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가 망하면서 한양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 장의동에 터를 잡으면서 동시에 별채가 있던 오미동에도 따로 관리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풍산김씨와 오미동의 첫 인연을 이것만으로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아마도 4세 연성과 5세 합이 살던 시기 어디쯤 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겠다.
현재의 오미동과 명확하게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은 8世 김자순(金子純)대에 이르러서이다. 김자순은 김안정의 둘째 아들로 형인 자량(子良: 호는 한죽헌(寒竹軒),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제자, 병조판서를 지냄)이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태종 2년 12월에 형벌을 받아 죽게 되니 동생이었던 자순이 한양 장의동에서 난을 피하여 별채가 있던 풍산 오릉동으로 이거하였고, 이후 풍산김씨문중의 본거지로 대대로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김자순은 종수(從水)와 종석(從石)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인 종석(1409~1439)은 조선 태종시대에서 세종시대까지를 살았던 사람으로 부인 춘천 박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휘손(徽孫: 1438~1509)을 낳았다. 김휘손은 세종시대에서 중종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진산군수를 역임하였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두었는데, 오미동의 풍산김씨 기틀을 마련한 인물인 허백당 김양진(虛白堂 金楊震: 1467~1535)6)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즉 김자순의 둘째 아들인 종석의 후손들이 바로 현재의 오미동 풍산김씨로 이어지는 것이다.
김양진이 대사헌과 전라감사 등의 높은 관직에 진출하게 됨에 따라 김자순 때에 오미동으로 내려왔던 풍산김씨문중은 다시 한양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양진의 아들 의정(義貞) 또한 중종 21년(1516)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종(仁宗)이 그의 학덕을 높이 인정하여 종박사첨정(宗?寺僉正)에 임명하는 등 이름을 널리 알렸으나,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여 시정이 어지럽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선대의 고향이던 오릉동으로 은거하였다. 이때 의정은 유경당(幽敬堂)이라는 호도 스스로 잠암(潛庵)이라 고치고 시문(詩文)으로 산수(山水)와 벗하면서 다시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김양진의 비문(대제학 정사룡 지음)에 따르면 김양진은 성종 20년(1498)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3년(149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고 한다.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을 지낼 당시 연산군이 생모를 추숭(追崇)하자 이를 반대하였고, 이로 인하여 예천과 경주로 유배가게 되었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어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으로 재임용 되었으나, 중종 19년(1524) 김안로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선비의 절개를 지키다 또다시 사직케 되었다. 이후 중종 24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다시 임용되어 황해감사, 공조판서, 충청감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김의정은 아버지의 이러한 혼란한 관직생활과 자신이 당한 정계에서의 어지러움 등으로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렸으며, 아들 또한 벼슬길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여 이름도 농(農. 호는 華南)으로 작명하고 전원에서 농사지어 평범하게 지내는 것을 원하였다고 한다.
농의 아들이자 의정의 손자인 김대현(金大賢: 1553~1602, 호는 유연당(幽然堂))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제자로 선조 15년(1582) 생원시에 합격하여 산음현감으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특히 대현은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7) 영특하여 모두 소과에 합격하게 되고, 또 그 중 5형제가 대과에 급제하니 인조 7년(1629)에 나라에서 벼슬이 추증되고 사제(賜祭)8)의 은총이 내려져서 일약 명문세족으로서의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9) ‘오릉(五陵)’이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오미(五美)’로 고쳐졌으며, 이들 8형제를 가리켜 ‘팔연오계(八蓮五桂)10)’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들 중 맏이인 학호 김봉조(鶴湖 金奉祖), 넷째인 심곡 김경조(深谷 金慶祖), 막내인 운송 김숭조(雲松 金崇祖)는 오미동에 세거하였고, 둘째 망와 김영조(忘窩 金榮祖), 셋째 장암 김창조(藏庵 金昌祖), 여섯째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는 봉화 오록(梧麓)마을로 새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다섯째 광록 김연조(廣麓 金延祖)는 예천 감천으로 이거하였고, 일곱째 학음 김염조(鶴陰 金念祖)는 재종숙인 정헌공 김수현(靖憲公 金壽賢: 김양진의 둘째 아들인 순정(順貞)의 손자.)에게 입양되어 김포로 이거하였다.
八蓮五桂 이후 문과 급제자 중 죽봉 김간(竹奉 金侃: 1653~1735), 독산 김종규(獨山 金宗奎: 1765~1830), 낙애 김두흠(洛厓 金斗欽: 1804~1877)은 심곡공의 후손이며, 왜적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추강 김지섭(秋剛 金祉燮)의사는 설송공의 후손이다.
현재 오미동에는 학호 후손이 10여호, 심곡공 후손이 40여호, 설송공 후손이 30여호가 살고 있다.11) 그리고 마을에는 유연당 9父子가 글 읽던 죽암서당(竹岩書堂), 위패를 모신 추원사(追遠祠), 후손들이 공부하던 도림강당(道林講堂), 풍산김씨 종택(민속자료 38호), 영감댁(令監宅: 민속자료 39호), 참봉댁(參奉宅: 중요민속자료 179호), 죽봉사당(竹奉祠堂), 마을회관으로 사용되던 화수당(花樹堂) 등 많은 고건축이 남아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오미마을을 대표하는 문화재는 추원사와 도림강당이다. 추원사는 유연당 김대현을 위시하여 그 자제 八蓮五桂 등 모두 아홉 분의 위패를 모셔두고 선조의 공덕을 기리는 향사를 지내는 곳이고, 도림강당은 이 분들의 학덕을 숭모하여 후손들이 자제들의 학업을 증진하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다. 후손들은 이 둘을 아울러 ‘도림추원사’라 부르며, 집안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하고 있다.
추원사(追遠祠) 및 도림강당(道林講堂) 이 건물들은 모두 안동시 풍산읍 오미1리 308번지 속칭 ‘웃보푸래미’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때의 문신인 유연당 김대현(悠然堂 金大賢)공과 그의 자제 8형제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유연당은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8형제는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중 5형제는 대과에 급제하여 풍산김씨 문중을 명문반족의 대열에 올려놓은 인물들이다. 이 곳은 추원사(追遠祠), 도림강당(道林講堂), 오미재사(五美齋舍), 전사청(典祀廳)등 총 네 동의 목조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추원사(追遠祠)는 순조6년(1806)에 건립된 유연당 9부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도림강당의 우측 후면에 단을 높여 조성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이익공 집으로 일반적인 묘우건물의 형식을 잘 따르고 있다. 향사일은 봄ㆍ가을 2차례였으나 지금은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한번만 모신다.
도림강당(道林講堂)은 추원사보다 한해 앞선 순조5년(1805)에 건립된 건물이다. 도림이란 뜻은 추원사가 보림산 도봉 아래에 위치한데서 따온 명칭으로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ㆍ측면 2칸으로 전체 10칸으로 되어 있다. 그중 가운데 6칸은 마루를 깔고 양 옆에는 온돌방을 두었는데 서쪽이 진수재(進修齋)이고, 동쪽이 저존재(著存齋)이다. 이 건물은 지붕구성이 독특한데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의 양끝에 다시 맞배지붕이 직각으로 교차하여 전체적으로 ‘工’자형의 용마루를 구성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도림강당은 화수당과 죽암서실에 뒤이어 오릉강습소의 마지막 교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미재사(五美齋舍)는 오미동 풍산김씨 집안에서 유연당 9부자분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재사이다. 도림강당의 아래편에 인접해서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4칸의 트인 ‘ㅁ자형’집으로 안채는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이다.
전사청(典祀廳)은 향사 때 제수를 장만하고, 그 이튿날 제사 시까지 잘 갈무리 하는 곳으로 제물에 불결함이 없도록 사람이 그 옆방에서 제사가 끝날 때까지 지키던 곳이다. 이 건물들은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도림추원사(道林追遠祠) 향사(享祀)
김성민(풍산김씨 27대손)
1. 개요
도림추원사(道林追遠祠)는 여러 대를 거쳐 쌓아온 의덕(懿德)을 상징하는 우리 조상의 전당(殿堂)이다. 고려조에 좌리공신 판상사 벼슬을 역임한 시조 諱 문적(文迪)에 이르러 풍산백(豊山伯)으로 봉해 졌기에 비로소 본관을 풍산(豊山)이라 하였다. 추원사에는 모두 아홉 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데 14世 유연당 김대현(悠然堂 金大賢)을 정위(正位)로 하고, 유연당의 자제 8형제분을 서열에 따라 양쪽으로 네 분씩 배위(配位)하였다.
추원사 향사는 매년 봄 가을로 봉사(奉祀)하였으나, 시대의 변천으로 젊은 제관들을 위하여 매년 봄 음력 3월 중정일(丁 자가 2번째인 날)에만 봉사한다.
2. 향사 절차
1) 분정례(分定禮) 향사의례를 집행 할 때 필요한 직무를 배분 하는 절차이다. 향사를 위하여 (음)3월 1일 전임사장과 유사가 강당에서 회동하여 차기 도유사(都有司)의 사장과 재유사를 선정 육개월 전에 망기를 송부 하고, 향사 전날 오전에 향사의 참석자 들은 도림추원사의 강당인 도림강당에 모여 중식과 간단한 주효를 마치고 시도기에 헌관(향사 때 술잔을 올리는 제관), 유사, 알자(향사시 헌관들을 인도 하는 집사), 찬자(홀기를 낭독하는 향사의 사회자), 대축관, 학생들이 배석 하여 배분된 직분을 시도기에 명단을 기재 한 후 유사와 재유사는 별도로 청금록(靑衿錄)[임원록] 등재하여 영구히 보존 한다. 전 제관이 제복을 입고 알자가 “알묘 아뢰오”라고 세번 외친다. 제관 전원은 묘우에 재배하고 재단과 제구를 청소 한다. 유사는 제수를 정결하게 조리하여 각각 예법에 따라 근봉 한다. 전 제관이 오후 4시경 강당에서 유사가 “파임 아뢰오”라고 세번 외침에 따라 파임 명단을 기록하여 ‘집사분정판(執事分定板)’에 부착한다.
2) 진설(陣設) 진설은 향사에 올릴 제물을 차리는 절차이다. 향사가 자정이 지나면 1시경부터 시작하므로 밤 11시경부터 제상에 정숙하게 진설을 시작 한 후, 집사가 읍을 한 다음 점검한다. 원래는 전사청에 마련된 제물을 진설 하였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사청도 낡았고, 인원도 부족하여 재사에서 준비 한 제물을 진설도를 기준으로 직접 진설한다.
3) 향사 시작 각 제관은 관수, 세수하고 봉황문 앞에 대기, 찬자는 먼저 묘우 동쪽 뜰에서 홀기 낭독, 제관은 우측문으로 입취, 배위함으로 향사가 시작 된다. 창홀(唱笏)에 따라 알자가 삼헌관을 정문, 오른쪽 문으로 인도하여 입취, 배위 후 재배를 올린다.
4) 초헌례(初獻禮) 첫번째 잔을 올리는 절차이다. 알자는 초헌관과 인사를 한 후, 초헌관을 인도하여 세숫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게 한 다음 다시 헌관의 앞에 서서 읍을 한 후 묘우 정문을 지나 정위신위(유연당공) 앞으로 인도 한다. 헌관은 신위 앞에 읍 한 뒤에 무릎을 꿇어 앉아 향로에 향을 3번 피우고 술잔을 신위에 올려 드린다. 공반은 보궤 뚜껑을 벗긴다. 제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부복을 한다. 대축은 헌관 왼편에 꿇어 앉아 축문을 낭독 한 후 본자리로 돌아가고 헌관은 일어나 읍한 뒤 다음 지평부군 신위 앞에 나아가 향을 세번 피우고 술잔을 신위에게 올린 뒤 (공반은 보궤 뚜껑을 벗긴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읍을 한 후에 다음의 참판부군, 도사부군, 현감부군, 정자부군, 우윤부군, 증좌승지부군, 주서부군 순으로 지평부군신위 전 제의철차와 같이 마친 다음 엄숙하고 공손하게 옆문으로 나와 원래 자리로 돌아와 절 두번을 하고 바로 선다.
5) 아현례(亞獻禮)ㆍ종현례(終獻禮) 찬인은 아헌관을 인도하여 세숫물에 손을 씻어 수건에 닦게 한 후 읍하면서 정문으로 준소에 들고 정위신위 앞에 헌관을 인도한다. 헌관은 정위신위 앞에 읍한 뒤 꿇어 앉아 술잔을 신위에 올려 드리고 고개를 숙여 엎드렸다가 일어나 다음 신위 앞으로 나아가 배열된 신위 순으로 창홀에 따라 엄숙 공손하게 전작, 부복, 흥, 하고 이어 옆문으로 내려와 본 헌관 위치로 돌아와 절 두번을 하고 바로 선다. 종헌례는 아헌례와 같은 순서로 행한다.
6) 음복례(飮福禮) 축관은 도마와 식칼을 가지고 신위 앞에 나아가 제(祭)를 지낸 포고기를 덜어 때어내고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음복 자리에 나아가 끓어 앉게 하고 축관은 제를 지내던 술을 술잔에 부어 헌관에게 주고 헌관은 술을 마시다. 또 축관은 포고기를 헌관에게 주고 헌관은 포고기를 받아 다시 축관에게 주면 축관은 받은 포고기를 가지고 동쪽계단으로 내려가 문밖에 던지고 원래 자리에 돌아온다. 이때 공반은 보궤 뚜껑을 모두 덮고 축관이 초헌관 좌편에 나아가 읍을 하면서 이성을 고한다. 헌관과 집사는 다같이 두번 절하고 바로 선다. 축관은 축지(축문)를 불사르고, 주독을 모두 덮고 차례로 동문으로 나감으로써 향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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