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신문 ♤ 시가 있는 공간] 빈집 / 권정희
심상숙 추천
빈집
권정희
오래된 그 집엔 누군가 흘러간다
시퍼렇게 살아오는 기억의 파편들이
낛삭은 시간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갔을까
짓무른 시간들을 탱탱하게 받치고선
꽃잎 연 벚나무만이 생을 환히 밝혀 섰다
나는 눈먼 사람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미쳐 걷지 못한 그리움이 남아설까
난분분 꽃잎 속으로 빠져드는 한나절
[작가소개
권정희 2015년 《시와소금》 신인상 당선, 2014년 광진문학상 시조대상, 2016년 천강문학상 시조대상, 2023년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1988년 3·1절 만해백일장 대상, 시집 『별은 눈물로 뜬다』 『배롱나무 편지』
[시향]
권정희 시인의 시는 죽은 듯 숨결 속으로 비수가 들리었다. 곧 새해를 맞는 모두는 남쪽으로부터의 비보로 마음 깊이 비검이 꽂히었다. 슬픔을 넘어선 시퍼런 칼날이다.
몸과 마음이 조금만 스쳐도 사방에 칼자국이 난자하다. 갑진년甲辰年 푸른 용의 해가 가고 을사년乙巳年 푸른 뱀의 해가 온다. 새해를 맞는 축제 카운트다운도 불꽃놀이 퍼레이드도 멀리, 안타까운 희생자들 앞에 애도의 조문을 바친다.
어느 한 슬픔으로 모두의 가슴은 시인의 “낛삭은 빈집” 이 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새봄이오는 길목으로 모두는 난분분 불 밝힐 꽃나무 한그루씩을 품고 있다. 그럴수록 오는 해를 더욱 곱게 피워내야 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저마다의 세상을 사랑하고 섬긴다. 그 힘으로 소명을 다할 때 꽃들은 더욱 환히 피어나 노래할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축복해야 할 시간이 조용히 도래到來하고 있다.
글: 심상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