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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7-12절)
아브라함 링컨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흑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견디지 못하여 많은 반대와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올가미에 걸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올가미를 풀어 놓았다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에게 채찍으로 맞은 적이 있었고 총구가 사슴을 향해 겨누고 있을 때 사슴을 멀리 쫓다가 회초리로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링컨은 매를 맞으면서도 어린 사슴의 목숨을 구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흐뭇했다고 합니다.
요한일서 1장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라.” 고 하였습니다. 다시 요한일서 4장8절과 16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새롭고 담대한 표현으로 놀라운 선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이한 사랑입니다. 다윗은 무죄한 자를 보호해 달라는 요청의 기도를 드릴 때 기이한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한 것입니다.
*시17: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하나님이 죄인에게 먹여주신 생명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은 죄인치고 멸망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땅에 충만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는 측량할 수 없는 영원토록 무궁하신 사랑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렘31: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사랑은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스톨게 사랑입니다. 이는 가족의 사랑입니다. 혈통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필레오 사랑입니다. 곧 형제의 사랑이요, 친구의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필레오 사랑을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셋째는, 에로스 사랑입니다. 성적인 낭만을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이성간의 사랑, 육체적, 관능적 사랑입니다.
넷째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희생적 사랑, 대속적 사랑, 생명적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이라는 대명제를 다루면서 이 아가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고전13장과 함께 “사랑의 송가”로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랑의 객관성입니다.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이는 사랑의 원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의 근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본래부터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속성이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그렇다면 사랑의 기원은 신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사람의 주관적 산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지식적 산물이거나 노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사랑은 본래부터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그 비밀을 인생이 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배로운 사랑입니다.
*시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하신 사랑입니다.
*시69: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하나님의 사랑은 후하십니다.
*시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아니하는 사랑입니다.
*아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멸망 받을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으로 사람의 뜻대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객관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사랑의 공개성입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것은 나타내신 바 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완전히 공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공개된 사랑의 정체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구체적인 역사 안에 오셨으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인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온 천하에 공개하고 나타내신 전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생 가운데 거하시도록 나타내었습니다. 만민이 그를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귀로 그 음성을 듣고, 손으로 그를 만질 수 있도록 역사의 한 가운데 공개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35:1-2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뉴욕에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가정마다 유리창에 별을 하나씩 붙여 놓았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어린 아들과 함께 밤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이 꼬마는 각 집마다 불이 켜져 있고 유리창에 빛나는 별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멋있다고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지나치는 가운데 궁금한 꼬마는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저것 보세요. 왜 집집마다 별을 달아 놓았을까요.’ 그러자 아빠는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합니다. ‘응 저 별들은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다는 표시란다.’ 아들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 저 집은 별이 두 개나 달려 있어요.’ ‘그런데 저 집은 별이 하나도 없네.’ 계속 길을 걸어가며 아이는 집집마다 창문에 달려 있는 별을 세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빠 저기 보세요. 하나님도 자기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셨나 봐요. 별이 저렇게 많이 반짝이고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이 어린 순진한 꼬마가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고 외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늘의 별이 아닌 광명한 새벽 별이신 당신 품속에 독생 하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어 우리를 구원하고자 이 세상의 전쟁터에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할롬은 말하기를 ‘사랑이야말로 우리들을 하늘나라로 이끌어주는 길손과도 같은 별이다. 메마른 광야의 한 떨기 꽃이며 햇빛 모래에 섞인 한 알의 황금이다. 라고 하였으며 무디 목사는 말하기를 ‘땅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늘에서 주님도 당신을 시인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늘의 축복과 평화를 원한다면 주님을 고백해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3. 사랑의 목적성입니다.
*요일4:9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자기 사랑을 공개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공개 목적은 바로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수 세기 전의 유명한 학자 무레투스는 극빈한 생활 속에서 날마다 식사를 거르고 추위에 떨면서 영양실조와 의식 불명으로 병을 얻어 마침내 극빈자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그가 의식을 회복하게 되자 두 명의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뼈만 남은 몰골과 다 헤어진 누더기 옷을 보고는 영락없는 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거지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수군대었습니다. 비난과 멸시와 조롱의 말들을 마구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자기들이 하는 말을 상대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들이었는데 무레투스는 다 듣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무레투스는 자신을 모욕하는 그들을 향하여 라틴어로 한 마디 말을 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마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낸 사랑은 우리를 살리시고 축복하시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많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생에게 큰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인생을 살리는 것, 곧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이것입니다.
4. 사랑의 선수성입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여기에 기독교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특수성이 있고 차별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죄인 된 인생을 찾아오셨습니다.
눈동자 같이 지키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홀로 찾아오셨습니다.
*신32:11-12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성도의 눈물을 감찰하시며 찾아오셨습니다.
*시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찾아오셨습니다.
*사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하듯 찾아오셨습니다.
*사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선수적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불변적이요, 부동적인 영원하신 사랑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뜨겁고 열렬한 사랑입니다. 식을 줄 모르는 불타오르는 사랑이요, 꺼질 줄 모르는 화산 같은 정열의 사랑입니다.
5. 사랑의 공유성입니다.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가지고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5:5-6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그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병이 날 정도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자기의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후2: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서로 종노릇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이 빚을 갚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6. 사랑의 완전성입니다.
*요일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며 계속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유명한 잡지 ‘라이프’ 는 “아름다운 참 사랑의 모습” 이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글을 실었습니다. 잡지사의 사진 기자가 영국을 방문하든 중 어느 날 지하철 대합실 식당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 자리에서 늙은 노인 부부가 서로 소꿉동무 어린이처럼 정답게 앉아 남편은 비스킷을 주문하고 할머니는 차를 주문하였습니다. 그 노인 부부는 누가 보아도 아주 가난한 사람들인데 그들은 누구에게도 개의치 않고 조용히 주문한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남편은 천천히 비스킷을 먹기 시작하였고 할머니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면서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잡지사 기자의 눈에 신기한 광경이 목도 되었습니다. 남편은 비스킷을 반쯤 먹더니 갑자기 자신의 틀니를 뽑아 깨끗이 닦고 나서 아내에게 건네주었고 아내는 그 틀니를 자연스레 입 안에 넣고는 비스킷을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아내의 모습을 행복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잡지사 기자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코가 찡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 서로를 아껴 주고 기다려 주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 이 사랑 앞에는 가난도, 시대도, 연령도, 주위의 시선도, 자신의 체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열기와 같아서 사방으로 동일하게 흩어지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고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사람의 사람 된 위대한 행복과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게 된 피조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구원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랑을 먹고 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을 먹고 마시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사랑의 완성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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