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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3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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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Is a lamp brought in to be placed under a bushel basket "Take care what you hear.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의 후손을 축복하신다. 다윗은 감사 기도를 바친다. 그는 자신의 후손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에 감격한다. 다윗은 지난날을 회상한다. 무명의 목동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마침내 임금이 된 것을 돌아본다. 주님의 크신 은총이었다(제1독서). 아무도 등불을 켜서 침상 밑에 두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둔다. 그리하여 방 안을 환하게 비추게 한다. 사람의 선행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알려지게 하실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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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방 안을 비춰야 할 등불을 침대 밑에 두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선행을 베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삶이 환하게 밝아지는데 그것을 모릅니다.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 강인봉-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 뭔가 크게 한 획을 긋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대통령?·?장군?·?과학자 등 위인전에 등장할 만한 직업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은 장래 희망직업으로 연예인이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평범한 삶보다는 뭔가 특별하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누구한테나 그런 능력이 주어지지도 않고 또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장래 희망은 점점 평범해지고 소박해지고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변하지요.
어떤 사람이 어느 유명한 병원에서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명의로 소문난 이 병원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폐결핵에 잘 듣는 약과 그 약을 사용하는 방법을 처방해 주었지요. 워낙 유명하신 선생님이라 이제까지 그 어떤 사람도 이 분의 처방전과 약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은 달랐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처방과 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폐결핵이 낫지 않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바보 같은 사람이라면서 사람들의 놀림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말을 믿고 따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 역시 이렇게 어리석은 환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과 힘을 선택하면 보다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또한 마지막으로는 영원한 생명까지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방법과 힘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는 많은 성인 성녀들의 선택을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 세상 안에서 기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방법과 힘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만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만 이야기합니다. 왜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나에게 주시냐고 주님을 원망하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주님의 사랑 가득한 선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선택을 당연히 해야 함을 분명하게 제시해주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남한테 주는 것이 아깝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심과 아쉬움 속에서는 사랑이 열매 맺기 힘듭니다. 대신 선행과 나눔이라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행하는 지극한 정상인인지, 아니면 이 세상 것만을 소중하게 여김으로 인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 있는 지를 묵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앞일은 누구에게나 미지의 영역이다. 다음 모퉁이를 돌았을 때 무엇이 기다리는지, 돌아보지 않고서는 짐작할 수 없다(무라카미 하루키).
하느님 나라 -조명연- 우리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기를 살리기도, 또 반대로 죽이기도
가진 것은 작아도 마음은 크게! -김찬선신부-
“너희는 새겨들어라.
숨길 수 없는 것 -전삼용신부-
어떤 피정에서 한 지도 신부님이 혼자 짓는 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혼자 그 죄를 지었다고 과연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제가 일반 대학 다닐 때 심심풀이로 관상을 좀 공부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관상 책을 보며 강의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을 표본 삼아 관상을 연습하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얼굴 보며 몇 시간은 이야기 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내면인데 그것들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관상을 보아주었는데 보아주는 제가 신기하게도 80%정도는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관상은 하나의 통계입니다. 선천적으로 생긴 얼굴과 후천적으로 인상을 써서 생기는 얼굴의 조합이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만들어갑니다.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중에 더 중요한 것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운명이란 사실 없고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굴이 변해가는 사람도 있고 사실 제 얼굴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윗눈썹 사이에 골이 파입니다. 걱정을 하니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지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보니 당연히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눈이 위로 치켜뜬 눈은 윗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상입니다. 실제로 자신도 모르게 윗사람들을 그렇게 노려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로 내려 보는 눈은 아랫사람을 내리 누르는 상이겠지요.
이는 자신이 인상을 쓰는 대로 얼굴 모양이 바뀌어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흔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지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많이 웃는 신부님을 아는데 그 분은 거의 50이 되어갑니다. 얼마나 웃으시는지 평상시 얼굴도 웃는 얼굴입니다. 골이 그렇게 웃는 하회탈 모양으로 패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다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숨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혼자는 아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아무 말하고 있지 않아도 그것이 자신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로마에서 가끔 한국 식당에 갑니다. 삼겹살을 먹거나 김치 같은 것을 먹고 버스에 타면 주위 사람들 눈치를 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외국 사람들은 냄새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택시를 탈 때면 더 주위를 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운전기사가 참지 못하면 추워도 창문을 열고 갑니다. 어찌 내가 무엇을 먹든 상관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다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사람만 마늘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백인들은 특유의 치즈 냄새가 납니다. 더운 날씨에 버스를 타게 되면 그 냄새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흑인들도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다 먹는 것대로 몸에서 냄새를 풍기게 되어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저절로 밖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행복이 있는 사람은 행복이 나오고 미움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미움이 나옵니다. 따라서 외로워지는 것을 다른 사람 탓 하면 안 됩니다. 자신에게서 상대를 다가오게 하지 못하는 무엇이 새어나오고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은 대낮이고 대낮에 숨길 수 있는 것들은 없습니다. 죄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짓는 것입니다. 적어도 완전히 죄를 물리칠 수는 없어도 자신에게 솔직하고 또 이웃을 위해서라도 죄를 줄여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마치 타볼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안에서도 빛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상지종신부-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뽑으신 까닭은 귀한 보물 삼아 깊은 곳에 감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두움 환히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되어 기쁨과 희망 나누는 이 되라는 주님 뜻 새기십시오.
빛을 죽이려 달려드는 어둠의 세력 가운데 빛으로 사는 것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빛이 아니라고, 빛이 될 자격이 없다며 쓰러지고 싶을 때 당신에게 불을 놓으신 이 생각하십시오.
한 줌 재가 되어 당신의 모든 것 사라질 때까지 빛으로 빛으로 당신을 모든 이에게 나누십시오.
당신의 사라짐으로 온 세상 환히 밝고 환한 온 세상 가득히 품에 안는 영광을 누리십시오.
자랑스러운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십시오. 당신은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할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제가 몇 년 전 갑곶성지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오후에 일을 하고 있다가 잠시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여보세요. 갑곶성지입니다.” “여보세요. 갑곶성지이지요? 저는 오늘 11시 미사에 참석했던 교우인데요. 글쎄 제가 경당에서 미사를 참석하다가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두고 온 것 같아요.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지만 혹시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저는 바로 경당 옆에 있었기 때문에, 전화 끊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경당으로 뛰어 들어가 그 분이 두고 가신 물건을 찾기 시작했지요. 다행히 그 물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기뻤지요. 그래서 다시 전화기로 갔는데, 글쎄 그 자매님이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이 다시 전화를 해 주리라 생각하고는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그 자매님의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물건은 분실물 보관소에 놓였다가 몇 년 뒤 없어졌습니다. 이 자매님에 대해서 우리들은 “얼마나 이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그와 같은 태도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나의 필요에 대한 모든 것을 주님께 기도라는 표현으로 이야기하지만 ‘수화기를 붙들고 끈질기게 기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응답받을 때의 기쁨을 놓치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을 맛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주님의 뜻에 완전하게 부합되지 못할 때 기도의 응답을 종종 늦추시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주님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모든 소원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바라던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늘 서두르고 있으며, 수화기를 붙잡고 기다리지 않고 일찌감치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주님께서 나만 미워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곤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모습은 등불을 등경 위에 놓기보다는 등불 자체를 가려서 등불의 용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즉,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등불을 가리고 등경 위에 놓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 안에서 기쁘게 살 수가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라도 항상 남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라.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이 남의 눈에 비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도록 사색하고 행동하라.(세네카)
등불을 더 밝게 비추기 위해 - 이창걸-
지난 겨울에 세브란스병원 가톨릭 교우들의 모임인 등잔회에서 해미성지로 순례를 가서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께서 우리 모임이름이 등잔회라는 것을 들으시고 참 의미가 있고 좋은 명칭이라고 하셨다. 등잔회는 원래 영동 세브란스병원 가톨릭 교우들의 모임으로 활동해 왔는데 2000년 9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도 가톨릭 교우들의 모임을 시작하면서 서로 일치감을 갖기 위해 같은 이름인 등잔회로 했다.
들음과 새김 김연희 수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와 사랑의 계명을
죄의 사회적 측면 -전삼용신부-
어떤 피정에서 한 지도 신부님이 혼자 짓는 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혼자 그 죄를 지었다고 과연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제가 일반 대학 다닐 때 심심풀이로 관상을 좀 공부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관상 책을 보며 강의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을 표본 삼아 관상을 연습하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얼굴 보며 몇 시간은 이야기 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내면인데 그것들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관상을 봐주었는데 보아주는 제가 신기하게도 80%정도는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관상은 하나의 통계입니다. 선천적으로 생긴 얼굴과 후천적으로 인상을 써서 생기는 얼굴의 조합이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만들어갑니다.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중에 더 중요한 것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운명이란 사실 없고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굴이 변해가는 사람도 있고 사실 제 얼굴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윗눈썹 사이에 골이 파입니다. 걱정을 하니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지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보니 당연히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눈이 위로 치켜뜬 눈은 윗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상입니다. 실제로 자신도 모르게 윗사람들을 그렇게 노려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로 내려 보는 눈은 아랫사람을 내리 누르는 상이겠지요.
물론 지금은 관상을 보지도 않고 다 잊어먹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혹시 특이한 관상이 있을 때는 하나씩 기억나기는 하지만 사람을 앉혀놓고 관상을 보아 주는 것은 군대 제대하고 끝냈습니다. 어느 순간에 관상에서 말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현세에서 돈 많이 벌고 오래 사는 등의 매우 속세적인 기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관상에서의 복은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잘 사는 것이지 영혼이 구원되거나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상학으로 보면 그것만큼 안 좋은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난하고 고생하고 치욕의 죽음을 당한 것이 우리 믿음 안에서는 더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위험성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관상을 조금 했어도 맞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관상대로 성격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쨌거나 관상 보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하나 믿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얼굴엔 안에 있는 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십 이후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짓는 표정들이 얼굴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다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숨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경험 안에서도 아이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을 할 때 쉽게 알아차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사람들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죄를 짓고 그것이 감추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말과 행동, 표정 등을 통해 밖으로 나타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죄의 사회성이고 온전히 개인적인 죄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은 대낮이고 대낮에 숨길 수 있는 것들은 없습니다. 죄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짓는 것입니다. 적어도 완전히 죄를 물리칠 수는 없어도 자신에게 솔직하고 또 이웃을 위해서라도 죄를 줄여나가도록 합시다.
-박철현신부-
등불은 요즘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추억 속의 물건입니다. 하지만 등불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거기에는 왠지 모를 포근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등불의 존재이유는 무엇입니까?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데 그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대낮에 등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에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등불의 비유’를 통해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진리는 감추어두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고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전하려할 때에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반대 세력이 그것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드러나게 되고, 진리가 옳다는 사실이 밝혀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감추어 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것이 지금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타인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그렇게 순간을 벗어나기는 하지만 하느님 앞에 감추어진 비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죄를 짓게 된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등불인 하느님의 진리를 외면하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를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감추거나 가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는 생활, 다른 이들의 어둠까지 밝혀 진리를 증거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사람의 잘못 여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의 잘못 여섯 가지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합시다. 스스로 결정 짓는 것
-구경국 신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속담처럼 자주 경험하거나 열심히
안면보시(顔面普施) -김현숙 수녀- 등불! 빛은 밝음과 따뜻함 그리고 확산의 속성이 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스스로 퍼져 나간다. 이는 다른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다. 양극화의 해법 -오상선신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 “너희는 새겨들어라. 나누면 나눌수록, 실제로 우리가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하지 않고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조욱현신부- 등불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등불은 어두운 곳에서 밝혀주는데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낮에 등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에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가 바로 감추어두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고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려할 때에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진리의 반대 세력이 그것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드러나게 되고, 진리가 옳다는 사실이 밝혀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지금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순간을 피하는 것이라도 하느님 앞에 감추어진 비밀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 이다. 결정적으로 등불을 외면하면, 즉 진리를 외면하게 되면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를 받은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감추거나 가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는 생활을, 다른 이들을 비추어 증거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빛으로서 증거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을 통해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복음 한 말씀을 가지고도 빛을 낼 수 있다,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성냥불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냥불빛에 어두움은 서서히 걷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이러한 겸손된 삶을 청하자.
너희가 되어 주는 만큼 보태어 받을 것이다 사람의 뇌의 크기를 재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뇌가 크면 사람의 머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뇌의 무게는 통계학적으로 대략 1,200g - 1,500g정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보다 훨씬 큰 사람도 있고, 가벼운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문헌으로 무게를 재서 기록에 남긴 사람은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가 2,012g 이라고 하고,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는 1,650 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죽은 다음에 해부해서 그 무게를 달아보고 그렇게 보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뇌의 무게를 가지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코끼리의 뇌는 대략 4,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하고 향유고래는 대략 9,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코끼리의 30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데 코끼리 머리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400그램 정도 나간다고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150그램 정도 더 무거지지만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머리가 더 좋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여성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성적 우수자들은 여성들이 훨씬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여성들이 더 잘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뇌가 많아서도 아니고, 여성들이 뇌가 작더라도 더 집중력이 강하고 학습 분위기가 더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골 찬 사람” 이라고 하고,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골 빈 사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골이 찬 사람들은 그만큼 뇌도 무거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뇌의 밀도에 따라서 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뇌의 밀도는 3.12, 침팬지는 1.79, 사자는 0.67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뇌의 밀도도 머리와 관계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답니다. (나카하라 히데오미/홍성민 옮김/ 뇌력사전 참조)
내가 아무리 내 컴퓨터를 잘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5-10%도 활용하지 못하고 마냥 업그레이드만 해서 용량만 키우고 사실은 5%도 사용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사용하는 나의 뇌도 5%도 사용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고 머리가 커서 어떤 모자도 맞지 않아 언제나 모자를 살 때 고민하는데도 머리가 좋은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때는 좋은 머리와 나쁜 머리를 구별할 수 없고, 내 머리가 점점 나빠지는데 머리크기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내 골이 지금 텅텅 비어가고 있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뇌의 양과 뇌의 크기와 뇌의 밀도에 대하여 사진을 찍고, 무게를 잴 수 있는 기술들이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크기를 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심장의 무게는 잴 수 있을 것이고 내 허파와 뼈들의 무게까지도 전부 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묘한 인체의 구조 중에서 아마 측정할 수 없는 것은 마음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의 크기를 나름대로 재고 살려고 하지만 정답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호수처럼 큰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물 컵 보다도 더 작고, 적은 것인 줄 요즘 겨우 알게 되었답니다. 내 마음을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내 행실은 금방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나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말은 금방 밖으로 표출됩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자신의 진심을 마음에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그 마음도 무한정으로 커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출중하지 못하고 용렬(庸劣)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좁은 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마음을 닮지 못하고 지금 내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능출불유호? 하막유사도야?’(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의 옹야 편에 있는 말입니다. <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는가?>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찌 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행하라는 선행을 외면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어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어찌 내가 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은 조금도 반성해 보지 않는 것인가? 내가 도를 따르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 선행을 실천하라고 하는가? 또 내가 따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과 자식들에게도 같은 이치라는 생각입니다. 용렬한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됫박으로 야박하게 되어 주면서 고봉으로 받으려고 하는 ‘밴댕이 창자’ 같은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사는 내가 내 아집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기 싫습니다. 매일 그렇게 결심하면서 인생의 후반부에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따라야하는 그 길에서 나는 문을 닫아걸고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제 마음을 더 크고 넓게 가지도록 자비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제가 넘치도록 되어주고, 넘치도록 자신을 나누게 하소서. 빗장을 벗어 버리고, 당신께 뛰어 달려가는 길을 깨닫게 하소서. 자비와 사랑의 주님!!!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大主宰)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중에서) 분별의 지혜가 더 절실한 현대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4장에 실려있는 4가지 비유 중 두 번째 비유인 ’등불의 비유’를 들려준다. 그런데 사실상 등불의 비유는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만 해당되고, 후반부는 종말보상률(24-25절)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두 대목은 서로 떨어져 전해 오던 것을 마르코가 한데 묶어 비유설교의 틀 안에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복음사가들은 종종 이런 의도적인 편집을 통하여 그 의미를 서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부각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은 4가지 비유들의 핵심적인 주제인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방향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서간 복음에서 ’알아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되는 12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에 국한시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도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만 훈시(訓示)된 것이다.
우선 복음의 전반부인 등불의 비유를 살펴보자. 등불을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함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불을 끌 때 됫박을 사용하는 것은 당대의 습관이다. 그런데 등불을 됫박 아래 두거나 침상 밑에 둔다는 것은,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좀 과장되고 지나친 표현이다. 이 표현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힘을 얻는다. 즉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을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22절) 아무리 감추어 두고 비밀로 해도 그것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등불이기 때문이다. 등불을 끄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가 복음의 말씀이라면 등불의 비유에서 빛을 내는 등불은 복음의 선포를 뜻한다. 등불의 본질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등불은 복음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복음선포라는 말이 된다. 사실 등불은 성서에서 예수님이 아닌 엘리야와 모세(묵시 11,4), 또는 세례자 요한(요한 5,35)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등불보다 훨씬 더 높고 강한 상징인 빛이시며, 세례자 요한은 이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었다.(요한 1,4-9) 따라서 복음자체이며 동시에 선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머무름 없이 온 세상에 드러나 밝게 비추이실 것이다.
복음의 후반부는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이다. 굳이 종말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무엇을 주고 난 후 되돌려 받을 때까지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그 때가 종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상률은 두 단계로 구별된다. 하나는 인과(因果), 또는 동태(同態) 보상률이고, 다른 하나는 은총(恩寵), 또는 가감(加減) 보상률이다. 앞의 것은 달아 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는다(24절)는 것이고, 뒤의 것은 가진 사람은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25절)는 것이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나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독자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동태보상, 또는 하늘에 영적(靈的) 재물을 쌓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은총보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다.
문제의 해결점은 전반부의 등불비유와 후반부의 보상률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관절어(關節語)에 있다. 바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23절), 또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24a절)는 말씀이다. 말씀인즉,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등불의 비유를 잘 알아듣고 그 뜻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보다 훨씬 강한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와 그 말씀을 알아듣는다 함은 다시금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만큼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깨우치게 될 것이고, 종말에 가서는 깨우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를 통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보다 들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보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우리들 세상에서는 무엇이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것인지를 정확히 분별하는 지혜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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