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산을 오른 것은 조각공원 작품들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새벽녘 북녘에서 불어온 차가운 눈바람에 놀란 아내가 나서서 두꺼운 방한복 걸치길 주문해댔다. 그 때문에 비탈진 남부민동 산동네를 지나 ‘천마산10리길’ 팻말이 선 초입에서 불과 십여 분 올랐는데도 등에서는 땀이 솟았다. 바람은 여전히 매웠지만 입춘을 지났으니 분명 그 속엔 봄기운이 들어있었을 터이다. 능선에 올라서자 그림처럼 아름다운 부산항엔 설을 맞아 운항을 멈춘 크고 작은 선박들이 그득했다. 평소 멀게만 느껴지던 영도해안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외항에 정박한 무역선들도 해면에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1964년 여름 부산으로 전근되자마자 천마산에 첫발을 디뎠으니 반세기 세월이 지났다. 그렇지만 그동안 산을 오른 횟수는 열손가락 안팎일 것 같다. 산 정상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영도 남항동까지 내리뻗은 가공송전선로는 설치한지 반백년이 지났지만 그대로다. 앞서는 영도다리에다 매단 배전선로를 통해 전기를 섬에 공급했으니 전력수요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내 최장거리에다 해월철탑을 세우기 위해 산을 수없이 오르내리던 송전계장 J선배의 모습이 떠오른다. 선배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일찍 떠났지만 그가 어렵사리 설계한 철탑은 오늘까지 전력공급을 맡고 있으니 저승에서도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산으로선 비교적 큰 매력을 지니지 못한 천마산을 그나마 자주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사진 동호인들과 계절별로 바뀌는 부산항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천마산에 올라서면 멀리 해운대 동백섬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함께 담는 풍경사진은 원거리 촬영이다 보니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나마 낮엔 날씨의 변화나 구름의 흐름만 신경 쓰면 되지만 밤의 야경사진을 제대로 찍기란 보통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오늘 공원엔 관광객이나 등산객들로 보이는 탐방객들도 간혹 보였지만 십중팔구는 공원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었다.
설 연휴를 보내면서 가족친지들과 산책 나온 이들로부터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헬스기구에 매달리는 이들까지 이용객은 다른 공원보다 많았다. 다닥다닥 붙은 동네의 작은 집들 인구밀도가 타지에 비해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겠다. 조각품은 한 공간에다 몰아서 세우지 않고 관람객이 야트막한 등산로를 따라 돌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길 옆에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 놓고 있었다. 공원은 비교적 근년에 들어섰기 때문에 내심으론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산을 올랐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예술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내게 부족하다고 치더라도 전체 45점 중 제대로 된 작품은 절반도 안 될 것 같았다. 작품 소재를 부식이 잘되는 금속으로 만들어 벌써 심하게 훼손된 것들도 몇 점 보인다. 예술성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작품마다 붙여 놓은 주제와 해설이 아닐 수 없다. 억지로 ‘예술의 난해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랬는지 뜬구름 잡는 식의 제목과 해설을 붙여놓아 아무리 작품과 매치를 시켜보려 들어도 도저히 불가능한 것까지 있었다. 주제는 간결하면서도 작품을 한마디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림이나 사진 문학작품까지 어떠한 장르의 예술이라도 예외일 수가 없다. 일례로 여자의 버선 한 짝을 크게 만들어 비스듬하게 눕힌 발등에다 코뿔소처럼 사납게 생긴 작은 동물이 꼬리를 치켜들도록 만들어 올려놓고 <아~우~>란 제목을 달았다. 놀라서 내지르는 감탄사라고 붙인 것 같은데 그런 낱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와우'라며 우리가 곧잘 감탄을 표하는 말도 아직까지 국어사전에는 없다. 아~우~의 해설은 더 걸작이다. '감추어진 여성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해학적으로 조형화 했다'고 써 붙였다.
이렇게 작품과 동떨어진 제목을 붙여서 작품이 납품되었더라도 전문가 그룹이 한 차례 심사만 했더라면 바로 잡았을 것이다. 작품의 주제와 해설을 담은 명판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었는데 군데군데 검정 페인트가 벗겨져 글자가 지워진 것도 있다. 광택이 나지 않는 동판이나 주물이 만약 고가라 만들기 힘들면 목판에다 글자를 새겨야만 작품과 궁합이 잘 맞을 것이다. 카메라에 작품을 담아서 인터넷카페에 올리기론 계절이 아직 좀 삭막하다. 작품의 바닥에 깔린 잔디도 색깔을 제대로 못 내고 작품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낙엽교목들도 푸른 잎사귀를 하나도 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작품을 촬영하는 데는 입사광선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해가 중천에 뜬 정오 무렵이 좋고 더 나은 것은 약간 흐려서 햇살이 아예 구름 속에 숨었을 때다. 변방의 소도시에 살다보니 서둘러 집을 나서 한 시간 넘게 지하철을 이용한 후 택시까지 바꿔 탔는데도 해는 이미 중천을 넘어 사광으로 변한 뒤였다. 작품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작품은 정면을 역광으로 갈무리해야 하는 고역도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생동감 느껴지는 작품 중엔 제법 덩치가 큰 ‘백마’가 있었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작품성도 돋보였다.
'옳다구나!' 하고 백마를 배경으로 부부가 추억을 한 컷 남겨보기로 했다. 휴대한 카메라 삼각대에 장애가 생겨서 두리번거리다보니 때마침 공원 트랙을 달리면서 돌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사정을 얘기하면서 카메라를 내밀었더니 무척 언짢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장갑 낀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데 카메라까지 약간 흔들렸다. 관할 구청은 다행히 우리 사무실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카페에 작성한 이 글을 들고 구청 공원녹지과를 찾아갈 생각이다. 민과 관이 서로 소통함으로서 더 향상된 문화예술작품을 갖출 수 있다면 미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