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의 안주나 해변>
남인도 여행기 4 "고아, 빤짐" 2
1510년 포르투갈 군대는 고아의 비자프루 왕국을 물리치고 고아를 점령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고아의 넓은 항구를 돈벌이가 되는 향료 운반하는데 사용했으며,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억압과 잔인성을 드러냈다. 1961년 인도 군대가 이 지역에 진군하여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냄으로써 5세기에 걸친 포르투갈 통치의 막을 내렸다. 오늘날 고아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개인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높은 문자해독률과 비교적 높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철광, 농업, 그리고 어업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아의 도처에서 포르투갈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오래된 저택이나, 포르투갈 요리, 교회, 그리고 언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Lonely Planet 14판에서 필자 발췌, 번역,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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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 Planet 지도 인용>
복만씨의 말에 따르면, 고아에 온 목적이, 추운 한국에서 왔으니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고 야자수 아래에서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데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좋아하는 책 한권 가지고 해수욕장에 가서 허리가 부러져라하고 누워있다가, 맥주나 슬슬 마시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낮잠이나 자고, 옆사람과 이야기하다가 또 잠이나 자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 한국 사람 중에 그런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왔으면 보아야하고, 볼 바에야 기왕이면 더 잘 보아야 하고, 하나라도 더 보아야 하고, 잠을 줄여서라도 아니 지옥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보아야 한다. 산에 갔으면 무조건 정상까지 가야하고, 땅끝에 가면 그 끝에서 보이는 섬까지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의지의 한국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이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짓거리여, 하고 후회도 하고,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도 하면서 한평생을 보내는 것이 어디 한 두 사람의 일이던가?
1월 5일 우리는 버스를 대절하여 고아 일대 구경을 나섰다. 처음 찾아간 곳이 아구아다 성이었다(위 지도 참조). 아구아다 성으로 가는 길은 평평한 해변으로 야자수가 드리워진 끝없는 휴양지였다. 길 양옆으로 끝없이 숙박소와 가게가 있었으며, 작은 동네가 나타났다가, 야자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도 하였다. 동네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가 하면, 개와 소가 목적 없이 걷거나
서 있기도 하고, 까마귀가 하늘을 덮고 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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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에 건설된 이 아구아다 성은 2층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인도에 망하면서 1976년 이후로는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진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본래 아구아다라는 말은 포르투갈 말로 물이 나오는 지역이라는 뜻인데, 이 성의 위 층에 물을 담아두는 거대한 물탱크가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바다 언덕에 부서진 건물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인 듯 했다. 날도 더우니 구경이고 뭐고 그만두고 빨리 나무 그늘로 가자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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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아다 성>
<아구아다 성>
<코코 비치에서 두 사람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아구아다 성을 지나면 바로 코코비치가 나온다. 코코 비치에서 잠시 쉰다. 코코 비치를 지나 한 참 차를 타고 가면 빤짐(빤짐은 고아의 중심부 중의 하나)이 나오는데, 이곳의 최대의 구경거리는 Church of Our Lad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동정녀 마리아 성당: 글자대로 번역하면 "아무런 결점없이 잉태하신 우리의 여인 교회"란 뜻이다)이다. 입구 아래 층에는
예수 탄생 모습을 만들어 놓은 좀 허접한 모형물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 계단을 타고 한참 올라가면 교회가 나오는데, 마침 우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그 안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1541년에 지어졌다고 하는 이 교회는 포르투갈인들이 자신의 조국을 떠나 안전하게 이곳 고아에 온 것을 감사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날이 얼마나 덥던지, 사실은 몇 발자국 떼어 놓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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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성당>
마침 그곳을 방문하여 쉬고 있는 독일인을 만났는데, 그는 유창한 영어로 6개월째 인도를 여행하면서 쉬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의 여유만만한 여행 방식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런데 이후 인도를 돌아다니면서 내가 가장 많이 만나는 외국인은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아닌, 바로 러시안이었다. 여기 남인도 여행을 마치고 스리랑카에 가서도 어디 가나 러시안인은 빠지지 않고 눈에 띄었다.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 추위를 피해 러시아인들이 이곳으로 휴양을 온 것이다. 내가 만난 독일인은 언제나 영어를 잘 했고, 러시아인들도 곧잘 영어를 했다. 소련과
미국이 양강 체제를 이루다가 급속히 미국으로 힘이 기울어지면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 영어의 세계화일 것이다. 1982년 11월 15일자 뉴스위크지에 English, English, Everywhere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는데, "이제 당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다른 나라 사람과 말을 할 때는 영어를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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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여행자>
<멩궈시 회교사원>
차를 타고 얼마나 더 갔을까? 점심 때를 넘기면서까지 찾아간 곳이 바로 고아의 와곽 지역에 있는 멩궈시 회교사원이었다. 사원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데, 모두 신발을 벗어 맡기라고 되어 있다. 배는 고프고 날은 덥고 바람은 불지 않고 그늘은 없고, 옆에 있는 사람 아무나 잡아서 따귀나 한 대 갈기고 싶은 판국에 신발을 벗으라니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그냥 밖으로 나왔다. 서울에서 수원성을 보러 갔다가 신발 벗고 들어가라는 말에 그냥 서울로 내빼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건진 것이라고는 밀짚모자 하나다. 한국에서 쓰고간 검은 야구 모자를 썼다가는 제명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 2000원 주고 밀짚모자 하나 샀는데, 1월 26일까지 까딱없이 아주 잘 쓰고 왔다. 1월 26일 한국에 와서 며칠을 생각해 보았는데, 가격대비 효용성 유용성 편리성을 가장 크게 발휘한 것이 바로 이 밀짚 모자임은 지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막에서
나그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황금이나 좋은 옷이 아니라 한 모금의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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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원짜리 모자>
<점심 때 먹은 이상한 물고기>
그후 Old Goa에 갔다. 이곳에는 고아의 수 많은 유물이 간직되어 있다. 교회와 성당 그리고 박물관이 밀집되어 있는데, 힌두교를 믿는 인도에 이런 기독교 건물이나 유물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 역사나 유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의 입장으로는 지금까지 여행에서 많이 보아왔던 것중의 하나이며 크게 놀랄 것도 없다. 나는 여러 곳 중 세 곳을 구경하고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사람들을 만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유적지보다도 더 관심을 끄는 일이 발생했으니, 어떤 아이스크림 장사가 적정 가격의 세배나 부풀려서 값을 받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아이스크림 장사는 요금표를 인도인용과 외국인용을 가지고 있다가 잘 모르는 외국인을 등쳐먹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버스 기사와 가이드가 눈을 부라리며 현장을 몇 바퀴 돌았지만 결국은 찾지
못하고 헛수고만 하였다. 그 후로 쓸데 없는 짓을 하다는 속담은 "버스 지나간 뒤 손들기"에서 "아이스크림 장사에게 사기 당하고 그 놈 찾기"로 변경되었다. KC가 자주 쓰는 말대로, 세상에는 "예고없이 변경될 수도 있는 일"이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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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고아 장터였다. 입구에 더러운 시궁창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더러운 시궁에 왜가리들이 눈독을 들이는지 몰랐다. 시궁창을 따라서 줄지어 서 있는 이 왜가리들은 시궁창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런 더러운 물고기를 먹고도 죽지 않는 것이 기적이라 여겨졌다. 조금만 가면 큰 바다도 있고 강도 있는데, 왜 그런 곳을 가지
않을까? 어디 새뿐이랴? 사람도 마찬가지다. 술퍼먹은 다음날 갤갤 대며 똥물까지 다 토해내도, 2-3일 뒤 멀쩡한 듯이 또 술퍼마시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그 똑똑한 인간인데, 왜가리를 나무라서 무엇하겠는가? 무식한 '왜가리'를 나무랄 것이 아니라 유식한 '대가리'를 나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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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생강과 마늘이 집채처럼 쌓여있다.>
에피소드 하나: 시장 구경을 하는데, 한 사람이 따라붙어 "이것을 보라, 저것을 보라, 여기를 와봐라 "등 간섭이 심했다. 이 사람이 틀림없이 "삐끼"라고 생각하여, 그 사람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면서, 그를 따 돌릴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욱 집요하게 우리가 갈 곳을 귀신같이 알고서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면서 거머리 같이 달라 붙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구경을 그만두고 시장 밖으로 나와 우리의 버스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이 찰거머리는 거기까지 따라와서 또 말을 걸며 "Can you speak English?"라고 나를 죽이기로 결심한 듯 했다. 나는 "No English"라고 대답하며 엉뚱한 곳을 쳐다 보았다. 그는 그래도 무슨 말을 더 하더니 기가 죽은 듯이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가 우리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버스의 기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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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안주나" 해변이었다. 그날 안주나 해변에서는 태풍이 온 듯이 바람이 세계 불었다. 바람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복만씨, 여기서는 뭐 안주나?" 누가 한 마디 했다. "주기는 뭘줘, 당장 내가 견디기 힘든데." 다른 사람이 또 한 마디 했다. "아니 술이나, 안주나, 뭐 다른
것은 아주냐고?" 또 다른 사람이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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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1월 6일, 우리는 뜻한 바가 있어, 깔랑굿에서 아침 일찍 짐을 싸서 빤짐으로 갔다.
1. 어떤 커피 집에 가서 집주인의 눈치가 보일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2. 근처 강이 보이는 공원으로 가서 지겨울 때까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3. 강물 보는 것이 지겹자, 지나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관찰하였다.
4. 점심 때가 되어서 근처 채식 식당으로 가서 시간을 끌면서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점심을 먹었다.
5. 다시 그 공원으로 와서 졸리기를 기다려 고꾸라질 때까지 졸았다.
6. 졸다가 잠이 와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잠을 잤다.
7. 늘어지게 잠을 자고나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사람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8. 밤 8시경 야간 침대버스를 타고 함피로 가기 위해 호스펫을 향해 떠났다.
9. 캄캄한 버스에서 밖을 보니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 선명하게 한 생각이 떠올랐다. "쉰답시고 한곳에 머물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여기저기 분주히 다니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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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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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아의 깔랑굿-안주나-올드고아-빤지니-야간침대버스로 이어지는 자취를 곽선생님 덕에 즐겁게 되 새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기는 다 나으셨나요? 건강하십시요.
예, 아직 기침이 남아 있습니다.
무시하고 삽니다.
기침은 열을 빼주니까
하라고 하세요.
버스기사 건에서 빵 터졌어요.
과잉 친절한 기사아저씨 ..ㅠ.ㅜ
죄송할 따름이었습니다.
버스기사 아저씨 살짝 상처받으셨겠당ㅋㅋㅋㅋ인도를 다녀온것처럼 생생하게 후기를 쓰셔서 넘 재미있네요~~
버스 기사님께 담배좀 드렸습니다.
고아지역엔 인도여인들 전통옷 (사리?) 입은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신기하죠? ㅎㅎ
글쎄요. 그런 생각은 못 하고 그냥 보았습니다.
제가 못가본 남인도라 지역 이름이 조금은 생소하네요,,,그래도 후기를 보면서 지역 이름과 특징을 새기면서 잼나게 보고 있습니다....근데,,술 드실 기회가 없었나보네요...술 애기가 없네요...
세상에 중국처럼 술마시기 좋은 나라가 어디 있겠어요.
ㅍㅎㅎㅎㅎ~박수치고 있었네요.안넘어간거 통쾌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