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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묵상글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쓸모 있는 종이 '나는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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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2 01:10
- 쓸모 있는 종이 '나는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진정 쓸모없는 종은
‘저는 쓸모없는 종’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그리고 잘한 종만이,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은 종만이
저는 쓸모없는 종일 뿐이라고 겸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불충실로 인해 인정과 사랑을 못 받은 종이
쓸모없는 놈이라고 야단맞으면 불충실하였음에도
제가 왜 쓸모없냐고 되레 반발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쓸모가 있다고 되레 강변하는 법이고,
칭찬과 사랑을 받지 못해 쓸모 있다는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쓸모없다고 얘기하면 되레 쓸모가 있다고 강변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쓸모없는 종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종의 주제이고 게다가 ‘쓸모까지 없는 종이야!’라고
수모를 주시는 말씀이거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고,
쓸모없는 종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는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앞서 주님께서는 다른 비유를 드셨습니다.
종을 식탁에 앉히고 주인이 시중드는 비유를 말입니다.
12장에서 이 비유를 드신 다음 17장에서 오늘의 비유를 드시는 겁니다.
어쨌거나 사랑받는 사람이 겸손합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겸손합니다.
그러니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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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잘 적응되는 곳이 소셜 미디어 공간입니다. ‘친구’라고 불리는 유사 사촌이 이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멋진 모습만 있지요. 명품 가방을 옆에 두고 커피 마시는 사진, 근사한 호텔이나 풀빌라에서 수영하는 사진, 값비싼 외제 차 앞에 선 사진 등 멋진 모습이 가득합니다. 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배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2017년 페이스북 측은 ‘페이스북을 수동적으로 사용하면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남들의 삶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자기만의 삶을 살면 됩니다. 행복이란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잘 보지 않고, 소셜 미디어 공간에는 묵상 글 올릴 때만 사용하니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없습니다. 저의 글에 댓글을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 이 역시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찾아보지 않으니, 관심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중독성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해야 세상을 잘 알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사용하지 않아야 고립감이나 배제감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문명을 이용하면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편한 것이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문명에서 멀어져야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이 세상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세상 것이 아닌 주님께 집중하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마땅히 주인에게 시중들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제대로 시중들기 위해서는 주님께 집중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데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자기 기준으로 바라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주종의 관계로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만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행복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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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목표는 우리가 의식하고 지향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에드워드 비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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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을 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히 주인을 섬기는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 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주님께서 붙들어주는 이, 주님이 선택한 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이’,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주는 이’(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 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러니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 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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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잔뜩 해 놓고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드는 일을 하고서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리피서 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이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꼭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크고 작은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을 때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한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세상은 참 약삭빠릅니다. 언제나 책임져야 할 사람은 없고 공허한 메아리만 남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앞세우며 하느님 앞에 당당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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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전례는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것이 좋다고 배웠습니다. 복사, 독서자가, 해설자가, 사제가 조금 틀릴 수 있지만, 그것을 지적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더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평일 미사 독서는 홀수 해와 짝수 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가끔 독서자가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은 홀수 해와 짝수 해가 같지만, 독서는 다릅니다. 복음이 상황이라면 독서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가 많습니다. 독서자가 짝수 해를 읽어야 하는데, 홀수 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독서자도 인식하지 못하였고, 미사에 참례하신 분들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도 전례는 물이 흘러가듯이 진행되는 것이 좋기에 자연스럽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강론은 결론을 조금 다르게 했습니다. 진실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은 이해와 용서라는 밭에서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중국의 열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왕이 연회를 열고 많은 신하와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연회 중에 왕의 애첩이 한 신하의 희롱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없었던 애첩은 신하의 갓끈을 몰래 끊어 왕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애첩은 끊어진 갓끈을 왕에게 가져가며 신하의 무례함을 암시했습니다. 왕은 이 상황을 지혜롭게 처리하기 위해 연회장에 불을 끄게 하고, 신하들의 갓끈을 모두 끊어 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누가 범인인지 특정하지 않고, 동시에 사건을 무마하며 연회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고사는 왕의 냉정한 판단력과 지혜로운 처세를 보여주며,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모두의 체면을 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솔로몬왕도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아이의 생모와 아이의 계모가 서로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왕은 그럼 아이를 갈라서 둘로 나누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계모는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 아이의 생모는 아이를 계모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왕은 아이를 주겠다고 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주도록 했습니다. 아이의 죽음보다는 아이를 살리는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혜로운 판단으로 죽어야 할 여인을 살려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부정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이 여인이 부정한 행위를 하다 잡혔습니다.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었습니다. 어찌할까요?” 예수님께서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도 율법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이야기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에서도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여름날에 성당에 와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 쌓인 오물을 꺼내는 형제님을 보았습니다. 아침 일찍 와서 큰 솥에서 육수를 끓이고, 친교실 청소를 하는 자매님도 보았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에 남아있는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즐겁게 하는 수녀님도 보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말없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인 저는 그분들의 신발 끝을 풀어드리기에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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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로 맺어졌는지 들려주고 계십니다. 주님 말씀으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독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더욱 이런 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희생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바로 복음에 등장하는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겸손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먼저 하신 분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 길 안에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누가 사랑이 쉽다고 말합니까? 누가 용서하기가 쉽다고 말합니까? 사랑도 용서도 쉽지 않습니다. 아니, 쉽냐고 묻기보다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운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걸으시고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어본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의 끝은 하늘나라의 문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우리 모습을 보여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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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다녀온 이야기들
얼마 전 지인분들과 식사했습니다.
제가 만났던 분들은 모두 인천지역이 고향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옛날 인천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백령도에 가기 힘들었어요. 멀기도 멀고, 돌아오는 배가 안 뜰 때도 많고, 뱃멀미는 또 얼마나 심했는데요. 너울이 일어나면 배 안은 지옥이었습니다.’
저 또한 뱃멀미로 인해 배 안이 지옥으로 변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울릉도에서 독도로 이동했을 때 경험했습니다.
뱃멀미를 사람들은 ‘지옥’이라고 표현합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그 순간을 모면할 어떤 방법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짜 지옥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고통을 모면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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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주님의 종의 삶
“겸손, 순종, 섬김”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시편37,3-4)
오늘 종의 처지 비유가 짧지만 참 심오합니다. 참 아름다운 종의 삶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겸손히 섬기는 종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복음 내용이 소중해 전문을 다시 인용해 나눕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바로 이 종처럼 사는 이가 참 아름다운 성인의 삶입니다. 묵묵히 자기 책무를 마땅히 다하는 순종과 겸손, 섬김의 자세입니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아니라 종과 주인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해서 하느님께 보상을 계산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이런 심정의 발로입니다.
“실상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게 자랑거리는 못됩니다. 그것은 내게 부과되는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불행합니다.”
감히 말하건데 매일 강론을 쓰는 제 심정도 이러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기에 전혀 자랑할 일이 못됩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무한히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갚는다 해도 극히 미미한 일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 은혜를 생각한다면 불평이나 불만은, 원망이나 절망, 실망은 꿈에도 상상치 못할 것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책임을, 운명을 온마음, 온사랑으로 묵묵히 끝까지 감당할 것입니다. 저절로 겸손히 순종하고 섬기는 자세로 살 수 뿐이 없을 것이고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다운 자세입니다. 바로 이런 심정을 대변하는 미사중 ‘연중 평일 감사송 4’입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우리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이지 하느님은 전혀 우리에게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정말 이런 겸손한 섬김과 순종의 삶에 항구할 때 하느님께서도 감동하시어 겸손히 우리를 섬기시고 순종하십니다. 옛 어른의 다음 말씀도 오늘 복음의 지혜와 일치합니다.
“초연함이란 욕망에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다산>
주인과 종의 자세를 확고히 함이 바로 초연함의 비결이자,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아름다운 삶의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이를 일러 수신(修身)이라 하니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대학>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신이란 바로 주인과 종의 관계로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인이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그 관계에 투철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삶을 사는 이가 참 아름다운 성인입니다. 오늘 11월12일은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그 책무를 다하다 순교한 성인입니다. 성인은 1580년 우크라이나의 동방교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성인은 1618년 러시아의 비텝스코 주교로 착좌한 후 희랍정교회와 로마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다가 라틴화되어 가고있다고 비난하는 아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말그대로 순교의 죽음이요, 1867년 비오 9세 교황은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니 동방교회에서는 최초로 성인품에 오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묵묵히 섬김과 순종의 삶을 살다가 순교한 겸손한 성 요사팟 주교입니다.
하느님의 종답게 겸손히 섬기고 순종하며 성인다운 삶을 살 때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제1독서 티토의 고백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 하시는 일입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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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해야 할 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내가
오로지
나이기에
해야 할 일
내가
비로소
나이려면
해야 할 일
내가
기꺼이
나이도록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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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
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다
주님은 밀씀하셨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파괴적인 욕정을 멀리하도록 만드시려는 뜻이었습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으로 인간의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이런저런 덕행을 하더라도 그것으로 아무런 은택도 입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온갖 덕을 다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며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엑카르트는 부정의 길을 다룬 본 설교에서 육채, 영혼, 영과 관련하여 이분법을 피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신중을 기하고 있다. 엑카르트가 본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에페소서는 이교도들의 성적인 방탕, “온갖 깨끗지 못한 일을 하던” 그들의 경력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엑카르트는 이분법을 피하려는 노력을 더한층 기울인다. 엑카르트는 성적인 음란에 대해 설교하라는 모든 유혹을 뿌리친다. 얼뜨기 설교자라면 그러한 유혹을 덥석 물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엑카르트는 정반대로 하고 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은 대립 관계에 있지 않으며, 영혼과 영은 같은 뜻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말한다. 에페소서의 저자는 새롭게 함을 일컬어 새사람의 “영적인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영혼 안에서 일어난다. 영적인 혁명은 육체와 영 모두에게서 일어난다. 혹자는 엑카르트가 우리네 정신의 “낮은 기능물”에 대해 논하는 것을 보고서 엑카르트가 여느 영성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분법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실, 그는 “금반지”라는 부드러운 이미지, 조화의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우리가 이 에너지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지, 고행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들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정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말한다: 자족(自足)이라는 이름의 반지를 끼워라,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피조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277)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성부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이 지상에서 모든 날과 달과 해를 살아가도록 저에게 은총을 주셨나이다. 제 시간은 당신의 영원한 시간에 잠겨 있으니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든 시간 속에 함께 계시나이다. 저를 시간 속에 태어나게 하고 원죄에서 벗어나 영원의 시간으로 들어가게 한 세례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과거는 미래와의 만남이고, 지난해가 새로운 해로 넘어가듯 시간은 당신의 영원한 시간으로 스며드오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제 삶의 모든 날, 저물어 가는 모든 날에 대해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사랑이 저와 함께하며 당신은 날마다 매순간 저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니 당신을 찬양합니다. 이 성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그리고 저희가 시계 바늘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하소서! 모든 순간은 유일하며 당신 사랑 속에서 성장할 기회를 줍니다. 제가 이를 의식하며 기쁘고 감사하게 당신과 협력했던 모든 순간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제가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시간을 쓰거나 허비한 순간을 용서하소서.
예수님, 당신께서 저를 구하셨기에 제 영혼은 당신 안에서 기뻐 노래하나이다.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277)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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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오늘 복음은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는데, 노예제도를 경험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될 수 있고, 겸손에 관한 탁월한 가르침이라고 느껴집니다. 결국 복음에 대한 몰이해는 복음이 저술된 시대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파생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복음의 행간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사실 전제되어야 합니다.
2,000년 전의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150년 전만 해도 이 땅에서도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었으며, 주인의 물건과도 같이 종을 사고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은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이 하루 종일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난 후” (17,8),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 시중을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종이 이처럼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종은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다 하고 나서,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7,10)하고 고백해야 자신의 처지를 아는 종이며 슬기로운 종이었겠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안다, 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종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종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주인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주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리가 아는 만큼 살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삶의 자세와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 취급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자신부터 알고 느끼고 있잖아요. 저는 바보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많은데 사실 바보는 정말 바보가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볼 때 가장 믿음직스러운 종일지 모릅니다. 왜냐고요. 바보는 바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다하고서도 무엇을 더 바라지 않고 다만 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하느님께 보답하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자세는 종의 처지에서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성서의 가르침은 단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자기 삶의 가치로 실천하며 살았고, 그리고 자신의 묘비명에 이 말씀을 새기고 세상을 떠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묵주알」의 저자로 잘 알려진 ‘나가이 다카시’ 박사입니다. 제가 사제 서품을 받았던 곳이기도 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그는 사랑하는 아내는 물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었으며, 그 자신도 또한 백혈병과 피폭자로서 죽는 순간까지도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과 그 지역이 받는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며 죽음 직전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평화를 위한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살았던 신앙의 도시 곧 순교의 도시인 나가사키가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과 삶이 평화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음을 깨닫고 참된 신앙의 증거와 삶을 통해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충실히 사시다가 하느님께 돌아가신 이 시대의 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묘비에 새겨진 성경 말씀대로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인생의 결론으로 『주님의 종으로서 저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비문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 나가이 박사의 고백처럼 주님께서 우리 각자가 놓여진 삶의 자리에서 하늘나라를 위해 무슨 도구로 어떻게 쓰시든, 그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는 주님의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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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일치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
박윤식 [big-llight] 241111. 19:19 ㅣNo.177531
오늘은 ‘일치의 사도’라 칭하는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이다. 성 요사팟 쿤체빅은 1580년경 당시 폴란드 관구였던 현 우크라이나의 볼린(Volyn) 관구에 속한 볼로디미르(Volodymy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가톨릭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던 때로 동방 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대립한 상황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했고,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성인은 수도생활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주인의 딸과 결혼하면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제의를 거부하고, 1604년 바실리오회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해 요사팟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1609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동방과 서방간의 일치를 위해 지도력을 발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함께 입회했던 친구 루트스키는 삼위일체 수도원 원장이 되었고, 그는 폴란드에 새 수도원을 세우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1617년 주교로 임명된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고 교회일치를 위해 더욱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문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하고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와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분리파 주교들이 성인이 실제로 라틴 전례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동방 교회와 맞지 않는다면서 대립주교를 내세웠다. 그래서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지만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며 비테프스크로 사목방문을 가던 중 새로운 정교회를 주장하는 분리파에 의해 1623년 11월 12일 도끼와 총탄으로 죽임을 당해 드비나(Dvina) 강에 던져졌다. 교회일치를 위한 열정으로 인해 ‘일치의 사도’로 불리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 그의 사망 후에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그의 전구로 인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164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복자로,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은 물론 함께한 제자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저는 제자들뿐 아니라 이들의 말과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당신을 믿는 이들이 하나로 일치되게 기도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믿는 이들의 일치의 모범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교회 공동체가 실제로 나누어야 할 사명이다. 이것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가장 중요한 계명과 맥을 함께한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께 결속되어 있음으로 해서 세상에 그분을 알리는 증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은 복음화와 구원의 대상으로 드러난다. 세상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면 그들 또한 아들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오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일치의 사도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을 맞이해,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서 선교 사명에 앞장서야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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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토머스 힐 그린 신부는 계약적인 주종 관계와 사랑의 가족 관계를 비교합니다.
주종 관계는 책임과 의무를 분명하게 규정하지만, 사랑의 가족 관계는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는 환자와 간병하는 사람의 비유로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계약적인 주종 관계는 환자와 직업 간병인의 관계와 같습니다.
간병인이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아 준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남남이며,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간병인은 환자를 돌보는 대가로 돈을 받기에 생각한 만큼 돈을 받지 못하면 그는 그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간병인은 자신에게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면, 환자를 두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환자의 삶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간병인은 자기에게 더 급한 일이 있다면 임종을 지키지 않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죄책감을 느낄 책임도 없습니다. 책임과 의무의 범위가 분명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환자를 돌보는 이가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내는 출퇴근 없이 밤낮으로 그를 돌봅니다. 이 돌봄에 보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만일 환자가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면, 아내는 모든 일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토머스 힐 그린,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63-71면 참조).
오늘 복음의 종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의 그 이상을 하며 주종 관계를 뛰어넘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에는 주종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지만, 마침내 사랑의 가족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그저 몇 가지 계명과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한 계약 관계에 머무르지 말고,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이 되는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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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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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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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공동체 생활 안에서,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성숙하고 균형 잡힌 자아 의식은 어떤 것인지 자주 고민하게 됩니다.
너무 지나친 자기 비하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족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나도 나를 존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모습도 정말이지 봐주기 힘든 꼴불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데, 본인만 스스로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자화자찬한다면, 그 얼마나 웃기는 꼴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균형잡힌 시선이요 한쪽으로 과도하게 지우치지 않는 조화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 직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침을 가르치십니다.
요점은 제자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10절)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자는 종이라는 것, 제자로서의 사도직 수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보상이나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들, 참으로 봐주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껏 부풀려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근본, 원초적 결핍, 태생적 나약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마치 이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 불과 20년 30년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육체는 아무 볼품없이 모습으로 차갑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저 세상 어딘가에서 초조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꼭 쥐고 있던 재물들은 사방천지로 흩어져버렸을 것입니다.
남겨놓은 글도, 명성도 순식간에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도 자부심을 느꼈던 소중한 저서들은 킬로그램당 얼마씩에 팔려 고물상 한켠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인물, 엄청난 존재가 되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허영심, 자만심, 하늘을 찌르는 교만함을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육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위쪽에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나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 나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나는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제자직 수행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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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서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9절) 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나서 겸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 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일만을 시키지 않으신다. 살면서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봉사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섬기는 일을 제법 잘했다 하더라도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지 않아야 한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그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도 알고 자기 직분과 위치가 주는 권위를 드러내야 할 때 분에 넘치는 충동도 꺾을 줄 안다. 교만하지 않으며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영광이나 명예와 권세도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사용할 줄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여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10절). 입으로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덕행을 실천하여도 그것으로는 아무런 은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갖 덕을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며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주님 앞에 자신을 무로 돌릴 줄 아는 자세도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이용하고 쓸고 난 뒤에는 그 빗자루를 좋은 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문 뒤 한적한 곳에 세워 둔다. 즉, “주인이 필요하여 나를 쓰셨고 이제는 내가 할 바를 했으니 내가 차지할 곳은 이곳입니다.” 하는 것과 같다. 주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또한 겸손한 봉사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스승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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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복보다 겸손
저는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후회가 없습니다.
그 방향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 본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니 난처합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방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종에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자신에게 식사 시중을 들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일하며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인은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주인에게 자신을 종으로 써 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서열을 정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에서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하루 종일 동네 슈퍼 앞에 앉아 있다가 오토바이만 지나가면 그 앞을 가로막고 마구 짖어댑니다.
그런데 사실 뭉치가 쫓는 오토바이는 단 한 대뿐이었습니다.
다른 오토바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오토바이는 슈퍼 앞쪽에 있는 한 마트의 배달용 오토바이였습니다.
처음엔 경쟁 마트의 오토바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슈퍼 앞에서 매일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실제 그의 공격 상대는 오토바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마트에서 기르고 있는 누렁이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에 누렁이에게 서너 번 물린 적이 있어서 누렁이가 무서워서 그 마트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마트의 오토바이에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어언 1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뭉치는 기회를 노렸다가 오토바이와 동행하는 누렁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누렁이도 화가 나 뭉치를 덮쳤고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뭉치는 누렁이의 힘에 못 당하면서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떼어놓아서 간신히 뭉치가 큰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뭉치는 끝까지 싸울 기세였습니다.
결국 전문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뭉치가 자신의 서열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뭉치와 누렁이가 자유롭게 싸울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제 누렁이와 뭉치는 입과 발에 보호대 등을 착용하고 철창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놓아두었습니다.
결국 승자는 누렁이가 됐고, 뭉치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뭉치가 다시는 집을 나가 슈퍼로 가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아버지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죽고 맙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게 된 것은 그의 동생 타마르 때문입니다.
타마르의 이복 오빠 암논이 타마르를 탐하고 버린 것입니다.
이에 분노해 압살론은 타마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윗는 압살론을 유배 보냅니다. 다윗에게는 모두가 자녀였지만, 압살론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압살론이 죽었을 때 다윗은 한없이 슬퍼하였습니다.
압살롬이나 타마르나 암논은 다 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자녀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의 자비를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 자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없자 이 모든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금인형은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소금 광산을 지나 소금 사막을 넘어 소금 염전에 다다랐습니다.
염전 앞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금인형은 멈칫하며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니?” 바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들어와서 보렴.” 그래서 소금인형은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습니다.
들어갈수록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점이 녹기 전에 소금인형은 경탄하며 외쳤습니다.
“아.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겠군!” 소금인형은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바다가 아니면 소금인형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인형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다가 아니었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압살론은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의 목적이 겸손이 아니고 자신이 믿는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성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폭정대로 형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폭정은 물론이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페룬(Perun)이라는 최고 신을 포함하여 여러 신을 숭배했는데, 그 신에게 특히 헌신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겸손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종교를
접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위엄을 본 신하들의 말에 그는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심합니다.
서기 988년에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의 그리스 도시인 케르소네수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기 전에 눈병이 있었다고 하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눈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은 블라디미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성인이 되었습니다.
압살론은 겸손에서 출발했지만, 아버지 앞에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미르는 교만함으로 시작하였지만,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겸손해졌습니다.
각자 행복해지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겸손해지는 길을 택했던 블라디미르를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에서는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1년 동안 자신을 물었던 이웃집 개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다 둘이 한 우리 안에 싸우도록 붙여놓았을 때 뭉치는 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삽니다.
불행의 시작과 끝은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완전한 행복과 천국의 길은 겸손임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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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1)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또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바오로 사도가 첫 번째로 원한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고, 그가 두려워한 것은 실격자가 되는 것, 즉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선교활동을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일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생활은 내가 살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나 자신이 살려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잘하고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고, 주님께 고마워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2)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종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로 표현하셨을까?
(1)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마치 종이 일하는 것처럼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좋은 예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8-32)”
큰아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종’으로 떨어뜨렸고, 아버지를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큰아들이 하는 일은 아버지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큰아들 자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일을 한다면, 종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현실을 보면,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렇게 종처럼 억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제 노동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신앙생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3)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내가 나를 위해서, 즉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고, 또 나에게 고마워하시는 분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을 우리가 먼저 고마워해야 하는데, 또 우리의 신앙생활과 회개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것을 우리가 먼저 기뻐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우리의 회개와 신앙생활을 고마워하시고, 먼저 기뻐하십니다.
<나를 식탁에 앉히고, 내 곁에서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17장에 묘사되어 있는 주인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의 일반적인 주인의 모습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인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온 것 자체를 크게 기뻐하면서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의 그 심정이 바로 하느님의 심정입니다.
4) 대부분의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착하게 살아라.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라고 자주 말합니다.
자녀들은 아직 철이 없을 때에는 그 말을 ‘잔소리’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철이 들면 부모의 말이 진리이고, 그 말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잔소리’가 아니라, 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즉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한 ‘진리’이고, ‘은총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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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7,7-10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종에게 잠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어서 밥을 차리라고 닥달하는 모습이, 심지어 본인이 밥을 먹는 동안 그 옆을 딱 지키고 서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도와주는 ‘시중’을 들라고까지 요구하는 모습이, 종의 입장은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폭군’의 모습으로 비쳐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정말 그런 분이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오늘 비유 속 종처럼 이리 저리 치이고 바빴다면 그건 하느님께서 나를 닥달하시고 휘두르셔서가 아니라, 내가 내 욕심을 더 채우고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과욕을 부렸기 때문이었지요.
오늘 복음 속 비유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의 종과 주인의 관계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금새 알아볼 수 있지요. 진정으로 고생하고 수고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쉬거나 자는 동안에도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돌보시고 섭리하시느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당신 백성인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시는데, 그분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는지요?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하고 약한 ‘종’인 주제에, 제 분수도 모르고 ‘주인’이신 하느님께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하며 그분이 쉬시지도 못하게 들들 볶고 있는건 아닌지요? 그런 모습이야말로 ‘주객전도’를 넘어 주종이 뒤집어진 ‘막장’이 아닐까요?
생각이 짧은 우리는 ‘종’이라는 표현에 꽂혀서 욱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를 ‘종’에 비유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함을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니 나의 재물 능력 시간을 들여 뭔가를 한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도, 그분께 대가를 요구할 권리도 없지요.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저는 마땅히 당신 뜻에 따라 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고 봉사한다고 해서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위가 높고 큰 재물과 권력을 가졌기에 마땅히 누려할 ‘권리’처럼 여기지요. 하지만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우리 하느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땅 짚고 헤엄치기’ 수준밖에 안되는 우리의 사랑과 선행을 크게 기뻐하시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고마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되찾은 양의 비유’이지요. 그 비유에 등장하는 참된 목자는 잃었던 양을 되찾은 것을 크게 기뻐하며 동시에 되찾은 그 양에게 고마워하는 존재입니다. 살아있어줘서, 무사히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이지요. 그런 하느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깊이 체험한 이들은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을,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뜻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님의 일꾼으로 뽑혔다는 사실에, 부족하고 약한 내가 그분을 위해 뭔가를 해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모범적인 신앙인의 마음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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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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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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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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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
<2024.11.12> 아침을 여는 묵상 (딤후 1:1~8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
❚ 성도는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참된 믿음과 확신과 은사와 능력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고난을 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우리는 생명의 약속인 복음을 맡은 자입니다(1~2절).
바울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사회적 배경이나 학문,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약속에 근거하여 사명을 감당했노라고 고백합니다(1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날마다 우리의 삶에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2절). ‘긍휼’은 사도 바울의 서신중에 유일하게 디모데에게만 사용한 인사말입니다.
주님의 뜻에 의해 부름 받은 사역자답게 썩어질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욕망과 야망을 위해 세상과 사람 앞에 비굴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신 계획을 이루어 가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을 담대하게 증거하며 살아가는 사역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자체를 의미하는 긍휼,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평강으로 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얼마나 큰지 알기에,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기에 오늘도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우리는 사명을 위하여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3~5절).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 전도에 충성을 다하는 디모데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디모데의 신앙 내력을 언급하고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쉬지 않고 드리는 간구 가운데 디모데를 위한 간구를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온 하나님께 디모데를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3절). 또한 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해서 그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고백합니다(4절). ‘눈물’이라는 말은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면서 모종의 고난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디모데는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거짓이 없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5절).
목사인 내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를 생각하는 바울의 마음 절반이라도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게으르고, 나태한 목자입니다. 우선순위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합리화시켜서 바꾸는 참 못된 목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워 감히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뻔뻔하게 다시금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주님의 능력을 간구합니다. 기도를 통해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으며, 성도를 향한 간절함을 다시금 불태우는 바른 목자로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가끔 딸들의 언행을 보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애들이 목사 딸 맞어??’ 그런데 결국 자녀들은 부모를 닮기 마련인데, 내가 가정에서나 자녀들에게 신실한 믿음의 삶을 보이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바른 신앙 교육을 통해 디모데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기도할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는 통로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온전히 회복하여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은사를 맡은 자입니다(6~8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함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 하게 하여, 두려움 없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6~7절). 주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고난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혀 고난 받고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8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거짓 없는 순결한 믿음을 통하여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은 당연한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결코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주신 은사를 다시금 회복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아울러 설령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한다면 그 자체를 영광스러움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능력을 공급 받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으로 감당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고난이 있더라도 멈추지 말고 은사를 맡은 자답게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을 입은 자답게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고난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딤후 1: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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