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의 새벽 편지-1977
신심명145
동봉
제3칙
제7장 진여眞如
제7절
신심이란 본디부터 둘이아니요
둘아님이 바야흐로 신심이나니
언어의길 끊어져서 표현안되고
과거미래 아니로다 지금이로다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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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信心을 풀어나갈 때
'마음을 믿는다'
'믿는 마음'처럼
믿음이 동사활용이고
마음이 목적어로 끝나면
단출하기에 덧붙일 말이 없다
하나 목적어가 따로 있을 수 있다
가령 '믿는 마음'이라 했을 때
무엇을 믿는 마음이냐다
여기서 대답은 다양성을 지닌다
자, 신심은 분명 둘이다
결코 하나가 아니다
신심은 둘 이상이다
셋이고 넷이고 대여섯이다
신심은 예닐곱이고 여남은이며
백팔이고 천팔십이며 삼천이다
팔만사천이고 천백억이며 무량수다
수로 헤아릴 수 없는 게 신심이다
뭇 생명이 지닌 간절한 소원이
신심으로 연결된 까닭이다
어떤 사람은 부처를 믿고
보살을 믿고
나한을 믿고
산신을 믿고
칠성을 믿고
용왕을 믿고
장군을 믿고
하늘을 믿고
땅을 믿는다
그렇게 믿음은 다양하다
세계 인류가 모두 몇 명이라고?
자그마치 70억이라 한다
각자 한 가지 소원만 있어도
무릇 70억 가지에 이른다
마음속에 지닌 소원이
어찌 하나로 만족하겠는가
자신의 소원도 있겠지만
아내, 남편, 아들딸, 부모님과
스승과 제자들과 동료들을 위한
소원까지 들먹이면 꽤나 될 것이다
믿음이라고 하니까 종교로 번진다
'나는 교회도 성당도 안 나가요
굳이 얘기하자면 나는 불교요'
'나는 믿는 게 내 양심이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법 없이도 살지요
내 믿음은 신뢰고 정의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나와 내 주먹을 믿소'
'나는 오직 내 마음을 믿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
산신, 용왕, 칠성이 누군지
예수님, 부처님이 누군지 몰라요
그러나 혹 누가 물어온다면
나는 불교라고 당당하게 얘기해요
어렸을 때는 할머니 어머니가 나가고
결혼한 뒤는 집사람이 나가요
나는 가끔 집사람을 위해
운전기사는 잘하는 편입니다
묻는 사람이 수행자라 그럴까
'교회라, 아닙니다
배냇적부터 불교입니다
종교 용어로 모태신앙이지요'
'1년에 딱 한 번 정도 절에 가는데
그날이 곧 초파일날입니다
그러나 법당에는 안 들어갑니다
애들은 절에 안 갑니다
아예 가자고도 안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다니면 되지요'
믿을 신信 자에 마음 심心 자
신심은 실로 다양하다
이를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동사활용형 믿음信은 하나겠지만
믿음의 대상은 끝이 없다
믿음의 강약도 또한 다르다
어떤 이는 금강경이고
어떤 이는 대비주고
어떤 이는 법화경이고
어떤 이는 천지팔양신주경이다
어떤 이는 나무아미타불이고
어떤 이는 관세음보살이고
어떤 이는 지장보살이고
어떤 이는 오직 절拜이다
화두 들고 참선하고
화두 없이 참선하고
앉으나 서나 늘 명상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참구한다
활용동사 믿음은 비록 하나지만
목적어 마음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래서 썽찬은 신심명에서 말한다
'믿는信 마음心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곧 신심이라'고
'신심信心'을 두고
이를 한 단어로 보느냐
혹 두 단어로 보느냐에 따라
내용은 으레 달라지게 마련이다
동일한 단어 뿌리는 '신심'이지만
두 단어는 동사와 목적어로 나뉜다
썽찬이 장시長詩 신심명을 쓸 때
신심의 다양성을 알고 있었다
이토록 복잡한 믿음 형태를
간결하게 만들고 싶었다
브레너의 빗자루 논리가 아니라
오컴의 면도날 논리라고 할까
선禪을 닦아가듯이
신심도 단출해야 한다
선禪의 관조示는 단순單이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게 선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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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연파 신현철 선생의 찻잔
구상에서 인상으로의 전환/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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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3/2020
곤지암 우리절 선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