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열
예술작품이라면, 무조건 발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검열이 있었다.
검열에는 정치 권력이 작용했고, 여론이 작용했다.
검열은 원칙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작품을 검토하여 결정한다. 그러나 문화시장이 팽창하면서 사전 검토가 불가능해지자 사후 검열로 바꾸었다. 공중도덕을 헤치거나, 권력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이 해당되었다. 처벌 대상자는 생산자(작가), 출판사, 극장감독이 대부분이었다.
검열을 받고 출판금지 대상이 되면 생산자는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 출판사도 경제적 손실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체 검열을 하였다. 따라서, 작가도 출판사도 몸조심하는 효과를 노렸다.
문제는, 검열의 기준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정권 교체가 자주 일어나는 곳일수록 심했다. 혁명-왕정 복고가 일어난 프랑스가 심했다.
성경해석에서 문제들이 나타났다. 롯이 딸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건, 다윗왕이 내연여 바사바의 남편을 전장으로 몰아내어 전사케 한 사건, 솔로몬 왕이 수백 명의 여자와 간통한 사건을 희석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영국은 왕실비평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러나 보수당이 집권하면서 여왕은 국모가 되었다. 왕실 비판의 경우는 법이 아니고, 관습을 따랐다.
권력자 비판은 그림에서는 삽화 형식으로 많이 나타났다.(오늘의 시사만화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검열도 대중의 인기가 높은 작가를 건드리는 것은 꺼렸다. 여론이 검열의 역할을 하였다. 대작가가 되지 전의 일반작가는 출판사에서 먼저 검열했다.
(이때의 작가는 좁은 독서 시장, 비평(이때의 비평은 말이 비평이지, 지금 우리나라 정치권처럼 비난과 욕설로 뒤섞여 있었다.)과 검열을 피하려 최대한 연구하고, 노력했다. 런던 뒷골목을 다룬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대중의 인기가 워낙 높아서 눈에 가시였지만 손대지 못했다.
검열의 일반적 원칙은, ‘성숙하고, 부유하고, 권력자들이 읽는 책은 덜 위험하고, 덜 퇴폐적이다.’라고 평가했다.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공산당 선언’이 검열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이다.
작가들도 검열을 피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보봐리 부인’의 경우는 당국이 무지막지하게 삭제했다. 지식인들의 플롤베르의 지지가 터져나오자 출판사는 돌아서서 웃었다고 한다. 왜냐면 매스컴이 이런 문제를 다루면 책이 많이 팔리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그랬다.
디킨스도 대중의 인기를 잃지 않으려 자신의 작품을 끊임없이 수정했다고 한다. 당국도 대중의 인기가 높은 유명작가들(플로베르, D.H 로렌스, 제임스 조이스 등)은 일부러 모른 척 했다. 하층민을 대상으로 하는 저질작품을 주로 검열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것이 하류층이 상류층을 미워하는 이유의 하나였다.
억압적인 검열제도는 1870년의 나폴레온 3세의 몰락 이후로 많이 완화되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 였다.
카톨릭은 중세 이래로 검열이 아주 심했다.
일반 사회에서는 허용되는 책도 카톨릭에서 금서로 정했다. 카톨릭의 검열도 19세기에 와서는 많이 풀어졌다. 그러나 카톨릭 세력이 강한 곳은 검열 강화가 더 오래 지속하였다. 정부이든, 종교이든, 대중이든 권력이 강해지면 검열도 강화되었다.
==> 결국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가는 검열을 더 쉽게 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