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16
7월12일[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CBjvLmYmLk
[서울대교구 이창준 세례자요한(중계양업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그냥 순박함이 아니라 슬기로움을 토대로 한 순박함입니다. 슬기로움 역시 순박함을 기초로 한 슬기로움입니다!>
굽이굽이 험난한 산맥들과 다양한 유혹거리들이 산재해있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음 깊이 새겨둘 정말 필요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 말씀만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우리 삶이 훨씬 평화롭고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오 복음 10장 16절)
선과 악이 공존하는 요동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조건 착해빠져서만은 안될 것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 참 많이 봤습니다.
어디 가나 사람 좋다는 말 듣습니다.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갑니다. 언제나 속아 넘어가고 이용당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뱀처럼 슬기로운 태도입니다. 슬기로움이란 지혜로움입니다.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정확한 식별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균형감각을 지니고 상식을 중요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약삭빠르고 계산적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비둘기처럼 순박한 자세가 또한 필요합니다. 그냥 순박함이 아니라 슬기로움을 토대로 한 순박함입니다. 슬기로움 역시 순박함을 기초로 한 슬기로움입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적락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
<(2)경쟁력 있고 전문성 있는 그리스도인>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 주신 가르침은 너무나 강력하고 혁신적인 것이어서, 때로 수용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
원수를 사랑하여라. 누가 오른 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까지 대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거던 십리를 가주어라.”
그로 인해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갈등과 방황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선해야만 하고, 세상의 불의 앞에서도 그저 참아야만 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야만 하고, 결국 한 걸음 뒤쳐져야만하는가? 늘 손해봐야 하고 바보처럼 살아야만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어느 한쪽에 지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이웃들 앞에서 순수하고 순박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험하고 악한 세상, 이리떼들과 늑대떼들이 우굴거리는 위험한 세상 안에서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오 복음 10장 16절)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ㅈ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적락하고 말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9l-2hwT5Gg
++++++++++++++++++
<사람에게 실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송봉모 신부의 상처와 치유에 대한 강의 중에 많은 사람이 ‘용서’와 ‘화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며 이런 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성당 단체에서 한 자매가 다른 자매님의 말에 상처를 입어 마음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정과 기도 끝에 어차피 성당을 다니기 위해서는 그 자매를 다시 보아야 하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자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도리어 그러더랍니다. “이제야 네 잘못을 뉘우치는군!”
결국 화해하려다 더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 실화는 더 충격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어렸을 때 성추행당했던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은 오랜 노력으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해를 청하여 아버지와 화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딸이 결혼하여 또 딸을 낳았는데, 자유롭게 딸 집에 드나들던 아버지는 어느 날 손녀딸에게도 또 몹쓸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문제는 위 자매들에게 뱀처럼 슬기로운 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여지라고 하시며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어떤 특정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세상에서 만나게 될 보통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며 제자들에게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 사람을 믿으면 안 될까요? 영화 ‘불한당’에서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지…. 상황을.”
르완다 종족 대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임마쿨레는 자신의 책에서 모든 인간이 상황이 바뀌면 다 배신하게 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자신의 절친들도 종족이 다르다고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고 목숨 걸고 자신을 숨겨주던 목사님도 상황이 어려워지자, 그리고 자기 목숨을 위해 살아남더라도 무인도에 가서 사람 만나지 말고 살라고 했습니다.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이렇게 만든 벨기에는 군대를 가장 먼저 빼버렸고 미국과 유럽도 모른 채 눈을 돌렸습니다.
이때 믿을 분은 하느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기도에 할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한 임마꿀레에게 절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평화를 주셨습니다. 한 사람 들어가기도 어려운 작은 화장실에서 여덟 명이 석 달 동안 숨어 살면서 그녀는 사람을 절대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께 의지하였습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뱀처럼 슬기롭게 되지 않으면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섭니다. 꼬마는 평생 처음 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 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 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립니다. 그리고 아빠는 아이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까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다정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오직 믿을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새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의 제자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비둘기와 뱀의 두 모습을 동시에 지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두 상반되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뱀이 되면 하느님께는 비둘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슷한데 다른 것을 ‘짝퉁’이라고 부릅니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짝퉁은 사용하면 진짜와 다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사실은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지방에서 서울로 가려면 박달재 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한 선비가 주막에서 하루 지낸 뒤 서울로 올라가려는데 주모가 선비에게 보따리를 하나 주었습니다. 선비가 ‘이것이 무엇이오?’하고 물으니, 주모는 ‘보따리에 싼(Pack up) 것은 비지떡입니다. 가시다 출출하면 드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 좋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두부를 만들면 남게 되는 ‘비지’라는 의미가 생겼습니다. 식당에서 두부를 먹고 나면 덤으로 ‘비지’를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싼 게(Cheap) 비지떡’이라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검사는 법과 정의를 실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과 검사가 권력의 하수인이 되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정치경찰, 정치검사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종교도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공동선을 위해서 연대할 때는 험난한 세상의 파수꾼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권력의 맛을 들이면 회칠한 무덤처럼 됩니다. 심하면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도 듣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비슷한데 다른 말을 꼭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솔직한 것과 직설적인 것’이 있습니다. 비슷한데 느낌은 아주 다릅니다. 솔직한 것에는 ‘측은지심’의 마음이 있습니다. 직설적인 것은 현상만 있습니다. 종교는 말씀이 있고, 말씀에 따른 현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과학은 현상을 먼저 연구합니다. 그 현상을 정리하면 이론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며칠씩 잘 먹지도 못하고 따라다니던 군중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복하신 후에 나누어 주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이 신발을 벗으니, 냄새가 심했습니다. 직설적인 신부님은 ‘어이구 이게 무슨 냄새야!’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한 신부님은 ‘열심히 일했나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직설적인 말은 때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울고 싶은데 뺌을 때리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당당한 것과 자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당당합니다. 욕심이 없으면 권력의 유혹에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당당하게 순교의 화관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도, 헤로데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많은 젊은이가 승리의 그날까지 당당하게 전진하였습니다. 자만한 것은 마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빌라도와 대사제는 자만했습니다. 자만한 사람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타인의 잘못과 허물을 쉽게 단죄합니다. 세리의 기도를 무시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웃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진심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헌금의 정성이 중요합니다. 불의에 맞서 일어설 수 있다면 당당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무시하고, 타인의 잘못과 허물을 쉽게 단죄한다면 자만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박해를 당해왔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미움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박해를 면치 못했고(요한 3,17; 15,18), 수난에서 절정을 이룬다(마태 23,31-32).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이 박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 역사 안에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라서 그분과 함께 그분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16,1-3). 그들 역시 그분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하고 그분이 받으신 세례를 받아야 한다(마르 10,38-39; 마태 20, 22-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박해를 당하신다(사도 9,4-5; 콜로 1,24). 제자들은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며(필립 1,29) 기쁘게 생각하였다(1베드 4,12-14).
자기 동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신뢰하셨으며(마태 26,53; 요한 16,32),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루카 23,34). 예수께서는 박해를 참아 견디는 최고의 표양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보여주신 태도를 제자들도 스승처럼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마태 5,44; 루카 6,27-28; 로마 12,14), 이겨내라 하신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마태 10,23; 사도 13,50-51). 그러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죽임을 당할 것을 항상 각오하여야 한다(마태 10,16-39; 요한 16,1-4). 이것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하느님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끊고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한 16,33).
제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판을 받을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참조: 마태 10,19-20).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할 때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지혜를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알려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삶이 중요하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가 있는 곳에 스스로 찾아가 순교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현실적으로 분별하여 박해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순교는 철저하게 하느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우리의 ‘의지’나 ‘신념’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박해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 주시는 일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처럼 슬기롭다.’는 것은 현실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박해로 드러나는 악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와 반대로 ‘비둘기처럼 순박하다.’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신비를 드러내신다는 순수한 믿음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를 뜻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순교는 ‘죽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생명과 사랑’,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순교의 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피를 흘리는 박해나 순교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명과 사랑’,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요즘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은 모두 다 피할 수 있는 신앙인다운 판단력을,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분께 향하는 판단력과, 가장 절망적일 때 그분께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키워 주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아멘.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와 순교는 현실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16-23)
1)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을, 21절의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 때문에 가족의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경우라면, 바로 그 가족이 ‘양들’을 박해하는 ‘이리 떼’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식구들이 종교와 신앙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옛날이야기만은 아니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과 가족을 함께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고, 다른 박해보다도 더 큰 인내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라는 말씀을, 22절의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은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어떻든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단체나 집단 내에서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앞의 권고와 거의 비슷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말’로 논쟁을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논쟁은 적대감과 반감만 키우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바르게 처신하라.’는 말과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신앙인답게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것이 미움과 박해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3) “뱀처럼 슬기롭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신앙인의 ‘분별력’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분별력’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하는 능력,그리고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과해야 하는 일을 판단하는 능력입니다.그런데 없었던 능력이 원한다고 해서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고, 주님께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들을 늘 마음에 새기고 ‘온 삶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말씀은, 악에 맞서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과 용기가 없어서 맞서지 못하고 참기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에 선으로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쳐서 없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는 말씀의 핵심 가르침은 ‘피하여라.’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중단하지 마라.”입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신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는데, 그들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했습니다.(사도 8,4)
4) 오늘날에도 박해와 순교는 현실입니다. 결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이론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박해가 일어나고 있고, 누군가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또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충실한 신앙생활’ 자체가 곧 ‘순교의 삶’입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뱀에 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뱀의 유혹에서 시작됩니다. 간교한 뱀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있는 욕망을 들추어내고 그들을 죄짓게 만듭니다. 비둘기는 창세기 8장의 노아의 홍수에 등장합니다. 비가 그치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비둘기는 마른 가지를 물고 옵니다. 이레가 지난 후 다시 날려 보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땅에서 물이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슬기롭다는 것은 분별력이 있고 치밀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뱀이 슬기롭다고 말씀하시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오늘 독서의 표현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순박하다는 것은 성실하고 단순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길을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것으로 들립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
분별하고 식별하는 것, 그리고 성실하고 단순한 것은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필요한 자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세상의 뜻인지, 무엇이 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불의한 것인지 분별하고 그 길을 묵묵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한 결과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이요, 모든 이로부터의 미움, 그리고 형제들과 부모 자식 사이에서의 분열과 죽음임을 소개하시며, 그런 상황 안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말라고 이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에 익숙한 시대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이 평화롭기를, 가족이 서로 화합하고 안정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그와는 달리 혼란과 갈등을 체험할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상황을 마주한 이들이 신앙의 무익함을 외치며 교회를 떠나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반드시 장애물을 만납니다. 주일을 지키느라 때로는 가족들, 친구들과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혼자만 잘났냐는 질투를 사기도 하며, 누군가를 배려하느라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듯합니다. ‘슬퍼하지 마라. 복음 때문에 네 안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징들이니. 용기를 내어라. 절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니.’
복음 때문에 어떠한 혼란과 다툼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누린다고 생각하는 안정과 평화가 그들이 받을 보상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 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에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 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 12)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0,16)
우리 모두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점은 창조 세계의 저변에는 양극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실재를 하나로 아우르는 방식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더욱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처세술(=성공과 출세 지향)이 난무하는 험한 세상에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전한 균형미를 유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다원적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자면 어려움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다고 인정합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균형 유지’가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는 확신을 오늘 복음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10,16)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균형 감각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연이 바로 안성의 ‘바우덕이 풍물단’의 ‘외줄타기 어름사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종 안성에 있을 때 찾았던 남사당 공연장에서 어름사니의 외줄 타는 모습에서, 마치 헨리 뉴웬이 서커스 단의 ‘공중 곡예사’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처럼 저 역시도 그런 느낌을 어름사니에게서 느낍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듣는 표현 중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표현이 오늘 복음의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라는 뜻을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16)라고 말씀하신 다음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리 떼와 같은 의회 의원들과 총독들과 임금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자면, 제자들에게 자기 신원을 보존하고 끝까지 견디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와 처신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사람들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조심하는”(10,17) 슬기로움이 요구됩니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막무가내로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슬기롭지 못한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는 표현을 역사가, 우리 경험이 이를 익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신하라.”(10,23) 하고 권고합니다. 때로는 쏟아지는 소나기는 잠시 피하면 그치는 것처럼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고집스럽게 객기를 부리는 것보다 내일을 기약하면서 순박하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끝까지 견디다 보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0,22 참조)라고 권고합니다.
참으로 슬기롭고 순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원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현실입니다. 슬기로움과 순박함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의 악에 두려움 없이 맞설 것이고 지혜롭게 그 악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10,20)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구상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무엇일까요? 호모 사피엔스, 즉 인간입니다. 최근에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온갖 동물이 모여드는 남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의 물웅덩이에 스피커를 설치한 뒤, 사람 말소리와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동물들은 사람 말소리에 40% 더 빠르게 반응하며 도망가는 것입니다. 어렵게 사냥한 먹이를 물고 가던 표범은 사람 말소리가 들리자마자 먹이를 포기하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도 사자 소리에는 오히려 스피커에 달려들어 망가뜨렸지만, 사람 말소리에는 서둘러 도망가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물리적인 힘이 세지도 않은 인간입니다. 빨리 달리지도, 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동물이 두려워하는 지구상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살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외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에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생각할 수 있게 해서 모든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또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커다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다, 힘이 없다 등의 말로 자기 할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며 지혜롭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아, 다시 이 세상에 그 사랑을 전달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의 만족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마음일까요? 부모가 자식을 군대는 보내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먼 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보내는 마음일까요? 아무튼 이런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자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능력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총독이나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 앞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연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기에 부족하고 나약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이 함께 하시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곁에 주님이 분명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굳게 믿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은 내가 아닌,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나를 발견하면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항상 참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용수철을 누르듯이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신앙의 가치관을 확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언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셨는데 어찌 십자가를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 앞에 성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은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넘어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상황이 변화되길 바란다면“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하고 마음속으로 묻기를 바랍니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길 기도합니다. 모함이나 뒷담화에 마음 상하지 말고, 뒤에서 딴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하며 상처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까지>
2024. 07. 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마태오 10,16-23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끝까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1)
늘 믿음
불신 뚫고
끝까지 믿음
오롯이 참 믿음
늘 희망
절망 헤쳐
끝까지 희망
오롯이 참 희망
늘 사랑
미움 녹여
끝까지 사랑
오롯이 참 사랑
늘 함께
홀로 헐어
끝까지 함께
오롯이 참 함께
늘 살림
죽임 밀쳐
끝까지 살림
오롯이 참 살림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난세(亂世)중 영적승리의 삶>
“회개하라, 지혜로워라, 걱정하지 마라, 희망하라, 인내하라”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엊그제 처음 발견한 어휘가 있습니다. 모 정치인이 대표직에 도전하면서, “나는 단언컨대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르기가 돼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먹사니즘은 ‘먹고살다’와 이념, 철학등을 의미하는 영어 접미사 ‘ism“의 합성어로서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조어라 합니다.
예전 언제나 자주 듣는 말이 말세라는 단어였는데 어지럽고 혼란한 현실이 늘 말세요 난세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한국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지금부터 32년전 1992년 제가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미사에서 한 명강론 제목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인데 지금도 자주 강론에 인용되는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때나 여전히 난세같은 혼돈의 세상입니다. “호주는 재미없는 천국,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얼마나 한국이 역동적 사회인지 깨닫습니다.
‘먹사니즘’이 아니라 ‘하느이즘’이 우선입니다. 제가 방금 생각해낸 하느님 주의가 하느이즘입니다. 예나 이제나 늘 난세입니다. 난세를 극복하는 근본적 처방은 하느이즘의 즉 하느님 중심 삶의 생활화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은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비단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정말 겸손히 기도하며 지혜를 청하는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종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기도해야할 난세같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은 난세를 살아가는 지도자뿐 아니라 모두가 경청해야 할 말씀같습니다.
“풀이 우거진 수풀도 사람이 자주 다니면 길이 생긴다. 지도자는 앞장서서 그 길을 간다.”<다산>
묵묵히 하느님의 빛의 인도하에 길을 내어 수풀같은 난세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바른 도리로 이끈다면 누가 바르지 않겠는가?”<논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말씀에 따라 바르게,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선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고맙고 반갑게도 복음의 예수님이 호세아 예언서 마지막 부분에서 호세아 예언자가 난세를 살아가는 영적승리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 당대나 호세아 시대 역시 난세중의 난세였습니다.
첫째, 회개하라!
회개를 통해, 회개의 여정을 통해 끊임없이 내적혁명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주님의 회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느님의 말씀도 참 아름답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에 정통한 신비가요 영성가요 사랑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회개의 축복을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이를 알것입니다.
둘째, 지혜로워라!
참된 회개의 열매가 겸손과 지혜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진 삶입니다. 옛 사막교부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우선적 관심사도 삶의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지혜를 회개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새벽 강론 쓰는 시간은 기도시간이자 회개시간, 그리고 지혜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주신 주님의 말씀은 오늘 이리떼들 무수한 난세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니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우리의 난세를 타개하는 참 좋은 처방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할 때 이런 슬기와 순박함의 선물입니다.
셋째, 걱정하지 마라!
몰라서, 주님을 떠나 걱정이요 불안이요 두려움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난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주님과 함께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위로와 격려말씀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무지로 인한 걱정과 불안, 두려움입니다.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이, 믿음의 빛이 걱정과 불안,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 말씀의 빛입니다.
넷째, 희망하라!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상징하는바 희망의 주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도래의 희망이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원천입니다. 희망해서 사람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선택하여 희망을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날마다 바치는 희망의 주님을 노래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순례자 되어 절망중에도 주님을 희망하며 희망의 여정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내하라!
최종의 승리자는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는 인내의 사람입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사랑, 인내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희망의 하느님께 눈길을 둘 때,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백절불굴의 믿음입니다. 이런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기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당시 주님 믿음으로 인한 처절한 박해상황임을 짐작합니다. 양상만 다를분 오늘날도 악순환처럼 반복되는, 연옥같은 힘든 상황을 살아가는 분들은 힘을 내십시오.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믿음이 나를 구원합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정주서원은 주님 불러 주신 삶의 제자리에서 한결같이 항구하고 충실한 이런 인내의 삶을 뜻합니다.
난세의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인간 고난의 현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묵묵히, 충실히, 끊임없이 회개하고, 지혜롭게, 걱정하지 말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견뎌내는 인내의 믿음으로, 날마다 난세중에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조심은 하되 걱정은 않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어제와 오늘의 말씀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평화를 빌어줘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 마라! 발의 먼지를 털고 ‘쿨’하게 떠나라!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파견이 기본적으로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양들이 이리 가운데 가면 당연히 잡아먹히는 것이 뻔한데 주님께서는 그런데도 가라고 하시는 것이며, 그런데도 사람들을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보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게는 내가 너희를 위해 걱정하고 있으니 너희는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랑이 느껴지며 나의 사랑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걱정한다면 단순히 걱정하는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더 큰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어리지만 부모가 있기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더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걱정을 내가 한다면 부모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부모가 없다면 내가 걱정해야 하고, 부모가 있어도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걱정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걱정해주시는 하느님이 계신데도 걱정한다면 하느님의 그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표시지요.
그렇다면 조심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걱정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이고, 조심은 그래도 생산적이기에 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걱정은 진정 쓸모가 없고, 조심은 안 좋은 일을 예방하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앙적으로 보면 하느님이 보살펴주시니 조심 안 해도 된다는, 그런 무모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조심하는 것은 조바심하는 것과는 다르고, 방심하는 것과는 반의어이며, 깨어있는 것과는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방심하게 되면 악마가 침입해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에 비해 조심하게 되면 악마가 침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깨어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바 조심은 다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걱정하지 말고, 내일 보게 되겠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10,16ㄱ)
<박해의 모습!>
오늘 복음(마태 10,16-23)은 '열두 사도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양들의 모습'이 박해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마태 10,16ㄴ) 되어,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겪게 되는 박해를 잘 이겨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지금의 우리가 겪고 있는 박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부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가?'
저는 그것이 바로 '세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들, 곧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지나친 탐욕과 욕심'이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박해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자리에서는 세상 가치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하느님보다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박해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해를 이겨냅시다!
'세상 가치'는 악(惡)이 아니라 선(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첫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자녀에게 부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성당에 나가지 말고 공부해." 많은 자녀들이 냉담하고 있는데, 아마도 부모가 자녀들을 이렇게 냉담시키지 않았을까?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자녀들을 돌아오게 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2KuVPil57vg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우리 멋대로
살아온 길에서
돌아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돌아갈 수 있어야
회개이고
돌아가야
진짜
복음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독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지혜의 말씀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혜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보여 줍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주님 행세를
하면서 살아온
우리의 교만을
기어가며
허물을 벗는
슬기로운 뱀이
가르쳐 줍니다.
순박한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가며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순박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미루지 않는
기쁨이며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이와 같이
만남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받지 못한
날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얼 말할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무수히
예수님과
마음을 나누는
지혜와 순박함이
끝까지 주님을
따르게 하는
부르심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걱정이 아니라
내어드리는
기쁨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의 여정을
오늘도 함께
걸어갑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