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의 내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의 사진은 ‘내가 이런 때가 다 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지요. 목소리도 그렇습니다. 지금 제가 사용하는 ‘빠다킹’이라는 닉네임은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봐서 내 목소리가 느끼한가?’ 싶었지요. 그래서 직접 미사 중의 제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정말로 느끼했습니다.
분명 제 모습인데도 낯설고, 분명 제 목소리인데도 제 목소리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내 모습도 변화해서 잘 모른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잘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몸에는 50~7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지며, 그 중에서 200만~300만 개는 시시각각 교체됩니다. 적혈구의 수명은 약 4개월이고 백혈구의 평균수명은 거의 1년입니다. 피부세포의 수명은 약 2~3주에 불과하고, 결장세포는 약 4일 후에 죽어갑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의 몸은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더불어 내 이웃 역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결혼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교회 혼인법에 있는 ‘불가해소성’의 기원이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이시지요.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당시는 남자 중심의 사회였고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거룩한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내를 버릴까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그래서 낯설게 느껴져서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혼이 굳이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배우자를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낯설게 느끼니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몸 자체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내 배우자 역시 계속 변화합니다. 그 변화를 인정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혼인 무효’가 될 만한 행동까지 무조건 인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변화들을 인정하면서 생활한다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을 소홀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