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은 입지조건부터 방어에 최적화되어 있었는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침입자들은 서쪽 방면으로 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조건에, 기존의 공성법으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크고 높은 성벽까지 쌓은 콘스탄티노플은 재래식 성곽 요새의 극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 육로로 접근 가능한 서쪽의 성곽은 3중 구조이다.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새로 성벽을 쌓았고, 이는 도시의 제1 방어선이 됐다. 총 6㎞ 길이의 성곽은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었다.
성벽의 가장 안쪽에 내벽(inner wall, mega teichos, "great wall"), 그 바깥에 조금 낮은 외벽(outer wall, mikron teichos, "small wall")이 있었으며, 이 외벽과 해자 사이에는 parateichion라고 불리우는 흉벽(胸壁)이 자리했다. 각 벽 사이에는 페리볼로스라는 병력이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성벽 사이는 방어용 탑의 샛문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 해자의 모습. 해자를 가로지르는 막벽이 보인다.
내벽의 높이는 무려 12m에 달했으며 두께는 4.5~6m정도였다. 벽의 안쪽은 모르타르로 채워졌고 잦은 지진에 대한 보강도 이뤄졌다. 총 96개의 탑들이 20~70m마다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탑들은 높이가 15~20m, 폭이 10m 가량이었다. 막벽으로 외벽과 내벽이 50m 간격으로 엇갈려 있었다.
탑의 최상부, 즉 옥상에는 전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탑 내부는 2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탑의 아래층은 도시 쪽으로 열려 있었고 창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위층에서는 바깥쪽으로 난 창문으로 적에게 사격도 가능했으나, 이후 보수 과정에서 창문과 총안이 사라져 최상부만이 유일한 전투 공간이 되었다.
서쪽 6km길이의 성곽은 이렇게 1차 폭 20미터, 수심 10m의 해자(성 주위의 인공 저수지), 그뒤로 2중성(높이 11m), 2중성뒤엔 3중성(16m)이 있다.
두께 2m 가량의 외벽은 내벽보다 조금 낮은 8~9m 높이였으며, 페리볼로스 쪽으로 아치형 출입구가 있어 도시 쪽에서 정문으로 들어가거나 안쪽 방어탑에 있는 샛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높이 12~14m, 폭 4m의 외벽 방어탑이 내벽의 탑과 탑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내벽은 최후의 저항, 흉벽은 일차 저지라는 의미가 있던 만큼 본격적인 방어는 외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외벽은 가공할만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외벽은 활용 가능한 공간(페리볼로스)의 양도 적지 않았고, 성벽의 다른 부분과 크게 연계되어 있었던 만큼 성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자는 외벽에서 20m 떨어진 곳에 20m의 폭으로 파여있었다. 10m 깊이의 해자 안쪽에는 총안이 갖추어진 1.5m 높이의 흉벽(parateichion)이 있어 일차 방어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막벽이 해자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이 막벽 안쪽에는 수도관이 있어 해자에 물을 채우는 송수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자는 성 로마누스 성문 방면에서 급한 경사로 인해 유지 보수에 막대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 때문에 성 로마누스 방면부터 아드리아누폴리 성문 방면까지는 해자가 끊겨 있다
◆ 3중성의 단면도
공격자에게 축차적으로 손실을 강요하는 구조이다.
당시의 대포는 하루 7발만 쏠 수 있었다. 고로 내부애서는 성을 수리하며 버틸 수 있었다.
◆ 블라케나에 성벽
블라케나에 성벽은 콘스탄티노플의 북서쪽을 방어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연결되어 있으며 금각만 쪽 성벽에 위치한 포르피로제니투스 궁과 같은 높이다. 이 성벽은 서로 다른 시기에 건축된 벽을 연결한 단일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플 북서쪽 수원지에 발렌스 수도관과 연결되는 블라케나에를 방어하기 위한 방벽이다.
높이 12~15m 정도의 단일성벽이지만 그 자체는 테오도시안 성벽보다 두꺼우며 감시탑도 조밀하게 위치하고 금각만으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해자가 추가된다.
정확한 건축시기나 최초의 구조는 기록 부족으로 불분명하지만 추정하면 포르피로게니투스 왕궁에서 출발해 아네마스 감옥을 거쳐 성 드미트리오스 카나보스 교회를 찍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는 삼각형 요새를 만든데서 이 성벽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테오도시우스 성벽보다 오래된 4세기 경에 건설된 것이므로 나중에 서쪽 성벽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동쪽 해안 성벽
동쪽의 하기아 소피아 방면 해안 성벽은 평범한 단일 구조로 달랑 성벽 한 겹만 있었다. 그러나 이 한 겹의 성벽도 다른 성의 일반적인 성벽보다 튼튼한 데다가, 이곳은 고대부터 비잔티움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고도가 가장 높고 노출된 면이 적었다.
또 동쪽과 남쪽을 감싸는 마르마라 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의 영향으로 평시에도 항해술을 제대로 익힌 승조원이 있는 튼튼한 선박만 근접이 가능하였고, 항구시설 또한 충분하지 않아 배를 접안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성벽을 건설한 이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여기서 적군이 성벽을 넘은 사례는 전혀 없었다.
다만,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던 시기에 바다쪽 성벽은 베네치아의 공세 앞에 약점을 드러내었다. 이에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자 이 성벽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이 재차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해군전력이 열세인 비잔티움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바다쪽 방벽의 강화가 필수였으며 금각만 건너편의 갈라타에 제노바인의 방어시설이 있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미하일 8세는 시간에 쫓겨 우선 성벽 위에 2m 높이로 목재 구조물을 쌓고 천으로 덮어두었고 10년 뒤에는 제2의 성벽을 안쪽에 건설했다. 이후로도 팔레이올로고스 황조는 해안쪽 방벽을 계속 보강하고 부분적으로 해자까지 추가했다.
금각만 성벽
콘스탄티노플의 북서부는 국제 교역향으로 발달하였기에 이곳에는 맞은편의 갈라타 지구는 물론이고 무슬림과 이탈리아계 무역상 거주지도 북서부에 존재했다.
따라서 이곳은 교역상에게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지리로 보아도 북쪽의 금각만 방면은 해류의 영향도 없고 만의 폭이 좁아 건너편 육지에서의 지원사격도 가능한 확실한 성곽의 취약점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도 성벽을 세웠는데 5.6km를 뻗어 육지쪽 장벽과 연결되며 해변에서 10m 정도 거리를 두고 한때는 성문 14개에 감시탑 110개가 있었다고 한다.
1200년의 제4차 십자군 때는 베네치아인들이 이곳을 집중 타격하였고, 끝내 버틸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반대파에게 끔살되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그 덕에 방어력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빈약한 상태이긴 했다. 결정적으로 내통자 때문에 성문이 열렸다. 이처럼 로마 제국이 해군력에서 압도당할 때는 이쪽 성벽이 주요 공격로가 되었다.
당연히 동로마 제국도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국가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금각만에 해군을 배치하고 프로스포리온 항으로 통하는 금각만 마지막 관문인 유제니우스 탑에 거대한 철쇄를 연결해 이곳을 드나드는 함선을 통제하게 했다.
결국 약점이라고 섣불리 공격했다간 성벽의 수비군과 바다의 해군에게 협공을 받게 되고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한 그리스의 불 세례도 각오해야 했다.[7] 따라서 먼저 동로마 해군부터 무력화하고 제해권을 쥐어야 봉쇄나 본격적인 공성이 가능했다.
다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마지막 공격에서는 오히려 압도적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잘 방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