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할미꽃
191024전라닷컴[괴나리봇짐] 임방울을 그리며
눈을 고르고 그늘을 쳐야 진정한 ‘소리’라네
어이, 동무! 이번에 나 묘한 도량에서 한 철 살고 나왔네.
저자가 멀리 하는 그 수행처에서 왕년에 한 가락 하던 짱짱한 도반(환우)들과 더불면서 이 풋꾼도 한 소식 얻었지 뭔가. 전개가 솔찬히 개미져, 관세음 해보게나.
어느 밤, 선방 말석에서 쑥대머리~ 한 대목이 터져 나와네 그려. 한데 그 성음에 그늘이 보이는 거라. 어허 이 떡판에도 이면을 그리는 작가가 있었네 싶어 꿍쳐논 부월채 간식을 보시하면서 수행이력을 물었지.
보소, 얼씨구~ 망외소득야라. 실화로 한 소리 한 타짜였던 거디었어! 대학에서 국악을 공부하다가 날이 살짝 넘어버려 이 난장까지 처처도량 삼은 시연이었지 뭔가. 때마침 천하명창 임방울 기림잔치도 거나하게 벌이는 판이라 쑥대머리~ 가락에 귀가 아니 번쩍 뜨였겠어?
풍류하고는 영판 남인 농투사니 선고께서 어쩌다 흥이 일면 딱 하나, 고물 축음기 소리로 삐걱대면서 함함거리신 곡조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임방울의 쑥대머리였다. 그만큼 쑥대머리는 당대 최고 인기가요였고, 광산 촌놈 곰보 광대 임승근이는 연예계 주름 가왕이었던 것이다. 광대끼가 좀 있는 기자도 특히 우리 ‘소리’하면 이내 젖어버리는 체질임을 고백한다. 기자생활하면서 송정리 임방울 태생지도 여러 번 가봤고 임방울기념회 인사들과도 친교가 있어 쑥대머리 한 자락은 귀동냥 할 수 있었고.
그래 놓으니 고교 후배이기도 한 이 날 넘은 작자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형 사제로 맺어져 지대방에서 한 철 내내 소리거량을 했던 것이네. 소리광대는 누가 뭐래도 소리가 좋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동리 신재효는 광대는 네 가지 치레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첫째 인물, 둘째 사설, 셋째 소리, 넷째 너름새) 소리광대는 역시 소리로 소리해야지.
흔히 판소리의 세 기틀로 성음(聲音), 음조(音調), 장단(長短)을 드는데 그 벼리 되는 건 아무래도 성음이지. 우리말로는 소리, 길, 박이라고 쉽게 일컫기도 한다네. 명창 김소희는 아무개의 솜씨를 평할 때, “성음은 호랑이가 물어가 버리고 길하고 장단은 좀 되는구만.”하는 식으로 성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하대. 자, 이번 거량은 소리가 화두이니 소리소리만 하더라고.
성음은 타고난 음색을 말하는데 천구성, 수리성, 철성, 아귀성 등으로 가른다지. 철성은 단단하고 쩌렁쩌렁한 쇳소리, 수리성은 쉬고 컬컬한 사나운 소리, 아귀는 어금니를 깨무는 듯한 독하고 야무진 소리를 뜻한다며. 이 중 수리성을 높이 쳐. 천구성(天口聲)이란 수리성의 장점을 갖추고서 그보다 맑으면서 애절한, 의미 그대로 하늘이 낸 목소리쯤으로 알면 될 듯하고.
그런가 하면, 좋지 않은 성음으로 그냥 빡빡하고 거친, 떡 같은 목인 떡목과 너무 밝고 맑아 그늘이 없는 양성(陽聲)이 그것. 그나저나 에구, 소리에는 참 별별 소리가 다 있지 응? (방울소리 듣기도 전에 끝소리 나겠네.)
네 가지 금기가 또 있어. 노랑목, 함함목(含聲). 발발목(轉聲). 킁킁목(鼻聲). 노랑목은 놀놀하니 잘도 넘어가 싹수가 노란 소리, 함성이란 소리가 입안에서만 함함거리고 밖으로 분명히 튀어나지 못하는 소리, 전성이란 굴리면서 발발 떠는 소리, 코맹맹이 같이 킁킁대는 콧소리를 이른다네.
알음알이 세설 이만 줄이고, 말후구 묘음으로 들이닥치세. 잘 만든 이야기를 판으로 짜서 부른다고 판소리라고 말하지만 그 긴 사설을 토막마다 잘 할 수는 없고, 그 중 십팔번인 최상승처가 있기 마련. 그걸 눈(眼目, apple of the eye)이라고 한다네. 이 눈을 잘 잡아내야 해. (전라도 저잣말로, 눈탱이를 봐 부러야써.)
그 다음, 그늘을 쳐야 돼. 이면(裏面)을 그린다고 표현해. 따뜻하고 밝은 양달이 아니라 어둡고 추운 응달을 담아내야 한다는 얘기지. 불가에서 길 튼 이를 작가라고 곧잘 부르는데 이면을 그리는 작가라야 참 선지식(善知識)이라 할 수 있겠지. 좋은 작가인 송수권시인은 생전에 늘 “그늘을 치라, 그늘을 치라” 외우곤 했었지. 언젠가 한 번 “한형도 시 좀 열심히 쓰지, 그래.” 충언하길래 “나는 시 안 쓰고 시를 살라요.”하고 건방을 떨었더니 그 다음부터 나 보면 “어이 시생(詩生), 시생”하고 놀려대시던 기억이 새롭구먼.
임승근은 전라도 빈농 출신에 키도 작고 얼굴도 얽어 내놓을 게 없었지만 목을 수리성으로 치레해 방울을 울렸다네. 수리성에 독공을 더하니 천구성을 좋히 넘어섰지. 유가에서도 생이지지(生而知之)도곤 곤이지지(困而知之)이듯 창가에서도 다듬을 게 없는 천구성보다도 피토하며 득음한 수리성을 더 받들었다는 거여. 그야말로 그늘을 치고 이면을 그려 일가를 이룸이라.
더욱이 임방울은 한없이 느껴우는 진양조가 아니라 죌 때는 죄고 풀 때는 푸는 눈을 밝혀내 그만의 기특한 더늠을 완성해 낸 공덕을 인가받았어. 임방울의 불퇴심 독공을 알려주는 애달픈 연사가 전해온다네.
승근은 머슴아 때 한동네 김부잣집에 머슴을 살았다. 동갑내기인 주인집 딸 산호주와 연분이 났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여자는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승근이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지리산에서 한창 독공을 하던 때, 다시 광주에서 홀로 되어 요리집을 하던 옛 연인을 만나게 된다. 못 다한 사랑을 지피었고 2년 동안 뜨겁게 살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산호주는 아팠고 임을 마지막 한 번이라도 보려고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토굴에서 독공하고 있던 임방울은 독하게도 다 죽어가는 연인을 만나주지 않았다. 임방울은 뒤늦게 죽은 산호주를 그리며 진양조의 애달픈 소리를 지어 불렀다. 그 소리가 <앞산도 첩첩하고>라는 단가다.
대개 이런 스토리라네, 동무. 내 수행보고는 이 정도로 접고, 우리 오랜만에 만나 그늘 있는 하산주 한 판 때리세. 참, 요즘 ‘판소리복서’라는 활동사진이 나왔다니 그것도 한 판 돌리고.
글 한송주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