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22일 그가 인터넷포털 다음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린 지 만 10년이며 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8년이 되었다.
2008년 7월 27일. 그는 기력이 쇠한 상태에서도 생(生)의 일기장 같은 블로그에 딸의 도움으로 ‘흙에서 나서 흙으로…’를 올렸다. 3년 동안 하루 한 개 이상 올린 글들이 현재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본 기자는 본지를 통해 현재의 ‘영종도 사람들’을 연재하고 있다. 고인이 된 영종도 사람도 한 번 기사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직접취재가 아니라면 충분한 자료와 주변인사의 증언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그 두 가지를 충족시킨 인물이 바로 故 정진백(鄭鎭白) 지방서기관이다. 그는 공직생활의 핵심인 주사와 사무관 직급으로 영종용유지역에서만 총 10년 11개월을 근무하였는데 특히 2000년초에는 영종출장소장으로 3년 5개월 근무하였다.
지난 1년 동안 ‘중구청 출동’이라는 취재활동을 통하여 그를 기억하는 후배 공무원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가족들에 의하여 ‘허허벌판’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자신을 얻어 그의 7주기 기일 (2008. 7. 30)을 맞이하여 ‘영종도 사람들 ⑦’을 올리게 되었다.
■ 허허벌판 블로그 - ( http://blog.daum.net/beolpan )
‘허허벌판’을 접한 것은 영종하늘도시에 입주한 이후 영종도의 역사찾기를 시작하면서이다. 보면 볼수록 세심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 일생일대의 역작(力作)은 아닐지라도 기록 시점에서는 가능한 한 ‘고향-영종의 모든 것’에 대하여 최선을 다한 노력이 보이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는 그 순간에도 고향인 영종만을 생각하며 기록한 그 내용들이다.
2004년 8월 아들로부터 간을 이식받은 후 “새 생명을 남은 공직생활에 최선을…”다짐한 후 이듬해인 2005년 7월 Daum블로그 ‘허허벌판’은 시작되었다.
블로그 게재 2년만인 2007년 8월에는 1000천여개 글을 게재하였고 이후 타계할 때까지 1,243개의 글을 남겼다. 여기에는 ‘영종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는 역사를 기록’에 일조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다.
■ 영종도 역사와 지명유래가 있고 인생, 철학, 사랑과 아픔이 존재
‘허허벌판’에는 그의 인생, 철학, 사랑과 아픔이 녹아들어 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혼자서 울고 웃기위해 써 놓았다고 그는 소개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를 기억하고영종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보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까?
수술 이후 새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그 동안 공무원으로 살면서 미처 정리 못한 고향에 대한 모든 것을 블로그 속에서 그는 정리하였기에 오늘 이 순간에도 ‘허허벌판’ 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오늘의 수상’과 ‘편지’의 게재 글의 비중이 크며 ‘건강과 종교’도 251건으로 비중이 있다. 그리고 ‘내 고향 영종’ ‘인천에 관한 것’ ‘여행’ 의 카테고리가 있으며 ‘가족과 가정사’의 사생활의 내용이 있다.
‘내 고향 영종’은 2005년 8월 2일부터 2008년 1월30일까지 91건의 글이 기록되어있다.
여기에는 그의 고향 벌판마을과 생가 터인 장촌마을 등 운북동 마을이름유래, 은골 등 운서동일원의 지명유래, 넙디와 월촌의 자연마을 지명유래, 구읍 및 송산 과 돌팍재의 지명유래 등이 있다. 고문서와 행정자료를 인용한 것도 있고 본인이 연구한 것도 있다.
또한 역사서에 나타난 영종의 모든 기록들을 스크랩하여 영종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지침서의 역할을 한다. 특히 조선말기의 영종도의 인구수 지명 및 행정구역흐름을 파악하기 용이하게 기록하였다. 아마도 고향의 포탈 블로그를 지향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행정공무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1895년 발행된 한국최초의 지지(地誌)교과서인 조선지지의 필사본을 분석한 내용은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보여진다.
‘큰말은 당시까지는 넙디구역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전소리에 편입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큰마을로써 독립된 마을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1909년 전후 마을이 쇠락하면서 가까운 넙디마을로 편입된 것으로 추측’
그리고 10년 전의 백운산 정상에서 영종도 동서남북 방향으로 마을사진을 촬영함과 동시 당시 구글 위성사진도 다운받아 올려놓았다. 귀중한 자료들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천주교신자였던 그는 ‘종교’ 에서도 많은 자료를 수집해 놓아 영종성당(민영환 주임신부)이 준비 중인 ‘영종성당 50년사’ 편집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전한다.
■ 건강칼럼
2005년 7월 22일부터 2008년 6월 4일까지 기록된 그의 건강칼럼이다. 그 가운데는 2004년부터 별도 투병일기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고 건강한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살아감에 좌표와 겸손 그리고 행복을 잘 가꾸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며 프라이버시에 관한 내용이 다수 있음에도 용기를 내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간이식수술을 받을 때 현재도 구청장이지만 김홍섭 당시 구청장 및 중구청 직원들과 지인들이 수술비를 십시일반(十匙一飯) 성금으로 보내준 고마움도 잊지 않고 기록해 놓았다. 감사한 일이다.
투병기와 항암치료기를 읽는 동안 눈물이 나왔다. 그 내용의 소개는 생략하고자 하며 꼭 한가지 만 기억하고자 한다.
중구청 세무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4년 8월 ‘간경변증’이 악화되어 간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맹호부대 군복무중인 이등병 아들이 청원휴가를 내어 아버지에게 간이식을 한 것 이었다. 이 효심(孝心)기사는 그 해 9월 기호일보의 사설과 기사, 국방일보에도 기사화 되었다.
■ 그는 고향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허허벌판’의 고향과 건강 그리고 가정사와 종교를 제외한 타 분야는 수필형식과 블로그형식에 따른 사진기사 형식이었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는 서정시였다. 천여편의 글속에는 자작시와 인용시귀가 자주 기록되어져 있다. 그가 공직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문학과 예술 분야 이었으리라.
그의 유작(遺作) 시(詩)일지도 모르는 ‘이제 날으리라’ (2004.8.17) 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제 날으리라
벌판 펼쳐진 파란 들판의 아지랑이
감고 있는 눈에 그 고향의 환영은
내겐 작은 창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나를 낳고 키워준 벌판 백운산
내 마지막 그날에 고향과 함께 묻히리라
2007년 8월 33년간 걸어왔던 공직의 문을 나섰고, 2008년 5월 마지막 날에는 부인괴 딸, 사위, 사돈내외가 사이좋게 고향 영종 방문길에 올랐으며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구읍-월미 뱃길을 이용해 고교시절 자취하며 열심히 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7월 27일 ‘흙에서 나서 흙으로…’를 남기며 30일 오전 하늘나라로 갔다.
‘허허벌판’에는 그를 기억하는 댓글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한 공무원의 글이 눈에 띤다.
“항상 후배공무원들의 귀감이 되시며 ‘고생 많이 했어’ 라는 과장님의 위로말씀이 귓전에 생생합니다. 과장님 말씀대로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이 되어 민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는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평안히 잘 가세요!”
백운산과 벌판고향을 사랑하였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약력
1955.3.29 운북동 장촌 출생 - 벌판 성장/금산초 졸업/영종중 졸업/경기수산고 졸업(현 인천해양과학고)/1974. 8 경기도 공무원 임용/영종출장소장, 세무과장, 재무과장, 보건소 행정과장 역임/2007. 8. 7 지방서기관 명예퇴직
근정포장 등 공직생활 33 년간 장관 표창 등 5회 수상
홍승준 선임기자 @정 마르티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첫댓글 그래!
니가 인간다웠다~
죽어서도 널 기억하는?
주변이 있다는 것에!
i view 인천인터넷소식에 하늘에서도 전하는 영종도 이야기
내가 복사가 안되어 연결을 못하네 함 확인해주시게
허허벌판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