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극장가에서 본 풍경 하나, 깻잎머리 소녀 둘이 극장 앞 광고판을 보며 무슨 영화를 볼까 고르고 있다. <조폭 마누라> 포스터를 본 소녀가 말한다. “야, 이거 정말 아무 생각없이 만든 영화같애.” 옆에 있던 친구 왈 “그래, 그럼 재미있겠다. 이거 보자.” 풍경 둘, 최근 몇년간 매진사례가 별로 없던 스카라극장에서 <조폭 마누라>는 추석연휴 마지막날인 10월3일 3, 4, 5회 매진이 나왔다. 오랜만에 극장에 나온 40대 부부는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순 없다”며 “입석이라도 보겠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관객에게 오뎅을 팔던 아줌마의 말씀, “정말 명절 분위기 나네. 스카라극장 앞에서 이렇게 장사 잘되긴 처음이야.”
<조폭 마누라>, 최단기간 전국 100만 동원기록
올 추석 화제의 중심은 단연 <조폭 마누라>였다. 이 영화는 개봉 5일 만인 10월2일 전국 100만명을 돌파, <친구>와 <엽기적인 그녀>가 보유했던 최단기간 전국 100만 동원기록을 하루 앞당겼다. <조폭 마누라>는 추석연휴 6일간 전국 144만8천명, 서울 39만3천명을 동원했다. <조폭 마누라>가 이정도 폭발력을 보이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다. 제작자인 현진영화사 대표 이순열씨도 “예상못한 결과라 혼란스럽다”고 말할 정도다.
<조폭 마누라>의 흥행은 같은 날 개봉한 <봄날은 간다>와 비교할 때 더 도드라져보인다. 언론의 호평을 받으며 흥행성공을 예감케 한 <봄날은 간다>는 6일간 서울 19만7900명, 전국 41만6천명을 동원, 관객 수에서 <조폭 마누라>의 절반에 못 미쳤다. 웬만큼 <조폭 마누라>의 흥행을 예상한 이들도 두 영화에 몰린 관객 수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일 줄은 몰랐다. 개봉 전 예매기록부터 <조폭 마누라>가 앞섰다고 하지만 관객반응은 <봄날은 간다>쪽이 훨씬 좋기에 이런 흥행결과는 ‘이변’처럼 보인다.
단적인 예로 PC통신과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감상평들은 <조폭 마누라>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한 게 “만족한다”는 평보다 많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입버릇을 닮아서인지 특히 <조폭 마누라> 홈페이지 게시판은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인신공격이 대단하다. 찬반의견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누군가 <조폭 마누라>를 지지할라치면 “너 알바(영화사에서 고용한 아르바이트생) 아니냐. 이것도 영화냐”는 협박조 답장이 바로 올라오고, “재미없다”는 감상은 “넌 영화볼 자격이 없다. 영화 자체를 보지말라”는 무지막지한 말로 공박당한다.
최근 개봉작 가운데 찬반격돌이 가장 심하며 표현수위도 거칠기 이를 데 없는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 <봄날은 간다>를 본 관객평은 대체로 호의적이고 점잖다. 영화에 대한 공감을 표현한 의견이 많고 허진호 감독의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비교한 글도 자주 눈에 띈다. 이런 관객반응은 <조폭 마누라>의 놀라운 초반 흥행세가 오래가지 못한 채 <봄날은 간다>가 영화적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견해에 설득력을 부여하지만 아직은 최종 흥행기록을 점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금융자본에 휘둘리는 시장점유율 40%
장기적인 흥행결과는 두고볼 문제지만 확실히 <조폭 마누라>의 성공은 영화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지고 있다. 그간 호평을 얻지 못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적지 않지만 <조폭 마누라>는 극의 완성도, 배우의 흡인력, 영화의 규모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모두 ‘개봉 6일간 전국 144만’이라는 결과와 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지금 한국의 영화시장이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한 제작자는 <친구>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 <조폭 마누라>로 이어진 올해 흥행작의 경향을 “위험하다”고 단언한다.
“오우삼, 서극, 임영동 등이 이끈 홍콩영화 전성기는 한달에 한편씩 찍어대는 왕정 감독의 코미디와 더불어 몰락했다. 갑작스런 호기를 맞은 한국영화가 지금 보이는 모습은 왕정 감독 시대의 홍콩영화계를 연상시킨다. <조폭 마누라>의 엄청난 흥행은 한국영화 급락의 징후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은 현재 한국영화계를 움직이는 돈이 대부분 수익률 외에 아무것도 관심없는 금융자본이기 때문이다. <조폭 마누라>처럼 완성도는 떨어져도 기획아이디어 하나로 승부수를 던지는 영화가 이정도 흥행을 기록한다면 아류작에 돈이 몰릴 것이고 뭔가 색다른 시도를 하는 영화들이 들어설 입지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시장점유율 40% 시대를 맞은 최근 한국영화계는 지극히 불안하다. “시장점유율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그간 한국영화를 안 보던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찾는다는 뜻인데 새로 한국영화에 끌린 관객이 어떤 성향이냐는 건 중요하다. <조폭 마누라>류의 영화에 몰리는 관객만 늘었다면 영화산업은 단기적 호황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극단적인 비관론을 피력한 이 제작자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두렵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상업영화의 테두리에서 어느 정도 품위를 지키고 영화산업의 미래를 걱정하며 영화를 만드는 ‘생각있는’ 제작자들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컨셉트 무비’의 정착?
하지만 이런 견해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측면이 있다. <봄날은 간다>를 배급한 시네마서비스 관계자는 <조폭 마누라>의 흥행은 예견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조폭 마누라>가 추석특수를 최대로 누린 예라고 설명한다. “대대로 추석에는 액션코미디가 흥행했다. 추석에는 1년에 영화 1편도 잘 안 보는 관객이 극장에 나온다. 그들이 쉽게 선택하는 영화는 액션영화나 코미디이고 올해는 <조폭 마누라>와 같은 장르에서 경쟁할 영화가 없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멜 깁슨의 액션영화 한편만 있었더라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런 견해는 올 추석 외화들의 부진을 보면 수긍이 간다.
성룡의 <러시아워2>는 1주 앞서 개봉, 추석연휴 6일간 서울 15만1천, 전국 33만2900명을 동원했다. 이는 <조폭 마누라> <봄날은 간다>에 이은 3위의 기록. 성룡의 영화가 한국시장에서 고정관객을 갖고 있지만 늘 어느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봤을 때 그 밖의 외화들이 얼마나 시장을 나눠가졌는가가 중요한데 올 추석 외화는 특히 약했다. <아메리칸 스윗하트> <프린세스 다이어리> <스위트 노벰버> <분노의 질주> 등이 <조폭 마누라> <봄날은 간다>와 같은 날 개봉했지만 서울관객 10만명을 넘긴 건 <아메리칸 스윗하트>뿐이었고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분노의 질주>는 서울관객 1만6천명을 못 넘기는 수모를 겪었다.
<조폭 마누라>의 흥행을 가벼운 영화에 몰리는 추석특수 결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번 추석 흥행전이 한국영화 붐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극장업계 출신인 한 제작자는 “예년에 외화가 분점했던 시장을 <조폭 마누라>가 독식했다. 지금 영화시장이 보여주는 중대한 변화는 한국영화 급락의 전조가 아니라 한국영화와 외화의 달라진 힘관계”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입장에선 <조폭 마누라>와 <봄날은 간다>에 몰린 관객 수 차이가 ‘의외의 결과’는 아니다.
“<조폭 마누라>가 없었다고 <봄날은 간다>가 지금보다 폭발적인 흥행결과를 낳았을까? <봄날은 간다>가 거둔 서울 20만, 전국 40만명이라는 관객 수는 결코 나쁘지 않다. 영화적 완성도에서 <조폭 마누라>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대중적 호소력면에서 그정도 결과가 나오는 건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완성도, 스타 파워, 영화의 규모에서 밀렸지만 기획아이디어, 개봉시기 선정, 마케팅에서 <조폭 마누라>는 관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영화로 느껴졌다는 해석이다.
br> <조폭 마누라>의 흥행이 깡패영화 유행의 정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친구>로 불을 지핀 뒤 <신라의 달밤>을 거쳐 <조폭 마누라>로 이어진 깡패영화의 승승장구는 얼핏 <친구> 이후 생긴 흥행영화의 최신 경향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갱스터영화, 홍콩산 변종인 홍콩누아르, 일본의 야쿠자영화처럼 깡패영화는 한국영화에서 신파 멜로드라마만큼 오랜 전통을 가진 장르이다.
명필름 대표 심재명씨는 “따지고보면 깡패영화는 흥행작을 양산한 장르이다. 60년대 다찌마리 영화들이 그랬고 90년대 <장군의 아들>도 성공했다. 조양은이 주연한 <보스>도 흥행했고 멜로드라마 코드가 강했지만 <약속>도 깡패영화로서 흥행했다. 깡패영화 유행이 갑작스레 생긴 것도 아니고 한국영화의 심각한 퇴행징후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친구>의 폭력성 논쟁 이후 깡패영화의 흥행과 사회분위기를 직접 연관시키려는 시도가 많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건 같은 장르를 색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변형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친구>가 현실적 캐릭터와 부산사투리로 만들어낸 장르의 내적 변화를, <신라의 달밤>은 코믹터치로 이어받았고 <조폭 마누라>는 주인공을 중성적 이미지의 여성으로 역전시키는 발상을 통해 이끈 셈이다. 실제로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를 연상시키는 <조폭 마누라> 광고사진은 한마디로 요약되는 아이디어 하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컨셉트무비’의 정의를 내려주는 듯하다. 튜브엔터테인먼트 대표 김승범씨는 “이런 유의 영화가 한국에서만 성공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90% 정도가 컨셉트무비라는 걸 고려하면 <조폭 마누라>의 성공은 납득할 만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JSA> 흥행과 대조적인 분위기
그러나 <조폭 마누라>의 흥행은 이 영화를 제작, 투자, 배급한 이들에게 희소식일지라도 영화계 전체가 반길 일은 아니다. “한국영화 몰락의 징후”라는 건 과장된 표현이라 해도 “<조폭 마누라>류의 영화가 범람할까 두렵다”는 영화계 관계자를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제작비 규모가 큰 영화를 여러 편 기획하고 있는 한 제작자는 “의욕이 안 난다”는 소감을 밝힌다. 그는 “쉽게 돈버는 길이 보이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의 완성도로 경쟁하던 게임의 법칙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런 반응은 지난해 추석에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가 흥행했을 때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작자들이 분투할 수준있는 대중영화의 모범을 제시했다면 <조폭 마누라>는 정반대로 아이디어 하나로 대박을 터트린 모델인 셈이다. 물론 <조폭 마누라>만 집중성토를 받을 영화는 아닐 것이다. <자귀모> <비천무> <단적비연수> 등 완성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올 추석흥행전 결과에 민감한 이유는 <조폭 마누라>가 보여준 폭발력이 완성도에 비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1997년 <할렐루야>가 서울관객 31만명을 넘긴 것과 비교하면 <조폭 마누라>의 기세는 위협적이다. 컨셉트와 마케팅의 힘만으로 불가능해 보인 어떤 선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돌파구, 앞서가는 제작자가 찾는다
이것이 추석특수에 기인한 흥행성공이며 일시적인 과열이라는 진단이 맞는지는 추석연휴 이후 관객 동향으로 증명될 문제이다. 문제는 이번 흥행결과가 영화계에 끼칠 부정적 영향이다. 크게 히트한 영화의 아류작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투자, 제작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쉽고 가볍고 돈 적게 들이는’ 영화 위주로 흐른다면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봄날은 간다>를 제작한 싸이더스는 상당히 위축된 상태다. 싸이더스 대표 차승재씨는 “투자자나 제작자가 앞서가는 시도를 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반면 최근 <와이키키 브라더스> <버스, 정류장> 등을 제작하며 스타 캐스팅에도 구애받지 않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는 심재명씨는 차승재 대표의 걱정에 동의하면서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어차피 돌파해야 할 현실”이라고 말한다. “관객의 수준이 하향평준화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의 관객수준은 외국보다 높다. 공급자가 수요를 만들어야 되는 상황이며 돌파구는 잘 만든 대중영화가 흥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 제작비 규모가 큰 작품을 진행중인 김승범씨 역시 “<조폭 마누라>의 흥행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을 줄이는 길은 완성도있는 영화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할리우드의 흥행작도 상당수는 수준미달인 영화로 채워져 있다. 한편으론 영화의 완성도를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렇지 않은 영화가 성공하는 데 영화산업 자체의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설령 지금 상황이 영화시장의 심각한 변화를 의미한다 해도 영화의 다양성과 완성도를 지키는 건 여전히 제작자의 몫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장점유율 50%로 치닫고 있는 지금, 흥행결과에 일희일비하는 숙명을 안은 채 영화산업의 미래 또한 염려해야 할 제작자들이 짊어진 짐은 오히려 무거워진 느낌이다.
'조폭마누라'같은 영화를 만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홍콩영화처럼 흥행작의 아류들이 시장을 독식하는 것일 겁니다. 관객들이 다양한 영화를 보지 않는 것도 (조금은) 문제일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소위 '조폭영화'들이 흥행영화의 아류작일까요? 장군의 아들, 달마야 놀자, 조폭마누라, 신라의 달밤, 주유소습격사건, 초록 물고기, 킬러들의 수다, 넘버3, 친구 등등등...
저는 이런 영화들이 분명히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영화들의 완성도를 떠나서 말입니다.) 상당수는 장르 자체가 다릅니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지 않은 이유는 마케팅이 좋지 않았고(액션이나 유머를 전혀 기대하지 않게 만든 광고였음) 전작인 플란다스의 개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꽃섬'에 경우... 영화계에 떠돌아다니는 '20대후반, 30대 초반 여성관객을 잡으면 그 사람들이 관객을 데려온다'는 통설에 기대어 흥행을 노리는 것 같은데... 저는 그 통설을 믿지 않습니다.
한국영화산업에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세계영화계가 함께 고민할 만한 문제는 있지만... 해결책은... 없습니다.
중간중간에 영화적인 완성도와 시장에 대한 설득력을 가진 영화가 나와서 관객들의 식성을 다양화 시켜주기를 빌 뿐입니다.
또한 '조폭영화'의 흥행에 대한 논란을 자꾸 부추기는 언론들이 정치적인 의도가 있을 것같다는 불쾌한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