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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00년간 계속되는 삼국사기에 대한 논란
지난해 11월, 이례적으로 한 일간지를 통해 역사 논쟁이 벌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와,
"삼국사기를 부정하는 것은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삼국사기는 왜 이런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인가?
"삼국사기!~
이 책에 대해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1,145년 고려 인종 때 김부식(金富軾)이 쓴 책으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 중 현존 가장 오래된 사서입니다.
그래서 고대사의 바이블이다,
고대사로 들어가는 창이다,
이런 이름들이 붙어있습니다.
현존하는 책 중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이만큼 자세히 다룬 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삼국사기는
책이 씌여진 이후 지금까지 800년이 넘도록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삼국사기의 내용이 잘못 되었다고도 하고,
삼국사기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도 하고,
혹자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왜 이런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걸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에서 삼국사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2. 삼국사기의 진실!
- 백제 무령왕릉 발굴을 통해서!~
충남 공주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 제 25대 무령왕릉.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백제 사마왕의 진실은
이 무덤안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1971년.
다른 고분을 발굴하던 중 우연히 찾아낸 왕릉에선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총 108종, 2,900여 점.
당시 백제 문화의 수준과 풍속, 그리고 왕의 위엄을 알려주는 유물들이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지석(志石)이었다.
이 지석엔
'백제 사마왕이 23년을 통치하다 계유년 526년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그 기록은 놀랍게도
<삼국사기> '무령왕편'의 기록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실로 위대한 발굴이었습니다.
역사적인 발굴이었습니다.
무령왕릉에 있는 이 지석은 연대가 뚜렷했습니다.
지금까지 삼국 시대 많은 무덤이 있습니다만,
몇 년도에 묻히고,
누구의 무덤인지 기록이 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무령왕릉의 지석과
우리의 정사(政史) <삼국사기>의 기록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얼마나 정확하고 훌륭한 사료인가,
이 지석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 한병삼(무령왕릉 발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3. 삼국사기는 고대로 들어가는 백과사전!~
고대사를 알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책, 삼국사기는 과연 어떤 책일까?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이래
모두 다섯 차례 판각이 된 걸로 알고 있다.
그 중 지금까지 가장 완질로 된 판본이
이곳 경북 경주 안강읍 옥산서원에 보존된 정덕본이다.
삼국사기는 9책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은 지금의 목차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50권을 크게 세분화해보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의 업적, 천재지변, 전쟁 등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본기(本紀) 모두 28권,
연표(年表)는 모두 3권,
B.C 57년 ~ A.D 935년(신라 건국 ~ 신라 멸망)까지
삼국의 왕들이 집권했던 시기를 서로 비교해 기록했다.
잡지(雜志)는 9권으로
각 나라의 제사, 복식, 관직, 지리 등 각종 제도를 8항목별로 구성했다.
10권인 열전(列傳)은
김유신과 을지문덕 등 삼국의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기전체 역사 서술 방식으로 씌인 <삼국사기>는
삼국 시대의 백과사전인 셈이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이 책은 김부식이 혼자 만든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김부식외 10명의 학자들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간관, 즉 임금의 언론 담당이었던 최산보의 이름부터
10명의 학자들의 이름을 적은 뒤
김부식은 가장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있다.
또한 편찬자들은 전대의 수많은 고기(古記)를 인용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방대한 자료를 참고하여 씌여진 것이다.
"<삼국사기>가 아마 지금 전하지 않는다면
한국 고대사의 구체적인 실상은 알 도리가 없을 겁니다.
만약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우리 한국사에서 고대사 공부하는 게 불가능했다고 봐야죠."
- 신형식 교수(이화여대 사학과)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여러 편찬들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사기>는
최근 CD롬 한 장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학 테이터베이스 연구소.
"'호랑이' 검색어를 쳤을 때
<삼국사기>에 22건이 나옵니다.
호랑이가 나오는 다양한 기사들이 한꺼번에 나오고요,
그 중에서는 '가을에 호랑이가 잘 나타난다'는 일관성 있는 내용을 얻을 수도 있구요,
의외의 결과물 상식을 얻을 수 있지요.
'6두품' 이라고 쳤을 때요,
수레 재목은 자단, 침향을 씌지 못하고 ...
바닥 깔개로는 능, 견 이하로만 쓰고..
두 겹 이상 해도 안되고..."
- 고윤희
고대 복식사에 있어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한 박선희 교수.
<삼국사기>의 위력은 박교수의 논문에서도 들어난다.
<삼국사기>의 '색복조(色服條)'를 통해
면 섬유가 이미 신라 시대에 있었음을 밝혀낸다.
여기에는 신라가 생성한 면과 견을 합성한 '면주포'가 등장한다.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알아낼 수 없었던 내용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려말 문익점이 목화를 전래하기 이전까지
한민족은 면섬유를 전래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라 사람들이 이 당시 이미 면을 생산했고,
면섬유와 실크의 합성섬유를 만들고,
또 면으로부터 솜을 뽑아 옷에다가 사용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 박선희 교수(상명여대 사학과)
삼국의 제도, 풍습, 인물 등 수많은 정보를 수록한 <삼국사기>.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로 들어가는 창이다.
4. 유교적 합리주의자 깁부식!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방대하고 중요한 <삼국사기>는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씌어진 후부터 800년이 지나오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 비판 중에 하나가
'김부식이 역사 기록을 날조하고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쓰면서 참고한 다른 많은 역사 기록들을
자기 주관에 따라 바꿔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김부식이 자료로 삼은 일련의 역사적 기록들이
단 하나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규보 - 동국이상국집
그 전대의 기록들이 어떠한 것들인지 유일한 단서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안에 들어있는 '동명왕편'입니다.
이규보는 서문에서
이 '동명왕편'을 <구삼국사>라고 하는,
'<삼국사> 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썼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삼국사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다음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의 한 대목입니다.
"7월에 홀령에 검은 구름이 피어
7일만에 운무가 걷히고 성곽 궁실이 자연히 이루어져"
이 대목이 <삼국사기>에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어떻게 적혀있는지 보겠습니다.
"4년 4월에 운무가 일어나
사람이 7일간 색을 구분 못하였다.
7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어떻습니까?
<동명왕편>은 전설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적고 있는 반면,
<삼국사기>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김부식은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전설적인 이야기를 역사 기록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5. 각 시대 관점의 혹평들,
"김부식은 사대주의자?~" , '국수주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부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1075~1151년)은
재상의 반열에 오른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다.
11세기 동북아 정세 - 거란(요)의 3차 고려 침공
12세기 여진족의 성장 - 북송을 차지하고 금 건국, 고려에 군신 관계 요구
고려와 거란의 요나라, 송의 안정된 삼각 관계는,
여진(금)의 등장으로 깨지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인 정세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여론이 양분되기 시작했다.
이 때 김부식은
강력하게 부상하는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화친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한 것이다.
"여러 신하가 찬성하는데,
김부식은 반대하여 말하길,
'여러 병난으로 군민이 겨우 휴식을 얻게 되었는데
지금 군사를 내는 것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 고려사
그 무렵 고려엔 중대한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묘청, 정지상 등 서경파의 주장 - 서경 천도, 황제 칭호 사용, 금국 정벌
왕실을 개혁하고,
금나라를 정벌하고
서경으로 천도하자며,
묘청이 난(인종 13년, 1135)을 일으킨 것이다.
금나라와의 전쟁보다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 안정을 추구했던
실리주의자 김부식으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결국 묘청의 난은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었다(1136년)
그러나 이 사건을 두고
근대 사학자 신채호는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역사'를
식민지 지배를 청산할 '투쟁'으로 삼은 신채호는
김부식 때문에 조선의 강토가 줄어들었다고 주장했다.
김부식의 사대성 논란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신채호(1880~1936, 독립운동가,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주성을 잘 발휘한 것이 '묘청'이라고 봤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조선일천년래제일대사건').
그런데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진압한 것이 김부식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김부식에 대한 신채호 선생님의 평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죠.
여기서 김부식과 그가 지은 <삼국사기>에 대해 사대성이 고착되었고
이것이 별다른 검토나 연구없이 그냥 우리 모두에게 공유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강래 교수(전남대 사학과)
그렇다면 중국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 시대 유교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어떻게 보았을까?
'읽으려면 잠이 오고,
중국의 형식을 취했으나 오히려 모화 사상이 부족하다'고 혹평했다.
"김부식의 책은 읽으려면 잠이 오고 황당하여 입에 오르면 불경할 뿐이다."
- 15세기 윤준
"사마천의 사기의 법을 취했으나 대의는 간혹 춘추와 다른 점이 있고"
- 15세기 권근
중화주의를 극복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의견은 또 달랐다.
도리어 중국의 사서를 베껴
자주적이지 못하다는 정반대의 지적을 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중국의 사서에서 골라 베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 18세기 박지원
"결국은 <삼국사기>나 김부식에 대한 향후의 평가라고 하는 것들이
평가자들이 처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처지,
자기 관점에서 본 <삼국사기>의 모습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시대, 어떤 상황이든
<삼국사기>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자기들이 처하고 있는 시점에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 그렇게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 이강래 교수(전남대 사학과)
6. 독창성, 자주성을 살린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
그렇다면 김부식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이강래 교수는
김부식의 정치적 태도를 바탕으로
삼국사기가 재단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재해석한다.
삼국사기는 크게 역사적 사실과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
'논왈(論曰)'로 시작되는 부분은
김부식이 자신의 의견을 적어놓은 것이다.
그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신라는 조카 고모와 이모의 자매까지 취하기도 한다.
외국의 법속은 다른 법이니
중국의 예법으로 이를 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왕의 업적을 기록한 곳에
'본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삼국사기 -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본기(本紀)'는
중국 황제의 기록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 편찬된 <고려사>
'본기' 대신, 제후의 기록이라는 뜻의 '세가(世家)'로 적고 있다.
더우기 중국과 우리 기록이 상반되는 경우는
거의 예외없이 우리 기록에 신뢰를 보이고 있다.
"고기(古記)에는 정관 6월에 죽었다고 하는데,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모두 5월로 나와 있으니,
아마 이것이 잘못이 아닐까 한다."
- 신라본기 진평왕
또한 편찬자들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리 것을 강조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신라의 초기 왕의 명칭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그리고 나서 중국식 왕호인 왕으로 바꿉니다만,
이러한 신라의 고유한 왕 칭호를
<삼국사기>는 예외없이 온전히 살려서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뒷날 조선 시대 역사 편찬자들이거나
심지어 신라말 최치원과도 구분되는 것입니다.
최치원이나 조선 시대 학자들은
이러한 신라 시대 왕 칭호가 '중국화 되지 못했다'거나,
'비루한 표현이다' 하면서,
전부 왕 칭호로 바꾸어 사용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기존의 신라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유산이나 용어조차도
그대로 살리는 게 옳다고 분명히 천명하면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인상적인 것입니다."
- 이강래 교수(전남대 사학과)
나이 71세의 은퇴한 노재상 김부식은 3년간 삼국사기 편찬에만 매달렸다.
평생을 정치가로 살아온 그는
마지막 힘을 역사 편찬에 쏟아부은 후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중국 사서에는 통달해 자세히 말하지만
우리나라의 일에는 갑자기 망연해져 그 시발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할 일이다.
중국 사서는 소략하고,
고기는 거칠고 졸렬하여,
삼국의 사실을 다 갖추어 싣지 못하였다.
이 책을 명산에 간직하진 못하여도
간장 병마개로 쓰지는 마옵소서"
- 진삼국사표
"인종에게 삼국사기를 바치면서 겸손하게 이야기했지만
간장 병마개로 쓰지 말아달라고 한 것은
그만큼 최선을 다해 썼고 부끄럽지 않다는 말일겁니다.
조선 시대 말까지
삼국사기에 대한 비평은
김부식 개인에게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대주의자라는 비판은
김부식 한 개인에게만 할 수 있는 게 아닐겁니다.
역사의 비판은
각 시대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록 하나하나가 올바른 것인지,
사실인지에 대해 검토하고 밝혀냈을 때
역사책에 대한 올바른 비판이 될 것입니다."
7. 일본의 역사 왜곡 '임나일본부설',
"삼국사기는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기록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 바로 일본 학자들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백제, 신라 300~400년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믿을 수 없다고 전면 부인하고 나섰고,
이것이 일본학계에선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상당 기간 우리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또 그들은 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걸까요?
지난 2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비교, 해석해오고 있는
최재석 교수(전 고려대 교수).
삼국사기를 부정한 일본학계의 움직임은
100년 동안 조직적으로 움직여왔다고 주장한다.
"구한말 19세기말부터 현재까지,
거의 100여 년 동안,
거의 조직적으로,
사학자 가운데 고대 사학자,
고대 사학자 가운데는 거의 한 사람도 예외없이,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30여 명 정도가,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임나일본부설),
동시에 삼국사기는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최재석 교수(전 고려대 교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처음 부정한 일본 학자는
일본 사학계의 거두 쓰다 소이치.
1919년 신라본기 부정,
1921년 백제본기 부정.
일제 시대인 1919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쓰다 소이치는 <일본서기> 중 신대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한 때 일본 우익 세력에 의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천황으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는다.
당시 우리에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학자라 알려져 있었지만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역사를 위해 그는 고대 역사를 조작했다.
그 역시 황국 사관에 충실한 대변자였던 것이다.
그들 주장의 기본은 <일본서기>였다.
자연 <일본서기>와 내용이 다른,
<삼국사기>는 부정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의 신화시대가 700만 년 계속되었다고 하지요.
하늘에서 내려와서
일본은 하느님의 아들이 통치하는 나라다,
그러한 조작된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일본 고대사를 써나가는 데
삼국사기가 전혀 도움이 안되요.
전혀 그러한 게 없으니까,
사실을 적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일본의 황국 사관을 펼쳐나가는 데 장애가 되니까
<삼국사기>를 조작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죠."
- 최재석 교수(전 고려대 교수)
<일본서기>에
백제와 신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 4세기 근초고왕,
신라 내물왕 때부터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기록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 초기 400년 역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백제 건국 - B.C. 18년.
신라 건국 - B.C. 57년.
- 삼국사기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위해서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해야 했다.
인덕천황릉(오사카)
4세기 야마토 정권 시절,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그 증거로 일본서기 '신공왕후 조의 기록을 내세운다.
신공왕후 49년,
서기 369년,
일본 군대가 한반도 남부 7국을 소탕해
200년 동안 속국으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남가라국 7국을 평정하였다."
당시 한반도 남부 지방엔 특별한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왜가 진출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는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의 기록이 밝혀지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이 비문을 일본측 학자들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391년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며
4세기 한반도 지배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우리쪽의 해석은 다르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오자 (고구려가 내려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이 내용은,
왜가 쳐들어오자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했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5만 군사는
내려가면서 먼저 백제 아신왕을 신하로 삼고,
신라에 쳐들어온 왜를 물리치고,
그후 신라의 김씨 왕위 세습 등 내정간섭까지 하며
(신라 호우총 호우명 그릇-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나아가 김해 금관가야까지 친다는 내용이다.
그 비석과 해석을 둘러싸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음에도
일본 학자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해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일본부설'의 가장 큰 걸림돌은 남아있었다.
바로 <삼국사기>의 기록이었다.
<삼국사기> 어디에서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그 근거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부터 주장했지만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것이 하나도 나와있지 않으니까,
다시 말해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까,
<삼국사기>가 조작됐다, 조작되었다고 해야만 그들의 주장을 펼 수가 있는 것이죠."
- 최재석 교수(전 고려대 교수)
4세기 이전에 강성한 고대 국가로 성장했던 백제와 신라.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함으로써
당시 한반도를 소국들만 난립하는 정치적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
결국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은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는 도구였다.
"쓰다 소이치에서 시작된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국내 학자들의 노력으로 많이 수정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본안에서조차
임나일본부설을 믿는 학자는 많지가 않습니다."
8. 천문관측 기록을 통해서 본, 삼국사기 신뢰도 최고!~
"그런데 또 학자들 중에서는 또 다른 이유를 들어
삼국사기를 믿을 수 없다고 또 주장을 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어떤 곳에는 연대가 표시되어 있고
또 어떤 곳에는 월까지 나와 있습니다.
요즘 같이 달력이 없었던 시대 어떻게 날짜까지 적을 수 있었겠느냐,
아마도 김부식이 필요에 따라 제 마음대로 써넣었다,
그래서 문제가 있고,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삼국사기안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총 266회의 천문 관측 기록이 있습니다.
일식이나, 또 유성이나 운석이 떨어진 기록도 있습니다.
혜성 출현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 기록들이 실제 일어난 기록인지,
만약에 일어났다면 중국의 천문 기록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대 천문대.
현대의 천문 관측은
망원경으로 모든 별자리의 움직임을 파악하지는 않는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유성의 움직임은
망원경 없이도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일어날 것까지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컴퓨터를 통해 과학적인 계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일식이나 월식, 오행 결집 같은 현상들이
앞으로 몇천 년, 몇만 년후에 일어날 것인가 예측도 하구요,
과거에 몇백, 몇천, 몇만 년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컴퓨터로 추적, 가능합니다."
- 박찬경(서울대 천문학과 박사과정)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실제 일어난 현상일까?
최초의 일식 기록을 입력했다.
B.C. 54년, 신라 혁거세 4년.
컴퓨터에서 찾아낸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했다.
고대 천문 관측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속 연구해온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박교수는
고대 천문 관측에 대한 기록들이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만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세 나라의 고대 일식 기록을 일일히 확인,
그리고 각각의 현상들이 실제 일어난 것들인지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한 80%가 진짜 일어났던 기록이고,
중국 기록은 75%,
일본 기록은 한 45%,
일본 기록은 반 이상이 안일어난거구요,
특히 삼국사기 초기 기록,
한 A.D 200년 정도까지 89% 정도가 실제 일어난 기록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주변국 다른 나라 사서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죠."
-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그런데 일식은 지구상 여러 지역에서 관측이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중국의 사서를 베끼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일식도: B.C. 800~A.D.2,200년
모든 일식의 성격을 분석한 지도.
"이것을 일식도라고 부르는데요,
지구상의 각 지점에서 어느 한 일식이 일어날 때,
각 지점마다 볼 수 있는 일식의 최대 식분을 볼 수 있는 거죠."
삼국사기 최초 일식 - B.C54년 식분도.
"이 중에 잔점을 찍은 곳이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지점이지요.
굵은 선이 90%, 70%, 50%..
50% 지점에 있는 사람들은 부분일식을 볼 수 있는 거죠.
태양의 지름 중에서 반이 가려지는 부분을 표현한 것입니다..."
일식을 볼 수 있는 지역과
볼 수 없는 지역을 표시한 일식도.
이 일식도를 이용하면 관측 지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모든 일식 기록을 입력해봤다.
결과는 관측 지점이 모두 다르게 나타났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측 지점이
모두 중국이나 일본과 달랐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다른 사서를 베끼거나 조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이 어디서 일어났느냐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컴퓨터를 사용해서 일식을 알아내는
그 정도 정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 생각에 도저히 일식 기록을 베낀다든지 조작해서
남의 것을 알아낼 수는 없다고 봅니다.
(만약에 김부식이 중국의 것을 베꼈다고 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러면 중국 기록들이 나타내고 있는 관측 지역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야지요.
그런데 고구려는 그보다 훨씬 고위도로 나타나고,
신라는 그보다 훨씬 저위도로 나타나는 것이 그런 가정을 부정할 수 있죠."
- 박창범 교수(서울대 천문학과)
삼국사기에는 중국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 독자 기록도 있다.
컴퓨터로 확인한 결과 이 기록들 역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太白犯月(태백범월) - 금성이 달에 가까워지는 현상.
독자 기록 중엔 낮에 태백성을 봤다는 '태백주현(太白晝現) 현상'도 있었다.
태백성이란 금성을 가리킨다.
낮에 금성을 관측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낮에 관측하기란 상당히 어렵거든요.
왜냐면 태양빛이 너무 밝아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낮에 보고싶다면 금성의 좌표를 사전에 미리 알아서 관측을 하면 육안으로 가능합니다.
저녁 때는 잘 보이지만 낮에는 겨우 보일 정도죠."
- 박찬경(서울대 천문학과 박사과정)
낮에 금성을 관측하려면 최소한 두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늘이 짙푸른 빛을 띄는 가을과 겨울,
즉 계절적인 조건과, 금성이 밝아지는 주기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224년으로 기록된 삼국사기 태백주현.
놀랍게도 금성이 밝아지는 주기와 일치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전부터의 '태백주현' 기록이 보이는데요,
그 시기에 지금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그런 천문 현상 기록들을 남겼다는 것이
저한테 굉장히 흥미롭고, 그 기록들에 감탄케 했죠."
- 박창범 교수(서울대 천문학과)
그렇다면 삼국 시대에는 천문의 주기를 계산할 수 있는 관측 기구가 있었을까?
고조선 시대의 유물을 연구하고 있는 이용복 교수.
삼국 이전에 벌써 수준 높은 천문 관측 기구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별자리가 정확하게 기록된 고인돌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인돌에 나타난 별자리 - B.C. 10세기경
"삼국 시대에는 엄청난 수준높은 관측이 진행되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단순히 별자리 관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대상으로써의 별을 관측했겠죠.
하지만 더 실제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정착 민족으로써
농경를 짓는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별자리 관측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역과 관련해서도 그 당시 사람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관측이 이루어지고
과학적인 수준도 높지 않겠느냐 하는추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 이용복 교수(서울교대 지구과학과)
기원전의 천문 관측까지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삼국사기.
이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증거다.
9. <삼국지위지동이전>을 따를 것인가?
<삼국사기>를 따를 것인가?
"이제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문제는 하나씩 해결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중견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아니면 믿을 수 있는 것만 부분적으로 선택해서 따를 것인가?
최근의 논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책은 <삼국지(삼국지위서동이전, 삼국지위지동이전)>입니다.
280년경에,
중국 사람 진수가 쓴 것으로
위, 촉, 오 삼국의 역사서인데요,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당대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삼국의 초기 모습을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안에 삼한을 기록한 <한조>에 따르면,
3세기경 한반도의 모습은
70여 개의 소국으로 나눠져 있고,
권역별로 이 소국들이 연맹체를 이루어서
마한, 변한, 진한으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삼국 초기의 역사인데요,
지금까지의 통설입니다.
그런데 이 통설이 잘못 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입니다.
구체적으로 백제 본기와 신라 본기를 살펴보면
이미 A.D. 1~2세기에 걸쳐서
주변국을 통합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군사를 보내어 몰래 마한을 습격해 그 도읍을 병합했다."
- A.D. 6년 백제 온조왕
"군사를 보내어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병합했다."
- A.D. 109년 신라 파사이사금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3세기 한반도 이남 지도를 그려보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딴판이 됩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는
3세기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남부의 70여 개의 소국의 하나로만 기록되고 있고,
<삼국사기> 본기 기록에 따르면
3세기 이미 백제와 신라는 고대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주변 소국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이 됩니다.
논쟁은 여기에 있습니다.
당대 기록인 삼국지와 12세기 기록인 삼국사기, 과연 어느 기록을 더 믿어야 할까요?
최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서강대 이종욱 교수.
그는 왜 삼국지위지동이전을 근거로 하는 통설을 부정하는 걸까?
"삼국사기가 저술된 시기는 1,145년이고
삼국지위지동이전이 편찬된 시기는 280년대입니다.
정확한 연대는 모르지만 280년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280년 이전까지의 연구는
삼국지 한조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
사료적인 가치가 더 높다 이렇게 주장하는 게 통설입니다.
그러나 삼국의 역사를
중국의 열전으로 연구할 수 없고,
조선조의 역사를
명사나 청사의 조선 열전으로 연구할 수 없듯이,
삼국지 한조(韓朝)의 열전을 가지고
바로 우리 한반도에 3세기까지 역사를 연구를 한다는 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지 한조의 기록을 한 번 검토해보면
삼국의 왕, 정치, 계보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백제나 신라의 정치적 성장, 삼한의 정치적 성장 이런 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원인을 이교수는 삼국지 기록의 목적에 두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한전(韓傳)은
삼국지 30권 위지, 그 중에서도 동이전 끝부분에 실려있다.
그 내용 또한 삼국의 정치적 성장엔 관심이 없음을 지적한다.
'막로국(莫盧國)'의 이름이 두 번 나오기도 하고,
변한과 진한을 합한 나라가 24국이라 했지만 실제는 26개국,
서문에서는 '변한(弁韓)'으로,
본문에서는 '변진(弁辰)'으로, 이름을 혼동하고 있는 등,
국가 관련 기록을 일관성없이 기록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부정확한 기록이 실린 것은
당시 위나라와 삼한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임을 들 수 있다.
위나라는
낙랑과 대방을 통해
무역에 필요한 간접적인 정보를 입수하였을 뿐이었음을 지적한다.
"사실 삼국지 편찬자들이
직접 삼한을 와서 견문하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있었던 여러가지 정보를 모아가지고,
또 간접적인 자료들을 통해서 삼국지 한조를 편찬했을 뿐이죠.
그러니까 삼국지 한조는
그 안에 여러가지 습속이라든지, 제도라든지,
사물이라든지, 관계 전환,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시대를 우리가 검토, 설정할 필요가 있죠.
그러지 않고서 삼국지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나라 3세기의 역사로 보는 건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삼국지 한전이 그린 기록은
3세기가 아닌 훨씬 이전 단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70여 개의 소국들이 난립하던 시대는
기원전 어느 시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한전에 실린 기사 중 연대가 실린 부분을 제시한다.
20-29년 사이 이미 진한의 이름이 등장하는 걸로 보아
삼한의 형성은 기원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황망지황 연간(20-29년)에
염사착이 진한 우거수가 되어 낙랑 토지가 좋아...."
그리고 계속적인 정치적 성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3세기에 이르면
한(韓)은 대방태수를 전사시킬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삼국지 기록대로 소국 상태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0-29년
우리들 천오백명은 벌채하다가
한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146-189년
한과 예가 강성해 군현이 통제할 수 없었다."
"246년
한(韓)이 대방군을 공격하였다.
그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대를 일으켜 쳤는데
궁중이 전사했다."
- 삼국지 한전
"삼국지 한조의 기록을 따르면 3세기까지 모두 소국입니다.
백제도, 신라도 전부 70여 개 소국 중 하나로 소국 상태입니다.
그 기록을 따른다면 우리 역사가 완전히 달라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종욱 교수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기원전부터
주변국들을 병합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3세기에 이르면 백제는 이미 충청권까지,
신라 또한 경북 일대를 통합하고 있다.
이번 논쟁의 또 다른 장본인인 경북대 주보돈 교수.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이기도 한 주교수는
'삼국사기에 있는 모든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밝힌다.
"삼국지라는 책은 위략이라는 책을 근거로 해서 작성을 했단 말이죠.
위략이라고 하는 책이 3세기 전반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전성이 되었던 시기를 감안한다는 2세기 후반까지도 가능하다고 보는데,
(삼국의 건국과 성장을)
1세기까지, 기원전 1세기까지 소급해서 보는 건
삼국사기 기록에 맞춰대기 위한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거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찾아지지 않습니다."
- 주보돈 교수(경북대 박물관장,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삼국지의 기록을 신뢰하게 된 부분은 다음이다.
"(삼한 사회가) 구슬을 더 귀하게 여겼고, 금은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장례에는 곽은 있으나, 관은 허용하지 않았다."
- 삼국지 한전
그동안 고고학적 발굴에서
이런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3세기 이전 무덤에선
관이 없는 무덤이 나왔다(=곽).
다양한 형태의 옥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금과 은은 출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곽묘.
곡옥(曲玉)
3세기가 넘어서야
화려한 금관도 나타나고
무덤들의 부장품이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세기가 지나서야
국가의 세력이 강성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3세기 관계라는 것은
거대한 정치 세력이 만들어지기 위한 그러한 준비 과정으로써의 모습을
고고학적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처럼
기원전부터 큰 왕조를 만들어 출발했다고 하는 것은,
지금 고고학적 발굴 과정에서 보여주는 것과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기가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죠."
- 주보돈 교수
기원후 3세기경 한반도 남부의 모습.
삼국지 한전을 토대로 한 지금까지의 주장과,
삼국사기를 근거로 한 새로운 주장,
백제와 신라의 초기 국가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10. 백제 초기 한성 왕궁터(?) 풍납도성 발굴!~
삼국사기 초기 기록 입증!~
"삼국지를 따를 것인가,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를 것인가,
이것은 우리나라 초기 국가 모습을 찾아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보돈 교수를 비롯해
고대사를 연구해온 많은 학자들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 중에 한전의 기록을 따랐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대 기록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역사학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12세기 기록인 삼국사기보다
당대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따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더우기 지금까지의 발굴을 보면
3~4세기에 와서야 무덤의 부장품이 다양해지고 금속제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종욱 교수의 주장은 무척 놀랍고 새롭습니다.
이종욱 교수의 주장대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삼국의 국가 형성 연대도 새롭게 조정되어야 하고,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의 연대도 새롭게 기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교수의 주장이 맞는다면
우리 고대사의 체계를 바꾸어야 하는 엄청난 지각변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최근 이 논쟁에 해답을 줄지도 모를 아주 중대한 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지난해 1997년 아파트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거대한 성벽과 다량의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학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백제 초기것으로 보이는 기와,
상당한 직위라는 것이 추측되는 '대부(大夫)'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그리고 제사터로 알려진 '여(呂)자형' 건물터도 있다.
그와 함께 왕궁 제사에 사용하는 말머리뼈도 발견되었다.
이로써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500년 왕궁터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성벽의 규모였다.
폭 40미터, 높이가 최고 9미터에 이르는 성이 2,2킬로미터에 이른다.
허물어진 부분까지 감안하면 3.5킬로미터에 이른다.
게다가 해자까지 감안한다면 성의 높이는 최대 15미터까지 가능하다.
이 정도 규모라면 100만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거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가름하는 중요한 문제다.
발굴 조사단은
지하 300~400미터 벌층에서 축조 연대를 풀어줄 단서를 찾아냈다.
'판축용 목재'
오랜 세월 벌층에 묻혀있어 부식되지 않고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목재에 탄소연대측정법을 실시했다.
탄소연대측정은
탄소 동위원소를 이용해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탄소연대는 말이죠,
화학 재료를 이용해 측정하는 것이고,
또 저희 뿐만 아니라 전 세계 200군데서 사용하는 방법이니까
이 자체에 대해 의의를 제기할 수는 없구요,
다만 동일한 지역에서 많은 실험을 동시에 분석하게 되면
오차 문제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차는 약 50년까지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연대 측정에 대해 충분히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 강형태(이학박사,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연구소는 가능한 한 오차 범위를 줄이기 위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풍납토성의 연대는 오차 범위를 감안하고서도
기원전 2세기까지 올라가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다.
풍납토성 하부층
B.C. 170 ~ A.D. 70년
B.C. 10 ~ A.D. 230년
집자리
B.C. 380 ~ A.D. 90년
B.C. 70 ~ A.D. 140년
A.D. 70 ~ 330년
"지금까지는 기록만 가지고 시비를 했다 이겁니다.
그래서 유구와 유물을 찾았을 때는
다시 기록을 검토해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이제 새로운 연구를 해야 되지 않느냐,
그런 입장에서 삼국사기 내용을 다시 검토해야 하지 않나 이런 얘기죠."
- 조유전(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기원 전후에 시작해,
최소한 2세기 이전에 도성이 완성되었다는 연구 결과는,
지금까지 통설로 삼아온 삼국지 한전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백제를 마한의 소국 중 하나로 기록하고,
마한에는 성곽이 없었다고 적어놨기 때문이다.
"산과 바다에 흩어져 있고 성곽이 없다."
- 삼국지 한전
"이 거대한 성을 축조할 수 있었던
통치 제도라든지, 인력 동원 방법이라든지,
우리가 새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백제가 3세기까지 소국이었다 이런 생각과 연구 체계를 가지고는
풍납토성과 같은 거대한 성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 이종욱 교수
삼국사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존의 연구 체제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또 있다.
바로 토기 문제다.
3세기 유물로 알려진 전형적인 백제 토기,
즉 삼족토기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원삼국 시대로 분리되던 이런 토기들이
한꺼번에 대량으로 출토된 것은 풍납토성이 처음이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삼족기라든가,
접시, 고배, 주둥이가 똑바로 올라서는 작은 항아리 정도들을
우리가 기존의 백제 토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풍납토성에서 나온 토기들을 보면
그런 유물들을 포함해서,
그 보다 훨씬 시기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이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은 기종의 유물들이
오히려 2/3 이상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유물들을
이전의 백제 전형적인 유물들과
어떤 관계로 생각해야 할 지 상당한 과제라 봅니다."
- 신희권(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풍납토성의 연대가 기원전으로 올라감에 따라
이 안에서 발견된 토기의 연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과도 연관된 중요한 과제다.
"<삼국사기>에 의할 것 같으면
신라가 기원전 57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을
고대 사학자들이 이제껏 잘 믿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고구려 태조왕, 백제 고이왕, 신라 내물왕 등,
4세기에 고대국가로 성립되어 왔을 거다 생각했는데,
실제 풍납토성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 연대가 올라가고
고대 사학쪽에서도 입증이 될 수 있다면,
이제는 한국의 삼국시대 기원,
그것이 삼국사기설이 맞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 거기에 맞춰 이제는 '긍정적인 역사관'을 만들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제 소박한 생각입니다."
- 최몽룡 교수(서울대 고고학과)
삼국사기가 기록한 백제 초기 500년 도읍지 하남 위례성.
그곳이 풍납토성으로 밝혀진다면
삼국사기는 다시 한 번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는 분명 우리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책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둘러싼 의문들을 해결하는 일을 결코 회피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격렬한 논쟁이 붙고, 또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 문제점들이 지적된다고 해서
삼국사기의 가치가 하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끊임없이 계속되는 삼국사기의 비판과 논쟁은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를 더욱 높게 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풍납토성의 발굴과 함께 계속되는 논쟁은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