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서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간이역을 노래한 시’ 하면 가장 먼저 꼽히는 시. 그러나 사평역은 이 세상에 없다. 작가가 만든 허구의 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현실의 사평역을 찾아냈다.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경전선 남평역(전남 나주)이 그곳. 시인이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열림원, 2013)에서 사평역의 실제 모델은 남광주역이라 밝혔음에도 우리에게 사평역은 여전히 남평역이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로, 1983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첫 시집 <사평역에서>에 실렸다.
추전역
고은
영동선 허위허위
해발 8백 55미터의 작은 역
너 누이야
석탄가루 날려
너하고 멜로드라마로 울며불며 헤어질 수도 없다
보아라 태백산 첩첩한데
무엇하려고 십자가는 여기까지 와 솟아 있느냐
떠라 모든 거룩한 말이여 너는 거짓말보다 못하다
◆추전역(강원 태백)은 해발 855m에 위치한,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역이다. 석탄산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태백은 동네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던 고장이요, 추전역은 쉬지 않고 석탄을 나르던 곳이었다. <시가 있는 간이역>(서정시학, 2012)의 저자인 소설가 최학은 이 시를 두고 “탄가루와 땀방울에 범벅된 사내들이 가졌던 속내 울음과 비탄을 역인들 기억할 것인가”라고 썼다. 오늘날 추전역은 환상선눈꽃열차·중부내륙순환열차(O-트레인)가 운행하는 관광명소다. 또, 시와 달리 영동선이 아니라 태백선의 간이역이다.
구둔역에서
설태수
간이역 모퉁이의 녹슨 철로
기차가 다니는 철길처럼
속살끼리 부비며
달밤에도 빛나고 싶건만
그렇게 소멸되고 싶건만
버려진 철로는 바람과 비와 눈을
적막을 견딜 수 없어
소리 없이 제 몸 찔러가며
검붉게 사위어가고 있다
취한 듯 스러지고 있다
◆구둔역(경기 양평)은 한때 중앙선의 간이역이었으나 지금은 선로가 옮겨가 역의 기능을 잃고 폐역이 됐다. 하지만 아름다운 역사는 등록문화재 296호로 지정됐고, 영화 <건축학개론>(2012)의 촬영지로 알려지며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거듭났다. 영화에서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나란히 걷던 그 철길이 이곳이다. 그런데 영화가 선보이기 아홉해 전, 시인은 이미 격정의 시기를 뒤로한 채 사위어가는 사랑을 버려진 철길에서 읽어냈다. 시집 <푸른 그늘 속으로>(모아드림, 2003)에 수록된 시.
첫댓글 사평역에서 저 시는 정말 말이 필요없죠.
간만에 다시 보아도 좋네요.
사평역이 실제로 없는 역이라는 거 처음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