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누가복음5:1-1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를 사람낚는 사명인으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평범한 사건같지만 인류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시몬 베드로는 시골 어부에서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와같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현대인들은 점점 소심한 신앙인이 되어 위대한 사명인으로 살기보다는 아기자기한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렇듯 얕은데 머물러 신앙생활하면 별로 재미없게 살게 됩니다. 의무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만 같고 졸리고 지루하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각종 진귀한 은혜와 축복을 누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기자기한 얕은 데를 떠나 깊은 영의 세계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사랑의 교회성도들은 소심한 신앙에서 떠나서 깊은 세계로 들어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진귀한 복을 많이많이 걷어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느 따스한 봄날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계셨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길이 약 20KM 되는 호수입니다. 이 호수는 예로부터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하여 어업이 성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호수주변에서 사역을 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물위도 걸으시고 광풍을 잔잔케도 하셨습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사역현장이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 호숫가에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들었고 예수님가까이서 말씀을 듣고자 밀고 당기는 바람에 예수님이 호수에 빠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중 한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를 조금만 육지에서 띄워주기를 요청하고 그 배에 올라 앉으셔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숨을 죽여가며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가 있는 것같지만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말씀에 대해 무지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참된 의미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줄 알고 물질과 육신에 얽매여 삽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적무지를 깨우쳐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부지런히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후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다같이 보시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 말씀을 하신 데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를 깊은 세계로 인도하고자 함이였습니다. 시몬은 하나님은 믿었지만 지금까지 그는 얕은 세계에 머물러 왔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깊은 데가 있고 얕은 데가 있습니다. 얕은 세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세계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된 세계입니다. 아직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그런 세계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계산하며 하나님을 믿고자 합니다. “나에게 득이 되는가 아니면 득이 되지 않는가?.. ”
그래서 으례히 교회나가고 무슨 행사가 있으면 교회가서 봉사하고 주일날 다른 모임이 있으면 예배를 빠집니다. 신앙생활을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얕은 데를 떠나지 않고자 합니다. 더 깊은 데로 가자고 하면 “나는 여기까지니 더 요구하지마세요”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깊은 데에 들어가야 그 신앙의 묘미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인생들을 지으실 때 이런 얕은 세상적인 것으로 만족할 수 없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동물들과는 다르게 고상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큰 뜻을 품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그런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순히 먹고 좋은 것 사고, 주말이면 놀러가는 것에 국한하여 산다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둥지에서 알을 가져다가 어미닭에게 품게 했습니다. 독수리는 부화되면서 자신이 닭 인줄 알고 컸습니다. 날개가 커져서 퍼득이면서도 날 생각을 하지 않고 어미닭을 따라다니며 지렁이나 애벌레를 잡아먹었습니다. 이제 자라서 어미닭보다 휠씬 커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닭들과만 어울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너는 독수리야 너는 날을 수 있어! 창공을 날면 얼마나 멋진데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살려고 하니!” 하는데도 독수리는 닭으로 일생을 살고자 합니다. 이것이 주인에게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이 독수리는 자신에게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보고 높은 데로 날아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얕은 닭의 세계를 고집하다 인생을 마친 것입니다. 우리가 혹 닭이 된 독수리같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독수리같이 창공을 날으며 기품있고 깊이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긴 날개를 펴고 깊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서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전진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인생들이 째째한 나만의 세계, 상식의 세계를 떠나고 하나님의 세계, 영의 세계를 들어가서 우리의 본질을 알고 꿈을 꾸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얕은 세계에서는 이런 묘미가 없습니다. 얕은 곳이 안전한 곳 같지만 실제로는 위험이 더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귀가 극성을 부립니다. 유혹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큰 망신당합니다. 사기당합니다.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집니다. 얕은 곳에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거이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심판받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는 위험할 것 같지만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깊은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를 겉모습만 보면 짠물밖에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면 상상치 못할 세계가 펼쳐집니다. 바다속에는 육지보다도 더 많은 169.000종류의 희귀한 동식물이 살아 숨쉬고 진주와 같은 보물들이 숨어 있고 석유, 가스 망간과 같은 지하자원과 미래의 식량자원이 무궁무진하게 묻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세계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보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적세계가 펼쳐집니다. 여기에는 우리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꿈이 있고 위대한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들이 있고 십자가의 사랑과 구속의 은총이 있고 여기에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치료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형통이 있습니다.
고도원씨가 쓴 꿈너머 꿈이란 책에는 사람이 백만장자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백만장자가 된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바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꿈너머 꿈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꿈이 있으면 삶이 행복해지지만 꿈너머 꿈이 있으면 삶이 위대해 집니다. 단순히 무엇이 되겠다는 꿈만 꾸면 막상 그 꿈을 이룬 뒤에는 허무해집니다. 꿈너머 꿈이 있어야 삶은 보람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꿈너머 꿈이 바로 사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카이스트 총장이였던 정근모장로는 신앙의 얕은 세계에서 자기머리만 믿고 살아오던 껍데기 신앙인이였습니다. 그는 약관 25세 나이로 미국 명문대에서 교수가 되어 천재교수로 이름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질병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열리고 깊은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깊은 세계에서 말할 수없는 감사와 거룩한 기쁨을 발견하였습니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어도 이런 감사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깊은 세계에서 거룩한 사명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목적을 발견하고 꿈너머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꿈너머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의 질병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얕은 데서 살았던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 꿈너머 꿈을 꾸고 거룩한 사명을 얻게 된 것을 무한히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데는 바로 꿈너머 꿈의 세계요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거기서 고기를 잡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첫째는 깊은 데로 나아가고자 소원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주님을 향해 온전히 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못믿을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진리이십니다. 진리는 이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피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음문을 활짝 열고 “나는 하나님을 믿겠노라”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을 믿겠노라” 하면 깊은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가운데 혹 아픔이 있습니까? 아픔은 깊은 데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질병과 사고가 있습니까? 질병과 사고도 깊은 데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혹 하나님의 깊은 세계로 나가면 혹 내게 손해가 있을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혹 하나님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면 내 시간을 잃고 내 재물을 잃을까 염려하고 있습니까?. 그런 작은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대신 내 마음을 더 열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깊은 세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둘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5)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위대성입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상식을 버렸습니다. 그는 지금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순종하여 깊은 데로 나아가야만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두뇌에 기초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가장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우리 인간의 두뇌가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순수이성비판을 한 칸트도 이성이 한계가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고 그것에 비추어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도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이성으로 분석, 비판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파스칼은 <믿음이란 자기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믿음이란 모험이요 인생을 건 도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보장이 되어있는 모험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모험보다는 안정을 원합니다. 이 때문에 깊은 곳에 가기를 원치않고 얕은 곳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깊은 세계로 갈려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6절을 보면 시몬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을 때 그는 깊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의 빈 그물에는 굵직 굵직한 고기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고기를 잡고자 하였을 때는 밤새도록 하여도 고기를 잡은 것이 없었지만 주님 말씀믿고 순종하였을 때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들은 결코 빈말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기만 하면 반드시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주십니다.
베드로가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믿지 않았던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무릎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그는 이 엄청난 기적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믿음없이 살아온 죄인인가를 깊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 이기적인 삶을 살며 이런 얕은 삶을 살아온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얕은 세계에서 베드로의 꿈은 고기를 많이 잡아서 좋은 아파트 마련하고 아이들 공부 잘 시키는 것이였습니다.
더 있다면 갈릴리농협 조합장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요 전부였습니다. 그는 이 희망으로 열심히 고기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삶에서는 인간의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한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삶의 분명한 방향과 꿈을 주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너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명인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점은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먹고 자고 놀다가 생을 마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복하고 다스리라(창1:28) 하시면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 때 행복할 것 같고 많은 것을 얻을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고독하고 무의미합니다. 최고의 배우가 되어도 고독하여 우울증에 걸립니다. 여러해전 삼성 전자 부사장이 투신자살하였습니다. 그는 삼성반도체의 세계최고의 반도체로 성장하기까지 견인차 역할을 했던 핵심멤버의 한사람이였습니다. 그도 마찬가지로 꿈만 있었지 꿈너머의 꿈이 없었습니다. 꿈너머의 꿈이 있는 사명인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은 그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죽음의 바다, 욕정의 바다, 욕망과 쾌락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인생들을 복음의 그물로 걷어올리는 삶은 그 어떤 삶보다 의미있는 삶입니다. 사람은 목숨을 바쳐 할 만한 의미있는 일이 있으면 참으로 행복해집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일이 있지만 복음으로 영혼을 살려내는 일처럼 영광스럽고 의미 있는 삶은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것 자체가 복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는 놀라운 상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도 백배를 얻고 저 세상에서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거기에다 인생의 그물을 내리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성도님들은 깊은 세계로 가라시는 주님말씀 순종하여 얕은 데서 소심한 삶을 살지말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