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섭리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칠 고난과 죽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광야로 돌리신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고 기억하며
당신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를 살리신 일을 두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이들의 결의는 사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복음).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큰 사랑을 받다가
형제들의 질투로 말미암아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곳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재상이 됩니다.
이후 요셉은 기근 때문에 이집트에 식량을 구하러 온
자신의 형제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형제들을 만나면서 하느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이집트로 보내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아버지 야곱의 후손 모두가 기근으로 굶어 죽지 않고
이집트에 정착하여 편히 살 수 있도록 조치합니다.
요셉이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형제들보다 먼저 이집트로 보내시어
기근에도 당신 백성이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도록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의 질투와 증오로 이집트로 팔려 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악의까지도 이용하시어
당신 백성을 살리신 것입니다(창세 45,7-11 참조).
그렇습니다. 인간의 악은 조화와 질서를 파괴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것마저도 이용하여 선을 이끌어 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성의 지도자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결의는 카야파 대사제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악의에 앞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탕과 같은 인간들의 죄악 가운데에서도
구원의 연꽃을 피우시는 분입니다.
도랑이나 하천가 양지바른 곳에 어김없이 자라는 풀이
‘고마리’라는 풀입니다.
오염된 시궁창이나 도랑에 난 이 풀을
쓸모없는 잡초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고마리’는 수질 정화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물의 오염이 심할수록 그 뿌리가 발달해서 더욱 잘 자라나고
물을 정화시키는 힘도 그만큼 커집니다.
오염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자라나
흘러가는 물을 맑게 해 주는 이 풀은 참으로 고마운 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풀을 ‘고마운 풀’로 불렀는데
그 말이 변해서 지금의 ‘고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시려고
스스로 수렁으로 들어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염된 시궁창을 맑게 해 주는
‘고마리’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도 ‘고마리’처럼 살아서 세상을 맑게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고마리’가 되려면 악취 나고 오염된 수렁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탐욕과 이기심의 수렁에
나눔과 공생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미움과 폭력의 도랑에서 사랑과 평화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비우고 죽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