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22. 콜럼버스는 무엇을 착각했나? ②
▶ 모습 드러낸 신대륙
[사진 = 콜럼버스의 항해로(영화 중)]
마르코 폴로가 알려준 것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갖고 콜럼버스가 이베리아 반도의 팔로스항(Port of Palos)을
출발한 것은 1492년 8월이었다.
서쪽으로 항해한 지 71일 만인 10월 12일, 콜럼버스 일행은 현재의 바하마(Bahamas) 제독의 와틀링(Watling) 섬에 도착했다.
일행은 그 주변에서 여러 개의 섬을 발견했다.
신대륙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사진 = 콜럼버스 항해선]
와틀링섬에는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구원의 성자, 또는 구세주의 섬이라는 의미였다.
새로운 땅에 도착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 = 콜럼버스 데이 행사]
이 섬을 발견한 10월 12일은 지금도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 곳이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는 신천지인줄 몰랐다.
그 때까지도 카리브 해(Caribbean Sea)의 섬들이 대칸의 나라 일부라고 믿고 있었다.
▶ "킨사이로 가서 대칸에게 친서를..."
[사진 = 콜럼버스의 항해경로]
1492년 10월 21일에 작성된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를 보면 그 것이 더욱 뚜렷해진다.
"날씨가 좋으면 이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이 곳 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몸에 지니고 있다고 들은 황금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를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제가 데려온 인디오들에게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지팡구(일본)가 틀림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쿨바(쿠바)라고 부르는 대단히 큰 섬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섬에는 아주 큰 배와 상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많은 섬들도 가는 길에 살펴볼 예정이지만
황금이나 향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행동 방침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토에 있는 킨사이(항주)로 가서 두 국왕폐하의 친서를 대칸에게 전하겠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반드시 그 답신을 요구한 뒤 그 것을 갖고 돌아갈 것입니다."
▶ 죽을 때까지 반신반의
[사진 = 콜럼버스의 항해]
이 일지 하나만 놓고 봐도 콜럼버스는 당시 자신이 대칸의 땅 바깥쪽 섬에 도착해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땅이 대칸의 나라가 아니었으니 콜럼버스는 당연히 대칸을 만나지도 편지를 전하지도 못한 채 유럽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4차례의 항해를 거치는 동안 그 곳이 당초 목표로 했던 지팡구도 칸 발릭이 있는 키타이(중국)도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으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반신반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그 것은 유럽인들에게 대단한 선물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신천지를 손에 넣기 위한 대규모 정복전쟁에 나서게 된다.
유럽이 아메리카를 손에 넣으면서 인류의 역사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 지구촌 새 시대 출발점
유라시아를 하나로 통일한 몽골의 시대는 마르코 폴로라는 한 인물을 통해 동과 서가 하나로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그것이 결과 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이라는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것은 완전하지 못했던 지금의 세계를 비로소 하나의 지구촌으로 묶는 새로운 시대를 불러왔다.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하지만 대칸의 나라는 그 원인을 제공하는데 그쳤고 실제로 동쪽으로 다가서기 위한 노력은 유럽 쪽의 몫이었다.
극작가 유진 오닐은 1927년에 쓴 희곡 ‘백만장자 마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쿠빌라이의 말도 그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내 제국은 이미 지나치게 거대해져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서양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
서양은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물질적인 부도 부족한 비참한 곳일 것이 분명하다.
서양의 탐욕스러운 위선과 접촉하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정복자는 먼저 피정복자의 악덕을 배우기 마련이다.
서양을 스스로 파멸하게 내버려두자."
▶ 정화함대의 신대륙 발견․세계일주 주장
[사진 = 콜럼버스의 관 (세비야 대성당)]
그 때까지 서양은 물질적인 부(富)도 전력(戰力)도 정신적인 면도 동양에 비해 열세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양은 파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 있던 동양의 것들을 자양분(滋養分)으로 삼아 동양을 압도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회를 마련했다.
영국의 한 아마추어 역사가는 14년간의 연구 결과 중국 명나라의 정화(鄭和)제독이 이끄는 탐험대가
콜럼버스 보다 72년 앞서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정화제독은 서양탐험가보다 1세기 앞서 세계 일주를 했다는 주장도 덧붙이면서 나름대로의 근거 자료를 제시했다.
이 주장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많은 논란과 연구가 뒤따라야겠지만 적어도 당시 동양,
특히 중국의 항해술이 서양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열세 뒤집고 서세동점 기회 잡은 유럽
[사진 = 나침판]
나침반과 인쇄술 제지술 화약 등 이른바 4대 발명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됐다.
항해와 관련된 많은 것들도 동양에서 넘어 갔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유럽인의 대탐험과 지리상의 발견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리상의 발견이후 서양은 신속하고 왕성하게 움직이면서 동양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열어 동양을 압도하고 일부 점령해 영국 같은 나라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동양은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서세동점의 전환점을 이룬 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다.
또 그 결과는 마르코 폴로가 일러준 동방에 대한 환상이 촉매제가 됐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