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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과 점봉 사이,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만추의 깊은 정취
2023년 10월 두발로학교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
10월 두발로학교(교장 진우석. 여행작가)는 제82강으로, 설악산과 점봉산 자락이 품은,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가을의 깊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인제 <은비령길>로 떠납니다. 가리산리마을과 필례약수 일대는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隱秘嶺)>의 무대이기도 한데요. 특히 가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만추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단풍을 찾아 은비령길로 함께 떠나볼까요(걷는 길의 난이도는 <보통(중)>이며 오르내리막길이 조금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만추의 깊은 정취,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진우석
진우석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두발로학교 제82강, 2023년 10월 28일(토) 준비하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에 대해 들어봅니다.
인제천리길 10코스 은비령길
강원도 인제는 휴전선을 머리에 이고, 첩첩 산을 품은 고을이다. 인제의 땅은 남북 분단으로 나눠지고, 소양호로 수몰되고, 일부 고원 지대는 군 훈련장으로 포장되는 아픔을 겪었다. 인제천리길은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며 인제 구석구석에 36구간 약 505㎞의 길로 이어졌다. 그중 은비령길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의 무대로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큰눈이고개를 넘어 필례약수를 잇는 약 10.3㎞의 길이다.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은비령(큰눈이고개)으로 가는 길. 앞으로 가리산 일대가 잘 보인다.Ⓒ진우석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은비령>, 이순원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은 주인공이 서해 격포로 가다가 라디오에서 눈 소식을 듣고, 은비령으로 길을 바꾸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갈등한다. 주인공이 고시 공부를 위해 머물렀고, 두 사람이 별을 봤던 장소가 지금의 가리산리방제처험마을 일대다. 이 마을은 과거 수해를 겪었고, 지금은 국내 유일의 방재체험마을로 꾸몄다. 주로 학생들이 방재체험을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기서 하쿠타케 혜성을 보고, 2천5백만 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기약한다.
▲장대한 숲이 펼쳐지는 큰눈이고개Ⓒ진우석
마을에서 설악산국립공원 중 가리산 영역인 가리봉과 주걱봉 등이 잘 보인다. 큰눈이고개는 가리봉 남쪽의 고개로 일명 ‘은비령’, 가리산리방재마을과 필례약수를 이어준다. 한계령이 생기기 전에는 보부상들이 소금을 지고 넘었던 유서 깊은 고개다. 호젓한 계곡을 지나면 조붓한 숲길이 나온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크기로 선이 살아 있다.
한동안 가파른 숲길을 오르면 큰눈이고개 꼭대기에 올라붙는다. 여기에 국립공원 돌 표석이 있다. 고갯마루를 기준으로 북쪽이 설악산국립공원의 영역이다. 북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봉 등이 버티고 있다. 이곳은 출입 통제구역이다. 남쪽으로 은비봉이 이어지는데, 길이 험하다.
대목이령, 필례령 등으로 불리는 큰눈이고개를 ‘은비령’이라고도 한다. 소설의 영향이다. 사실 소설에 나오는 은비령은 한계령에서 양양 쪽으로 내려오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필례약수 쪽으로 가는 길의 작은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 이름을 이순원 작가는 은비령이라 이름 붙였다. 한계령 아래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큰눈이고개 일대는 장대한 숲이다. 봄여름에는 야생화가 수놓는다. 하지만 전망이 트이지 않는다. 고갯마루에서 남쪽 은비봉 쪽으로 조금 가면 조망 좋은 공간이 있다. 여기서 설악산과 가리산마을 등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큰눈이고개에서 필례약수로 내려서는 호젓한 숲길Ⓒ진우석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
큰눈이고개에서 한숨 돌렸으면, 이제 필례약수 방향으로 내려올 차례다. 인제천리길 이정표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면 숲길은 임도로 바뀌고 필례마을을 만난다. 필례마을은 1996년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만큼 오지였다. 마을에는 동네 목욕탕 수준의 필례온천이 있다. 소박한 온천이라 정겹다.
필례의 지명은 주변 지형이 베 짜는 여자인 필녀(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어 피난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필례약수는 1930년경 처음 발견됐다.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은 1970년 말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마을을 떠났다. 다시 사람이 찾아든 건, 필례약수가 소문나면서부터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사람들이 찾아왔다.
필례약수에서 주차장 내려가는 단풍 터널은 널리 알려졌다. 필례약수 주차장부터는 계곡길이 이어진다. 도로 아래로 계곡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계곡에는 떨어진 단풍이 흐른다. 깊은 가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은비령길은 필례오단폭포를 지나 군량분교에 마무리된다. 소설 <은비령>은 여인이 떠나면서 끝맺는다. 이순원은 이 소설을 통해 “우리 곁으로 오는 혜성과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멀리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는 뜻으로 혜성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질서처럼 미리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우리 운명의 어떤 약속으로 다가오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라고 한다. 소설은 마지막 구절을 감상해보자.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은비령>, 이순원
설악과 점봉 사이,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만추의 깊은 정취
2023년 10월 두발로학교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
10월 두발로학교(교장 진우석. 여행작가)는 제82강으로, 설악산과 점봉산 자락이 품은,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가을의 깊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인제 <은비령길>로 떠납니다. 가리산리마을과 필례약수 일대는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隱秘嶺)>의 무대이기도 한데요. 특히 가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만추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단풍을 찾아 은비령길로 함께 떠나볼까요(걷는 길의 난이도는 <보통(중)>이며 오르내리막길이 조금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만추의 깊은 정취,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진우석
진우석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두발로학교 제82강, 2023년 10월 28일(토) 준비하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에 대해 들어봅니다.
인제천리길 10코스 은비령길
강원도 인제는 휴전선을 머리에 이고, 첩첩 산을 품은 고을이다. 인제의 땅은 남북 분단으로 나눠지고, 소양호로 수몰되고, 일부 고원 지대는 군 훈련장으로 포장되는 아픔을 겪었다. 인제천리길은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며 인제 구석구석에 36구간 약 505㎞의 길로 이어졌다. 그중 은비령길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의 무대로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큰눈이고개를 넘어 필례약수를 잇는 약 10.3㎞의 길이다.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은비령(큰눈이고개)으로 가는 길. 앞으로 가리산 일대가 잘 보인다.Ⓒ진우석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은비령>, 이순원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은 주인공이 서해 격포로 가다가 라디오에서 눈 소식을 듣고, 은비령으로 길을 바꾸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갈등한다. 주인공이 고시 공부를 위해 머물렀고, 두 사람이 별을 봤던 장소가 지금의 가리산리방제처험마을 일대다. 이 마을은 과거 수해를 겪었고, 지금은 국내 유일의 방재체험마을로 꾸몄다. 주로 학생들이 방재체험을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기서 하쿠타케 혜성을 보고, 2천5백만 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기약한다.
▲장대한 숲이 펼쳐지는 큰눈이고개Ⓒ진우석
마을에서 설악산국립공원 중 가리산 영역인 가리봉과 주걱봉 등이 잘 보인다. 큰눈이고개는 가리봉 남쪽의 고개로 일명 ‘은비령’, 가리산리방재마을과 필례약수를 이어준다. 한계령이 생기기 전에는 보부상들이 소금을 지고 넘었던 유서 깊은 고개다. 호젓한 계곡을 지나면 조붓한 숲길이 나온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크기로 선이 살아 있다.
한동안 가파른 숲길을 오르면 큰눈이고개 꼭대기에 올라붙는다. 여기에 국립공원 돌 표석이 있다. 고갯마루를 기준으로 북쪽이 설악산국립공원의 영역이다. 북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봉 등이 버티고 있다. 이곳은 출입 통제구역이다. 남쪽으로 은비봉이 이어지는데, 길이 험하다.
대목이령, 필례령 등으로 불리는 큰눈이고개를 ‘은비령’이라고도 한다. 소설의 영향이다. 사실 소설에 나오는 은비령은 한계령에서 양양 쪽으로 내려오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필례약수 쪽으로 가는 길의 작은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 이름을 이순원 작가는 은비령이라 이름 붙였다. 한계령 아래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큰눈이고개 일대는 장대한 숲이다. 봄여름에는 야생화가 수놓는다. 하지만 전망이 트이지 않는다. 고갯마루에서 남쪽 은비봉 쪽으로 조금 가면 조망 좋은 공간이 있다. 여기서 설악산과 가리산마을 등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큰눈이고개에서 필례약수로 내려서는 호젓한 숲길Ⓒ진우석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
큰눈이고개에서 한숨 돌렸으면, 이제 필례약수 방향으로 내려올 차례다. 인제천리길 이정표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면 숲길은 임도로 바뀌고 필례마을을 만난다. 필례마을은 1996년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만큼 오지였다. 마을에는 동네 목욕탕 수준의 필례온천이 있다. 소박한 온천이라 정겹다.
필례의 지명은 주변 지형이 베 짜는 여자인 필녀(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어 피난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필례약수는 1930년경 처음 발견됐다.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은 1970년 말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마을을 떠났다. 다시 사람이 찾아든 건, 필례약수가 소문나면서부터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사람들이 찾아왔다.
필례약수에서 주차장 내려가는 단풍 터널은 널리 알려졌다. 필례약수 주차장부터는 계곡길이 이어진다. 도로 아래로 계곡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계곡에는 떨어진 단풍이 흐른다. 깊은 가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은비령길은 필례오단폭포를 지나 군량분교에 마무리된다. 소설 <은비령>은 여인이 떠나면서 끝맺는다. 이순원은 이 소설을 통해 “우리 곁으로 오는 혜성과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멀리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는 뜻으로 혜성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질서처럼 미리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우리 운명의 어떤 약속으로 다가오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라고 한다. 소설은 마지막 구절을 감상해보자.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은비령>, 이순원
설악과 점봉 사이,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만추의 깊은 정취
2023년 10월 두발로학교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
10월 두발로학교(교장 진우석. 여행작가)는 제82강으로, 설악산과 점봉산 자락이 품은,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가을의 깊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인제 <은비령길>로 떠납니다. 가리산리마을과 필례약수 일대는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隱秘嶺)>의 무대이기도 한데요. 특히 가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만추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단풍을 찾아 은비령길로 함께 떠나볼까요(걷는 길의 난이도는 <보통(중)>이며 오르내리막길이 조금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만추의 깊은 정취,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진우석
진우석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두발로학교 제82강, 2023년 10월 28일(토) 준비하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에 대해 들어봅니다.
인제천리길 10코스 은비령길
강원도 인제는 휴전선을 머리에 이고, 첩첩 산을 품은 고을이다. 인제의 땅은 남북 분단으로 나눠지고, 소양호로 수몰되고, 일부 고원 지대는 군 훈련장으로 포장되는 아픔을 겪었다. 인제천리길은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며 인제 구석구석에 36구간 약 505㎞의 길로 이어졌다. 그중 은비령길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의 무대로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큰눈이고개를 넘어 필례약수를 잇는 약 10.3㎞의 길이다.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은비령(큰눈이고개)으로 가는 길. 앞으로 가리산 일대가 잘 보인다.Ⓒ진우석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은비령>, 이순원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은 주인공이 서해 격포로 가다가 라디오에서 눈 소식을 듣고, 은비령으로 길을 바꾸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갈등한다. 주인공이 고시 공부를 위해 머물렀고, 두 사람이 별을 봤던 장소가 지금의 가리산리방제처험마을 일대다. 이 마을은 과거 수해를 겪었고, 지금은 국내 유일의 방재체험마을로 꾸몄다. 주로 학생들이 방재체험을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기서 하쿠타케 혜성을 보고, 2천5백만 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기약한다.
▲장대한 숲이 펼쳐지는 큰눈이고개Ⓒ진우석
마을에서 설악산국립공원 중 가리산 영역인 가리봉과 주걱봉 등이 잘 보인다. 큰눈이고개는 가리봉 남쪽의 고개로 일명 ‘은비령’, 가리산리방재마을과 필례약수를 이어준다. 한계령이 생기기 전에는 보부상들이 소금을 지고 넘었던 유서 깊은 고개다. 호젓한 계곡을 지나면 조붓한 숲길이 나온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크기로 선이 살아 있다.
한동안 가파른 숲길을 오르면 큰눈이고개 꼭대기에 올라붙는다. 여기에 국립공원 돌 표석이 있다. 고갯마루를 기준으로 북쪽이 설악산국립공원의 영역이다. 북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봉 등이 버티고 있다. 이곳은 출입 통제구역이다. 남쪽으로 은비봉이 이어지는데, 길이 험하다.
대목이령, 필례령 등으로 불리는 큰눈이고개를 ‘은비령’이라고도 한다. 소설의 영향이다. 사실 소설에 나오는 은비령은 한계령에서 양양 쪽으로 내려오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필례약수 쪽으로 가는 길의 작은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 이름을 이순원 작가는 은비령이라 이름 붙였다. 한계령 아래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큰눈이고개 일대는 장대한 숲이다. 봄여름에는 야생화가 수놓는다. 하지만 전망이 트이지 않는다. 고갯마루에서 남쪽 은비봉 쪽으로 조금 가면 조망 좋은 공간이 있다. 여기서 설악산과 가리산마을 등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큰눈이고개에서 필례약수로 내려서는 호젓한 숲길Ⓒ진우석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
큰눈이고개에서 한숨 돌렸으면, 이제 필례약수 방향으로 내려올 차례다. 인제천리길 이정표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면 숲길은 임도로 바뀌고 필례마을을 만난다. 필례마을은 1996년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만큼 오지였다. 마을에는 동네 목욕탕 수준의 필례온천이 있다. 소박한 온천이라 정겹다.
필례의 지명은 주변 지형이 베 짜는 여자인 필녀(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어 피난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필례약수는 1930년경 처음 발견됐다.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은 1970년 말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마을을 떠났다. 다시 사람이 찾아든 건, 필례약수가 소문나면서부터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사람들이 찾아왔다.
필례약수에서 주차장 내려가는 단풍 터널은 널리 알려졌다. 필례약수 주차장부터는 계곡길이 이어진다. 도로 아래로 계곡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계곡에는 떨어진 단풍이 흐른다. 깊은 가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은비령길은 필례오단폭포를 지나 군량분교에 마무리된다. 소설 <은비령>은 여인이 떠나면서 끝맺는다. 이순원은 이 소설을 통해 “우리 곁으로 오는 혜성과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멀리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는 뜻으로 혜성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질서처럼 미리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우리 운명의 어떤 약속으로 다가오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라고 한다. 소설은 마지막 구절을 감상해보자.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은비령>, 이순원
설악과 점봉 사이,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만추의 깊은 정취
2023년 10월 두발로학교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
10월 두발로학교(교장 진우석. 여행작가)는 제82강으로, 설악산과 점봉산 자락이 품은, 황홀한 단풍루트! 더할 수 없는 가을의 깊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인제 <은비령길>로 떠납니다. 가리산리마을과 필례약수 일대는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隱秘嶺)>의 무대이기도 한데요. 특히 가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만추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단풍을 찾아 은비령길로 함께 떠나볼까요(걷는 길의 난이도는 <보통(중)>이며 오르내리막길이 조금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만추의 깊은 정취,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진우석
진우석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두발로학교 제82강, 2023년 10월 28일(토) 준비하는, 인제의 비경 <은비령길>에 대해 들어봅니다.
인제천리길 10코스 은비령길
강원도 인제는 휴전선을 머리에 이고, 첩첩 산을 품은 고을이다. 인제의 땅은 남북 분단으로 나눠지고, 소양호로 수몰되고, 일부 고원 지대는 군 훈련장으로 포장되는 아픔을 겪었다. 인제천리길은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며 인제 구석구석에 36구간 약 505㎞의 길로 이어졌다. 그중 은비령길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의 무대로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큰눈이고개를 넘어 필례약수를 잇는 약 10.3㎞의 길이다.
▲가리산리방재체험마을에서 은비령(큰눈이고개)으로 가는 길. 앞으로 가리산 일대가 잘 보인다.Ⓒ진우석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은비령>, 이순원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은 주인공이 서해 격포로 가다가 라디오에서 눈 소식을 듣고, 은비령으로 길을 바꾸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갈등한다. 주인공이 고시 공부를 위해 머물렀고, 두 사람이 별을 봤던 장소가 지금의 가리산리방제처험마을 일대다. 이 마을은 과거 수해를 겪었고, 지금은 국내 유일의 방재체험마을로 꾸몄다. 주로 학생들이 방재체험을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기서 하쿠타케 혜성을 보고, 2천5백만 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기약한다.
▲장대한 숲이 펼쳐지는 큰눈이고개Ⓒ진우석
마을에서 설악산국립공원 중 가리산 영역인 가리봉과 주걱봉 등이 잘 보인다. 큰눈이고개는 가리봉 남쪽의 고개로 일명 ‘은비령’, 가리산리방재마을과 필례약수를 이어준다. 한계령이 생기기 전에는 보부상들이 소금을 지고 넘었던 유서 깊은 고개다. 호젓한 계곡을 지나면 조붓한 숲길이 나온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크기로 선이 살아 있다.
한동안 가파른 숲길을 오르면 큰눈이고개 꼭대기에 올라붙는다. 여기에 국립공원 돌 표석이 있다. 고갯마루를 기준으로 북쪽이 설악산국립공원의 영역이다. 북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봉 등이 버티고 있다. 이곳은 출입 통제구역이다. 남쪽으로 은비봉이 이어지는데, 길이 험하다.
대목이령, 필례령 등으로 불리는 큰눈이고개를 ‘은비령’이라고도 한다. 소설의 영향이다. 사실 소설에 나오는 은비령은 한계령에서 양양 쪽으로 내려오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필례약수 쪽으로 가는 길의 작은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 이름을 이순원 작가는 은비령이라 이름 붙였다. 한계령 아래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큰눈이고개 일대는 장대한 숲이다. 봄여름에는 야생화가 수놓는다. 하지만 전망이 트이지 않는다. 고갯마루에서 남쪽 은비봉 쪽으로 조금 가면 조망 좋은 공간이 있다. 여기서 설악산과 가리산마을 등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큰눈이고개에서 필례약수로 내려서는 호젓한 숲길Ⓒ진우석
필례약수의 단풍 터널
큰눈이고개에서 한숨 돌렸으면, 이제 필례약수 방향으로 내려올 차례다. 인제천리길 이정표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면 숲길은 임도로 바뀌고 필례마을을 만난다. 필례마을은 1996년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만큼 오지였다. 마을에는 동네 목욕탕 수준의 필례온천이 있다. 소박한 온천이라 정겹다.
필례의 지명은 주변 지형이 베 짜는 여자인 필녀(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어 피난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필례약수는 1930년경 처음 발견됐다.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은 1970년 말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마을을 떠났다. 다시 사람이 찾아든 건, 필례약수가 소문나면서부터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사람들이 찾아왔다.
필례약수에서 주차장 내려가는 단풍 터널은 널리 알려졌다. 필례약수 주차장부터는 계곡길이 이어진다. 도로 아래로 계곡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계곡에는 떨어진 단풍이 흐른다. 깊은 가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은비령길은 필례오단폭포를 지나 군량분교에 마무리된다. 소설 <은비령>은 여인이 떠나면서 끝맺는다. 이순원은 이 소설을 통해 “우리 곁으로 오는 혜성과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멀리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는 뜻으로 혜성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질서처럼 미리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우리 운명의 어떤 약속으로 다가오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라고 한다. 소설은 마지막 구절을 감상해보자.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은비령>, 이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