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누가복음 20:37,38,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찬송가 295장(큰 죄에 빠진 나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호칭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자기를 소개하실 때에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택한 믿음의 족장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한 까닭은 그 족장들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지금도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신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살아 있는 자들로 계속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 앞에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육체가 늙고 병들거나 사고로 죽을지라도 그 영혼은 하나님께 올라가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합시다. 우리 역시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으며 장차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 계속하여 살아 있는 그의 백성이라는 점을 항상 잊지 맙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억할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극히 부족하여 연약한데도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부끄러워 여기지 아니하신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야곱을 생각해보면 욕심이 참 많은 분이었습니다. 성격적으로 모난 구석도 많은 분들이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보면 그들은 어떤 아들은 포악하고 어떤 아들은 부도덕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후에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하나님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시고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뜨겁게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솔로몬이 쓴 아가는 왕의 신분이었던 솔로몬이 지극히 평범한 시골의 양치기 소녀인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여 쓴 연서입니다. 물론 성령의 영감으로 쓴 이 노래는 왕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와 성도들의 언약적 사랑을 노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술람미 여인은 오빠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면서 험한 양이나 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녀인데 어느날 왕이 그 근방에 와서 포도원을 가꾸는 여가 생활을 하는 중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일 수 있습니다. 신분적으로 보면 도저히 만나지 못할 사이고 정신적으로 보아도 큰 차이가 있는 사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를 떠나서, 빈부의 차이를 떠나서 솔로몬은 이 순수한 시골 소녀를 보고 그 소녀와 말을 나누는 중에 기이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왕은 왕궁에 수많은 여인들이 있지만 이 소녀에게서 신선한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사랑을 연모합니다. 이에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왕의 총애를 받은 술람미 소녀는 왕에게 마음을 열고 존경을 넘어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의 총애를 깊이 기뻐하며 깊은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가서에서 이렇게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을 향한 사랑을 느끼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아가 2:16)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도다”(아가 7:10)
그렇습니다. 큰 왕국의 최고 권력자인 솔로몬 왕이 일개 시골뜨기 소녀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처럼 기이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러한 신분과 조건과 빈부를 떠난 조건 없는 사랑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지극히 사랑스런 신부요 그의 사랑스런 누이입니다. 그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의 사랑을 심히 연모합니다. 이것처럼 황홀하고 이것처럼 영광스럽고 이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의 사랑은 영원하고 한결같으니 심지어 우리가 뻔뻔스럽고 배은망덕하기까지 할지라도 변치 않습니다. 호세아서 3:1 말씀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다른 신을 사랑하고 우상 제사에 참석하는 악을 행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눈물 겨운 사랑을 우리가 받은 자들입니다.
에스겔서 16:6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탯줄도 끊지 않은 채 버려진 핏덩이 아기를 보고 그 아기를 구하여 돌보아서 아름다운 처녀로 양육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핏덩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고 돌보시어 지극히 아름답게 양육하였노라고 말씀한 것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고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간다 해도 그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하며 마치 “피투성일지라도 그저 살아 있어만 다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기만 해다오.”라고 간절히 말하는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를 향한 마음이요 주님께서 그의 신부된 우리를 향한 마음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괜찮으니 다만 살아 있어만 다오.”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가 조건없이 한량없이 지금까지 받아왔고 앞으로도 이런 사랑을 우리가 받고 살 것입니다. 못난 우리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기가 불리워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누가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랑을 우리가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영원히 우리가 받고 그 앞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믿어주고 밀어주고 자기를 내어주며 온갖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 주님의 신부가 되었으니, 우리도 그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연모하듯이, 우리도 그의 사랑을 연모하며 그에게 우리 온 마음을 다 드려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이름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우라 모두 그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 험한 세상을 힘차게 살아갑시다. 또한 이제 힘을 내어 이 사랑의 하나님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드리는 그의 자랑스런 백성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