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나또 수삐꾸 잉글리슈
/노정희
대문께에 차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곧 소란스러워졌다.
이어 작은아버지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야들아 머하노 이거 받으러 안 나오고…."
우리 집 살림을 도와주며 같이 사는 덕이 언니가 빨리 뛰어나가 짐을 받아 안았다.
"아재 오십니껴? 아이구 무겁네, 이 많은 걸 우예 갖고 왔어예?"
그러자 작은아버지는 '배짱도 좋게' 소리쳤다.
“까짓 거 다꾸시 탔지 머, 부자 형수님 있는데….”
짐 보따리 속에는 시골집에서 치는 토종 벌꿀과 익모초, 그 외 온갖 약초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늘 하듯이 약초값과 차비를 넉넉히 챙겨 주며, 옷가지에 양말도 가방에 넣어 주라고 덕이 언니에게 말했다. 작은아버지는 돈을 세어보고 기분이 매우 흡족한 듯했다. 우리 자매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는 길에서 코쟁이 만나거든 미국 말 몇 마디를 해야 하니 가르쳐 준다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너거 잘 배와 둬라. 아이 캔나또 수삐꾸 잉글리슈! 따라 해라.” 우리 자매들은 큰 소리로 따라 외친 뒤,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작은아버지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껌이나 초코렛또 있으믄 달라고 하기 전에 내가 미국말 잘 못한다는 뜻으로 먼저 이 말을 해라. 그다음에 '김미 껌! 김미 초코렛또!'라고 외치 믄 껌이나 초코랫또를 준대이."
그러니까 '아이 캔나또 수삐꾸 잉글리슈'는 'I cannot speak English.'
의 작은아버지식 발음이었던 것이다.
그런 말 말고도 '아이 에무 걸', '아이 에무 보이'도 배웠는데, 엄마의 꾸중만 아니었다면 계속 했으리라. 그게 내가 최초로 배운 미국 말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색깔 있는 와이셔츠와 넥타이에 금핀을 꽂고, 읍내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노름방에 드나들며 돈을 없앴다. 아버지는 그런 동생을 만나기만 하면 크게 꾸짖었다. 그래서 작은아버지는 항상 형님이 퇴근하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우리 형수 친정이 부자!"라고 큰소리치며 돈을 융통해서 쓰고는 우리 집에 나타났다. 항상 뒤치다꺼리는 엄마의 몫이었다.
어느 날, 골목길 끝 집에 사는,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고 얼굴은 매우 새카매서 꼭 석탄처럼 반짝이는 옥이라는 아이가 우리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옥이 엄마가 시장에 장사하러 다니던 어느 날 미군이 타고 가던 짚 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실려 갔다 온 후 낳은 아이였다.
옥이는 어릴 때도 아이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학교에 입학해서도 늘 놀림감이 되었다. 단지 얼굴색이 다르다고….
"봐라, 자는 미국 아라도 미국 말 하나도 모르지? 껍데기는 미국 사람인데 미국 말 모르면 말짱 꽝이지. 딸아는 이름 석자하고 버스 탈 때 어디 가는 거만 알머 되는기라…. 백선생 봐라, 지 엄마가 혼자서 애묵고 딸아 하나 키와 갖고 사범학교 공부시켰는데 연애 잘못해가 미치뿌렸잖아…… 일찌감치 쪼매만 갈치고 공장 보내가 돈벌이 시키마 저런 일 없었지.” 백 선생은 얼굴도 예쁘고 양순한 사람이었다. 남자를 사귄 뒤 아기를 갖자, 가난한 집이고 친정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걸 안 남자가 변심해서 떠나 버렸다. 백 선생은 종일 실실 웃으며 동네를 쏘다니고, 백선생 엄마는 젖을 물리려고 아기를 업고 딸을 뒤 따라다녔다. 딸에게 집에 가자고
애원해도 백 선생은 막무가내였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엄마가 딸들만 낳았으니 작은집 아들을 우리 집에 양자로 들이려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딸들에게 공부 많이 시키지 않기를 바랐다. 집을 새로 지을 때도 수리를 할 때도 엄마는 작은아버지의 의중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을 맡겼다.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공부 많이 해서 남자들 몫까지 해야 한다며, 딸들에게 최선을 다해 교육하려고 애썼다.
엄마는 작은아버지에게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우리 자매들에게 피아노, 발레, 스케이트, 미술 등 하고 싶은 것을 다 가르쳤다. 아마 양자를 들이는 걸 원치 않아서 그랬으리라.
작은아버지의 희망은 이른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아이 캔나또 수삐꾸 잉글리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