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약속이나 한 듯, 미국 자동차 업계는 지금 일제히 극도의 경영난에 봉착해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일본차와 한국차 등에 북미 시장을 야금야금 빼앗겨온 데다 공룡처럼 거대해진 덩치, 거기에 퇴직근로자 의료보험 부담을 비롯한 방만한 운영 때문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 상황에 대한 안일한 대처 등도 한꺼번에 겹치면서 세계 자동차 업계를 호령하던 빅3는 사상 최악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론 미국 정부가 자동차 산업의 어려움을 바라보고만 있을 리 없을 테고, 따라서 머지않아 적극적인 대책이 나올 것이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제대하고 나서 1년 넘도록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물며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다. 서울 거리에서 수입차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때다. 당시 지평선 너머까지 쭉쭉 뻗어 있는 미국 고속도로를 몇 날 며칠씩 운전해 달리면서 미국차가 왜 그렇게 큰지, 그리고 왜 그렇게 부드러운 서스펜션을 갖고 있게 됐는지를 몸소 깨닫게 됐다. 바둑판처럼 뻗어 있는 미국 대륙횡단 고속도로에서는, 그런 미국차가 그만이었다. 그때 미국차에 푹 빠져 지냈던 탓인지, 미국 머슬카에 대한 감정은 지금까지도 각별하다.
현존하는 가장 미국적인 머슬카 중 하나인 크라이슬러 300C SRT 8이 한국에 상륙했다. 이 차의 두툼한 도어를 열고 시트에 앉기만 해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나운 수컷 기질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겉보기와 달리 알고 보면 여성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서 욕 먹지 않고 버티기 위해 앞장서 비난하곤 했던 바로 그 마초 기질이 내 안에서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머슬카=남자'라는 등식은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상대성 이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E=mc²'이라는 공식은 외우고 있듯, 머슬카와 남성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누군가가 따지고 들면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머슬카만 타면 괜히 있지도 않은 가슴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바로 머슬카만의 남성 본능이다.
300C SRT 8은 베스트셀러 300C의 하이 퍼포먼스 버전이다. SRT(Street and Racing Technology)는 벤츠 AMG, BMW M과 같은 퍼포먼스 비클 전담 운용팀이다. 그들의 손을 거친 크라이슬러 차들은 '가장 미국적인 퍼포먼스카'로 변신한다. 가뜩이나 무쇠덩이 같은 외모인 300C가 SRT의 집중치료를 받고 나왔으니 오죽할까. 그대로 뜯어다 숯불 위에 얹으면 한번에 바비큐 10인분은 족히 구워낼 것만 같은 격자형 라디에이터 그릴은 압권 중 압권이다. 굳이 있는 힘껏 달릴 필요도 없다. 거리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주위 모두를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카리스마가 강렬하다.
휠하우스를 가득 메운 20인치 굿이어 F1 타이어나 다운포스를 40% 가까이 증가시킨 리어 데크 스포일러, 차체를 에워싼 에어댐은 모두 범상치 않은 위압감을 만든다. 미래에서 현재로 날아온 나체의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 이런 외모를 갖고는 사고를 치려야 칠 수도 없을 것 같다. 어떤 목격자든 마치 초상화 그리듯 몽타주를 그려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드 그레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인테리어가 우선 반갑고, 카본 파이버 풍 트림으로 단장한 센터페시아도 외모와 잘 어울린다. 원체 과잉인 겉모습 때문인지 SRT의 인테리어는 과하다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는다. 대시보드에까지 박혀 있는 'SRT 8'이라는 로고가 마치 "나 이런 사람이야"라며 건들거리는 것 같다. 불량배들에 둘러싸여 공포에 질렸을 때 어처구니 없게도 나오는 것과 같은 헛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 소파를 닮은 시트는 '아메리칸 버킷시트'의 전형이다. 어찌나 두툼하고 풍성한지, 양 옆구리를 받쳐주는 날개 때문이 아니라 그 볼륨감만으로도 온몸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을 것 같다. 엉덩이와 등이 닿는 부분을 모두 스웨이드로 마감해 몸을 잡아주는 동시에 스포티한 감각을 최대한 살렸다. 양 옆으로 길게 뻗은 대시보드나 막강한 사이즈의 시트를 보고 있자니, 이 차의 엄청난 사이즈(길이 5015㎜)가 새삼 실감난다.
스타트 버튼이니 스마트 키니 하는 첨단 방식 따위는 아메리칸 머슬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예전부터 해왔듯 키 홀에 꽂고 돌려 엔진을 깨우면 그만이다. 차 주위 길바닥의 먼지를 풀썩 일으킬 것만 같은 강력한 시동음은 가뜩이나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어깨와 가슴을 더 뻣뻣하게 만들어버린다. '과르릉!' 끝내주는 이 느낌! 15년 전 미국에 있었을 때부터 이 느낌이 좋았다. 미국 머슬카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차에서도 이런 느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을 뿐인데도 마치 힘을 주체하지 못해 씩씩대는 버팔로처럼 걸걸대는 큰 배기량 엔진의 느낌이 마구 몰려온다. 주체할 수도 없고, 굳이 주체하려 하지도 않는 야생미….
크라이슬러의 상징인 V8 6.1ℓ 431마력 OHV 엔진은, ℓ당 30㎞의 고연비를 넘나드는 최신 트렌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공인연비는 ℓ당 5.9㎞이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당 397g이다. 마치 이죽거리는 모범생들을 향해 "다 덤벼!"라고 고함치는 고독한 보스 같은 모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300C는 벤츠의 흔적이 가장 짙게 밴 크라이슬러 차다. 언뜻 보기만 해도 미국 머슬카의 유전인자가 뚝뚝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이 차를 딱 한 꺼풀만 벗겨내면 칼날 같은 독일 엔지니어링의 흔적이 숨어있다니 말이다. 어쨌든 그 같은 과정을 통해 무지막지한 헤미 엔진은 ESP와 TCS 등 첨단 주행안정장치로 섬세함을 더하게 됐다. 소위 '럭셔리 스포츠'를 지향하게 된 것도 그래서다. 빌슈타인제 서스펜션에도 벤츠 AMG의 기술이 스며 있다. 공간 걱정 따위는 남의 얘기. 더블 위시본 프런트 서스펜션으로 운동성을 높이고, 리어 서스펜션에는 벤츠 영향을 받은 5링크를 썼다.
가속 페달을 꾹 눌러 밟으면 차체는 무섭게 치닫는다. 운전석에서 두려움에 휩싸이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거동이 불안정해서가 아니다. 차체는 마치 항공모함처럼 도로 위를 유유히 흘러간다. 그런데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힘으로 밀고 나가는 두려움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원래의 미국 머슬카에 비하면 한결 차분해졌지만, 그래도 가속 페달을 꾹 눌러 밟을 때의 '과르르릉'하는 엔진 사운드와 휠 스핀 느낌은 여전하다.
유럽 스포츠카가 마치 아프리카 초원의 치타처럼 날세게 달린다면, 아메리칸 머슬은 울창한 정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가는 코끼리 떼처럼 무시무시한 힘으로 밀고 나간다. 레드존은 6200rpm. 수동 모드에서는 레드존 언저리에 이르러서야 강제변속이 이뤄진다. 1단에서 시속 70㎞, 2단 120㎞, 3단 200㎞로 펑펑 치고 달려나간다. 시속 250㎞에 도달해서도 발 아래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힘이 절절 끓어오른다. 2t 가까운 덩치를 이렇게 밀고 나가는 힘도 어지간하지만, 그걸 또 억세게 붙들어 세우는 브렘보 4피스톤 캘리퍼와 대구경 디스크 브레이크도 대단하다. 그런데, 속도제한구간을 조금만 빠른 속도로 지난다 싶으면 어김없이 제한속도를 읊조리는 어린아이의 음성이 반복해서 흘러나온다. 이 우락부락한 차 안에 웬 어린아이 목소리? 수입 이후 국내에서 따로 설치한 경보장치인데, 처음엔 괜히 섬뜩하다가 나중에는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어쨌든 그 덕에 과속단속 카메라는 모두 피할 수 있었지만, 과속보다는 운전자의 짜증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이 8980만원짜리 아메리칸 머슬은 분명 남자 중 남자였다. 하지만 왜 그런지 차근차근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어차피 이성적인 설명은 300C SRT 8에 어울리지 않는다.
세상 모두가 입만 벙긋하면 연비니 경제성이니 친환경이니 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모범적인 담론'만 늘어놓는 요즘 세상에, "그런 것 따위는 쓰레기통에나 갖다 버려!"라며 거리로 어슬렁어슬렁 나선 야수. '재미'라는 요소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자동차 세상에는 이런 차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300C SRT 8의 그런 모습이 마치 억눌린 모범생으로 지내야만 했던 10대 시절의 반항심과 닮은 것 같아 묘하게 짜릿하고 통쾌하다.
아메리칸 머슬 앞에서 함부로 마초를 입에 올리지 말라. 그들은 마초 중의 마초니까. 마초는, 누구에게든 쉽사리 공략 당하기를 원치 않는 법이다. 300C SRT 8의 폭발적인 가속은 등골 오싹한 두려움과 스릴을 동반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끝에서는 절정의 희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머슬카는 미국 자동차 산업이 인류에게 남겨놓은 뚜렷한 발자국이다. 그 발자국이 바위산에 찍힌 유산으로 남게 될지,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찍어놓고 온 역사적 발자취처럼 영광스럽게 남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됐건 나날이 나약해져 가는 수컷들에게 '너희들은 원래 이랬었노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 시속250㎞에도 넘쳐나는 파워
최근 전 세계를 짓누르는 경제위기와 유가 급등 탓에 모든 자동차 업체들이 움츠러들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자동차 업계의 세계적인 트렌드는 고성능에 대한 끝없는 추구였다. 최고출력 1001마력의 어처구니없는 슈퍼카들이 등장했던 것도 그 때문. 미국과 유럽, 일본의 어지간한 자동차 회사들은 저마다 고성능 버전을 따로 운영하며 자사 양산차를 대상으로 고성능 실험을 계속했다. 고성능 버전은 해당 자동차 회사 기술력을 과시하는 마케팅의 무대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판매 측면에서도 일반 양산차에 비해 상당한 폭 이익을 안겨주는 효자 노릇까지 톡톡히 한다.
크라이슬러의 SRT(Street and Racing Technology) 디비전 역시 바로 그런 고성능 버전 중 하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규 모터스포츠 서킷은 물론, 일반 도로에서도 그 못지않은 성능을 구현하는 걸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아메리칸 머슬카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SRT는 다른 고성능 브랜드에 비해 출발이 다소 늦은 편이지만 대신 크라이슬러그룹 산하 소형차에서부터 300C와 같은 대형세단, 그리고 지프 브랜드의 SUV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종에 두루 적용된다는 장점이 있다.
크라이슬러는 올해 1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 자동차 부품쇼인 '2008 SEMA'에 최고출력 600마력짜리 V10 엔진을 올린 다지 챌린저 SRT 10 컨셉트를 내놓았다. 보닛과 공기 흡기구 디자인은 1970년대 플리머스 바라쿠다의 것을 빌려와 아메리칸 머슬카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지만, 차체 곳곳에 탄소섬유를 쓰는 등 첨단 기술을 듬뿍 담아냈다. SRT 뒤에 붙는 숫자는 그 차의 기통 수를 가리킨다. 예컨대 300C SRT8은 V8 헤미 엔진을 얹었다는 뜻이다. 캐딜락의 V나 포드 SVT, 메르세데스벤츠 AMG, BMW의 M 등이 모두 크라이슬러 SRT 디비전과 같은 성격 디비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