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윤선도 원림
甫吉島 尹善道 園林
2016. 5. 6
보길도에 당도하여 건너다 본 노화읍
보길 윤선도 원림
세연정 계담으로 흘러드는 물길
부용동을 일러 고산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격자봉 아래 말굽 모양의 아늑한 곳에 선계의 이상향을 펼쳐놓은 고산 윤선도.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이르길,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나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지었다”고 했으며,
또한《고산유고(孤山遺稿)》에서는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芙蓉城是芙蓉洞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으로
今我得之古所夢
옛날 꿈꾸던 부용의 절경을 얻었네
世人不識蓬萊島
세상 사람 신선이 사는 섬 알지 못하고
但見琪花與瑤草
단지 기화와 요초만 찾고 있구나
보길도는 중국의 부용성 선유고사(仙遊故事)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작은 섬 임에도 부용동에 들어서면 마치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울창한 상록수림대의 청정한 모습은 마치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윤선도 / 1587년 (선조 20) 서울생.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시호는 충헌(忠憲)이고,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가 된다.
윤선도의 조경에 대한 높은 식견을 볼 수 있는 부용동 원림.
그 중에서도 세연정 일대를 둘러 보노라면 고산의 천재적 안목에 절로 무릎을 치게된다.
앞산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은 먼빛이 더욱 좋다
날씨가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낚싯대는 쥐고 있다 술병은 실었느냐
〈어부사시사〉 중에서
세연정(洗然亭)
1637년(인조 15) 2월.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은 윤선도는
세연정(洗然亭)과 함께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부용동원림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 세연정의 건축적 의미 -
개울에 보를 막아 물을 대는 원리로 계담과 방지(方池) 사이에 판석보를 막아 조성된 세연지는
물과 바위와 송죽과 정자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동대와 서대, 서쪽 산 중턱의 옥소대까지 끌어들여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낸 윤고산의 섬세하고 기발한 조원 기법이 잘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그는 예악(禮樂)으로 성정을 다스리며 자연과의 합일에 이르고자 했을 터.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진다는 뜻.
두 차례의 귀양과 벼슬 등으로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어부사시사'를 비롯,
자연을 소재로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네모난 방지에서 바라본 세연정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으로 창과 마루를 둘렀다.
창호는 분합분(分閤門)이어서 문을 모두 들어걸면 사방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위 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빠져나가는 지점.
- 판석보 -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를 위한 용도이자 다리.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별시문과에 급제,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정랑을 비롯,호조, 예조 등 관직을 두루 거친 윤 고산.
이후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와 50세 되던 해에 병자호란(1636)을 겪게 된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의 소식을 들은 고산은 향리의 자제와 집안의 노복 수백 명을 모아
배를 타고 서해를 올라 강화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는 청나라 군대에게 함락된 후였고
귀향하는 뱃길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듣게 된다.
이에 세상과의 별리를 결심하고 제주로 향하던 중, 보길도에 정착.
탈속의 경지를 부용동에 펼쳐놓게 된다.
- 낙서재(樂書齋) -
윤고산의 주된 주거공간으로 주산인 격자봉의 혈맥을 잡아 터를 잡고
동천석실과 마주보는 공간에 3칸의 모옥(茅屋)지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와가(瓦家)로
바뀌었다고 한다. '보길도지'에 의하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로 평가받는다. 고산은 이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서재와 전사청
평소 같으면 서재 문밖으로 거너편 산자락의 동천석실이 보이이는데
오늘은 자욱한 안개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소은병 -
낙서재 뒷편 산자락의 바위 덩어리인데
주자가 기거했던 무이산 봉우리 이름인 대은병의 이름을 차용 소은병이라 명명하고
자주 이곳에 올라 사색에 담겼다는 윤 고산.
하연지
왼편의 곡수당((曲水堂) 오른쪽은 사당(祠堂)
낙서재 건너 아랫쪽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석정(石亭)·석가산(石假山)·연못·화계(花階)·다리 등
다채로운 조원(造苑)이 베풀어진 곳으로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머물던 공간이다.
사당은 낙서재에서 죽은 윤고산 사후 이곳에서 얼마간 초장을 지냈었다고.
- 상연지 -
개울물을 홈통으로 연결, 앞에 보이는 돌확으로 떨어지게 했고
다시 그 물이 넘치면 아래의 상연지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동천석실' 가는 길
동천석실 바위지대.
- 洞天石室 -
절벽위에 세운 한 칸 정자로 서책(書冊)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隱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동천'이란 신선들의 거주처인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연유한 것.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3,306m²(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 던 곳이다.
차바위
석실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이 남아있다.
석담(石潭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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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보길도'는 고사하고 우선 '땅끝 갈두항'에 당도하는 것 자체부터 험난.
연휴를 맞아 삼천만이 끌고 나온 차량으로 온통 북새통 인지라
단숨에 보길도에 들어서겠다는 계획을 애저녘에 포기, 간신히 구한 땅끝 숙소.
국토의 최 남단 땅끝이 주는 정서상,
저녁 만찬은 당연히 '회' 정식 정도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무도 변해버린 관광지의 얄팍 상차림 앞에 할 말을 잊고 만다.
이걸 도대체 남도 음식이라 말 해야 할지 난망한 지경이더라는 말씀.
머나먼 곳에서 물경 열 시간 이상 달려오신 외지분 들께
이토록 허접한 상차림을 선보여야 하다니...
담날, 윤 고산의 유적을 운무속에 돌아나와 남도 맨 윗쪽 산골 동네로 이동,
'회' 맛의 정수를 보여드릴 수 있어서 그나마 죄송함을 조금 덜 수 있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