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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 너 어디에 있느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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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3 04:06
- 너 어디에 있느냐?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오늘 복음에서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 환자는
치유를 받고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고
주님께 감사하지도 않아 주님께서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한탄하십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제겐 레오나르도, 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거저 받는 것에 익숙하고,
거저 받는 것이 당연한 나는 아닐까 반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저는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리고 근래에는 더 빈번하게 기적적인 일을 체험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신 거야 하고 제가 느낀다는 말입니다.
뭘 해야지 생각하면 누군가 그에 필요한 것을 보내주시는데
저는 그것이 그분이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 보내주신 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혀 못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손길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도 또한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느끼고
너무 자주 느끼기에 익숙하고 당연한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사랑과 은총을 꿀꺽 삼키고는 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내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돌아와서 감사드리지 않습니다.
성당으로 달려가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습니다.
평양에다 종합 복지관 ‘평화 봉사소’를 세울 때,
그러니까 몇 년간의 아주 힘든 줄다리기가 끝나고 계약이 성사되었을 때,
그때는 그 소식을 듣고 성당으로 달려가 감사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것처럼 커다란 기적이 아닌,
작은 기적들을 수없이 체험하면서는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된 것입니다.
태양이 뜨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한 것처럼,
태양 빛의 따스함을 감사하지 않고 누리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하느님 책임도 있습니다.
너무 무상으로 주시고,
너무 많이 주시고 늘 주시기에 그러는 것이니 말입니다.
은총을 꿀꺽하고 마는 것,
뇌물을 꿀꺽하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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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꼬리 없는 원숭이가 쌍둥이를 낳는데, 그중 하나에게는 엄청난 사랑을 쏟으며 정성껏 젖을 먹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외면하고 소홀히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건강하게 어른이 되는 쪽은 홀대받던 새끼였습니다. 정성껏 키운 원숭이는 어미 원숭이가 꽉 껴안는 바람에 젖가슴에 질식해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홀대받던 새끼만이 어른 원숭이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잘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품에만 안고 사는 부모의 모습에 안타까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운동회 때 가족이 모두 와서 응원하는데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 비가 오면 어머니들이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데, 저는 늘 비를 맞고 집에 터벅터벅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때는 원망의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 힘을 어렸을 때부터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만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상황만을 찾으면, 정작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도 각종 이유를 들여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족함 안에서 감사를 느끼게 될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불만보다는 감사를,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더 한껏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아셨지요. 그래서 그들의 병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때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하겠지만,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열 사람이 치유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만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도 자기의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감사의 마음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을까요? 믿음이 없으면 감사의 기도도 바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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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오노레 드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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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단 한 명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고,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홉은 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았을까? 또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열 명의 나병환자와의 인터뷰”라는 존슨 그나나바라남의 꽁트에서 한 기자는 ‘시간의 기차’를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치유된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소. 혹시 재발할지 모르지 않소. 그래서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소.”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선행에 대해 사람들에게 감사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나는 감사드리는 일을 그만두었소.”
또 다른 사람은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감사하는 일을 까맣게 잊었소.”
또 다른 사람은 “나는 감사를 드리고 싶었소. 그런데 대부분이 돌아가지 않았소. 나는 언제나 다수를 따르오. 그래서 나도 돌아가지 않았소.”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한 사실에 대한 기쁨에 머물며,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은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보다, 오히려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것은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돌아옴’과 ‘새로운 출발’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베풀어진 자비를 입고, 그에 합당한 ‘응답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그를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변화된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요 기적이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오고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어,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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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돌아가 감사를 드렸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자신의 삶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구원은 감사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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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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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곳 성지에는 ‘기도 틀’이 있습니다. 성당 독서대 앞에 마련된 이 ‘기도 틀’에 기도 쪽지를 꽂아 놓고 가면 제가 다음 날 아침에 기도 쪽지의 내용을 보고 함께 기도합니다. 물론 가끔은 당황스럽고 황당한 기도 내용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정말 기도와 응원이 필요한 분들의 사연입니다.
저는 기도 쪽지에 관한 이야기를 공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 틀에 쪽지를 쓰는 이유는 사제가 함께 기도해 주는 것에 대한 의미도 있지만 기도를 한 번 써 봄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께 어떤 기도를 봉헌하는지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다시 돌아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봉헌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기도를 이루어주셨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이 나은 사람은 열 명입니다. 나병은 불치병입니다. 지금 현재에도 큰 병인데 주님 시대의 나병은 그야말로 불치 중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런 병이 나았습니다. 나병 환자 열 명에게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열 명 중 단 한 명,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의 기도를 봉헌합니다.
그때 주님은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입니다.
열 명 중 아홉은 그저 병이 나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돌아와 감사를 드린 한 사람은 구원받았습니다. 즉 하늘나라를 선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감사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로 향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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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비빔밥
어떤 사람이 음식을 주문했는데 그 음식에서 벌레가 나왔다고 환불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벌레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식당 주인은 당황과 황당 사이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의 벌레는 바로 표고버섯을 잘라 놓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기사를 보고 갑자기 배가 고파졌습니다. 그래서 버섯 비빔밥을 해 먹기로 했습니다.
우선 집에 있는 버섯을 모조리 꺼냅니다. 제 냉장고에는 표고와 팽이가 있었습니다.
표고와 팽이를 씻어 잘라줍니다. 표고는 길게 길게, 팽이는 듬성듬성. 먼저 기름을 두른 팬에 표고를 볶아줍니다. 어느 정도 볶아졌다 싶으면 간 마늘을 넣어 조금 더 볶아냅니다. 그리고 팬을 기울여 표고를 위로 올리고 밑에 간장 두 큰술과 설탕 1/2큰술을 넣습니다. 간장이 끓어오르면 표고를 내리며 간장과 함께 볶아줍니다. 이때 오매불망 기다리던 팽이도 넣어주세요. 그렇게 한번 휙 볶아내면 끝.
따끈한 밥에 버섯을 올려주세요. 있다면 들기름과 들깻가루도 듬뿍 넣어주세요. 쓱쓱 비벼서 아삭한 김치와 한입~^^ 얼마나 맛있게요~~~^^
누군가에게는 벌레로 보이는 표고버섯. 우리에게는 건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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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한 치유의 구원; 찬양과 감사의 믿음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요셉수도원 정문 입구 거대한 돌판에는 베네딕도 수도회 모토,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모토입니다. 사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모토에 한결같이 충실함이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이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보시기 참 좋은 삶이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이요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 삶의 궁극 목표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 여정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일어난 나병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일화입니다. 주변 모두에 활짝 열려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병환자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이 무엇인가 배우게 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과 예수님의 감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겸손히 바칠 수 있는 참 좋은 기도가 자비송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바칠 유일한 기도도 이 기도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의 치유의 구원을 바라며 이 자비송과 더불어 미사전례를 시작합니다.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여기서 유래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역시 우리가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기에 참 좋은 기도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한 이들은 즉시 몸이 깨끗해지는 치유를 체험합니다. 주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말씀의 능력도 발휘됨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치유에 따른 반응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열중 하나였고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늘 호의적이었습니다. 다음 장면의 묘사가 그림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앞서 치유받은 아홉은 반쪽의 육신의 치유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겸손히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온전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소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생활화할 때 영육의 전인적 건강의 참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게 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예수님의 눈에는 얼마나 놀랍고 고맙고 기특했겠는지요! 과연 나는 ‘아홉과 하나’중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은 찬양과 감사의 삶으로 요약됨을 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부단히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이 영육으로 건강한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알레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나는 삶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찬미와 감사의 영혼의 양날개로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겠는지요! 예수님의 결정적 구원 선언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평생 화두처럼 늘 지니고 살아야 할 참 은혜로운 말마디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되는 파스카의 구원의 삶을 상징합니다. 흡사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영적나병을 치유받고 파견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일상에서 넘어져 좌절해 있을 때 이 말씀 연상하여 즉시 일어나 힘차게 믿음의 구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의 구원이자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오늘 티토서의 바오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3;2,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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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고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살고파
죽음에 덫에 걸린
나에게서
참으로 살리시는
당신께로
살고파
참으로 살리시는
당신께로부터
살아있음을 판단하는
사람에게로
살고파
살아있음을 판단하는
사람에게서
참으로 살리시는
당신께로
그리하여
참으로 살리시는
당신과 갈림 없는
참으로 살아있는
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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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6-18)
감사드린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인 나병 환자 아홉은 감사한 미음을 잊버리고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 주십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아시리아에서 옮겨 온 타민족이었지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그 일이 일어난 데는 뜻이 있습니다. “그 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라는 구절은,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이 진술은 엑카르트가 걷고 있는 영적 여정의 첫째 오솔길과 일치한다. 엑카르트는 첫째 오솔길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정욕을 대하는 엑카르트의 관점이 만족과 불만족의 관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불만이 가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욕망을 다스리는 이분법적 방법을 추천하지 않는다. 그는 화해, 곧 반지로 상정되는 조화를 더 선호한다. 어쩌면 그는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설교와 맥을 같이하는 바오로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어떤 태도가 새사람의 특징인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봉사직을 주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과연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저들에게는 그 범행을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는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신 분입니다(2코린 5,17-19). (278)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인노첸시오 3세:
최근의 연구에서는 인노첸시오 3세를 그가 비록 타고난 지배자요 황제였을지라도 항상 첫째로 사제요 사목자로 머문, 종교심이 깊고 내적으로 경건하고 금욕적이고 엄격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완전히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감에서 직무를 이행하였다. 그가 사용한 이 칭호는 이후 교황의 자기 표현 중 하나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세니(Segni) 출신의 로타리오는 1160년 오래된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와 볼로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였고, 그의 백부인 클레멘스 3세 교황 때(1181∼1191) 추기경이 되었다. 몸집이 작고 우아하고 연약한 체질이었으나 폭넓은 지식과 함께 돌출한 정신력과 형안(炯眼)과 현명과 절제,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교황직에 대한 높은 영적인 이해를 겸비하고 있었다.
교회적인 광신자이거나 “순 정치적 교황” 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그는 문화적 •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인 영역에서 긴장과 대립으로 가득차 있던 그 시대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큰 개방성을 보였다. 그는 내적인 일관성과 권력으로 대립적인 경향들을 당시의 상황에 따르면 교황직만이 할 수 있었던 통일적인 질서원리로 복종시켰다.
인노첸시오가 세속문제에 개입하였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사건들도 하느님에 의하여 제정된 질서에 순응해야 하고, 국왕과 제후들도 하느님의 심판에 종속되어 있다는 책임과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세상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위계제도 다시 말해서 하나의 거룩한 질서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때에는 순 정치적인 것과 순 영적인 것, 교회와 국가간의 정밀한 구별은 교차와 “침해”가 없었을 정도로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교황은 ‘죄의 이유에서”, 질서가 도덕적 과실이나 객관적인 불의로 인하여 방해될 때 개입할 권리와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모든 미해결의 논쟁문제에서 “세상의 심판관” 이기도 하였다.(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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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17,15)
세상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질병에 걸린 적이 없는 건강한 사람들은 마치 한 번도 여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앙드레 지드’는 그의 일기장에서,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열 수 없었던 문을 열어 주는 열쇠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질병 곧 인간성마저 모조리 망가뜨리는 가장 심각한 병일 경우에도 해당될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예수님 시대엔 나병만이 아니라 많은 질병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나환우들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주 심각한 사회적 질병이었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회로부터 온전히 격리된 채 소록도와 외딴곳에서 외롭고 힘겹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가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지드가 말한 새로운 문을 열어 주는 열쇠와 같은 기능을 했었을까요?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 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 위 시는 천형의 시인이라 불리었던 한하운의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의 한 부분입니다. 일생을 나환자라는 멍에 속에 살다 간 시인의 한이 명징한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한과 설움은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니며 예수님 시대에도 이 병을 앓다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고통이 아문 지금에 와서야 어제를 되돌아보면, 질병이 제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준 열쇠였음을 인정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사람이면서 사람처럼 살지 못하고 살아왔던 나병환자처럼, 우리 역시도 이 땅을 살아오면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보살핌을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도 너무나 자주 인생에서 참으로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그러기에 나병환자 열 사람 중에서 죽음과도 같은 나병으로부터 치유 받고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나병환자는 한 사람 사마리아인뿐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심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로운 시선에서 깊이 반성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나병환자들이 멀찍이 서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7,13)라고 소리 높여 울부짖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앙드레 지드는 『지금껏 한 번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은 수많은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셨기에 그들을 나병에서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7,15~16)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말이냐?”(17,17~18)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씁쓸함을 느낍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무슨 찬양을 받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살아온 삶의 어려움과 고통을 공감하시고 그들을 낫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맞아 제자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은 것이라 봅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 아홉은 단지 깨끗하게 치유 받은 것에만 급급하다 보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해 되돌아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질병으로 짓눌려 살아오면서 참으로 인간다움의 미덕인 감사할 줄을 잃어버렸고, 나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신경의 무감각이 마음의 무감각으로 변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은 외적으로 나병을 치유 받았겠지만, 내적으로 사랑과 은혜받음에 감사하고 감격할지 모르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곧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내적 상태를 엿볼 수 있는 힌트는 바로 “사람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치유 받은 나병환자 열 사람 가운데, 진정으로 외적인 나병은 물론 내적 마음의 상처마저도 치유 받고 참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차이는 바로 감사에 있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아름다운 말은 감사합니다, 라고 저는 믿습니다. 감사는 기쁨을 그리고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5,16-18)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배운 것은 인생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이렇게 단 일회적인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받은 모든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감사할 줄 알 때 매일 매일 기쁨이 넘쳐날 것이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께 기도하며 찬양과 영광을 드리게 될 것이며, 그러한 삶은 이미 하늘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이라 봅니다. 우리 모두 모든 일에 감사하며 늘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살고,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주님,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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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지금도 그 열에 아홉 격인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024-11-12 ㅣNo.177559
나병 환자 열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아예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의 그 절박한 외침과 딱한 처지를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그들의 병을 낫게 하신다. 그래서 사제에게 가서 정결해진 것을 확인받도록 하셨다. 당시에 나병이 나았더라도 공인을 받아야 했기에 ‘사제들에게 가 보여라.’라고 하셨으리라.
하지만 그 진절머리 난 병이 낫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이는 몇 명이나? 겨우 한 명뿐,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다. 치유 내용은 여기까지가 다다. 그러나 여기에 더 중요한 게 있음을 느끼자. 은총에 대한 감사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제의 선언을 들었을 때 그들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들 모두 눈물 흘리며 무릎 꿇었을 거다.
그것은 그 치유를 내린 사제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사를 드릴만하니까. ‘이젠 병이 나았다. 이제 나는 나병 환자가 아니다.’라는 벅찬 생각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들 가슴을 부풀게 했으리라. 그런데 은총을 드린 이는 열에 단 한 사람,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아홉은 외면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가지 못했을까? 아마 너무 기뻐 벅찬 감정에 순간 예수님을 잊어버렸기에. 아니면 병이 나은 것에 너무 놀란 나머지, 진작 판단력을 상실했기에.
어떻든 그들은 평생 간직하고픈 그 소중한 은혜를 잠시 망각하였다. 아마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도. 사실 아무리 작은 은총이라도 감사 없이는, 더 큰 축복마저 스스로 막는 꼴이다. 열에 그 아홉은 여기까지가 어쩌면 한계였다. 지금의 우리 모습일 수 있는 그들이다. 우리 안에도 이런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아야만 하겠다. 급할 때면 “주님, 주님!”하다가도,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걸 잊을 때가 종종 있지 않을까? 그래서 병이 나아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그 사마리아인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진작 구원을 간청한 이는 무려 열 명이었지만, 끝까지 믿음을 간직해 구원에 이른 이는 그 사마리아 사람 단 하나뿐이었다. 우리 삶에도 참으로 남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을 간혹 깨닫곤 한다. 더구나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은 다 잊고는, 오히려 받은 서운했고 상처받은 것들만 기억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기에 얼마나 것을 깨닫고 감사를 드렸는지를 조용히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 우리란 도대체 누구인가? ‘저희는 쓸모없는 종,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우리 아닌가? 나병 환자의 치유와 사회적 지위의 회복은 치유의 기적보다도 더 큰 ‘감사’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이다. 감사의 삶은 우리를 전혀 새롭게 바꾸리라.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감사송을 바친다. 이처럼 감사는 그분께 드려야 할 첫째 의무이자 마땅한 도리일 게다.
의당 구원은 지위 고하나 출신 성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편된 정의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올게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 곧 이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께 치유의 그 은총을 저버린 나병 환자 열에 아홉 격인 이가 우리인지를 묵상해봐야 하리라. 되돌아 와 예수님께 큰 감사를 올린 ‘그 하나’라도 되고자, 이 시각 스스로 다짐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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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믿음이 청원과 감사와 함께 커져 간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자비를 청하고, 주님 말씀대로 사제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청한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다시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의 업적임을 알고 돌아와 감사를 드린 이만 예수님께 믿음을 확인받습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와 감사 기도를 통하여 믿음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청원 기도를 하고 그 청원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진 체험을 한 뒤, 그것에 대한 감사 기도를 드릴 때 우리 믿음이 커지고 굳건해집니다.
필요할 때 애타게 청원 기도를 해도 그 청원이 어떤 방식으로 응답받았는지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깊어지지 못합니다.
삶의 중요한 시기와 고비 때에 절실하게 주님께 매달렸지만 그 시기를 넘긴 다음에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많은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그때 참 열심히 기도드렸고 주님과 가까웠다고 추억하지만, 믿음이 크게 굳건해지지는 못하였던 듯합니다.
이처럼 청원 기도를 바치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만으로는 굳은 믿음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청원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깊이 체험하고 이에 감사하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 믿음이 커지고 굳건해지며 그 믿음으로 우리는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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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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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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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일하게 나를 받아주신 분>
지금도 삶 자체가 고달프고 힘겨운 나병환자들인데, 변변한 치료제도 없던 예수님 시대 당시는 얼마나 더 괴로웠겠습니까?
당시 그들이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은 아무래도 ‘추방으로 인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병으로 판정되면 일단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허용되었지만 성벽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다인이면 정기적으로 순례를 해야 할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 성은 절대 출입금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입장 바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그들이 괴로웠겠는지?
자기 잘못으로 걸린 병도 아닌데, 무조건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만남조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도 벌레 씹은 듯합니다.
병세는 하루하루 점점 깊어만 갑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면 멀찍이 도망가기 바쁩니다.
점점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가고 자기 안에 갇히게 됩니다.
스스로 너무 무가치해 보이기에 스스로를 거부해서 자존감은 완전 바닥입니다.
이렇게 당시 나병환자들은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의 고초를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들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죽음과도 같은 나병을 말끔히 치유시키십니다.
공동체는 나를 따돌렸고 세상 사람들은 다들 멀찌감치 피해 도망갔는데, 다들 더럽다고 돌을 던지며 무시했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 예수님께서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나를 받아주십니다.
내 참혹한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내 허물어진 마음을 달래주십니다.
예수님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치유의 에너지로 인해 나병환자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죽음의 기운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의 치유 이후 한 가지 중요한 과정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단 한명의 이방인만 제외하고 9명의 유다인들은 그 과정을 생략함으로 인해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중요한 과정은 바로 감사였습니다.
불행하게도 9명의 유다인들은 그 큰 은혜를 입고도 아무런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죄인, 이교도 등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 하느님이라는 확고한 믿음, 그분이 보내시는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 그리고 깊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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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 주셨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인 한센인이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드렸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다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사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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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것이 빠진 묵상은 기도가 될 수 없다
2014년 5월 15일에 방영된 EBS ‘리얼체험 땀: 링 위에서 세상을 배우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방황하던 한 고교생 영대(19)가 있습니다.
영대가 일정 시간 권투를 배우며 땀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영대는 ‘자신은 방황하는 중이고, 그런 자신을 붙잡아줄 강한 스승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영대의 스승은 박현성 관장(47)입니다.
과거 자기 모습과 꼭 닮은 모습인 영대를 보고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둘의 첫 만남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영대는 박현성 관장 앞에서 의자까지 들며 위협합니다.
그러나 박 관장은 영대의 실력이 형편없음을 링 위에서 보여줍니다.
영대는 갈등합니다.
권투를 계속 배울지. 그리고 배우기로 합니다.
이제 헤어질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박 관장은 다시 마지막 권투 스파링하자고 합니다.
박 관장은 과거 권투 유망주였지만 올림픽 문턱에서 두 번이나 좌절한 후 폭력조직에 가담하고, 삶을 비관해 분신자살까지 시도하면서 인생에 기권을 선언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온몸에는 화상의 흔적이 있습니다.
박 관장은 자기 다리를 만지게 합니다.
딱딱하게 굳어 굽혀지지도 않는 몸으로 자신을 가르친 것입니다.
마지막 스파링에서는 영대가 자신을 한 번도 때리지 못하자 양손을 등 뒤로 하고 한 대 강하게 맞아줍니다. 방송 PD가 묻습니다.
“사부님은 왜 헤어지기 전에 대결하자고 하셨을까요?”
“점점 나아지는 내 모습을 보라고 그런 거 아닐까요? 저한테…. 느껴보라고. 딱 하나 정확한 게 하나 있어요.
생각하는 게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난 안 되겠다.’ 이런 생각 말고, 이젠 ‘내가 안 돼도, 한다.’라고 믿어보자.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고 믿어보자.’ 이런 식으로.”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글을 자신이 다니는 교회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도 분명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서 무엇이 빠져있었을까요? 지향입니다.
방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렸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묵상기도가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영대는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스승을 묵상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자신이 관장의 얼굴을 때릴 수 있을 수준으로 향상되었음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감사하게 되고 새로운 삶으로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 않아요!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 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묵상입니다.
묵상에 십자가가 빠지고, 그 때문에 감사와 찬미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가 아닌 시간 낭비를 한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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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구원받지 못하면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1) 이 이야기를 묵상할 때,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할 수도 있고, ‘감사’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하면,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몸의 건강’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건강하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닙니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병들어 있는 죄인들과 몸은 병약해도 성덕의 최고 수준에 도달한 성인들을 생각하면......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 그는 평생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감사할 줄 모르는 믿음은 아직 부족한 믿음이고,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이라는 더 큰 은총을 얻지 못한다.”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2)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자기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입니다.
이 말은, 그들 모두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치유의 말씀’이 아닌데, 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간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너희가 청하는 대로 너희의 병을 고쳐 주겠다.” 라는 말씀이 생략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을 믿었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고쳐 주실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제에게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라는 말은, ‘저절로’ 병이 고쳐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이 간청할 때 바로 고쳐 주시지 않고 ‘가는 동안에’ 고쳐 주셨을까?
이 질문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과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가버린 아홉 사람은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친 사람들이고,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몸의 치유’에서 멈추지 않고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3)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들에게 가라는 말씀만 하셨고, 병이 나으면 되돌아오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아홉 명도 병이 나은 것을 알았을 때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제들에게 갔을 것이고, 병이 나은 것을 확인 받았을 것이고,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예물을 바쳤을 것이고,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이 치유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믿었지만, ‘병의 치유’에만 만족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믿음에 도달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관심 갖지 않고,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도 관심 갖지 않고, 병이 치유된 것만 기뻐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인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병이 치유된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 즉 ‘메시아’ 라는 것을 깨달았고, 믿었고, ‘병의 치유’보다 더 큰 은총을,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 사제에게 가던 길을 중단하고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병의 치유 이상의 구원’을
희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4)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병의 치유를 당연한 일로 생각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께서 잘못하신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병이 나은 것에 감사드리지는 않고 하느님께서 당연히 해 주셔야 하는 일을 하신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이 하느님을 찬양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즉 자기들이 예수님께 간청했던 일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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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7,11-1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우리는 살면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참 자주 합니다. 그런데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경우는 참으로 제한적이지요. 나에게 은총이나 축복이 주어지면 감사합니다. 내 몸이 아픈 데 없이 건강하고 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쥐면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을 받은 뒤에야 그 대가로 드리는 감사는 참된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품어야 할 참된 감사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만 하지요.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에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었음에, 그래서 그분과 마음으로 더 강하게 일치되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졌을 때에는 이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음에 대해, 이제 남은 건 희망으로 바닥을 차고 올라가는 것 뿐임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음 속에 참된 감사를 품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입니다. 열 사람의 나병환자가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었는데, 그 가운데에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고 누리는 작은 은총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민감한 영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 감수성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했기에 지금 자신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건강해진 자기 몸을 사제에게 보여 공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건 그 ‘때’를 놓치면 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렸고 그 결과 육체의 치유라는 결과에 머무르지 않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분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반면, 다른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은 걸 당연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여러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해가며 주님을 찾아갔기에 그런 은총을 받은 게 당연하다고 여겼겠지요. 받은 은총을 당연하게 여기니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올 리가 없었고, 얼른 사제를 찾아가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는 일이, 그래서 자기가 나병에 걸려 잃었던 모든 걸 회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 생각을 행동에 옮깁니다. 자기가 은총을 받았다는 결과 자체에 얽매여 정작 그 은총을 베푸신 분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 결과 구세주를 만나고도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감사는 상대방이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를 내가 안다는 증거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그를 향한 축복과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이 모든 게 다 당신 덕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하느님께는 영광과 기쁨이 되고, 나에게는 더 큰 은총을 가져다주는 ‘마중물’이 됩니다. 그러니 감사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즉시, 진심을 담고 최선을 다해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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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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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열린 마음과 감사로 여는 구원의 문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구원의 순례길’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경계 지역을 지나가십니다(17,11). 이런 길 선택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취급받아 적대감을 가졌던 사마리아인들 모두를 받아들이시어 해방하시려는 몸짓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뻗어가는 교두보였지요. 이렇게 그분이 향하는 예루살렘 상경 길은 죽음을 통해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 살리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말씀’을 목숨을 다해 온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심오한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길목에서 예수께 다가온 나병 환자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었음은 의미심장합니다.
나병 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청합니다(17,12-13).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는 ‘다가갈 수 없는 그 거리’를 없애버린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을 향한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믿음의 토대 위에서 ‘사랑의 갈증’을 드러냈고, 그 목마름은 결국 치유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17,14) 그런데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17,14) 이렇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치유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 받으려는 이의 지향과 순수한 사랑의 갈망과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치유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유대인은 주님께서 주신 해방의 선물을 자기것으로 소유하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선물을 주신 주님을 곧바로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명은 병이 낫자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17,15-16) 치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선이신 그분 안에 끝까지 머문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로 민족적, 종교적인 적대감과 증오심까지 치유받습니다.
우리도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경계를 지나시며 사마리아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문화와 이념, 민족과 종교가 다르고 신분과 빈부에 차이가 있다 하여도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해야겠습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조건 없이 자신을 내놓을 줄 아는 너그러움이 치유와 해방을 불러옴을 기억해야겠지요.
나의 일상의 발걸음과 몸짓은 어떤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차별과 배척 의식, 폐쇄적인 태도, 선입견과 편견의 틀을 벗어버려야겠습니다. 더는 우리 모두 자신만의 기준이나 좋고 싫음의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보다 근원적이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만이 해방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치유하고 세상에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이 지녔던 갈망과 감사의 샘물을 마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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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의 은총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2-13)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외칩니다. "멀찍이." 전염 가능성 때문에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거리감이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합니다. 아마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는 예수님 마음도 그리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환자들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치유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가서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당신은 치유를 결심하셨기에 한시도 지체하지 않게 하신 것 같습니다. 또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삼가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마음도 존중하신 것이지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예수님 분부를 "믿고"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또 기뻤을까요? 아홉 명은 말씀하신 대로 사제를 찾아 달려간 것 같습니다. 어서 '정결한 상태'라는 선언을 듣고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겠지요.
그런데 한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감사드리고 싶어서였지요. 그에게는 공동체의 정결 선언이나 복귀 허가보다 예수님께 올리는 감사가 더 시급하고 중요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과 거리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가 바로 발 앞, 그분 가까이까지 다가옵니다. 그와 예수님 사이는 거리도 가까울 뿐더러 아무 장애물이 없습니다. 감사를 잊지 않은 그는 치유만이 아니라 "주님 가까이"라는 관계성까지 획득한 겁니다.
감사는 거리를 좁힙니다.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거리도 친밀하게 바꿉니다. 감사는 상대방이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를 내가 안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보여주고, 축복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치유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회복과 더불어 주님 가까이를 차지했던 영적 경험까지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 3,5) 우리가 받는 은혜와 도움은 우리 자신의 공이 아닙니다. 죄악으로 부패해 가면서 악취를 풍기는 영육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는 주님 자비의 덕입니다. 이 기적은 때로는 멈추어서, 때로는 가는 길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께서 이르시는 대로,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그분의 뜻이 내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자기 능력 밖의 일 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곧 인생일 터이니, 주님 발 앞에서 점점 더 무력해지고 점점 더 작아져가면서 바칠 수 있는 건 감사뿐입니다. 겸손하고 솔직할수록 감사는 더 깊은 진정성을 띱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감사는 주님 가까이에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친밀한 행위입니다. 세상을 다 가지신 주님이시건만, 보잘것없는 우리 감사에 그분은 감동하고 행복해하십니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더 내밀해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받은 은총과 우리의 믿음이 확증되는 것이지요.
주님 "멀찍이서" 맴돌지 말고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분께 마음을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속삭이는 찬양과 흠숭과 영광, 사랑과 감사로 주님께서 흡족하고 기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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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담대하고 신실하게 소명을 이어가는 삶
<2024.11.13> 아침을 여는 묵상 (딤후 1:9~18절)
❝담대하고 신실하게 소명을 이어가는 삶❞
❚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고난을 자랑스러워하며 복음 전파 소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 믿음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고난에 동참할 때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9~10절).
구원함을 얻어 소명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행실에 따라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영원 전부터 은혜를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9절).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의 힘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보다 영원히 썩지 아니하고, 영원한 삶으로 이끄는 복음을 붙잡는 지혜로운 삶이어야 한다(10절)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고, 인정하는 자들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사역의 범위가 넓어지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세상이 나의 능력을 알아준다고 믿는 순간 교만의 영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멋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사명자로 부르신 주님의 은혜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가길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그 고난을 통해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역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8절)는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며, 우리 자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은혜를 더욱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고 담대하고 신실하게 소명을 이어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성령이 역사할 때 복음을 지키게 됩니다(11~1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11절)고 말합니다. ‘선포 자’는 전파한다는 뜻의 군사 용어입니다. 복음 선포는 죄인에게 항복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라는 외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자입니다. 바울은 영생을 얻은 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를 말합니다. 그가 믿어 온 분을 잘 알고 있고, 그가 맡은 것을 그분이 그 날까지 지켜 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라고 당부합니다(12~14절).
바울은 자신이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과 주의 복음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는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혹도 많고, 개인적으로 관심 분야도 참 다양합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은 뒤쪽으로 밀려나고, 복음은 내가 필요할 때만 적용하는 어쩜 애물단지 취급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 그리고 복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하여 복음을 우리 삶의 일 순위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신앙을 철저하게 지키고 계승하는 삶을 살아가므로 더욱 담대하고 신실하게 소명을 이어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고난을 받게 될 때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15~18절).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심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해관계 때문에 바울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떠난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이해타산이 밝은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바울 곁에 남았습니다(15~16절). 그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바울을 자주 찾아와 격려하고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17절). 그리고 그는 에베소 교회에서 많이 봉사한 사람(18절b)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위해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18절a)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이 때로는 우리에게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많다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극히 우리의 생각이고 우리의 판단에 의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이 부담스러워 떠난 자들이 있고, 반대로 끝까지 복음 안에서 의리(??)를 지킨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은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네시보로와 같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지키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고난 앞에서 사람들이 다 떠나도 우리 자신만큼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부르심을 입은 소명의 사람임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고난도 축복으로 여겨 더욱 담대하고 신실하게 소명을 이어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거룩한 부르심을 입은 소명의 사람답게 복음 안에서 마땅히 지키고, 믿음 안에서 바른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딤후 1:9~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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