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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의 구제
행 11:19-3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행 11:19-30 /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 스데반이 죽은 뒤 잇따라 일어난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진 신도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찾아다니며 유대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다. 20) 그러나 구브로와 구레네에 사는 신도들은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도 마다하지 않고 주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께서 이들이 애쓰는 모습을 높이 보시고 함께 하셨으므로 수많은 이방인이 신도가 되었다. 22)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새로운 신도들을 돕고자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23) 안디옥에 간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흥분과 기쁨에 넘쳐, 신도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뒤따르더라도 주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라고 격려하였다. 24) 바나바는 친절하고 성령이 충만하며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본받은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나오게 되었다. 25) 그후 사울을 찾아 다소로 간 바나바는 26) 사울을 만나 그와 함께 안디옥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로 신도가 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신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곳도 안디옥이었다. 27) 이 무렵 몇 사람의 예언자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왔다. 28) 그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어느 날 집회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일어나 이스라엘 전역에 큰 기근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 과연 이 예언은 글리우디오 황제 때에 이루어졌다. 29) 안디옥에 있던 신도들은 유대에 있는 교우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힘닿는 대로 모아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30) 그리고 곧 그대로 실행하여 그 헌금을 바나바와 사울편에 예루살렘 교회에게 보냈다.
본문에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교회 중의 하나인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고 부흥되는 장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이 장벽을 넘어 이방을 향해, 곧 세상 끝을 향해 힘차게 진군해 가는 놀라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19-24) 스데반의 일로 인해 일어난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 땅에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중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형제들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놀라운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복음 전파는 항상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주의 손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말해 줍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합니다. 바나바란 ‘위로의 아들’ 이라는 뜻으로 권면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권면하니 큰 무리가 더하는 부흥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24-30)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 안디옥으로 데려와 일 년 동안 함께 있으며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크게 성장하게 되었고, 예수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믿는 자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사울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좋은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27-30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사람을 통해 더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으로 이제 막 개척된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보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방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에서 시작한 복음역사는 이방을 향해 힘차게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적용: 교회가 서로 연합하고 서로 도울 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의 어려운 교회들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형편에 따라 형제, 자매를 힘이 닿는 대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맺어 주신 한 몸이기에 상대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며 상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할 때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 설 교 >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
행11:19-30 / 김명혁 목사
부족한 사람이 광야교회에 자주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설교도 하고 합동결혼식 주례도 하게 되어서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2013년 9월 22일 주일 여기 와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4년 8월 17일 주일 여기 와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5년 1월 12일 주일 여기 다시 와서 새해 둘째 주일 예배를 여러분들과 함께 드리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축복이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과 광야교회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여기 와서 무슨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오전 11시 예배 시간에는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저녁 6시 예배 시간에는 “미언 오언: 고미사뭘보”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우선 서론적인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곳들 중에서 교회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복되고 더 아름다운 곳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귀가 항상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임재하시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주일에도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 오라고 했지만 저는 주일 날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서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자유롭게 예배 드리기 위해서 11살 때 고향과 부모를 떠나 38선을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을 북한에 두고 11살 나이에 38선을 넘어 월남했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은 38선을 넘다가 모두 인민군에게 붙잡혔고 저만 혼자서 남쪽을 향해 달리고 달려서 월남했습니다. 고향과 부모를 떠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한 평생을 살았지만 주일 날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곳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복되고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보배로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들은 아닙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을 내려다 보셨을 때 일곱 교회들 중에서 주님의 칭찬을 받은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는 두 곳밖에 없었습니다. 다섯 교회들은 모두 주님의 책망을 받은 문제가 많은 교회들이었습니다. 수년 전에 옥한흠 목사님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진 사데 교회와 비슷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시아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슷하게 부요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그래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평양의 장대현 교회와 산정현 교회와 여수의 애양원 교회의 모습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광야 교회에 와서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바라보시고 기뻐하시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행2:47).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이방에 새로 세워진 첫 번째 교회인 안디옥 교회의 모습도 아름다웠습니다. 이방에 새로 세워진 첫 번째 이방인 안디옥교회는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의 모습 일곱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와 환난의 일로 피난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는데”(행11:19).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와 환난을 인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피난민 신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세운 소박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씨앗은 스데반의 순교의 피였고 안디옥 교회의 기초는 피난민 신자들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피난민 신자들이 세운 보잘것없는 가난한 교회였지만 순수한 교회였고 보배로운 교회였습니다. 환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해지고 단순해지고 겸손해집니다. 환난을 경험한 사람들의 신앙은 진지하고 단순하고 따뜻해집니다. 환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기도도 성경공부도 전도도 봉사도 열심히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피난민 신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기도와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저들이 주 예수를 전파했을 때 주의 손이 저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안디옥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21).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뜻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피로 그리고 순교자들의 피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9:12).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스데반 집사가 순교의 피를 흘리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그리고 앞으로 안디옥 교회와 빌립보 교회와 여러 교회들이 세워질 것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 기뻐서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안디옥 교회는 순교자의 피와 환난으로 세워진 순수한 교회였는데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참된 교회는 모두 순교와 환난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교회와 아름다운 신자들이 되려면 환난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36년 동안의 환난과 순교를 통해서 그리고 6.25 전쟁의 환난과 순교를 통해서 세워졌던 한국교회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고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순교자들이 당하는 핍박과 환난과 죽음은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저도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환난과 순교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주님의 종으로 교회를 섬기는 심부름꾼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로 구성된 광야교회가 환난과 순교 신앙의 유산을 귀중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 튼튼하게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더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4). 믿음도 중요하지만 착함을 구비하지 못한 믿음은 교회에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충만도 중요하지만 착함을 구비하지 못한 성령충만은 교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졌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고 뜻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산상 설교를 하시면서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착한 행실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좋은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착한 사람이란 욕심과 야심이 적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이방인 새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시기하지 않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새 신자들에게 자기에게 붙으라고 권하지 않았고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착한 성품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지만 또한 후천적으로 고난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 지기도 합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좋은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결국 부흥이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로 구성된 광야교회가 유능한 사람들보다 돈 많은 사람들보다 착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협력 목회로 부흥 발전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다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행11:25). 그리고 사울을 데리고 와서 둘이 협력 목회를 했다고 했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11:26). 착한 사람 바나바는 심각한 과거를 지닌 사울을 데려다가 그를 격려하고 그를 내 세우면서 협력 목회를 아름답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고 뜻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어 보내실 때 하나씩 내어 보내지 않으셨고 둘씩, 둘씩 짝지어 내어 보내셨습니다. 목회와 선교에 있어서 협력 사역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협력 목회를 너무나 아름답게 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인” 이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처음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바나바는 튼튼하게 세워져 가는 안디옥 교회에서 자기 혼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일하려고 하지 않았고 심각한 과거를 지닌 자기 보다 유능한 사람인 사울을 청하여 자기와 함께 동역을 하게 했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좋은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협력 목회로 부흥 발전한 교회였고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을 섬기는 임명희 목사님, 정경화 사모님, 정선영 목사님, 정병창 집사님 등등 여러 사역자들이 협력 목회를 조화롭게 하므로 광야교회가 더욱 더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4. 안디옥 교회는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착한 사람이 힘쓰는 일은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일인데 안디옥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구제 사역이 너무나 중요한 사역임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이 직접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교회가 존재하는 첫째 목적은 물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구제 사역에 무관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이사야와 야고보와 사도 요한 등이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5-17). 안디옥 교회는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고 뜻하신 일이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주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는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한 그래서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사랑과 구제와 봉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국교회와 사회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신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사랑과 구제와 봉사 사역에 전력을 다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칭찬받는 교회가 되려면 억지로라도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방에 세워졌던 안디옥 교회야말로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라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국내의 여러 곳과 국외의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북한, 중국,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찾아 다니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을 해 오고 있습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을 섬기는 광야교회가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5.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다 인종, 다 문화, 다 계급, 다 사회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다 인종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뜻이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그 날에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19:23-25).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2:1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오순절 날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강림하셔서 언어와 인종의 장벽을 깨트려주셔서 다 인종, 다 문화, 다 계급, 다 사회의 3천여 명이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행2:4-8).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교제하고 기도하며 예배 드린 다 인종, 다 문화 다 계급, 다 사회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섬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었습니다. 루기오도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었습니다. 마나엔은 귀족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소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안에는 수리아 출신의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룬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보시시기를 원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 흑인들만 모이는 교회, 이북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경상도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전라도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는 바람직한 아름다운 교회가 아닙니다. 사업가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 정치가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 연예인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 부자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도 바람직한 아름다운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하나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적 장벽과 문화적 장벽을 깨트리고 하나를 이루시는 일이었는데, 이와 같은 일이 안디옥 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억지로라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계급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광야교회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다 인종, 다 문화, 다 계급, 다 사회의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6. 안디옥 교회는 기도에 전력하며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성령의 지시에 순종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행13:2). 안디옥 교회는 기도에 전력하며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니라”(사56:7, 마21:13).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기도에 전력할 수 있는 사람들과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교회와 사람들은 축복받은 교회와 사람들입니다. 빈 마음, 열린 마음, 단순한 마음, 겸손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고 기도할 때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 질 수가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했을 뿐 아니라 성령의 지시에 순종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좋은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데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도록 준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기도하는 데 전력을 다한 교회였고 성령의 지시에 순종한 순수한 교회였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로 구성된 광야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되고 그리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7. 안디옥 교회는 결국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에 전력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두 사람에게 안수한 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을 했습니다. 갓난 아이들과 같은 저들이 저들의 믿음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은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해서 선교사로 파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계획이나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계획과 선택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를 믿은 지 2,3년 밖에 되지 않는 초 신자들이 저들의 믿음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은 바나바와 사울을 핍박과 박해가 기다리고 있는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 땅으로 파송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성령님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초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래된 신자들은 자기 고집과 주장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는 부모 잃은 고아와 같은 석별의 정을 금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저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뜻과 예언을 성취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뜻과 예언과 분부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소아시아와 유럽에까지 가서 주님을 증거하는 선교의 일을 수행하는 선교의 기지가 되었습니다. 세계선교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계속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저들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기억하며 저들을 위해서 기도와 후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님의 선교 위임령을 성취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교에 주력하는 교회는 교회 이름을 안디옥교회 라고 짓습니다. 전주의 안디옥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로 구성된 광야교회가 궁극적으로는 선교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노숙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로 파송하고 누군가를 극도로 어려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북한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이방에 새로 세워진 첫 번째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주님의 뜻을 이룬 아름다운 교회”가 된 모습 일곱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1) 스데반의 순교와 환난의 일로 피난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소박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2)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3) 바나바와 사울의 협력 목회로 부흥 발전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4) 사랑과 구제 사역에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5)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다 인종, 다 문화, 다 계급, 다 사회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6) 기도에 전력하며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성령의 지시에 순종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7) 결국 선교 사역에 전력을 다하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로 구성된 광야교회가 안디옥 교회와 같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을 받고 칭찬과 존경을 받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착한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사랑과 구제와 봉사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전력하며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선교에 전력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름, 그리스도인
행 11:19-26 / 인명진 목사
여러분, 혹시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 불리는 별명이 있습니까? 어릴 때 한두 가지 별명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 덕분에 "호떡"이라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에는 얼굴이 까무짭잡 하다고해서 "깜상"이라 불렸습니다. 나중에는 이 별명 두 개를 합쳐서 "탄 호떡"이라 불렸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별명을 지을 때에는 이름이나 신체의 특징에 따라 별명을 불렀습니다. 상대방이 크게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애칭과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별명을 짓는데 보면 굉장히 공격적이고 도발적입니다. 옛날에는 친구 중에 유난히 머리가 큰 아이가 있으면 대개 "가분수"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머리 큰 아이를 "특공대"라 부른답니다. 특공대라 하니까 좀 있어 보이는 별명은 같아도 풀어서 보면 기가 찹니다. "특별히 공부도 못하면서 대가리만 큰 아이." 아주 기분 나쁜 별명입니다.
그런데 이런 별명과 애칭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체나 조직에게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별명이 있었고, 지금도 그 별명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당연한 이름으로 여겨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니까 그리스도인이지 그러나 이름 속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눈물과 신앙고백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 말씀과 사도행전 26장 그리고 베드로전서에 3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을 다 합쳐서 5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우리가 스스로 이렇게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이방 사람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고서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았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좋은 별명을 붙여주었을까요?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피난살이를 하고 있어서 남의 집에 종이나 하인이나 식모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사람의 형편은 금방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예수 잘 믿어도 여전히 종이었고, 예수 잘 믿어도 여전히 하인이었고, 예수 잘 믿어도 여전히 식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종들과는 삶이 전혀 달랐습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종인데 종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데 가난한 사람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이방 나그네인데 뿌리 없는 사람들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이런 숨겨진 가치관은 금방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로 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하인으로 두고 있던 주인은 함께 살면서 예수 믿는 하인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종인데 종 같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인들은 다 노는데 예수 믿는 종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른 종들은 주인 눈치만 살피는데, 예수 믿는 종은 묵묵히 자기 일 감당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예수 믿는 하인을 불러서 "자네는 남들 다 노는데 왜 그렇게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 믿는 하인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은 또 묻습니다. "너의 주인이 누구냐?", "예 저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음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인이지만 고상한 인격이 있어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주인도 나중에는 이 하인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 속에서 만나는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남의 나라 땅에서 떠돌며 살았지만, 가난하게 살았지만 멋있게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집사가 순교를 당하고 야고보 사도가 목 베임을 당하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저들이 왜 흩어졌습니까? 왜 집도 버리고, 논밭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이방인의 땅으로 흩어졌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 때문에 핍박 받아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도망친 것입니다. 다른 것 다 버려도 예수는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국경을 넘었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 믿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들이 오직 예수 한번 잘 믿어보자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곳이 바로 바로 안디옥이었습니다. 안디옥은 유대 나라 북쪽 경계선 바로 너머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유대인의 박해가 없는 안디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 중에서도 교회의 소문을 듣고 안디옥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이 교회가 유명한 이유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신앙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뭔가는 잘 몰랐지만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세상 여느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외국인을 만나면 제일 궁금하게 여기는 점이 어느 사람일까 하는 점입니다. 민족과 나라의 정체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 눈에 비친 눈에 비친 안디옥교회 성도 역시 유대인들의 어떤 종교집단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삶의 내용과 신앙은 보면 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았습니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유대인들과 달랐습니다. 이제 보아왔던 다른 종교집단과도 달랐습니다. 저들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지만 민족적 성격에 붙잡히는 것도 아니었고, 세상의 재산이나 권력에 의해 붙들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별난 집단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최고로 여기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 공동체는 이방 사람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어떤 무리라 부르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른 것입니다. 민족적 성격보다 예수께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예수 믿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것을 깊이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가리켜,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우리를 가리켜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개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비난하는 사람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비통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믿고, 잘못 살았습니다. 이 개독이라는 이름은 10여년 전 인터넷 댓글에서 시작되었다가 이제는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길바닥에서 짓밟히는 것처럼 처참하게 비난당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라 추한 이름, 개독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한기총 회장 선거에 수억원대의 금권 선거로 얼룩졌고, 교회가 권력 앞에 아부하고, 대형교회의 타락과 무리한 건축, 그리고 교회를 사유화하여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상 이런 실례가 없었는데 지난해 총회에서 세습금지를 결의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신앙도 물신을 숭배하듯 미신화 되어 현세의 복을 강조하고, 교회도 성도의 교통이 아니라 개인화 되어가고, 교회도 특정한 사람에 의해 사유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신화, 개인화, 사유화 이런 틈새를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이 파고들었습니다.
여기에 한술 더하여 나라의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연루되는 기독교인, 함께 울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잘못된 외침이 교회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디 가서 제가 목사요 하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어찌하여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처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여기저기서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추한 이름 개독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름 그리스도인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교회가 교회다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비밀은 그리스도인이라 칭송을 들었던 안디옥 교회를 벤치마킹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교회들이 다 훌륭한 교회들이였지만 약간씩은 다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파당이 많은 교회였고,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를 용납한 교회였고, 다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인들 서로 간에도 아름다운 화합과 사랑을 이루었습니다. 핍박자인 사울을 변화시켜 복음의 증인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인종 간에 편견이 심하던 시절에 흑인이었던 니게르 시몬을 교회 앞에 지도자로 세웠던 교회입니다.
또한 선교 사명을 깨닫고 이방을 향한 선교사를 최초로 파송한 교회입니다. 요즘은 선교사를 파송할 때 본 교회를 섬기는 부목사나, 전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담임목사 바나바와 부목사인 바울을 동시에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두 사람을 안수하여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파송했습니다.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지상명령인 선교가 교회 안의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들었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함을 받았고, 다른 교회들로부터도 존경받았습니다. 저는 우리 갈릴리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다른 교회로부터 존경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제 안디옥교회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먼저, 성도들의 신앙이 예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어서 덕보려하고, 예수 믿어서 복 받으려 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믿으면 손해 볼 줄 알고,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박해 받을 줄 알고,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문 받고, 죽임당할 것을 각오하고 예수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고 신앙생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수 믿으면 직업을 포기해야 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가야 한다면 우리 중에 과연 몇 사람이 그래도 나는 예수 믿겠다고 신앙 붙들고 있을까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문에서 배척당했고, 동족들로부터 멸시 당했고, 직업을 버려야 했고,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다고 말 한 마디 하면 이런 어려운 일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산 빼앗기도 않아도 되고요. 정든 고향 떠나지 않아도 되고요. 그러나 저들은 자기 살기 위해 예수 팔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 포기하고 예수 붙잡았습니다. 자기 몸을 밀착시켜 예수를 바짝 따라갔습니다. 고난과 박해 앞에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저들의 이름을 아름답게 했고,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손해 보는 그 믿음이 복이 되었고, 박해 받는 그 믿음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믿음 회복해야 합니다.
얼마 전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이름 밝히지 않아도 다 아는 교회입니다. 유명하신 이 목사님이 횡령과 배임죄로 재판을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이 기사를 접한 복음주의 석학 존 파이프 목사님은 당사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를 욕되게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나타나는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번영신학,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고, 무조건 잘 된다는 신앙의 뿌리가 잘못되었습니다. 뿌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열매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물려받은 우리의 신앙은 이런 시시한 수준이 아닙니다. 세상의 복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복되게 하는 예수, 눈에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어 금생과 내세를 복되게 하는 예수가 우리의 최고의 복입니다. 예수 한분만으로 충분한 복입니다. 예수 팔아서 얻는 복은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기꺼이 손해 보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믿음 지켜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고, 삶이 되고,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꺼이 손해보고도 예수 잘 믿으려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박해 받더라도 예수 잘 믿으려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바로 그 사람이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살아야 그리스도의 냄새가 납니다. 이렇게 살아야 세상이 변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우리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뀌어집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에는 협박만 하던 유대 관원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비밀결사대까지 조직되었습니다. 사울은 그 일원이 되어 온 유대를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디아스포라라 말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신앙 때문에 직업과 가문과 고향까지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오는 불이익과 손해를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손해 보면서도 예수 믿으려는 사람 하나님이 복주십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 지키는 사람 하나님이 손이 함께 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손해보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역사를 주름 잡았습니다. 흩어졌던 신자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불과 3백년도 안되어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복음이 전 유럽을 점령 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청교도 퓨리턴이라 말하는데, 이들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네덜란드로, 스코틀랜드로 흩어졌습니다.
청교도들이 이곳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이 두 나라에 엄청난 복을 주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나라인데도 전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신앙의 박해로 신교도들이 끔찍한 살해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성 바돌로매 성당에서 자행된 학살은 7만명의 개혁교회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말로 이 사람들을 "위그노"라 하는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위스의 알프스 산 속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신앙 포기할 수 없어서, 예수 버릴 수 없어서 모든 것 다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가내 공업으로 시계를 만든 것이 오늘의 스위스 시계의 기원입니다. 정직한 신앙이 바탕이 되어서 만든 것입니다. 또한 청교도와 위그노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아왔는데,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입니다. 세계 역사와 신앙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시면 어떤 사람에 의해 역사가 움직이는가? 이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이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역사는 손해 보더라도, 핍박이 있더라도 끝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움직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고, 이 믿음으로 복음 전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교회가 스스로 가난해졌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피난민 교회입니다. 예수 때문에 모든 다 버리고 오직 예수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피난민들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담임목사인 바나바, 부목사인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교회에서 모든 경비를 후원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분명히 되집고 넘어가야 되는 것은 교회는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보여주고, 예수를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칭송을 최초로 들었던 안디옥교회는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가난해지고, 복음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이웃을 위해 낮아졌습니다.
우리 갈릴리교회도 지난 28년간 인명진 목사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가난해지는 교회로, 복음을 위해 스스로를 비우는 교회로, 이웃을 위해 낮추는 교회로 목회철학을 세워왔습니다. 저 역시 이 정신과 함께 걸어가며 다시 한번 다짐하며 고백합니다. 갈릴리교회의 이 예배당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도들이 드린 헌금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도들 자체도 갈릴리교회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예배당도, 헌금도, 성도도 마음껏 사용하셔야 우리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산의 50%를 선교비로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한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신앙고백과 정신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온 손님들이 우리교회의 건물을 보고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경험하고 나면 없는 게 너무 많고, 부족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사찰도 없습니다. 버스도 없어서 교회 차량도 운행하지 않습니다. 주일 점심도 밥값을 내고 사먹어야 합니다. 거기다가 봉사할 일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엄청나게 가난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배당 건물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말도 두고, 종도 두려고 합니다.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거부하는 교회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교회를 통해 세상에 흘러가는 것이 중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회자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추한 이름으로 다가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다시 세우고,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여 다시 한번 달려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안디옥교회 성도들처럼 예수 때문에 손해 보기를 마다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 때문에 스스로 가난해지는 교회를 세워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예수 이야기를 세상에 유통시키고, 가장 복된 예수를 가슴에 안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착한 그리스도인
행 11:19-30 / 김경진 목사
< 양심과 사랑에 기초한 각 교회 공동체의 방향을 존중합니다. >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거리에 차량도 뜸하고, 집에서 아이들과 계속 시간을 보내느라 많이 지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오늘도 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먼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잘 할게요.” 이렇게 인사해 보겠습니다. 서로를 격려하는 이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지난 주일에 보여 주신 아름다운 모습은 저에게도 큰 기쁨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질서정연하게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큰 감동이었습니다. 예배 후 많은 교우께서 예배드린 장면이 담긴 사진을 보내 주셨습니다. 중등부와 고등부 학생들이 집중해 예배드리는 사진도 있었고, 유·초등부 어린아이들이 예쁘게 예배드리는 모습,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참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또한 여러분께서 온라인 헌금으로 보여 주신 사랑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의 모금에 많은 분이 정성껏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정성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지정 헌금을 보내 주신 분들도 계셨고, 큰 헌금을 보내 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1부부터 5부까지 소망교회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립니다. 동시에 실제로 이 시간 우리 소망교회 예배당에서 열다섯 분 정도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반주자, 독창자, 카메라를 담당하시는 분, 음향을 맡으신 분, 헌금 위원, 기도자, 그리고 몇 분의 교역자가 모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곳에 수천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인원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현재 많은 분이 온라인으로 가정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조금은 다른 형식이지만, 지금도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전히 ‘예배당을 열 것인가? 또 예배당을 닫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신학적으로 또 성서적으로 온라인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실천적인 관점에서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교회가 우리 소망교회처럼 온라인예배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각 교회 공동체의 양심과 판단에 맡겨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편입니다. 때문에 일일이 예배자를 관리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교회의 경우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적은 인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협력하여 전염병을 예방하며 예배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3.1절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께서 50여 명과 함께하였듯이, 그 정도의 인원이라면 얼마든지 예배당에서 적절한 예방조치를 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을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각 교회의 상황과 양심에 따라 결정될 일입니다. 예배당을 닫았기 때문에 비난할 일도 아니고, 예배당을 열었기 때문에 비난할 일도 아니며, 반대로 칭찬받을 만한 일도 아닙니다. 모두가 양심과 상황에 따라 일할 뿐입니다.
< 이단의 구조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경험하면서 ‘바이러스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라고 절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놀랍게도 코로나19의 확산만큼이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게 있는데, 바로 ‘신천지’라고 불리는 종교 단체입니다. 최근 많은 매체에서 신천지에 대한 영상과 자료를 접하셨을 것입니다.
20만 명이 넘는, 아니 3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신천지 교도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가르치며, 열심히 전도하고 있다는 것 역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질서정연한 행동이나 유니폼 같은 복장을 착용한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포스럽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신천지가 동시에 주목받게 되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신천지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접촉하면 안 된다는 것과 접촉하면 전염된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단으로 분류되는 많은 종파가 있는데, 그 종파의 신도 수가 200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장로교 통합 측 교단의 교세가 약 200만 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단의 신도 수만큼 되는 많은 사람이 이단에 빠져 있다는 충격적인 수치입니다. 특히 이런 분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사회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이단들은 우리나라 각 분야, 각 방면에서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가에게 이단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연예계, 언론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많은 이단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 교회에 대한 악의적인 댓글과 공격이 늘어나는 것도 이단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천지 교도들이 약 9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그곳에 무언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한번 들어가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들어가서 공부해 보고, 그런 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서 공부하다 보면, 그 속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허술한 신학 구조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개월 동안 함께 공부하다 보면 그 안에 빠지는 경우가 생기고 맙니다.
저는 인터넷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을 좋아하지도 잘 하지도 않지만, 우리 아이들이 종종 게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볼 땐 참 말도 안 되는 게임 같았습니다. 그림도 이상하고, 설정도 그렇고,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어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템의 의미도 알게 되고, 기능도 알게 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그 가치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점차 게임의 구조에 빨려 들어가게 되고, 게임에서 이겨 더 좋은 아이템이 생기면, 열광하면서 더 깊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사람들이 빠질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게임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듯이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나름의 신호를 발견하며, 함께 열광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구조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교주의 사진만 봐도 열광하고, 그분이 지나갔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게임은 그저 게임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단은 훨씬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실제 삶의 영역까지 그 영향이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안의 사람들이 연결돼 있고, 그곳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이단의 폐해가 매우 심각합니다. 그러니 그 구조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얼마든지 신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 구조로 들어가게 되면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이단은 인간의 욕망과 교만을 자극하며 유혹합니다. >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게임에 빠집니까? 현실이 답답하고 힘들 때 게임에 들어가면 새로운 질서가 보입니다. 그 안에서 또 다른 위치도 생깁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위치지만, 마치 다단계의 유인술처럼 곧 성공할 것이라고 우리를 유도합니다. 계속하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포인트를 얻으면 조금씩 위치가 달라지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고, 많은 것을 갖게 되고, 힘도 세지고, 능력도 많아지고,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게임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같은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내 자리가 생기고, 구조가 생깁니다. 그 안에서 점차 성장하고 희열을 느낍니다.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성장하는 느낌을 얻습니다. 특히 이단들은 구원과 관련하여 인간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14만4천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유혹합니다. 그것이 또 다른 경쟁을 자극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맹렬히 노력합니다. 이미 그 구조 안에 들어갔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점수를 얻으려 하고, 전도해서 포인트를 얻으려 하며, 출석해서 포인트를 얻으려 하는 등 열광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원인은 바로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 욕심, 그리고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저질렀던 죄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풀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비밀을 모두 풀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꼭 14만4천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욕심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물리쳐서라도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입니다. 종교도 신앙도 아닙니다. 게임이고, 일종의 사업이며,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겸손한 것 같고, 지혜를 얻는 것 같고,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나만이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는, 나만이 신앙의 비밀을 깨우치려고 하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15)
거짓 영이 우리를 미혹하고 끌어들이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소망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님들도 있으실 것이고,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에서 말씀의 꼴을 먹으며 신앙생활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교회마다 특징이 있고, 목사님마다 특징이 있고,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명을 잘하시고, 어떤 목사님은 말씀을 잘 풀어내시고, 어떤 목사님은 뜨거운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어떤 목사님은 신령한 은사를 보여 주십니다. 모두 다 같은 은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장단점이 있을 수도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사실은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하지만, 사실 신앙의 체계는 하나님의 커리큘럼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건과 말씀과 우리의 인생을 통해 알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커리큘럼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꼭 14만4천의 비밀을 알아야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비밀을 풀어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은 미련한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명료하고 분명합니다. 더하거나 덜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이 모자라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부족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도 아니고,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제대로 배운 것을 그대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삶으로 신앙을 적용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말씀대로 살아보았는가? 말씀대로 실행해 보았는가? 말씀대로 기도해 보았는가? 말씀대로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구제를 해 보았는가? 그리고 그 이후에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경험해 보았는가?” 어느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정말로 맞는 말씀입니다.
“기도만 해서 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저는 이 말에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능력을 봅니다.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아는 사람은 “기도만 해서 되겠냐?”라고 말합니다. 그리곤 나름대로 여러 이론을 들어 기도를 풀어내려 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능력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배우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 자체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아가 기도를 통해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 건강한 신앙생활은 진리와 자유에 기초합니다. >
운동할 때 도와주는 사람을 PT라고 부릅니다. 물론 PT 선생님 중에 좋은 선생님도 있고, 조금 부족한 선생님도 있을 것입니다. 동기부여를 잘해 주는 분들도 있고,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적절하게 내게 맞는 운동법을 찾아내 주는 유능한 선생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PT 선생님이 없어서 내 몸이 건강하지 못합니까? 내 건강을 내가 유지하지 못합니까? 알고 있는 것이 부족합니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 자신이 스스로 운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운동해서 내 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더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까? 그래야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얼마든지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 설교를 듣는 분 중에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대학가에 가면 많은 이단이 유혹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과 접촉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부탁의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여러분의 교회를 깊이 사랑하시고, 그 안에서 꼴을 먹으며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교회일지라도, 작은 교회일지라도, 늘 힘들어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일지라도, 그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결심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교회를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연습하는 일들을 실행하십시오. 평생 그 안에서 자라나며, 신앙을 성장시켜 나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누가 어디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하면, 가능하면 가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 주위에 유혹하는 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교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유혹의 영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비밀스러운 성경공부는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공부는 비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부모와 소통하면서, 여러분의 교회 목사님과 소통하면서 얼마든지 성경공부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비밀스럽게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 거절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더 있나, 어디에 더 좋은 꼴이 있나, 이곳저곳을 헤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거짓 교사에게 또는 미혹하는 영에게 붙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를 속이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비밀스러운 성경공부는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꼭 부모님과 소통하면서, 또 교회 목사님과 소통하면서 해야 합니다. 한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면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의 공동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만든 이름이 아닙니다. 당시 안디옥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니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이 우리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게 아닙니다.
신천지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다양한 거짓말과 속임수를 독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교를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일삼습니다. 연극과 연출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속아서 교인이 되었는데, 속이는 일에 열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되거든, 그들이 어떤 이단이든지 어떠한 종파이든지 즉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거짓과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땅에 발을 딛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해치거나 속이거나 거짓말하여 끌고 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단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정당화하고,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속임수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 자체가 이미 그들이 진리와 멀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단들은 말합니다. 지금 자신들이 초대교회처럼 박해를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이 박해받은 이유는 비윤리적이거나 속여서거나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박해받았던 이유는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했기에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결코 비윤리성이나 비도덕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은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장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16 중)
이 고백과 확신이 있었기에,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 박해를 받았지만, 결코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거짓이 있고 속임수가 정당화되는 곳이라면, 그곳은 우리의 신앙이 설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얻은 안디옥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세상을 넘어서는 비전과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비전을 선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교회는 항상 사회와 현실에 맞닿아 있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피해 숨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착한 바나바라는 표현은 당시 안디옥교회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침없이 선포했고,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교회는 부조를 보내 도왔습니다.
진정한 진리는 이 땅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늘 위에 떠 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어려움을 함께 겪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희망, 우리의 비전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하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은 이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문제를 도외시하거나 피안의 세계만을 바라보는 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과제요, 소명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돕기 위해,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잠시지만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늘 위에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다소 설교의 틀을 벗어났지만, 목회자로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이단과 관련해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욕심과 욕망을 위해 신앙의 길을 가지 마십시오. 거짓과 속임수는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거짓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거짓과 속임수는 신앙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세상과 맞닿지 않는 신앙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 사실을 마음에 꼭 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떤 신앙이 바른 신앙인가를 고민하게 될 때, 제가 오늘 말씀드린 세 가지만큼은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만,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
행 11:19-26 / 문기태 목사
21세기의 가장 크게 논쟁이 되고 있는 화두는 '리더십은 정확하게 무엇으로 구성되느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리더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는 능력과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리더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전달하여 사람들로 그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끌어내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리더는 한 마디로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좋은 리더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세계는 리더십의 부재로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장기불황으로, 부정 부패의 문제로, 실업의 문제로 온갖 어려운 문제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쳐서 리더가 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혼란만 가중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면 평화롭고 발전하며 행복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지도자를 만나면 혼란의 연속이며 퇴보하고 모두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고 모든 공동체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목장도 마찬가지이며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의 모델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박해를 피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로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지도자로 세워 안디옥교회에 파송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자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상 최초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좋은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사역하는 안디옥교회와 당시 예루살렘과 소아시아 일대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까지 바나바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나바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강력하게 끼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시고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을까요? 바나바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을까요? 바나바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아름답게 변화시켰을까요? 바나바를 통해서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셨을까요? 그에 반해 오늘 우리들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우리도 바나바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나바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도전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23)
스데반 순교 이후에 일어난 큰 박해로 인해 흩어진 교인들이 안디옥에도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사람이 이방인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사도들이 안디옥교회에 지도자가 필요함을 깨닫고 바나바를 안디옥교회 담임목사로 파송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 성도들을 만나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한 것은 교회당이 얼마나 크고 웅장한가?를 살핀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를 본 것도 아닙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재정 상태는 어떤지? 그런 것들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있는 놀라운 은혜를 보았습니다. 지도자가 없이도 교회가 세워졌고 교인들이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사모하며 열심히 모이고 있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교회에 넘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가 보입니까? 아니면 은혜는 보이지 않고 다른 것만 보입니까? 교회 와서 은혜는 보지 않고 사람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와서 은혜는 보지 않고 축복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와서 은혜는 보지 않고 문제와 허물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됩니다. 시험에 들게 됩니다.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려고 힘쓰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 응답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난 것도, 좋은 교회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주일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은혜요, 엄청난 진리를 깨닫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에는 내가 잘나고,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잘해서 당연히 누리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은혜인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이 못마땅했습니다. 누가 조금만 잘못을 해도 밉고 그래서 신랄하게 비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 꼬이고 모두가 나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달아졌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가 많고 허물이 많은 부끄러운 존재인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힘으로 다 될 줄 알았는데 내 힘으로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삶 속에 오셔서 모두가 고개를 돌린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가 잘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 같은 일들을 이루어 주십니다. 나와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고 하늘 소망을 품게 하시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 기쁨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주님! 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위해 내 아들 그리스도도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을 더 아끼겠느냐?" 하십니다.
다 은혜입니다. 은혜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은혜를 보고 기뻐하는 영적 감각이 살아나야 합니다. 바나바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바나바처럼 은혜를 보고 기뻐하는 영적 감각이 살아나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은혜를 보고 기뻐할 뿐 아니라 바나바의 권면처럼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므로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2. 인성과 영성을 갖추어야 합니다.(24)
1) 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바나바를 가리켜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착하다는 것은 지도자로써 별로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착하다는 말을 사람들은 어리석음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순진하기 때문에 늘 이용당하고 사기 당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여러분 착한 사람이 사업을 잘 합니까? 좀 착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악하여 수완을 잘 부리는 사람이 사업을 성공합니까? 여러분, 착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직장에서 승진하여 고위직에 오릅니까? 계략도 펼 줄 알고 거짓말도 적당히 둘러댈 줄 아는 사람이 출세를 합니까?
왠지 우리의 생각에는 착한 사람은 지도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성경은 무엇을 가리켜 착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착하다는 것은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정직한 인격을 소유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창립멤버로 보여집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 교회로 밀려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비교적 부유했던 바나바는 가난한 이들을 보며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순종하여 자신 소유의 땅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아주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역을 시작한 동기도 순수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땅을 팔아 헌금했습니다만 그들은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숨겨 놓고 전부 헌금한 것처럼 속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속이고 주의 영을 시험하려 했다고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술수를 쓸 줄 모르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 사울이라는 핍박자가 회개하고 들어왔지만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고 슬슬 피했습니다. 모두들 사울이 언제 돌변하여 성도들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나바가 다가가 외롭게 혼자 신앙 생활 하던 사울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울을 성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의 회심이 진실함을 증거했습니다. 바나바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된 것은 남을 믿어주는 착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을 믿어주는 착한 마음이 바나바에게는 있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전체를 통 털어 오직 바나바 한 사람에게만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나바는 정직하고 순수한 동기를 품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뢰할 만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CEO들에게 물었답니다. "성공의 필수 요건이 무엇입니까?" 공통적인 답이 정직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지도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거룩한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수한 사람, 정직한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올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 착한 사람이 되어 귀하게 쓰임 받기 바랍니다.
2)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착하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찾아보니 어떤 사람은 착하기는 한데 무능하고 어떤 사람은 유능하기는 한데 믿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착한 마음을 소유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능력을 갖춘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각자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힘쓰고 남보다 더 노력하여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실력을 갖추어도 우리는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크고 어려워서 역부족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실력을 갖추고 열심히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중 에서도 사람을 섬기고 키우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을 다르게 하면 믿음이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으면 탁월한 지도자가 됩니다. 요셉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니엘이 또한 그렇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타고난 지도자가 아닙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양 몇 마리와 씨름을 하던 사람, 집안 가족들에게도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동행하더니 사람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그 어려운 때에 위기의 나라를 견고한 반석에 올려 놓았습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말씀입니다. 엡5:18절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고 명령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술기운이 그를 지배합니다. 술기운이 이성을 지배합니다. 그의 판단을 지배합니다. 그의 감정도 지배합니다. 그의 모든 것을 술이 지배합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판단을 지배합니다. 의지를 지배합니다. 감정도 지배합니다. 전에는 자기 생각대로 살았는데 자기 감정을 앞세웠는데 성령충만해지니까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사로잡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십니다. 바나바는 성령님께 사로잡혀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게 됩니다. 바나바가 성령의 은사로 일을 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변화되고 주께 헌신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 인성과 영성을 갖추어 귀하게 쓰임 받고 존귀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