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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 17] 금강경의 지혜 / 정병조
반야사상 대승불교의 초기 사상을 주도해온 것은 반야의 철학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반야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경전들과 그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 알아본다. 원래 반야( )라는 말은 인도말 프라 즈냐에서 음사한 것이다. 프라즈냐는 '인식'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을 알다' '~을 인식하다'는 뜻이다. 중국인들 은 이것을 '~을 분별해서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하여 '분별지'라고 번역하였다. 이 분별지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들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다. 그것을 통해 나 이외의 외부대상을 향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혹은 좋다거나 밉다거나 등의 감정을 갖는다. 저것은 높다, 낮다, 이 음식 맛은 달다, 쓰다 등으로 분별해서 안다. 그런데 분별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의 병폐를 가져온다.
즉 분별해 본 결과 자기에게 유익하고 자기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꾸 가까이 하려고 한다. 또 자기에게 싫은 것은 멀리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분별지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물론 분별지라는 것이 우리들의 불가피한 인식작용일지라도 분별지를 가지고 있는 한 절대 완전한 세계, 공의 세계에 진입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반야사상가들이 하는 말은 바로 그러한 뜻이다. 우리들이 피상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작용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양 철학자 헤겔도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 "우리들의 이성, 그 자체에 이미 모순이 있다." 그 말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결국 분별하는 의식을 통해서 절대 완전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분별하는 의식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초월적인 지혜가 부처님의 예지처럼 분명히 존재 하지만,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프라(pra)'라는 접두 어를 붙여서 '프라즈냐'라는 말을 만들었다. 그것은 사물을 인식하기는 하되 절대 완전한 인식을 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상대적인 차별을 초월해서 절대 완전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예지를 어떤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인지 고심하던 중국인들은 그대로 음사하여 '반야'라고 하였다. 반야라는 술어는 앞으로도 자주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한다. 반야란 부처님의 지혜이며, 사물의 절대적인 세계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사상가들은 우리들에게 분별지를 버릴 것을 요구하게 된다. 철저히 반야사상의 입장에서 이 사물을 관조해야 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깊고 깊은 반야의 사상의 담고 있는 불교의 경전, 통상 반야부 경전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반야사상을 말해주는 근거가 되는 경전으로는 <대반야바라밀다경>600 권이 있다. '바라밀다'는 '파라밀 타'를 음사한 것이며 도피안의 의미를 갖는다 즉 불교에서 추구하는 저쪽, 이상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세계에 도달하게 하는 힘이 바로 반야라는 것이다. 반야에 의거해서 저쪽 열반의 언덕에 도달했다는 것을 가르친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대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경전이 반야부 계통의 경전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방대하고 그 내용 자체도 난해하기 때문에 보다 축소한 반야부 계통의 경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경>10권이며 <반야이취경>등이 있다. 물론 넓은 사상적인 계통으로 보면 <유마경>등도 반야부의 계통에 속한다고볼수 있다.
<유마경>의 내용 자체가 출가자를 중심으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재가의 신자가 부처님의 열 분 제자들보다도 훨씬 위대한 반야의 증득자로서 표현되어 있고 그 반야를 생활 속에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유마경>이라는 불 교경전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통상 우리들에게는 <금강반야바라밀경>, <반야 심경>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란 부처님의 반야 지혜가 금강과 같이 단단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을 깨뜨려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금강, 이것은 다이아몬드이다. 그것은 아름답기도 할뿐더러 단단해서 그 어떤 돌에 의해서도 부서지지 않는다. 또 다른 어떤 돌도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위대한 예지는 이 세상의 어떤 의도, 어떤 그릇된 것들도 없앨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였다. 이 <금강 경>은 초기에 형성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보고 있다.
또 이것을 보다 줄인 것이 <반야바라밀다심경>1권이다. 이 경은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 중 가장 짧은 경전이며 우리 불자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경전이 아닌가 한다. 이 <반야심경>은 일반적인 경전의 형식을 무시하고 있다. 다른 경전들은 주로 부처님과 제자들이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경에서는 이러한 문답 형식이 극도로 긴장되어 단순히 부처님이 관세음보살을 주인공으로 해서 사리불이라는 제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압축적인 표현과 간결성이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선종에서 쓰는 말로 일능이 만능통 '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가 통하면 일만 가지가 통한다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반야를 지녔을 때에만 모든 것이 통용될 수 있다는 불교적인 입장이 반영된 가르침이다. 반야사상이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했는가 하면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을 주제로 하는 법회가 신라나 중국, 일본의 왕실에서 주관하여 거의 매달 열렸다고 하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인왕'이란 지도자의 자질, 자격에 대한 논의인데 인왕은 반야를 가짐으로써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반야에 의해서만 우리나라가 지켜지고 외국의 침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도자이건 혹은 지도자가 아니건 간에 반야를 증득하고 체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는 증거를 인왕호국법회에서 보는 것이다. 그 인왕호국법회가 신라시대에는 백고좌도량으로 나타난다. 백고좌도량은 고구려에서 망명한 혜량스님이 최초로 신라에서 열기 시작한 이래 원광, 원효 등의 큰 스님들이 모두 백고좌도량을 주관하거나 그 백고좌도량과 관계를 맺는 데 적어도 신라를 거쳐서 고려의 말엽에 이르기까지 천년 동안 이와 같은 지도자의 자격에 관한 논의들이 계속 지속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반야의 실천, 즉 무애행 내지는 달관된 경지가 중 요시되어 온 것이다. 이 무애와 달관의 멋을 한국 불교를 관통하고 있는 해학과 유머성에 관련지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유연성이다. 그 독특한 무애, 즉 반야의 철학이 깃든 한국 불교가 지배하던 사회의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사회는 경직되고 근엄한 분위기였으나 불교가 지배하던 고려나 신라를 보면, 온통 해학의 멋이 흘러넘친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보여 지지 않는다. 불교가 지닌 잠재력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공기로 전환되어 자연스럽게 이루어낸 것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구성과 내용>
반야부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은 <금강반야바라밀경>과 <반야심경>이다. 경전 성립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금강경>은 상당히 오래 전에 성립된 경전이라고 불교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금강경>의 산스크리트 본이 기원전으로 내려가는 상당히 고투의 문법체라는 점과 <금강경>의 사상 속에 탑파 숭배 신앙이 자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대승불교 교단의 형성에 관하여 논할 때 탑파지라고 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금강경>이 편집된 시기는 탑파 숭배 신앙이 매우 강조되었던 시점의 어느 때였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이다. <금강경>의 구절구절마다 반복되는 내용 중에 '그대가 이 경을 독송하는 공덕이 다른 모든 이들이 탑묘를 공양하는 것과 같은 일이리니'라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금강경>의 편집 당시가 탑파 숭배의 신앙이 매우 왕성했던 시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와 <금강경>의 표현 자체가 매우 간결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금강경>의 첫머리는 '그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러 있을 때 여러 큰 스님들 천이백오십 명과 함께 있었다.'로 시작되어 매우 간략하다. 이러한 고투의 표현 자체가 경전 성립사적으로 상당히 오래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불교 문헌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금강경>은 <법회인유분>이니 <선현기청분>이니 하여 그 품을 나누고 있으나 사람들이 경을 독송하다가 그 내용에 따라 임의로 분류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본래적인 문단 구획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대개 그런 형태로 편집이 되어 있다.
<금강경>이 담고 있는 사상의 대의를 한마디로 하자면 무상으로 모습이 없음을 뜻한다.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습이 없는 진실의 세계에 대한 접근이다.
모습 있다고 함은 무엇인가? <금강경>에서 반복되는 논리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내가 남에게 베풀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을 자랑삼는다면, 그것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보시라고 말할 수 없다. 베풀었지만 내가 베풀었다고 하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 이것을 무주상보시라고 한다.
또 <금강경>에 이런 표현도 나온다. 만약에 보살에게 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곧 보살이 아니니라. 아상이 무엇인가? 나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나만이 옳고 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아상이라고 했다. 인상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을 학대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견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생상. 이것은 거꾸로 '나는 중생이므로 도저히 성불할 가망도 없지.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입어야지. 한 생만 사는 것이 아니고 여러 겁을 두고 산다는데, 다음 생애나 성불해야겠다.'는 등의 비굴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중생이기 때문에 안 된 다'는 마음을 가져도 그릇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자상인데 이것은 오래 살려고 한다든지, 목숨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 네 가지의 상을 벗어났을 때 진정한 의미의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심사상은 바로 무상인, 모습없음이다.
진실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반야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의 모습 없 음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금강과 같은 예지로 이 세상의 모습 없는 진실을 볼 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금강경> 이 제시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그러면 <금강경>에 나오는 몇 구절을 인용하여 그 내용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부처님이 수보리를 향하여 여래라고 하는 인격적인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물으신 적이 있다.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가히 몸의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여기서 몸이니 마음이니 하는 용어를 썼으나 이것은 종교학에서 쓰는 용어로는 인격적인 모습이라는 뜻이다. 요즘도 그러한 논쟁이 많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논쟁 중에 신의 모습이 인격적인 모습이냐, 비인격적인 모습이냐는 이러한 논쟁들이 있다.
다른 종교에서 논의되는 문제이기는 하나 사실, 유일자적인 신이 과연 인격적인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부처님이 던진 질문의 의미도 바로 그것이다. 인격적인 몸의 모습, 어떤 형상 지워진 형태의 것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수보리에게 물었던 것이다. 수보리는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인격적인 몸의 모습 으로써는 부처님을 뵐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부처님이 말한 몸의 모습이란, 곧 몸의 모습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해야 될 구절이라고 본다. 부처님이 말한 몸의 모습뿐만 아니라, 열반. 해탈. 괴로움 등 그 모든 것 들은 사실 그 모습이 아니며 다만 이름이 그것일 따름이 다. 즉, 어떠한 진리적인 것이든 간에 개념이나 형태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권력에의 의지>속에서 "영원이라고 파악된 모든 진리는 파기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분히 독선적이고 혁명적이기는 하나 분명히 날카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진실한 진여의 세계를 추구하지만 우리들의 현실은 결코 진여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아주 불확실하지만 언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될 것은 그 언어, 개념과 형상의 뒤안길에 있는 참모습이다. 부처님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룻 있는 바 모든 모습이란 헛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여러 모습의 참된 모습이 진실치 않은 것임을 알게 되면 곧바로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있으리라." 바로 이 구절은 그 유명한 <금강경>의 사구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구절이다.
'무릇 있는 바 모든 모습이란 헛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진실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무엇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또 그 무엇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인과의 고리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 우주 속에서 생멸을 유지할 수 있다. 모든 것과 결별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것, 이것은 아무 데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인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헛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결코 허무적멸의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때 헛되다고 하는 것은 영원성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모습들 속에 감추어진 진실한 모습들이 이러한 헛됨을 속성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처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표현만으로도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라는 인격을 인격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격적이지 않은 모습, 예컨대 <화엄경>의 본존불이신 비로자나 법신부처님의 경우에도 부처님의 진리의 속성을 형상화시킨 것이기에 이것도 비인격적인 주체라고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부처님의 이 가르침 '범소유상 개시허망'의 진실한 의미는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모습들의 속성을 반야로써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보지 못하는가? 반야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야가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이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늘 있지 않은 것을 늘 있다고 착각 하고, 즐겁지 않은 것을 즐겁다고 착각하며, 나라로 할 만 것이 없는데도 내 한 몸에 집착해서 내 한 몸의 이익과 안락에 일생을 허비한다. 또 깨끗지 못한 우리 주변을 깨끗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중생들의 편견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편견의 극복을 강조하였다. 이 편견의 극복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금강경>에서는 그것을 '비인격적인 모습'이라는 말로 설명한 것에 불과 하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의 불자들 가운데서도 부처님의 모습을 인격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금강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말했을 때 적어도 서양종교에서 생각하는 바와 같은 그런 형태의 모습으로서 부처님을 그린다고 하는 것은 편견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그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착하게 살려고 하는 그 의지 그리고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파사현정의 기개, 그 속에서 부처님은 영원히 호흡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부처님은 우리들 이웃의 평범한 모습 속에도 잠재되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부처님을 알 아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은 부처 님이 거룩하고 위대한 모습을 띠고 우리들 앞에 오리라는 편견 속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들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러한 모습들의 진실을 파악하고 반야를 가질 때, 저절로 우리들 앞에 다가서게 된다고 <금강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금강경>에는 유명한 사구게라는 것이 있다. 짤막한 게송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는 뜻 에서 사구게라고 이름 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약견제상의 비상이면 즉견여래니라'하는 것도 사구게 가운데서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또 이것도 사구게 가운데 하나이다. 응무소주하여 의생기하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은 마치 선종에서 말하고 있는 화두와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즉, 앞뒤의 말이 모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을 낸다고 하는 것은 어디엔가 그 마음이 가서 들러붙는다는 말이다. 움직일 생각이 있으므로 행동으로써 그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머물지는 않되 그 마음을 내라고 하였으므로 모순이 되는 가르침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고래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마음속에 번뇌가 없는 마음. 티끌이 없는 마음 쉽게 말해서 조금도 하자가 없는 경지를 증득하도록 노력하는 삶의 태도라고 이해해 오고 있다. 즉,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 이것은 해도 한 바가 없고 하려 해도 실체가 없는 지극히 이상적인 행동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쉽게 생각해보자. 남에게 뭔가를 베푼다고 하자. 자기의 피와 땀으로 얻은 것을 남에게 다시 베푸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베품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 베풀고 난 뒤 그것에 대해 아까워하고 후회한다면 베풀지 아니함만 못할 것이다. 또 주기는 주되 그준 것을 장사 속셈으로 내놓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만큼 주었으니 얼마만큼 돌아오지 않겠는가하고 기대한다면 이것은 결코 보시가 아닐 것이다. 또 준 것을 자랑삼는 경우 이 또한 진정한 보시가 아닐 것이다.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야 한다. 바로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래를 모습으로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과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논리의 백미가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요약되고 있다
"수보리야,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법이 있는가?"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질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팔만 사천 법문을 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설한 법이 있는지를 새삼스레 묻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가 세존께 대답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이 기묘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표면적으로 이해해 보자.
만약에 부처님의 말한 바가 있고 부처님이 건진 중생이 있고, 부처님이 우리들을 위해 무엇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부처님도 아상을 가진 것이 된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므로......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부처님에 의해서 구제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의뢰심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부처님이 표면적으로 질문한 것은 '내가 말한 것에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 수보리는 그 부처님 질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여 대답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하였던 것이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라고
착한 일을 했다고 하자. 그러나 만약 그 착한 일을 했다는 자만심에 싸여 있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우리들 마음 속에는 착한 것과 악한 것이라고 하는 이분법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흑백의 논리 속에서는 절대로 안정과 평화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흑백의 논리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착한 일을 했을지라도 착한 일을 했다는 증거는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에서는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장려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악한 일을 해도 자취를 남기지 않으면 악한 일을 해도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착한 일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 하물며 악한 일에 집착할 것인가? 이것은 이미 논외의 것이라는 점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은 허망한 외부세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그대의 마음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과 객관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대립으로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들 중생의 삶이란 끊임없는 주관과 객관의 만남이다. '나'라로 하는 주관이 있으므로 객관을 만난다. 그래서 우리들은 객관 뿐만 아니라 주관도 실체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우상의 형태를 말하면서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종족의 우상 등을 말한다. 그는 우리들이 갖기 쉬운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언어 자체에 어떤 절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의 마음도 물과 같아서 고정적이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 자체에 절대성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평생을 해로한다는 것을 미덕으로 삼지만 보다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기가 던져놓은 말의 굴레에 자기 스스로가 속박된 것일 수도 있다. 자승자박인 것이다. 그 속마음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허망한 외부 객관대상의 절대성을 인정할 수 없다. 동시에 나의 내면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므로 주관 또한 공이 아닐 수 없다. 주관과 객관의 양자가 모두 공인데도 불구하고 이 주관과 객관에 영원한 어떤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한다. 바로 이 점을 <금 강경>은 지적하고 있다.
예부터 이 <금강경>은 죽음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같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금강경>의 가르침을 보탑 형태로 만들어 놓은 붉은 종이에 붉은 색으 쓰여 진 금강경보탑이라는 것을 망자와 함께 넣어서 시신을 다비하는 장례 기법도 있다. 또 불교적인 장례의식 속에서는 <아미타경>과 더불어 <금강경>을 많이 독송하는 습속이 있다. 특히 나중에 발달된 선종의 이론이 풍미했을 때 선종의 세계에서 제시하는 것이 이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한국의 선종에서는 <육조단경과 더불어 이 <금강경>이 가장 폭넓게 수용되고 많은 이들에게 선호되었던 것이다.
첫댓글 탐진치, 육도윤회, 12연기 - 그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의 자아형성과정
자아에 대한 집착은 블랙홀이다. 나를 무명처럼 검게 하고 주위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시공간을 휘게 한다. 환세계(차안, 마야)의 번뇌와 무지에서 벗어나 진세계(도피안)으로 가야 한다. 번뇌, 망상, 집착을 유보하고 버리면 곧 열반이고 극락이다.불국토가 물리적으로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내 마음이 지옥이고 열반이다.
심즉시불(心卽是佛),불즉시심(佛卽是心)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다.마음 밖에 따로 도를 구할 필요가 없다. 깨달으면 혹은 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을 버리면 지금, 여기가 부처고 불국토다.
여기가 부처의 자리다.
'여기'는 '이 육체만이 나'라는 제한된 시각이 아니라 '전체가 나'라는 확장된 시각에서의 여기이다.
즉 '나=전체'이기에 '여기=전체'가 된다.
마치 이 '육체만이 나'라는 기준에서는 '여기'가 내가 서 있는 자리만을 가리키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