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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간첩의 조선 정탐록(朝鮮偵探錄)
- 조선(朝鮮)의 실상 -
"일본 간첩(日本 間諜)의 조선정탐록(朝鮮偵探錄)"
'조선(朝鮮) 잡기'의 사료적 가치(史料的 價値)
일본인들에게 '조선(朝鮮)의 이미지'를 심어준 책(冊).
1893년 일본(日本)의 공무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는
조선(朝鮮)땅에 세작(간첩) 임무를 띠고 파견(派遣)되어
조선 전국(朝鮮 全國)을 돌면서 정탐(偵探)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모아 1894년에 신문(新聞)에 연재(連載)하고
다시 한권의 책(冊)으로 묶어서 간행(刊行)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朝鮮) 잡기'라는 책(冊)이었다.
책 내용을 보면 당시 조선(朝鮮)의
무능(無能)함+낙후(落後)함+불결(不潔)함
+부패(腐敗)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료적 가치(史料的 價値)는 상당한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이 책 내용이 향후 일본인(日本人)들에게
조선(朝鮮)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지대(地帶)한 공헌(貢獻)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알면 유용(有用)하다.)
몇 가지 인상깊은 내용(內容)을 뽑아봤다.
🕹조선(朝鮮)은 어떤 나라인가?
01. 언어(言語)와 문장(文章)
언어(言語)는 전국(全國) 모두가 같다.
다만 지역(地域)에 따라
억양(抑揚)과 사투리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일본(日本)과 비교(比較)하면
사투리의 지역(地域) 차이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가령 함경도(咸鏡道) 사람과 전라도(全羅道) 사람이
상봉(相逢)하더라도 가고시마 일본 남부(南部)와
이와테 일본 북부(北部) 사람이 상봉하는 것처럼
기이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02. 한글의 교묘(巧妙)함
'언문(諺文)'이란
훈민정음 곧 조선(朝鮮)의 문자(文字)를 말한다.
교묘(巧妙)한 것은 서양(西洋)의 알파벳을 능가한다.
조선인(朝鮮人)들은 실로
이와 같이 교묘(巧妙)한 문자(文字)를 가지고,
왜 고생스럽게 일상의 서간문(書簡文)에까지
어려운 한문(漢文)을 사용하는지 의문이다.
이와 같이 교묘(巧妙)한 문자(文字)도 겨우
중하층 사회(中下層 社會)에서나 사용될 뿐이다.
03. 가야(伽倻)라는 국호(國號)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수로왕(首露王)이 도읍(都邑)한 땅으로
국호(國號)를 '가락(駕洛)' 이라고 부르고, 대가야 (大伽倻),
소가야(小伽倻), 고령가야(高靈伽倻) 등의 5가야를 지배했었다.
바다를 낀 이 지역은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진구 황후(皇后)가 삼한(三韓)을 정벌(征伐)하기 위해
보낸 군대(軍隊)는 틀림없이 여기에 상륙했을 것이다.
가락(駕洛)은 곧'가라(伽羅)'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外國)을 가리켜
'가라(伽羅)'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기원했을 것이다.
04. 독립(獨立)한 적이 드물다.
일본(日本) 사람들은 흔히 조선(朝鮮)은
지금 비록 쇠미해지기는 했지만 4천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로서 경외(敬畏)시 한다.
하지만 실상(實狀)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문물(文物), 제도(制度), 기계(機械), 공예(工藝)
하나같이 사람의 시선을 끌만한 것이 없다.
거의 아프리카 오지 탐험을 연상시키게 한다.
조선역사 (朝鮮歷史)를 탐독해봐도 그렇다.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지금까지
줄곧 다른 나라에 속박(束縛)되고
상대(相對)하지 않았던 시절(時節)이 드물다.
진정으로 독립(獨立)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05. 대(大)·중(中)·소화(華)사상(思想)
조선(朝鮮)의 선비는
중국(中國)을 항상 '중화(中華)'라고 말하고
스스로는 '소화(小華)'라고 부른다.
그런 조선(朝鮮)사람들은 나에게도 묻는다.
조선인(朝鮮人)
"일본(日本)은 어떻게 부르는지?"
혼마
"대화(大和)" 이렇게 말하면 곧 나를 꾸짖는다.
조선인(朝鮮人)
"이런 오만방자(傲慢放恣)한 지고"
하지만 오만(傲慢)하여 자랑하는 것과
비루하여 주눅든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그들은 이렇게 박식(博識)한 척 하면서 설명한다.
조선인(朝鮮人)
"중국(中國)을 중화(中華)라고 칭하는 것은
대중소(大中小)의 뜻이 아니라,
가운데 위치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임."
그렇게 책망(責望)하면 나도 한마디 한다.
혼마
"그렇다면 조선(朝鮮)은 왜 소화(小華)를 칭하는가?"
그러면 조선(朝鮮)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못한다.
06. 기후(氣候)
조선(朝鮮)은 일본(日本)과 위도(緯度)가 같다.
그러나 강수량(降水量)은 대개 일본보다는 적다.
그리고 무척이나 춥다.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지역(地域)은
일본(日本)과 비슷한 기후(氣候)를 느낄 수 있지만
충청도(忠淸道) 위쪽으로 가면
기후(氣候)가 변하여 급격히 추위를 느끼게 된다.
겨울이면 경셩(서울)은 도로가 얼어서
봄에 얼음이 풀리는 때에
가옥(家屋)이 경사지는 경우도 매우 많다.
🕹조선인(朝鮮人)들의 기질(氣質)
07. 무사태평(無事泰平) : 느려터진 사회(社會)
일본의 목수라면 반나절 걸려서 할 수 있는 일은
조선의 목수는 3,4일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시간(時間)에 쫓기는 바쁜 삶이 없기 때문이다.
느리게 살아가는 것은 책망할 일은 아니지만,
외국인(外國人)들이 보기에
분명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08. 매운 음식(飮食)
조선(朝鮮)사람들은 매운 것을 좋아한다.
생선(生鮮)국, 된장국 등을 조리하는데,
모두 고추 혹은 고춧가루를 넣는다.
어린 아이들은 생강(生薑) 혹은 무를 씹어,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데
마치 일본 아이가 사탕을 먹는 것과 같았다.
타고난 취향이라고 해도 자못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09. 싸움
조선(朝鮮)사람들은 작은 일로 싸움을 시작하면
서로 마음이 격앙(激昻) 되어 입에 거품을 물고
설전(舌戰)하는 것도 잠시, 서로 갓을 벗고
상투(上頭)를 잡아 댕기며 한바탕 육박전을 치른다.
하지만 크게 치고 박고 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은 언제나 옷이 찢어지고
그러면 옷값을 물어내라고 하는 수순이다.
10. 담배 사랑
조선(朝鮮)사람들은 담배를 매우 좋아한다.
3척(尺)(90cm)이나 되는 담뱃대를
걸어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앉아서 누워서,
일을 쉬거나 침묵하는 사이에도 손에서 놓는 일이 없다.
심지어 목욕탕(沐浴湯)에서도 그런다.
일본인(日本人) 거류지(居留地)에
목욕하러 오는 조선인(朝鮮人)들이 있는데
이들은 탕안에 들어가서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신분제 사회(身分制 社會)
11. 예의(禮儀)가 바른 나라?
조선과 같이 계급사회(階級社會)의 나라에서는
언어(言語)와 행동(行動)에도 자연히 계급이 있다.
예를 들면 '오라'라는 말에도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의 사용법이 있다.
이리 오너라 :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
이리 오시요 : 같은 무리에게 하는 말
이리 오십시요 : 높은 사람에게 하는 말
이런 계급사회의 모습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상민(常民)들은 양반(兩班)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고
앉으라는 명을 받지 못하면 앉을 수도 없고
도로변에서 이름 모를 양반(兩班)이라도 걸어가면
담배를 뒤로 감추고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일본 사람들은, 조선을 흔히 '예의(禮儀)의
나라'라고 하지만 실은 '계급(階級)의 나라'였다.
12. 노예제도(奴隸制度) : 노비(奴婢)
조선의 사정을 깊이 조사할 때 실로 놀랄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의 노예제도(奴隸制度)다.
조선(朝鮮)에서는 양반(兩班)이라면
모두 '노비(奴婢)'라는 노예(奴隸)를 데리고 있었다.
이들은 봉급을 받고 노예(종)가 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된 경우다.
그렇게 노비(奴婢, 종)가 되면 자자손손 영구히
주인(主人)집의 노예(奴隸)가 되어야 하고,
평생을 가축(家畜)처럼 시키는 일만을 해야 했다.
이들은 평생 주인에게 묶인 신세가 되고
장가를 가도, 자식을 결혼시켜도
자기 의사대로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하거나, 쉬거나, 말하거나 하는 일까지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계속해서 먹을 수도 없다.
추워도 옷을 껴입을 수가 없다.
만사를 주인(主人)의 명령(命令)을 따라야만 했다.
13. 양반(兩班)
양반(兩班)이 소일하는 모양은 실로 한가해 보인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만 담뱃대를 물고 방에 누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재산가(財産家)의 대부분은 양반(兩班)들이다.
재산가(財産家)들은 대개 관리(官吏)가 되어
서민들로부터 강압적으로 거둬들이기 때문이다.
조선 속담에는,
관리가 되면 3대가 앉아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관리 중에서 가장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지방관(地方官) 수령(首領)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관료(官僚)가 된 자(者)들은
지방관(地方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14. 양반(兩班) 여자(女子)들의 진찰(診察)
조선(朝鮮)에서는 양반가(兩班家) 부인(婦人)이
병(病)에 걸려 진찰(診察)을 받는다 해도
얼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얼굴을 뒤집어쓰고 손을 내밀어 겨우 진맥을 보게 한다.
🕹부패(腐敗)한 관료(官僚)와 행정(行政)시스템
15. 관리(官吏)
양반은 과거(科擧)를 통과하면 어떠한 관직도
살 수 있는 것이 조선(朝鮮)의 제도(制度)이다.
하지만 관직(官職)을 가진 자들은
대부분 어리석고 몽매한 자가 많았는데,
지방관(地方官) 수령(首領)들과 필담(筆談)을 통해
대화를 나눠보면, 고루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은 둘째 치고 이들은 제대로 한자(漢字)도 몰랐다.
사실 조선(朝鮮)의 과거(科擧) 시험장(試驗場)은
공공연한 뇌물 수뢰(賂物 受賂)의 장소였으니,
급제해도 뇌물을 쓰지 않으면 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16. 지방관(地方官)
지방관(地方官)의 임기는 3년을 만기로 삼지만
재임을 원하면 정부에 돈을 내고 관직을 사기도 한다.
이때 수령(首領) 군수(郡守)는 3천냥 정도
관찰사(觀察使) 도지사(道知事)는 1만 냥의 돈이 필요했다
17. 관리(官吏)는 모두 도적(盜賊)
조선(朝鮮)의 관리(官吏)는
마음대로 백성의 재화(財貨)를 빼앗는데,
그 정도가 도둑보다 더 할 정도다.
18. 무관(武官)
무관(武官)들은 단지 그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병법서(兵法書)를 읽지도 못한다.
무예(武藝)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작자들이
정부(政府)에 돈을 내고 임용을 받는 것이다.
이들은 첨사(僉使), 수사, 병사(兵士),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으로 불리지만
훌륭한 관직명(官職名)만 있을 뿐
전혀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리들이 아니다.
19. 병사(兵士)
조선(朝鮮)의 병사(兵士 들은 무뢰한(無賴漢)을 모아
봉급을 주고 흑색의 목면(木棉, 무명)옷을 입게 한 것이다.
이들 무뢰배(無賴輩)는 품삯 목적으로 병사가 된 것이다.
본래(本來) 국가(國家)를 지키려는 뜻은 전혀 없다.
게다가 병사는 조선사회에서 지위가 낮은 자들이다.
만약(萬若) 전쟁(戰爭)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자랑스럽게 말한다.
병졸(兵卒)
"전쟁(戰爭) 나면? 얼른 총 버리고 군복도 벗어야지.
민간인처럼 하고 있으면 적병들도 죽이지 않겠지."
상황(狀況)이 이랬으니, 이들은 도박 자금이
모자라면 흔히 가지고 있던 총을 저당잡혔다.
정부는 이런 병사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할 때면,
이들 무리로 하여금 부잣집을 약탈하는 것도
묵인해주기도 했는데,
경성(京城)안에 겨울철 도적(盜賊)이 많은 것은
정부(政府)가 겨울 봉급(俸給)을 병사(兵士)에게
주지 않는 것이 한 원인이었다.
20. 무예(武藝)
조선(朝鮮)의 무예(武藝)중에는
현재 존재하는 것은 궁술(弓術)뿐이다.
칼과 창이 없지는 않지만,
그걸 연습하려는 사람들은 없다.
🕹사법(司法) 제도(制度)
21. 감옥(監獄)
죄인(罪人)은
감옥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 한 푼 없는 자는
감옥(監獄)에서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반면에 뇌물(賂物)을 바치는 경우에는
어떠한 큰 죄(罪)라도 쉽게 방면(放免)된다.
22. 형벌(刑罰)
조선(朝鮮)의 형벌(刑罰)은 하나같이 관리의 뜻에 따라
임의적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며
전국에 똑같이 적용되는 일정한 형벌(刑罰)이 없다.
23. 대리(代理) 변제(辨濟)
조선(朝鮮)에서는 빚을 갚지 못할 때에는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대신하여
빚을 갚는 것을 의무로 하고 있다.
만일 형제(兄弟), 부자(父子)가 대신갚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 9족(族) 중의 한 사람에게
대신 변상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친척(親戚)중에 한 사람이라도
도박(賭博)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이것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큰 피해(被害)를 입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일본(日本)의 채권자(債權者)들은
조선(朝鮮)의 이런 습관(習慣)을 이용해서
대금(貸金)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조선인(朝鮮人)들 중에는
점차 이런 관습의 부조리를 깨닫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경상도(慶尙道) 밀양 부사(密陽 府使) 등은
일본인(日本人)의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조선인(朝鮮人)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때문에 일본(日本)의 채권자(債權者)들은
빚을 받지 못하는 피해를 보고 있다.
🕹 기이(奇異)한 풍속(風俗)
24. 조혼(早婚)
조선(朝鮮)에서 가장 기이한 풍속(風俗)은
조혼(早婚)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자들은 12,3세의 나이로 장가를 간다.
그리고 부인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고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12,3세 짜리가 20세 전후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조선(朝鮮)에서는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린 남녀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조선(朝鮮)의 인구가 매해 감소하는 원인은
여기에 있을지도... (실제로 1세기 이전보다
인구가 100만 명 가량 줄어 들었다.
25. 처(妻)를 손님에게 내 놓는다.
조선에서는 돈만 주면 처첩(妻妾)으로 하여금
손님의 머리맡에서 시중을 들게 한다.
이것은 남편(男便)과 상의한 뒤의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日本)사람들 중에는
조선(朝鮮)에 오래 머문 상인들의 경우,
이런 추(醜)한 풍속을 배워서
자신의 마누라에게 강요하는 자들도 있다.
26. 전염병(傳染病) 환자(患者)
여름에 야외(野外)를 걷다 보면,
곳곳에 초막(草幕)을 짓고 수척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염병(傳染病)에 걸려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조선에서는 역병(疫病)을 죽을병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치유된 사람을 요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병(病)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가족을 전염(傳染)시키는 것을 걱정하여,
야외의 작은 집에 옮겨 놓는 것이다.
물론 약(藥)을 주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버려서 죽이는 것과 진배없었다.
27. 천연두(天然痘)로 죽은 아이의 장례식(葬禮式)
아이가 천연두(天然痘)로 죽을 때는
그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가마니에 넣어서
새끼로 가로 세로로 묶어 야외 나무에 매달았다.
그렇게 하면 삼복(三伏) 더위에는
시신이 부패하여 썩은 액체가 지상에 떨어지고,
악취가 끝없이 사방에 흩어져서 코를 찌른다.
그리고 시신이 모두 썩어 백골이 되면
뼈를 추려서 땅에 매장했다.
이런 풍속(風俗)은 특히 한반도 남쪽의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마마신이 찬바람을 맞고
떠나가라는 의미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
🕹조선인(朝鮮人)들의 의복문화(衣服文化)
28. 한복(韓服)의 아름다움
조선(朝鮮)의 한복(韓服)은 정말로 아름답다.
조선 한복(朝鮮 韓服)의 풍치는
가히 세계 으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소매는 길고 갓은 크고,
불편한데 있어서도 세계 으뜸일 것이다.
조선 사람의 거동이 우유부단하여 활발하지
못한 원인은 이 세계 으뜸의 의복을 입는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옷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이 사는 집은,
개집과 돼지우리의 수준과 같다 하겠다.
29. 두루 주머니
조선인(朝鮮人)은 허리 주위에 반드시
2,3개의 주머니를 항상 늘어뜨리고 있다.
주머니는 담배를 넣는 것,
도박 도구(賭博 道具)를 넣는 것,
거울을 넣는 것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들은 용모(容貌)를 꾸미는 버릇이 심해서
시간만 있으면 수시로 거울을 보고 수염을 다듬었다.
30. 모자(帽子)를 쓰지 않으면 벌금형(罰金刑)
조선(朝鮮)에서 모자는 필수품(必需品)이다.
계급(階級)과 직책(職責)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경성(京城)에 있는 일본인들은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모자(帽子)를 써야만 했다.
만약 이를 어기면 벌금(罰金) 50전(錢)을 내야했다.
대신에 길에서 노상방뇨(路上放尿)해도 벌금같은 건 없다.
31. 우산(雨傘)
조선(朝鮮)에는 원래 우산(雨傘)이 없었다.
일본(日本)을 통해 보급(補給)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우산(雨傘)을 가진 자는
10명 중 한두 사람 정도로 대개는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朝鮮) 사람들은 비가 내릴 때는
갓 위에 기름종이로 만든 덮개를 붙여서
비를 막고 옷은 그냥 젖은 채로 걸어 다닌다.
32. 부녀자(婦女子)의 기호(記號)
양반(兩班) 부녀자(婦女子)는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습때문에,
의복(衣服) 장식품(裝飾品)등을 조달하는 것에도
항상 모두 하인에게 구해 오도록 시킨다.
그런데 부녀자에게도 엄연히 기호(嗜好)가 있다.
하인(下人)의 기호(嗜好)를 어떻게
부녀자의 기호(嗜好)에 맞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물건을 사는 것은 일체 남자에 맡기게 되니
조선(朝鮮)의 부녀자는 남자의 생각 안에서
그 기호(嗜好)를 만족시킬 수밖에 없다.
33. 모자(帽子)만드는 기술(技術)
조선(朝鮮)의 미술품(美術品)중에는
전혀 감복할만한 것이 없지만
삿갓이나 관 등을 말꼬리로 짜는 것을 보면
그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감탄하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거미가
거미집을 만드는 것 같이 섬세하다."
34. 빨래
개울가에 나가면
옷을 빨래하는 여인(女人) 네들이 많은데
물에 담군 옷을 평평한 돌 위에 놓고
한자 정도되는 막대기로 두들겨서 때를 없앤다.
이렇게 하면 옷감이 상하기 십상이지만
때는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
🕹조선인(朝鮮人)들의 식생활(食生活)
35. 풀
기근(飢饉)이나 흉년(凶年)에 대처하는 것을
배우려고 하면 조선(朝鮮)으로 와야 한다.
이들의 식탁(食卓)에는
야외 풀잎의 대부분이 반찬(飯饌)으로 올라온다.
36. 남은 음식(飮食)을 탐(貪)하는 자(者)
한 주막(酒幕)에 머물렀을 때였다.
주모(酒母)는 나의 돈 주머니가
무거운 것을 보고 좋은 손님이라 생각했는지,
저녁상을 한 상 가득히 차려왔다.
이윽고 내가 저녁밥을 들었을 때,
어떤 남자(男子) 하나가 다가왔다.
주인은 그의 모습을 보자, 퉁명스럽게 얘기를 한다.
주모(酒母)
"여기 무슨 용무(用務)가 있어서 왔어? 썩 돌아가."
그러자 남자(男子)가 말했다.
남자(男子)
"나 일본(日本)사람 구경하려고 왔어."
주모(酒母)
"네가 남은 음식때문에 왔다는 거 모를 줄 알고?"
이 말을 듣고 나는 설마 그러겠는가! 했다.
그래서 주인의 말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진짜로 그 남자(男子)는
남은 음식(飮食)을 먹으려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주인(主人)은 그걸 주기 아까워서
그자를 그토록 나무랐던 것이다.
37. 구더기 낀 상어고기
상어의 지느러미는
중국인(中國人)의 기호품(嗜好品)으로서
그 가치(價値)가 매우 귀하다.
다만 상어잡이는 지느러미만 취(取)하고
고기는 바다 가운데로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어느 날 한 일본(日本) 상인(商人)은
이렇게 버리는 몸통이 아깝다고 해서
몸통을 조선(朝鮮)에 팔아볼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상어 몸통을 소금에 절였다.
그리고 부산(釜山)을 향해 출발했는데
때마침 초여름 이었는데 2,3일 지나지 않아
고기는 부패(腐敗)하고, 이상한 냄새가
배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와 4,5일 후에는
구더기가 끓어서 거의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부산(釜山)에 도착하면
콜레라의 매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겨우 가져왔는데
중도에 버리기도 그래서,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낙동강(洛東江) 하구(河口)를
거슬러 올라가서 고기를 팔만한 곳을 물색했다.
그래서 한 마을을 발견하고 상어를 팔아보기로 했다.
한동안 배 밑바닥에 닫아 두었던 상어고기를 꺼내서
해안(海岸)에 운반했는데 냄새가 코를 찌르고,
구더기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지만
고기는 그다지 변(變)하지 않았다.
마침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와서 사가기를 원했다.
한 근에 얼마씩이라고 하면, 그들은 가격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으면서도 크다, 작다만 평했다.
냄새나 구더기 신경쓰는 조선인들은 전혀 없었다.
그러더니 곧 고기는 몽땅 동이 나버리고
일본 상인들은 뜻하지 않게 돈을 챙길 수 있었다.
38. 개
조선인(朝鮮人)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집집마다 기르는 개들은
전적으로 고기를 먹기 위해서였다.
한 마리의 가격(價格)은
일본(日本) 통화(通貨)로 30~40전이었으니
귀한 손님이나 좋은 일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잡지 않았다.
마치 일본 사람이 닭이나 돼지를 잡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조선(朝鮮)의 개는
기본적으로 인분(人糞)을 먹고 연명(延命)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똥을 싸면 개를 불러
혀로 항문(肛門)을 핥게 만들었는데
그리고 개가 핥고, 나면 깨끗해졌다 하여,
그냥 아이의 바지를 입혔다.
🕹조선(朝鮮)의 상업활동(商業活動)
39. 지폐(紙幣)에 대한 평가(評價)
공방전 엽전(葉錢)외에
통화(通貨)가 없는 나라 사람의 생각은 황당했다.
조선인들은 지폐(紙幣)를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게 돈이라고?
면직물에 붙인 인쇄물이 전부인데?"
"우리 속이려고 하는 거 아님?"
"만약 이런 걸. 돈이라고 가지고 다니면
도적(盜賊)들한테 엄청 빼앗길 걸."
40. 조선(朝鮮)의 통화(通貨): 당오전(當五錢)의 현실
현재 조선(朝鮮)에서 통용되는 화폐(貨幣)는
상평전(上平錢)과 당오전(當五錢) 두 종류가 있다.
모두 공방전 엽전(葉錢)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상평전(上平錢) 5개의 가치를 지녔던
당오전(當五錢)은 지금은 그딴 거 없어졌다.
그냥 다 똑같은 엽전(葉錢)으로 취급되어
당오전(當五錢)은 이름만 있을 뿐 특별한 가치는 없었다.
▲ 구(舊)한말 만들어진 상평통보(常平通寶)와
당오전(當五錢): 사실(事實) 생긴 것도 같았다.
41. 인삼(人蔘)
인삼(人蔘)은 조선(朝鮮) 특유의 명산물(名産物)이다.
산지(産地)는 경기도(京畿道) 개성(開城),용인,
충청도(忠淸道) 괴산, 전라도(全羅道) 금산(金山) 등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개성 송도(開城 松都)의 인삼(人蔘)이다.
품질(品質)이 좋은 것은 가격(價格)도 비쌌다.
그런데 조선에서 인삼밭을 가진 자는 반드시 부자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재배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삼(人蔘)을 재배하는 밭은 나무 울타리로
사방을 둘러싸고 함부로 사람이 출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리고 밭 주변에 작은 움막 원두막을 지어서
파수꾼을 두고 지키게 했다.
42. 시장(市場)
경성(京城),공주(公州),평양(平壤), 개성(開城) 등의
26대도시(大都市)의 시장(市場)은 나름 괜찮다.
해도 기타 소도시의 시장(市場)이라는 것은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지붕을 엮어 얹은
조잡한 가옥들이 2,30개씩 줄지어 선 형태가 전부다.
5일에 한 번씩 장(場)이 들어서는데,
5일 장날이 되면 가까운 곳에 있는 상인들이 모여서,
시장(市場)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팔려고 하는
물건(物件)을 진열(陳列)한다.
그리고 매매(賣買)는 대부분 돈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물건(物件)을 교환(交換)할 뿐인데,
그 모양이 마치 상고시대(上古時代)를 연상케 한다.
한편 장이 서는 날 외에는 바늘 한 개도
파는 곳이 없었으므로, 식용품부터 일용의 잡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날 사두지 않으면 안됐다.
때문에 장날에 비라도 내린다면
장(場)을 열 수 없게 되므로 큰 불편을 느끼게 된다.
43. 싸구려 물건(物件) 판매(販賣)
서양(西洋)의 상인(商人)들은,
일본(日本)은 싸구려 물건을 파는 나라라고 하여
일부러 일본 수준에 맞는 조악한 제품을 가져오곤 한다.
그런데 일본인(日本人)들도
조선(朝鮮)은 싸구려 물건만 판다고 하여
또 조선(朝鮮) 수준에 맞는 조악한 제품만을 가지고 온다.
44. 중국인(中國人)
조선팔도(朝鮮八道) 가는 곳마다, 시장(市場)에서
중국인(中國人)을 보지 않는 지역(地域)이 없다.
이런 중국 상인 (中國 商人)들이 파는 물품은
대략 바늘, 못, 댕기, 부싯돌, 성냥, 담뱃대 등이었다.
이들은 조선인(朝鮮人)들과 섞여서 시장(市場)에
점포(店鋪)를 펴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싼 옷을 입고 등으로 근검절약(勤儉節約)해서
나중에 귀국할 때는 큰돈을 벌어서 가게 된다.
하지만 일본(日本) 사람들은
쓸데없이 한탕주의(主義)에만 눈이 멀어,
평소에 이러한 행동을 조롱하고
또 중국인을 미천하게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 온 일본 상인들은
재산(財産)을 모으기는 커녕, 파산(破産)해서
빈털터리로 귀국(歸國)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中國人)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45. 조선(朝鮮)에서는 자본(資本)이 필요하지 않다.
일본(日本)에서 사업(事業)을 하려면
커다란 자본(資本)은 필수적(必需的)이다.
하지만 조선(朝鮮)은 빈약(貧弱)한 나라다.
자본을 써서 사업을 영위할만한 나라가 아니다.
큰 돈을 가지고 와봤자 그걸 쓸 방도가 없다.
요컨대 조선은 돈 없는 자라면 한번 도전해볼 곳이다.
중국인(中國人)들만 봐도 한 푼의 자본도 없이 와서
거액의 재산(財産)을 얻어 귀국하는 자들이 많다.
46. 우물 안의 개구리
경성(京城)에 있는 영국(英國) 영사관(領事館)의
고용인 최모 씨가 일찍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崔)씨
"영국인(英國人)들은 하루 50냥씩의 담배를 피우더라.
50냥이면 일가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밑천인데
그 교만(驕慢)과 사치(奢侈)를 생각하면
영국(英國)이라는 나라는 곧 망하게 될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서 거친 식사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형편의 조선인이
지금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계수나무를 장작으로 때고
옥(玉)으로 밥을 짓고 있는 부자(富者) 나라
영국(英國)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하루 50냥의 담배 값을 가지고
교만(驕慢)과 사치(奢侈)의 극치(極致)라니
우물 안의 어리석은 개구리는 참으로 막막하다.
🕹 조선(朝鮮) 여행(旅行)
47. 여름 여행(旅行)
방 안에는 빈대, 모기, 이, 벼룩이 많아서
도저히 실내(室內)에서 잠을 잘 수 없다.
여름에는 객사(客舍)의 주인(主人)도
실내로 안내하지 않고 안에 있는 정원(庭園)
혹은 길 위에 돗자리를 깔고 목침을 가지고 와서
그 위에서 자게 한다.
그래도 벌레들은 여러 무리가 되어
공격(攻擊)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마른 풀을 태워서
모기를 쫓아내면 모기가 모이지 않지만
사람들도 연기를 마시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점점 연기(煙氣)가 없어지는 것이 느껴지면
머지않아 모기떼가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친다.
특히 빈대는 한번 물면 일주일 내내 아프다.
48. 선착장(船着場)
조선(朝鮮)의 강(江)에는 대개 교량(橋梁)이 없다.
배로 건너가거나 배가 없을 때는
그냥 옷을 벗고 헤엄쳐가는 수밖에 없다.
49. 요리점(料理店)과 여관(旅館)
조선(朝鮮)에 가보지 않는 사람들은
조선(朝鮮)에도 일본(日本)과 같은 요리점(料理店),
여관(旅館)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의 요리점도 여관도 이름뿐이고,
차라리 없다고 해도 거의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요리점(料理店)이라고 하는 것은
'주막(酒幕)' 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여기에는 따로 '손님방'이라는 것이 없다.
대충 한방에 마부, 가마꾼, 여행객 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음식(飮食)을 먹는 것이다.
🕹 주막(酒幕).
여관(旅館)이 없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싸구려 여인숙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여관(旅館)은 음식값을 받을 뿐이고
그 외에는 숙박료(宿泊料)를 요구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둥근 된장(메주)을 천정에
매달아 두는 집도 있어서 그 냄새가 매우 심하여
집안에 들어가면 곧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두통(頭痛)이 일어날 때도 있다.
또 조선(朝鮮)사람은 담배를 좋아해서
여관(旅館)의 실내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도
문(門)을 열어 환기(換氣)시키려 하지 않는다.
옆으로 누워 있는 자, 앉아 있는 자, 잠자는 자,
깨어 있는 자, 방귀를 뀌는 자,이를 가는 자,
한방에 십수명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누워있다.
이 모양을 보면, 차라리 야외에서 노숙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될 정도다.
조금의 결벽증(潔癖症)이라도 있는 자는
잠시도 여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다.
50. 길옆의 부뚜막
조선(朝鮮)을 여행(旅行)하는 사람은
반드시 길 옆에 돌을 쌓고, 불을 때서
그슬린 흔적이 나는 작은 부뚜막을 보게 된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여행객(旅行客)이
스스로 밥을 지어서 식사(食事)를 한 흔적이다.
조선(朝鮮)의 가난한 여행객(旅行客)은
흙으로 만든 작은 솥을 지고,
쌀을 사서 스스로 밥을 짓고,
되도록이면 여관에서 식사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순박한 풍조(風潮)가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이다.
51. 불결(不潔)함
불결(不潔)함은 조선(朝鮮)의 명물(名物)이다.
경성(京城)은 말할 것도 없고,
팔도(8道)가는 곳마다 도시다운 도시를 볼 수가 없다.
거리에는 가축의 배설물과 인분이 가득 차있고
그 불결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시장(市場)의 중앙에 공동변소(共同便所)를 설치했지만
그것은 짚으로 지붕을 엮고, 거적을 두른 조잡한 것인데
그 똥을 받아 먹으려 개와 돼지를 길러 사람이 들어가면
옆에서 기다렸다가 인분(人糞)이 나오면 받아먹는데,
그 모습(模襲)을 보면 거의 구토(嘔吐)를 하게 된다.
음식물의 불결함 역시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썩은 생선과 야채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음식물(飮食物)을 조리하는 모양을 볼 때는 어떠한
호걸이라 해도 수저를 드는데 있어 주저할 수밖에 없다.
요리하는 자는 도중에 간을 보는데
자신의 입 속에 들어간 숟가락으로 계속 간을 본다.
젓가락 같은 것은 오랫동안 거의 씻은 일이 없고
콧물을 닦은 손으로 김치 항아리를 젓는 등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방안에 들어가면 벽은 누런색으로
닿으면 의복(衣服)이 더러워지고
지붕 밑에 진흙을 바른 천정은 낮아서
하품을 하면 목이 지붕에 닿을 정도다.
넓은 방이라고 해도 크기는 3평(坪) 정도이며,
좁은 방은 0.5평에도 미치지 못한다.
방안에 앉아있는 손님들은 만일 가래 뱉을 때는,
앉아 있던 멍석을 들고 그 아래에 뱉고,
콧물이 떨어질 때는 손을 비비고 바로 벽에 바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혀 불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객사(客舍)에 목욕탕(沐浴湯)이 없는 것 또한
더욱 여행자(旅行者)를 고통 스럽게 한다.
여름은 빈대와 모기가 매우 많아서
지친 몸에도 잠을 자기 힘들고
파리와 같은 것은 사시사철 실내에 날아다니고 있다.
객사(客舍)의 문은
작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 조선(朝鮮)의 열악(劣惡)한 인프라
52. 좁디? 좁은 도로(道路)
어느 날 경성(京城)의 길을
조선인(朝鮮人)에게 필담(筆談)으로 물었더니
조선인(朝鮮人)이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내가 찾아가려던 구포는
경성(京城)에서 큰 길과 접(接)한 곳이었다.
그러데 목적지 근처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작은 길 외에 큰 길은 보이지가 않았다.
혹시 잘못 들어왔나 싶어
샅샅이 뒤져보아도 결국 큰 길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조선인이 말한 큰 길이란
어쩌면 이 작은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과연 내 생각이 옳았다.
조선의 도로(道路)가 형편없다는 사실에
몹시도 놀라는 순간이었다.
일본(日本)의 역사(歷史)서에서는,
흔히 신라시대에 이미 백성(百姓)에게
우차법(牛車法)을 가르쳤다고 나와 있지만,
이런 논두렁 같은 도로를 어떻게 우차(牛車)가
통행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釜山)에서 경성(京城)까지의 도로는
모두 이와 비슷하다.
일본의 마을길 보다도 심하게 울퉁불퉁 하여,
군대(軍隊)는 일렬로 가지 않으면 통행이 어렵다.
오직 의주(義州)~경성(京城)에 이르는 길만
도로(道路)가 다소 정돈되고 사이즈도 넓어져,
군대(軍隊)의 2열 행군이 가능할 정도였는데
이는 중국(中國)과의 시대의 결과(結果)로서,
중국(中國) 사신(使臣)의 왕래(往來)길이라
다른 길보다 더 좋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53. 민둥산
조선의 산(山)은 대부분 민둥산으로 수목(樹木)이 없으며
조금만 가물어도 수원(水原)이 바로 말랐다.
이럴 때면 논밭이 갈라지고 벼 모시대종이 붉은색을
드러내어 백성(百姓)들이 고생하고 근심하게 되었다.
일본(日本)에서는 높은 땅을 관계하는 데는
수차(水車)를 이용(利用)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뭄을 쉽게 극복(克服)할 수 있지만,
조선에는 수차가 없어 겨우 물통으로 물을
퍼 올렸기 때문에 그 불편함은 실로 말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가뭄이 계속되어 거의 수확(收穫)이 없을 때
조선인(朝鮮人)은 아녀자(兒女子)를 부잣집이나
중국인(中國人)에게 팔아서 노비(奴婢)로 만들어서
겨우 쌀과 보리를 구(求)했다.
흉년에 백성들은 기근(飢饉)으로 고통을 받아
부잣집 문 앞에 가서 밥을 구걸하는 모습,
찢어진 옷에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뺨에 뼈가 튀어 나올 정도로 마른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걷는 모습은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하였다.
답답한 마음에 한번은 조선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혼마
"당신 나라의 산에는 왜 수목(樹木)을 심지 않는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答)했다.
조선인(朝鮮人)
"호랑이의 피해(被害)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애써 나무를 심지 않은 거임."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누가 봐도 빠져 나가려고 꾸며대는 말일 뿐이다.
54. 제방(堤防)
조선팔도 (朝鮮八道)의 하천(河川)은 평소에는
물이 적거나 완전히 말라버린 상태지만,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물의 양이 바로 불어난다.
비온 뒤 여러 날이 지나면 홍수(洪水)가 범람하는데
이때 홍수(洪水)로 밭이 잠기는 것을 염려해
조선 사람은 되도록 물가를 피해 경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방사업(堤防事業)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경작지(耕作地)가 있어도
종자(種子)를 뿌리고 묘를 심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부산(釜山)~구포(龜浦) 사이에 김해(金海)라는
낙동강(洛東江) 하류의 삼각주(三角洲)가 있는데
그 땅은 매우 비옥한 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미 한번을 쓸 수 없었다.
55. 공동체 정신(共同體 精神)의 부재(不在)
제방사업(堤防事業)에 한정되지 않더라도
무슨 사업에서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조선에서는 바랄 수가 없다.
도로가 수리되어 있지 않고, 위생적이지 못한 것도
공동체(共同體) 정신(精神)이 부족한 결과다.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개개인 소자본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도모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안동포(安東布), 화문석(花紋席),부채 등의 특이하고
우수한 산물(産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공급(供給)은 수요(需要)를 따라가지 못한다.
널리 해외(海外)에 판로를 열려는 의지가 없으며
상공업(商工業)은 여전히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이 기술한 위의 내용은 거의 모두 진실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은 10%, 상놈(노예)이 90% 시대이였다.
빌린돈을 갚지 못하면
평생 자자손손 임금도 못받는 노예로 전락한다.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학당을 만들고
교육시키고 사람답게 사는법을 가르쳤고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임금에게 청원하였고
상놈도 백정도 갓을 쓰도록 허락을 받아 주었다.
일본식민지 시대. 2차대전. 대한독립 등을 거치면서
한국이 개화되었고 양반. 상놈 제도도 페지되었다
이런 격변기를 통하여 한국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선교사의 교육도 받았다.
1883년생 고당 조만식 선생은 자서전에
상놈 노예로 살면서 주인 양반 집의 각방에서
아침에 나오는 요강을 깨끗이 씻어서
주인양반의 환심을 사서 주인양반이
비싼 학비를 대주면서 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그후 조선민주당 창당 및 평안남도 민민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장로교인으로 반공을 웨치다가
1950년. 소련 앞잡이 김일성에게 총살형을 당하셨다
우리는 실제로 위와 같은 시대와 환경을
직접 체험하였고 625전쟁 후에는 더 비참하게 살았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
산업화 대통령 민족의 영웅 박정희대통령에 의해서
가난을 극복하고 복지, 민주, 인권을 추구하게 된 것은
놀라운 변화다.
그러나 정의와 양심이 실종된 정신적 후진성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참다운 문명사회를 여는 작업은 건전한 인격을
추구하는 인성교육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이철세 /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