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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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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소통광장 Re:신라왕조세운 주역은 4세기에 남하한 훙노족?
金子 추천 0 조회 225 14.07.13 09:16 댓글 2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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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7.13 11:09

    첫댓글 전제:백인족과 혼혈화된 초원민족(스키타이)은 자신들은 늑대개의 후손들이라고 생각했다...고로 노랑개족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 14.07.13 11:10

    [KBS장한식 기자의 역사 추적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주장에 공감하며 인용한다]" 법흥왕이 숨지고 6년이 지난 진흥왕 6년 이사부와 거칠부 등 왕실 종친이 주축이 되어 꾸민 「國史(국사)」에 그 혐의를 둔다. 국사는 신라 金씨왕실의 정통성을 반석 위에 두고자 했던 일종의 통치이념서다.

    이런 책을 통해 신라 金씨 왕실은 하늘이 보낸 선택된 종족이며 신라 초기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다고 본다. 「國史」는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그 기록이 전해졌다고 볼 때 역사 날조의 증거들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

  • 14.07.13 11:12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엉성한 왕의 계보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모용씨≒金씨 세력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짐작되는 마지막 昔씨 임금이 흘해이사금이다.

    그는 아버지 昔于老(석우로)가 서기 249년에 죽고 61년이 지난 310년에 즉위하는데 그때부터 46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돼 있다. 昔于老가 살았을 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다』고 칭찬했다니 아버지 昔于老가 숨질 때 적어도 열 살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310년에 흘해는 70세쯤 됐을 것인데 46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 14.07.13 11:13

    "또 제3대왕과 14대 임금은 둘 다 儒理(유리), 또는 儒禮(유례)로 그 이름이 똑같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조차도 「두 임금의 이름이 같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정도다. 왜 그럴까? 국사를 편찬한 김씨 왕족이 자신들의 조상이 昔씨 왕실을 몰아낸 사실을 숨기려고 昔씨 임금으로 이어지는 계보 한가운데 미추왕을 끼워넣다 보니 이같은 엉성한 王曆(왕력)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즉 성씨를 모(용)씨에서 金씨로 바꾼 법흥왕이 숨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신라 金씨 왕실은 자신들의 뿌리를 감추는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작업」을 펼쳤으니 바로 국사의 편찬인 것이다. "

  • 14.07.13 11:16

    "이 때문에 (경주)金씨왕조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사실은 철저히 인멸됐을 것이다. 다만 중국의 몇몇 역사서와 경주에서 머리 떨어진 울진 봉평리의 돌비석 정도에서 김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단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법흥왕이 모(용)씨 성을 포기하고, 한나라의 흉노정벌 때 붙잡힌 흉노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가 한무제에게 하사받은 金이란 중국식 姓을 채택하면서 기마족의 신라통치는 막을 내렸다. 金씨왕들은 스스로를 기마족이 아닌 농경족의 임금으로 자리매김하고는 유교적 관료체제로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 14.07.13 11:17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

  • 14.07.13 11:20

    하지만 金씨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遺事(유사:책 이름)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 14.07.13 11:21

    "경주 땅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세력은 4세기 중반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金씨 왕족이란 것이 정설이다. 이 적석목곽분이 匈奴族(흉노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를 만든 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알게 해 주었다. 무덤 형식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출토물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가히 「騎馬文化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

  • 14.07.13 11:22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은 스키타이族과 흉노族 등의 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로 밝혀졌다.."

  • 14.07.13 20:50

    @나는나였다 동아시아 고대사는 매우 미묘해서 그 원류나 뿌리를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근거없는 추론을 정설이라 착각하면 당신같은 해석이 나오지.

    연대의 비정은 중국 한당의 주장을 가져오고...
    민족의 이동은 서양의 서방기원설을 차용하는 거지.
    그럼 당신같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유물가지고 짜집기 하지마라.

    당신의 지식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

    고대에서 말하는 흉노는 그 의미 자체가 동이, 즉 구이의 통칭이었고..
    한나라는 그 근원이 어딘지 조차 파악도 못하고 있다.
    (당연히 당시 조선이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했다.)

    그러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조용히 공부나 더 하길 바란다.

  • 14.07.14 00:37

    @타임로드 그리고 스스로 깨달으라..

    스스로의 정신상태가 근본모를 노랑개?가 아닌지를 말이다.

    내가 볼때..
    당신이 그토록 욕하는 노랑개가 서방과의 혼혈이라면....

    당신이 바로 노랑개?다.

  • 14.07.13 11:28

    종합분석: 4세기에 해당하는 무덤으로 경주에 초원민족의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쿠리간)을 남긴 주인은 4세기 고구려 정벌에 동원된 모용선비족의 용병 기마집단인 흉노족으로, 모용선비족에 흡수되면서 모씨로 성까지 바꾼 모용선비족의 귀족으로 편입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북부전선에서 대패한 후 동해안을 타고 경주까지 내려 온 모용선비 흉노기마집단은 사로국을 무너 뜨리고 신라왕조를 세운 후 성씨를 모씨에서 김일제가 한무제에게 하사받은 김씨로 바꾸고, 신라왕조혈통까지 박혁거세 왕족과 석탈해 왕족까지 계보를 잇는 혈통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기가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한 진흥왕 시기다.

  • 14.07.13 11:34

    왕조혈통 계보날조는 유럽으로 이주하여 헝가리를 세운 훈족도 기독교지역인 유럽에 동화되기 위해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초원민족이면서도 자신들의 조상을 기독경상의 니므롯으로 날조를 했고, 온조왕족을 통합하고 백제를 세운 부여의 구태집단도 온조왕조의 계보와 자신들의 계보를 잇는 왕조혈통작업을 했다. 그래서 신라시조를 박혁거세로 인식하고 있지만, 김춘추 아들 김인문의 비문에는 신라시조를 성한왕 투후로 기록하고 있고(모용선비 흉노족이지만, 김씨로 창씨개명한 후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김일제를 조상으로 인식하고 기록했을 것이다.), 중국문헌에는 백제시조를 온조가 아닌 구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14.07.13 11:35

    고로 김자처럼 그대로 믿는 자들은 매우 순진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왕조가 바뀌고 권력이 바뀌면 자신들의 허상과 열등감을 감추고 정통성을 세운답시고 날조하고 짜집기 하는 거 모르나?

  • 작성자 14.07.13 12:36

    개종자... 지식이 대단한 것처럼 나불거리는데... 본문의 틀을 깨봐라... 이건 주요인물들의 생몰 연도만을 삽입하여 찾은 진실이다... 모든 사서내용엔 위,변조가 있지만... 생몰 연도는 위,변조가 안된다... 위,변조를 하면 할아버지와 손자의 위상이 뒤죽박죽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4.07.13 17:00

    ㅎㅎ짝짝짝!... 개종자가 노랑개라고 헛소리를 지꺼리는 일이란... .^^

  • 14.07.15 22:05

    200년의 나이차는 20년으로 나누면 10세손 쯤 됩니다. 엤날일수록 조혼을 했는데 20세에 첫 아이를 생산한다고 계산하면 10세 쯤이 아닐까요? 물론 첫아이가 남자가 아닐수 있어도 대충 10세손? 아닐까요? 마리아는 14세에 첫 아이를 낳았다는 추측을 하는데..! 사실 이조 왕손들은 왕비를 아예 나이많은 처녀를 왕비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하긴 조선왕조 500년을 27대로 보면 500나누기 27은 약 19세?

  • 작성자 14.07.13 20:42

    ^^200년의 나이 차는 20년으로 치면 10대 차입니다만... 당시의 조혼 풍습이 오히려 부자 간의 나이 차를 늘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15세에 결혼한 아들이... 50세에 아들을 낳을 경우는 부자간의 나이 차가 50년이 되고... 17세에 아들을 낳으면 17년 차가 됩니다... 그래서 1대 평균을 30년으로 환산하는 것이 적절한 것입니다.^^

  • 작성자 14.07.13 20:48

    @金子 공교롭게도 제 선친과 저는 29세에 2세를 봤기에... 각각 29년 차입니다.^^

  • 14.07.15 22:12

    오! 그렇군요! 난 아들이 38 세에 손자를 봤는데...! 그러나 요즘의 세태는 그러하지만 성경에는 수백살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십살이라고 보면 맞을것이고 ,,,,! 옛날로 그슬러 올라 갈수록 수명이 잛았다고 생각되기에 결혼이 빠른것이지 않았나 생각되어서....! 조선 시대는 비교적 단명하고 어제본 tv에서 남미의 126세의 할머니 가족이 5대가 사는 모습을 보았는데 계산하면 25세 이더군요!! 그 할머니는 병원에 라고는 한번도 가지 않아도 아직도 정정 하더군요! 인간의 수명 한계는 125년 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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