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의 아파트를 나온 수혁이 찾아간곳은 인근의 술집이었다.
서울에 올라온후로 적당히 절제하며 살아왔건만....도저히 취하지않고는 견딜수없었다.
이제껏 꿈에서 그려왔던 은영의 모습은 간데없이....초췌한 얼굴에 남산만한 아랫배를
쓸어안고 뒤뚱뒤뚱 걸어가던 은영의 영상이 끊임없이 크로즈업되어지고있었다.
가슴을 더듬어 어머니 영희의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되뇌어보았다.
"어무이~~!! 인자 난 우째야 하는교? 우짜믄 좋겠능교....."
순간 걷잡을수없는 한줄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이적지 사는동안 수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하는 대상은 오직 한사람....
어머니 영희뿐이었다. 그러나...오늘은 은영때문에 울었다.
억수로 술을 마시고.... 억수로 취해서.... 탁자에 퍼질러 엎드린채....
나중엔 엉엉~ 소리까지내며 울었다.
그러나 처절하고 갈급한 눈물도 수혁에게 해답을 제시해주진 않았다.
다만....또 하나의 뼈아픈 진리를 불도장 처럼 가슴에 새겨넣어주었을뿐.....
항용 그렇듯이 사람이 사는 일이란.....
늘상 엇갈리는 이상과 현실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일이란것을....
수혁이 거짓말처럼 닥친 현실의 질곡속에서 몸부림치며 울던 그 시간!
민혁은 똑같은 사안에 대한 전혀 이질적인 고뇌로 술을 마시며 골똘한 궁리에 빠져들고있었다.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는 민혁의 야망에 이제 비로소 재벌가의 사위라는
날개까지 날아 하늘로 치솟아 오르려는 판에 엉뚱한 돌발변수가 툭 튀어나오다니....
이 위기를 어떻게든 돌파하지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에 민혁의 똥쭐은 타들어가고있었다.
결론은 한가지였다.
일단은 은영과 수혁을 적당히 구슬려야한다는거.....
은영의 자존심이나 성격을 놓고볼때 자신을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일단은 사죄한다는 명분으로 찾아가 은영의 의중이라도 떠봐야 안심이 될거같았다.
수혁도 그랬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연모해온 은영의 임신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수혁이
혹시라도 불같은 성정을 터트려 일이 덧뜨려지기라도 하는날엔
자칫 다 된밥에 코빠트리는 결과가 될수도있기에.....
그저....만사 불여튼튼 미리 단도리를 확실히 해두어야한다는 쪽으로 궁리를 거듭한다.
그 결과 우선적으로 민혁이 찾은곳은 은영의 아파트였다.
저녁무렵 은영의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니...문이 열리는 대신
뜻밖에 민혁이 찾아온것을 확인한 은영의 가시돋힌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와 오셨능교?"
"은영씨....지가 드릴 말씀이 있어갖구예~~"
"지는 민혁씨한테서 들을 말씀이 없심더~!! 돌아가이소!!"
"은영씨!! 잠깐만 열어주이소....한말씀만 드리고 가겠심더~~"
한참동안 잠잠하던 현관문이 철커덕 자물쇠가 풀린다.
현관으로 들어선 민혁은 차마 미안해 은영을 마주보지 못하겠다는듯 고개를 수구린채
더듬더듬 사죄의 말을 풀어놓는다.
"은영씨....수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심더....와 일찍 말씀을 안하셨능교?...
우얗거나 다 지 잘못입니더...."
"재벌가로 장가가고싶어 안달난 민혁씨한테 애를 핑계로 매달려 발목이라도 잡아주길
바랬다는 말씀인교?"
"일찍 알았더라면 은영씨한테 돌아왔을겁니더....믿어주이소...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허소..일찍 알았다고 돌아올 민혁씨였다면 애초에 떠나지도
않았을깁니더....지금 내 임신땀시 재벌가와의 혼사틀어질까 걱정되서 오신거 맞지예?~~
지말 틀맀심니꺼?....걱정말고 돌아가소...내도 자존심상 이런일로 매스컴타기도 싫고....
이적지 넘한테 고추가루뿌리고 살아오진 않았응게...씰데없이 찾아와서 속뒤집어놓지마시고...
이시간 이후로 여기에 절대 발끝 들이지마소~~알겠능교?"
은영의 말에 마음속으로 저으기 안심을하면서도 민혁은 마지막 단도리를 잊지않는다.
"은영씨의 지금 형편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심더....달리 생각마시고 사죄의 의미로
받아주셨으면함니더...."
민혁의 손이 양복안주머니로 향하자 은영은 냉소를 머금고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는다.
"지금 돈꺼낼려고하시능교? 싸게 못나갑니꺼~~부얶에서 구정물퍼다 뿌리기전에....
그리고....내말 단디 명심하소...언젠가는 민혁씨가 오늘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할날이 오고야말기라는거.... 내가 그때 두눈 똑똑이 뜨고 지켜볼낍니더~~"
은영의 아파트를 나서서 차에 오른 민혁은 느낌으로 감지한다.
은영의 감정이 적잖이 격앙되있기는 하지만...자신의 말처럼 혜경과의 혼사에
고추가루뿌리는 일은 없으리라고....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찝찝한 여운은 가시지않는다.
은영의 마지막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걸기적거리는 까닭이었다.
과연 은영의 말처럼 내가 오늘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까?
그러나....민혁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마음속에 다짐을 다시한번 새겨넣는다.
역사는 승자를 위해 존재하고 승자만을 기억할뿐이라고....
나는 지금 역사에 남을 승자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나아가고있다고....
이제 남은 문제는 수혁이었다.
그러기위해서는 현재 수혁이와 갈등을 빚고잇는 진양식품과 권명철씨 특허문제를
더이상 물고늘어져 수혁의 감정을 자극하지말하야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한것이다.
더군다나 추후에 권명철씨껀을 자세히 조사해보니 진양쪽에서 권씨의 특허를 도용하기위해
무리수를 쓴 정황이 포착되지않았던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민혁은 즉시로 진양식품 허이사를 검찰청으로 부른다.
이럴경우 민혁이 검사생활중 터득한 방법이있었다.
자신이 당면한 난처한 상황에서 무리없이 리드미컬하게 빠져나오기위해서는
원인제공자를 쥐잡듯 몰아부쳐야한다는거......
"허이사님!! 왜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심니꺼?
내가 권명철씨건을 면밀히 조사해보니 진양측에서 무리수를 둔 정황이 드러나더군요....
허이사님은 이런 무리수가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신깁니꺼?
이 사건은 원칙대로하면 오히려 허이사님이나 진양측에서 특허법위반으로
형사입건되야할 사건인거....허이사님도 모르지는 않지예?.....
허이사님! 회사의 중역쯤 되시는분이라면...과연 무엇이 회사를 위하는일인지
좀더 깊은 마인드가 필요하지않겠심니꺼....
손으로 막을거 가래로도 못막고 나중에 여러사람 다치는수가 있심더~
진양의 기업이미지에 먹칠하기전에 이쯤에서 포기하고 사건 매듭지으소.
권명철씨와 적당한선에서 보상도 마무리하시구예....아시겠심니꺼?...."
민혁의 임기응변과 휘몰아치는 능란한 화술에 진양의 허이사는
입한번 못떼보고 마치 선생님에게 꾸중듣는 초등학생처럼 고개를 숙인채
땀을 뻘뻘흘리고있을뿐이었다.
허긴....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토를 달것인가....
머지않아 진양그룹의 사위가되어 로얄페밀리로 등극할 민혁의 앞에서.....
진양의 허이사가 사무실로 수혁을 찾아온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뒤였다.
허이사는 수혁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말문을 연다.
"진양에서 모든걸 인정하고 소송을 취하하기로했습니다....말씀하신 보상건도
깨끗이 처리하겠습니다...그런데....권명철씨가 어디에 계신지 찾을수가없어서...."
"우째 갑자기 생각이 180도로 바뀌셧는교? 참 신기하네예....진작에 그러실일이지....
아뭏든 앞으로 더 이상 딴얘기 안나오는건 확실한기지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제 불찰로 여러분께 불편과 심려를 끼쳐드린점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사과는 내한테 하지말고 권선생님과 가족들에게나 단디 허소....
명식아~~!! 니 지금 아파트가서 권선생님캉 가족분들 모셔오니라~~!!"
수혁은 대충 감을 잡는다.
사건이 뜻하지않게 쉽게 풀린데는 민혁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것을....
아주 오랜만에 검사와 조폭두목이란 상극의 입장에서 마주친 두형제...
민혁과 수혁이 진양그룹과 권씨의 특허권문제를 두고 서로 반대편의 입장에서서
첨예한 대립으로 진검승부가 벌어질뻔했던 사건은 은영의 임신이라는 돌발적
변수로하여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가되었고.....
이 돌발적인 변수로인한 사건의 전환은 머지많아 권씨와 그의 가족뿐만이 아닌
수혁과 은영의 삶에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기에 이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