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한국영화가 해외영화제에 초청받거나 해외에서 상영된다는 사실이 뉴스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분명 그런 시절을 한참 뒤로 두고 달려온 해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를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이 궁금해지는 까닭은 우리영화도 괜찮다는 자부심이나 언젠가 도덕 교과서에서 읽어보았음직한 국위선양 때문은 아니다. 낯선, 때로는 오해와 오독이 섞여 있을 시선을 따라 먼 길을 돌아오면,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이 다른 문화에 뿌리를 대고 있는 이들에겐 어떻게 비칠까 혹은 우리에게도 신기했던 영화가 그들에게는 어떤 방식의 신기함이었을까. 여기에 발췌, 정리하여 실은 몇 편의 리뷰와 기획기사가 그런 발견이 되기를 바란다.
영국 평론가 그레이디 핸드릭스가 본 한국영화 속 폭력
트라우마의 연속인 한국사회의 반영
그것은 낚싯바늘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김기덕의 <섬>에서 자포자기한 도망자의 식도 안으로 밀어넣어진 한 움큼의 낚싯바늘이라고. 유럽 각지에서 수상을 하며 <섬>은 베니스에선 구토를, 뉴욕에선 졸도를 야기했다. 그 한순간 한국영화에 관한 오해가 생겨났고 폭력은 서구 관객의 마음 속에서 단단하게 굳어졌다.
5년을 뛰어넘어보자.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지만, 그 영화가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하던 저녁, 미국 평론가들은 그리 깊은 감명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뉴욕타임스>의 마놀라 다지스는 “파산 상태의, 위축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라고 강도 높게 공격했다. 반면 <뉴욕 옵서버>의 앤드루 새리스는 좀더 저열한 지점에서 시작했다. “생마늘과 썩을 때까지 파묻어둔 배추를 혼합하여 질그릇에 담아 공항에서 기념품이라고 파는, 김치를 먹는 나라에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할리우드는 온갖 슬래셔 영화의 아류작과 속편들로 공해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총도 거의 나오지 않는 한국영화들은 잔인하고 짜증을 돋우는 영화들로 낙인찍히곤 한다. 한국 박스오피스는 일반적으로 코미디와 로맨스, 멜로드라마가 점령하지만 서구 배급업자들이 구매하는 영화는 한계까지 밀고가는 장르영화들이다. 2005년 가장 높은 해외수익을 올린 영화는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였다. 반면 한국에서 흥행 1위에 올랐던 영화는 한국전쟁을 다룬 <웰컴 투 동막골>이었고, 2위는 <말아톤>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폭력에 관한 논쟁과 폭력을 향한 찬미를 헷갈려해 왔다는 것이다. 박찬욱과 김기덕의 최근 영화들이 대표하는 것은 단지 한국영화의 계급의식, 반독재 파장과 멜로드라마를 향한 오랜 취향 사이의 새로운 충돌일 뿐이다. 20세기 한국은 트라우마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분단, 군부독재, 대통령 암살, 시민 불복종의 폭력적인 억압… 1990년대 한국이 안정화되고 영화감독들이 과도한 검열에서 놓여날 때까지 누구도 권위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었다. 권력을 가진 이는 의혹의 시선을 받았고- 경찰은 부패했고, 정치가는 불의와 타협한다고- 그래서 영화는 믿을 만한 영웅을 창조해야 했다. 범죄자 말이다.
1990년대에 한국의 거장인 임권택은 <장군의 아들>을 만들었고 그 인기는 두편의 속편을 낳았다. 이후 10년 남짓,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공의 적> 같은 영화가 등장했고, 깡패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경찰들은 권력과 투쟁하며 법을 무시하는 단독자로 나타났다. 포스트 밀레니엄 시대의 관객은 <조폭마누라> 같은 일련의 코미디영화에 열광했다.
미국이 영화폭력의 양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넘버원인 반면 한국영화는 질적인 면에서 승리를 거두어왔다. <하녀>에서 <가족>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 속 폭력은 대상에게 밀착돼 있다. 한국영화 역대 흥행 1위작인 <태극기 휘날리며>는 심지어 한국전쟁을 두 형제 간에 얽힌 가족불화로 전화시킨다. 이 영화의 감독 강제규는 1999년 <쉬리>로 한국의 첫 번째 메이저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는데, 지워지지 않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연인은 서로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박찬욱과 김기덕의 손에서 권위를 향한 불신과 계급을 평등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폭력의 사용, 멜로드라마적인 천성은 감상을 공격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서로 섞인다. 한국에서 김기덕은 영화에 드러나는 살육과 하층 계급의 초상으로 인해 심각하게 비난받고 있다. 박찬욱은 남북한 병사들 사이의 우정을 다룬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으로 인해 복수 3부작에 착수할 수 있는 창작권을 부여받았다. 이 3부작은 모든 권위를 부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부유한 기업가와 마음 착한 노동자를 충돌시키고, <올드보이>는 언제라도 폐기처분될 수 있는 중산층 샐러리맨과 능수능란한 수완가가 대비된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은 이중으로 저주받았다. 전과자이자 여인인 사람보다 어떻게 더 영락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과 <친절한 금자씨> 사이의 어느 즈음에서 한국 감독들은 폭력을 향한 혐오를 키워왔다. 장준환은 가능한 한에서 가장 폭력적이자 반폭력적인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만들었고, 이명세는 액션영화의 언어로 만들어진 로맨스 <형사 Duelist>를 내놓았다. 김기덕마저 비폭력적인 저항을 탐구하는 초현실적인 영화 <빈 집>을 찍었다.
<친절한 금자씨>의 히로인 금자는 어린아이를 살해한 연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13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출옥하면서 정화와 구원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하얀 두부접시를 들고 있는 요란한 기독교도들에게 환영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두부를 던져버리고, 그녀의 감옥 동료들을 찾아 정교한 복수계획을 실행한다. 복수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형태이다. 마침내 개인적인 임무를 포기한 그녀는 자신의 옛 연인을 향한 공동체적인 복수를 조직하지만 복수란 단지 영혼을 파괴하는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두부조각에 얼굴을 파묻고 용서를 구한다. 기독교적인 도상에 의한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이 구약성서식의 일대일 복수를 다루는 감독에서 신약성서식의 속죄를 움켜쥔 작가가 되어가는 표식이다.
김지운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주인공을 파멸로 몰아넣곤 하는 감독이다. 그의 최근작 <달콤한 인생>은 선한 고용인과 악한 보스 사이의 피투성이 충돌을 다루고 있다. 커다란 호텔을 관리하고 있는 선우는 보스가 휴가를 떠난 동안 그의 어린 여자친구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녀를 죽이라는 명령까지 받는다. 물론 그녀는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선우는 동정심에 그녀를 놓아주고, 김지운은 그가 착한 행위로 인해 거듭하여 처벌을 받도록 한다.
선우의 보스는 불공정하고 무자비하고 구시대적이어서 장르의 요구는 그가 복수를 해야만 한다고 지시한다. 거기엔 선우가 자동차 유리 뒤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며 밤거리를 운전하는 <택시 드라이버>의 메아리도 있다. 트래비스 비클처럼, 선우는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남자다. 선우의 마지막 대결이 대부분 단지 칼로 무장한 적들을 학살하는 것이고 그가 통과하는 악의 소굴이 영화 처음에 등장했던 그 자신의 아늑한 요새라는 사실은 멋진 아이러니다.
<달콤한 인생>은 김지운이 마지막 프레임을 뒤틀기 전까지는 값싼 복제품 이상은 아니다. 오프닝신으로 돌아가 우리는 선우가 섀도복싱을 하는 순간을 보게 된다. 갑자기 이 냉혹한 악당은 <더티 하리> 흉내를 내는 바보 같은 소년 이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 전체가 선우의 마초 판타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몇몇 장면들을 보면 김지운은 과묵한 악당의 이야기를 찾고 있는 한국 감독들의 무리에 합류해왔던 듯하다. 그 악당들은 상류계급을 향한 엄혹한 복수에 삶을 소비하며 내러티브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들의 테크닉은 탁월하니, 우리는 고작 우리의 두부 케이크를 가지고, 그것을 비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평론가 케빈 토머스와 로라 컨이 본 <태풍>
멋진 대작인가? 실패한 멜로드라마인가?
케빈 토머스/ <LA타임스>
곽경택이 연출한 강력하고 액션 넘치는 핵무기 스릴러 <태풍>은 정치적인 편의에 희생된 무구한 사람들이 처한 고난에 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데까지 진화해가는 영화다. 곽경택은 또한 남한과 북한 사이에 낀 이들의 고통, 그리고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참사를 덮어두려 했던 소비에트연방의 태도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재앙을 덮어두려는 정부의 과거 회귀적인 경향에 관해서도 신랄한 코멘트를 던진다.
의도한 것처럼 분절돼 있는 오프닝 시퀀스 때문에 <태풍>은 처음에는 스토리를 쫓아가기가 어렵고, 몇몇 디테일과 배경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명의 주인공과 그들을 끌어안는 중심 플롯은 점점 제대로 정리되어간다. 도발적인 주제, 한국과 러시아와 타이 세트와 로케이션을 활용한 멋진 프로덕션디자인 모두에서 야심만만하고 인상적인 <태풍>은 먼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관객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주는 멋진 대작이다.
북한에 살고 있던 최씨 일가 20명은 압제에 시달리는 모국에서 탈출해 중국으로 가고, 다시 남한으로 망명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베이징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그러나 1983년은 그들에게 최악의 시기였다. 중국과 남한의 관계는 해빙무드를 보이는 참이었고, 남한 외교관은 정부로부터 최씨 일가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라는 압력을 받는다. 최씨 일가는 즉시 처형당하지만 어린 소년과 그의 누이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남매는 헤어지고, 아름답지만 세파에 시달린 누이 최명주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든 창녀가 되어 있다. 반면 그녀의 동생 명신은 현대의 해적이 되어 가족의 복수를 하겠다는 강박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명신과 그의 무리를 뒤쫓는 남한 해군 중위는 놀랍게도 자신의 적인 명신이 지닌 분노와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세명의 배우는 완벽한 캐스팅이고, 그들의 인상적인 육체적 존재감과 초상은 <태풍>에 감정적인 공명을 불어넣는다. <태풍>은 미국에서 개봉된 대부분의 한국영화보다 보편적인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로라 컨/ <뉴욕타임스>
장엄하고 마초 에너지가 분출하는, 격정적이지만 구태의연하기도 한 곽경택의 <태풍>은 배 위와 육지에 정교한 세트를 건설하여 한국과 러시아와 타이에서 촬영됐고, 기관총이 끝없이 불을 뿜고, 장면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쿵쾅거리는 음악으로 악당 혹은 영웅주의를 실어나른다.
영화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품고 있는 성난 탈북자 명신과 엄격하고 고지식한 해군 중위 강세종을 맞붙게한다. 강세종은 태풍이 불어오는 동안 풍선을 날려보내 북한과 남한 양쪽에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살포하려는 명신의 계획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러나 극악무도하고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신은 오래전에 헤어진 누이를 다시 만나는 순간, 상처입기 쉬운 면모를 드러내보인다. 그럼으로써 신은 강세종뿐만 아니라 관객의 연민을 확보하게 된다. 반면 생기없는 그의 적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태풍>은 대망을 품고 있는 영화지만, 대부분의 경우 중요한 감정을 놓침으로써 다소 어색한 멜로드라마가 되어 버린다. 그렇더라도 <태풍>은 잘 만들어진 액션 시퀀스가 나오는 동안에는 화려하고, 거의 즉각적으로 관객의 주의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결국에는 재빨리 잊혀지고 말 것이다.
일본 평론가 니시와키 히데오가 본 <웰컴 투 동막골> <너는 내 운명>
전쟁동화와 비련영화의 정통을 맛보다
<웰컴 투 동막골>
판타지? 메르헨(Mrchen, 독일어로 동화라는 뜻)? 동화와 같은 전쟁 영화로 이름 붙이면 될까? 2년 전쯤 개봉한 한국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국전쟁의 비극성과 심각성을 정면에서 그려내어 힘있는 감동을 끌어냈다면, 이 작품은 그런 슬픈 전쟁의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풍자 섞인 웃음으로 비극성과 심각성을 호소하는데, 이 부분 또한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이 마을의 한 일원으로 약간 머리가 모자란, 그래서 더욱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소녀의 존재가 키워드가 되고 있는데, 병사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서 심각한 현실을 주장해도 소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왜 너희들은 사이좋게 지내지 않나” 하면서 예의 그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들에게 묻는다. 병사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소녀나 마을 사람들에게 점차 감화되어가고 결국엔 일치단결하여 마을을 위한 결사적인 작전에 임하게 된다.
유교정신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한반도이기 때문에 배려와 성실함 그리고 목가적인 가족애의 따뜻함이 전편에 넘쳐 흘러서 마치 꿈 이야기처럼 보이면서도 깊은 설득력과 강렬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 관객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환상적이면서도 진지하고, 냉엄한 현실 속에 따뜻함을 담아 전쟁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을 훌륭하게 표현한 걸작이다. 필자는 ‘현실의 전쟁 또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라고 자문하면서 원작자의 발상의 풍부함에 적잖이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불발탄으로 생각하고 던진 수류탄이 식량 창고에서 폭발하고 그 안에 저장되어 있던 옥수수가 팝콘이 되어 눈처럼 흩날리는 환상적인 신이나, 전쟁의 프로라고 할 수 있는 병사들이 덫에 걸린 거대한 멧돼지를 엎어지고 뒹굴며 쫓아 돌다가 결국은 퇴치한 유머러스한 에피소드 등 메르헨만의 기상천외한 발상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130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감독은 CM계 출신으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 하는데 무서울 만한 재능을 느끼게 된다.
<너는 내 운명>
천사와 같이 순진무구한 남자와 매춘행위까지 한 과거가 있는 여자와의 사랑, 실화라고는 해도 너무나도 만들어진 듯한 연애물로, 사실 보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작품이었지만, 이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걸작!! 이 정도까지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전에 한국영화의 드라마 만들기의 정교함과 깊이있는 인간묘사에 압도되어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다. 예를 들면, 일본 연애영화의 명작 <부운>(浮雲) 등을 떠오르게 하는 비통함과 투명성이 관통되어 있어 그 감탄할 만한 설득력과 리얼리티에 이유를 막론하고 감동받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이것이야말로 비련영화의 정통파, 본모습이다.
농촌에서 자란 서툴고 어눌한 총각이 첫사랑을 했다. 상대 여자는 결혼 경험도 있고 전남편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결사적인 용기를 가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그. 여자는 남자한테 지쳐 있어 그의 순수함을 완전히 믿지 못함과 동시에 순수한 그에게 자신과 같은 더럽혀진 여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거부하면서 상대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해(障害), 그녀가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 판명되고 점점 더 웅덩이는 깊어져 간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 놀랍다. 이미 연애의 단계를 지나 망집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의 마음의 깊이. 주위의 걱정이나 조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그 모습에는 광기조차 느껴져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지고 만다.
이러한 설득력과 감동을 만들어낸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두 주연배우의 거침없고 한결같은 명연기의 결과이다. <달콤한 인생>의 악역, <여자, 정혜>에서 약간 어두운 느낌의 작가지망생에서 완전히 벗어나 단지 좋은 사람(이것이 가장 어렵다)을 철저하게 연기한 황정민의 힘있게 끌어안고 싶어지는 열연. 한편으로 여배우 전도현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비틀거리는 부인, <인어공주>의 천진난만한 섬 처녀, 그리고 <너는 내 운명>의 가련한 인어(!) 같은 창부 역까지, 작품마다 변신하는 그녀의 훌륭한 연기는 이 작품이 단지 울리면 된다는 의미없는 눈물을 강요하는 작품이 아님을 전신(全身)으로 증명해서 보여준다.
중국 평론가 디에이가 본 <왕의 남자>
동성애가 아니라 연산의 비애를 보라
자유.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고통스럽게 추구해온 목표로, 전제주의 사회에서 추구할 때 더더욱 비극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왕조 500년, 안정을 이룬 조선이지만, 혼란하고 불안한 시국을 맞고 있다. 조선 역사상의 유명한 폭군이면서 희로의 변덕이 잦았던 연산군 시대에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피폐하여 거리로 나서는 이들이 많았다.
<왕의 남자> 중 장생과 공길 두 사람은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 시기의 유랑하는 거리 광대패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는커녕 오히려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광대패 수장을 죽이고 한양으로 도망친 그들은 거리에서 한판 놀이를 벌이다 궁중으로 잡혀가게 되고, 나중에 왕의 남자가 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은 서로 약속한다. 내생에서 다시 만나 한판 놀자고. 희망을 내세에 둔다는 건, 의심할 바 없이 지금 생에 대한 절망을 뜻한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고 그저 한낱 허무한 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음 생에 다시 한판 놀자고? 이 비극을 다시 반복하자고? 내가 보기엔, 이 말은 훨씬 더 자유와는 결별하게 되는 의미일 뿐이다.
영화 전체를 보면, <왕의 남자>의 인물들간의 감정은 다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동성애적인 감정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난 줄곧 이 영화가 성별 구분없는 좀더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고 여기며,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일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엔 <왕의 남자>가 연애적 감정을 그리는 건 아닌 듯하다. 영화 속에 드러난 감정들은 결코 애정의 뜻만은 아니다. 영화는 조금도 사랑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정에 대한 이야기가 시종일관 영화 전편에 가득 차 있다. 동양적인 함축성이 영화에서 아주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만약에 모두들 영화에서 교태기 있는 실눈과 백옥 같은 피부의 공길에 더 많이 주목했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이 ‘왕’이란 인물을 주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왕’이야말로 영화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고, 혹자는 연산군 부분이 영화에서 비교적 더 뛰어난 면이라고 얘기한다. 영화에서 감독은 일종의 비애와 연민의 태도로 폭군 연산군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운명을 거스를 힘이 없이 태어난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의 한 국왕이었던 연산군과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큘라는 운명상 서로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영화는 연산군이란 인물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데 상당한 심혈을 기울여 깊이감 있게 모친을 잃은 그의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
연산군의 포악함의 근원은 불행한 어린 시절인데 이 유년 시절의 감춰진 고통은 그를 최후의 반역자로 만드는 데까지 영향을 끼친다. 즉 선조에 대한 반역, 관료 체제에 대한 반역으로까지 몰아간다. 유년기에 모친을 잃었던 일은 연산군을 인격적 기형을 가진 성인으로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이미 그의 비극적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만약 그의 포악무도함의 책임자를 찾으라면, 그를 왕가에 잘못 태어나게 했던 운명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운명을 타고난 연산군의 녹수에 대한 기이한 애정은 정확히 그의 모친 상실로부터 기원한다. 또한 공길에 대한 총애도 많은 부분 유년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에서 기인하며, 그의 인생에서 결핍된 어떤 한 시기를 보상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사람의 주목을 끄는 점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이야기, 슬프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담긴 플롯이 관중의 심금을 울리는 데 있다. 영화 전체에 산뜻하고 신선하면서도, 전통적 음율의 문화적 함의가 용솟음치는 기운이 드러나고 있다. 역사의 한 부분에 몇몇 허구적 인물을 추가해 이처럼 정교하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도록 찍었고, 독특한 섬세함, 독특한 감정 등은 그야말로 “오래도록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프랑스 평론가 장 필립 테스테가 본 <괴물>
불균질한 초장르적 영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몇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작된다. 세신이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시작하는 영화의 속도는 놀랍기만 하다. 이 초반 장면은 방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뜬금없는 상황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훌륭한 장면이다. 이어지는 장면, 괴물에게 납치된 현서의 가족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이 위급 상황을 무마하려는 미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현서를 구출하겠다는 계획에 착수한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을 묘사하는 코믹한 장면은 전형적인 괴물영화의 특징을 변질시킨다. 영안실 장면을 보자. 딸을 잃은 슬픔에 바닥을 구르며 오열하는 아버지, 삼촌 뒤로 메가폰을 들고 등장하는 사내. 그는 대사를 뱉기도 전에 바닥에 깔려 있던 박스를 밟고 넘어진다. 이 장면은 가족멜로, 정치 블랙코미디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적 요소를 섞어놓은 초장르적인 영화, 또 다른 <괴물>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영화는 이러한 난리 법석 속에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괴물>을 감상하려면 감독이 창조해낸 이 난리 법석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괴물을 보자. 형용할 수 없는 창조물. 서투른 고질라와 같은 괴물은 화면의 저 끝에서 번데기 형상으로 출현해 벽을 뛰어다니고, 한강 다리에 매달려 있다 미끄러져 떨어지고, 가끔씩은 미친 개처럼 계단을 오르내리며 난장판을 만든다.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이 변화무쌍하고 무법자 같은 괴물을 바라봐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과 미장센의 호흡을 시간과 공간을 파괴하며 등장하는 괴물의 존재와 맞춰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연출 기법은 가끔씩 비현실적인 느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서가 괴물이 자는 동안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을 보자. 괴물은 자신의 꼬리를 이용해 공중에서 그녀를 잡아 바닥에 다시 살며시 내려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봉준호 감독의 데쿠파쥬(편집기법)는 약간은 호흡이 긴 화면과 짧고 거친 화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그의 편집 방법은 관객에게 괴물의 등장과 사건 전개에 번갈아가며 호흡을 맞출 수 있게 한다. 잘 처리된 그래픽… 끈적끈적한, 근육질의 육식동물… 이 괴물은 먹이를 잡기 위해 동정을 살피는 순간을 제외하고 언제나 과장된 움직임 속에서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지나침’이라 특징지울 수도 있는 괴물에 대한 묘사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섞여 있는 (가족멜로, 정치 블랙코미디, 익살극) 그의 영화의 호흡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그의 영화의 기질이 자신이 창조해낸 이 생명체와 닮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괴물의 존재는 다른 괴물영화와 같이 비인간적인 인간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또 다른 네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드라마적 요소로서의 사용. 어찌되었던 간에 <괴물>은 괴물의 출현으로 영화의 흐름이 결정되는 액션물이다.
둘째, 정치적 의미의 괴물.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셋째, 코믹적 요소로서의 사용. 괴물의 출현으로 인해 벌어지는 난장판과 다양한 스피드 변화로 인해 빚어지는 코믹적 장면들. 예를 들어 박씨 가족이 벌이는 전투장면은 처절하기도 하지만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넷째, 멜로드라마적 요소로서의 사용. 괴물은 어느 면에서는 어머니가 부재하는 박씨 가족에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를 대체하고 있다. 괴물의 출산장면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이러한 네 가지 메타포로 봉준호 감독의 괴물 사용을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괴물의 사용은 영화의 첫 번째 공격장면에서 아주 간단하게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괴물은 상징화되고, 무언가를 함축하고 있는 어떤 존재이기 이전에 그의 출현이라는 사건 자체로 충분히 설명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강변에서 과자를 먹고 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벌어진 뜬금없는 괴물의 출현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불균질한 모드, 설명할 수 없는 마술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그의 미장센을 설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뜬금없는 괴물의 출현, 이 생명체의 나타남 그 자체로서 그는 영화의 모든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앤드루 세리스?//학살자의 후손에게 그런 말 들을 이유는 없는데...
아 좋은자료 잘보았습니다
영국 평론가 존나 웃기네. 치즈도 썩은 거거든. 한 이야기가 생각 납니다. 한 아프리카의 식인종 추장이 영국 런던에 왔더니 존나 욕하더니 전쟁이 나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니 추장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들을 먹지도 않는데 사람들을 죽이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