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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전충청방 작전부장으로, 회원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막강파워믹키님의 글입니다...대전충청방에 올린글 여기에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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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나비 축제에 부푼 꿈을 안고 왔다가
무심함과 허탈감만 안고 돌아 간 다섯 중국여인들과 수양 여동생 엽홍이의 이야기입니다.
다섯여인 중에는 내가 중경에서 대나무로 물건을 만들다가 비자가 만료되어 애로를 겪고 있을 때
흔쾌히 자신의 일을 마다하고 비자 연장(원래 안 되는 것이었는데 순전히 그 녀의 노력으로 된...)을 할 수 있오록 도와 준
엽홍(방년25세)이란 수양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내몽고가 집이며, 현재 서안에서 한국어 기초반을 가르치고 있는 한족 아가씨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서구화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중국은 지금,
열악한 환경을 마다 않고 저임금 속에서 한국의 70년대처럼 돈을 벌어 동생들과 부모님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똑순이!~"들이 참으로 많다.
옆홍이도 그런 똑순이 중에 한명이다!
착하고, 부지런하고, 튼튼하고, 모진 환경 속에서도 항상 밝고 명랑한 생각을 하는 서안의 수양여동생 세명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한달에 1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 친구 네 명과 함께 개인당 18000원 정도 드는 서안의 연립주택에서 살고 있으며
나머지 비용은 자신의 시집갈 비용을 모으고 또 부모님을 봉양하고 있다.
그런 그녀는 한국어을 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 함평 나비축제!에의 직원 채용에 선발 되었다
그것은 많은 월급과 동경하던 한국행! 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거머 쥔 행운 이었다.
옆홍이는 3월말에 한국에 왔으며 오던 날 무척 흥분 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선생님!~(이녀석들은 나에게 꼭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리 라오스(李老師!)라고 부른다)저 한국에 왔어요 ㅎㅎㅎㅎ!~"
반드시 만나러 갈 것을 약속 하였지만 그동안 중국을 두 번이나 다녀 오고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아주 흥분 된 목소리였고 또 함평나비축제가 꽤 홍보가 많이 되어 있어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월요일!(5월19일!) 아침 일찍 마눌님께 허락을 득하고 옆홍이를 만나러 함평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는 핸드폰이 없었으므로 연락을 하지 못했다
무조건 나비엑스포장 중국 관을 가면 중국옷을 예쁘게 차려 입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한국 사람들을 상대 하면서 기쁨에 들 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차를 몰았다.
함평에 도착해 중국관을 찾아 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많은 인파가 북적 거리며 성황을 이루고 이는데 중국관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홍조 띤 얼굴로 나를 보고 좋아서 팔짝 팔짝 뛰며 "어머? 선생님!!!!~~~~~~~"하며 반길 줄 알았던 엽홍이도 없었다
???????
연락할 방법이 없는 나는 주변 안내원에게 영문을 물으니 장사가 안되어 일주일 전에 문을 닫았다는 설명이다.
일을 하던 중국 사람들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정문으로 나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 하고 있는데
그녀 와의 인연이 모진지 옆홍이가 일행 다섯명과 함께 정문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순간 뒤돌아 놀라게 해 줄 요량으로 뒤돌아 서 있다가 옆홍이가 내 앞을 영문도 모르고 지나가자
나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아흥!!!!!!!!!!!!~~~~"하며 어깨를 잡았다.
그렇게 만난 옆홍이는 나를 만나 반가워 하기 보다는 눈물부터 흘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지만 옆홍이를 포함한 다섯명이 그저 울기만 했다.
하도 옆홍이가 나를 그녀들에게 예기를 해 놓아서 그 다섯명이 모두 나를 알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묻는 나에게 그녀들은 힘든 와중에 이제 기댈 곳이 생겼다는 안도의 눈물이라고 했다.
영문과 까닭을 모르는 나는 우선 그녀들을 진정 시키고 근처 식당으로 데려가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다.
자초지종은 이러 했다.
함평군수는 세계나비축제를 개최하면서 場內에 이름과 명성에 걸맞도록 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다가 초청장을 보냈다.
"너희나라에 서식하는 나비들을 가지고 한국에 오면 적당한 건물과 자리를 임대 해 줄테니(3개월 간 천만원!)
와서 기념품과 고유 음식등 너희들이 알아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라! 그대신 직원 채용이나 관리 등은
모두 너희들이 책임져라!~
우리는 그저 건물과 공간만 제공 할 테니 그 사용료만 내라 수익이 얼마가 나든 모두 너희가 다 가져라!"
라고 계약을 하여 "함평 세계 나비 축제마당에 중국관!"이 들어 서게 된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중국인(남,35세 정도 되는)이 과감하게 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 중국인 사장은 "한국에서 하면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엽홍이를 포함하여 많은 인원을 채용하여 한국에 왔다.
초반에는 그의 생각이 맞았다.
만두 네개에 5천원!~ 중국에서 3원이면 살 수 있는 설탕을 녹여 만든 장난감 같은 것도 5천원씩 팔고 기념품등의 물건을
중국에서 받는 것보다 네 다섯 배는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념품 등 물건은 중국의 길거리 상품이었고
음식은 "씨앙차이!~" 와 "기름 덩어리!~"로써 처음에는 호기심에 중국음식을 맛보았으나
금방 입소문이 나면서 매출은 급감소 했다.
사장과 중국인들은 그런 상황에 적절히 대응 하지 못하였고 급기야 나비 축제가 시간이 갈수록 시들 해 지면서
결국 중국관은 자금 압박을 받고 문을 닫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후 사장의 조치가 문제가 되었다.
사장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자 엽홍이를 포함한 직원들의 월급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함평 군청 또한 아무런 보상을 해 줄수도 없고 해 줄 필요도 없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건 너희들 사정일 뿐!~"이었다.
엽홍이를 포함한 중국인들은 3개월 간 아침7시에 출근해서 저녁10시까지 일을 하였다.
한국을 구경 할 시간도 물론 없었다.
열악하고 조악한 기념품을 만들고 뜨악한 음식을 계속 만들어 한국 사람들이 사 먹기를, 매상이 오르기를 바라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18일 사장은 "너희들 월급은 한 푼도 줄 수 없으니 내일 서안으로 돌아가라!~"라는 무식한 통보!~를 하였고
졸지에 엽홍이 일행은 동경하던 한국 구경은 커녕, 많은 월급은 커녕, 완전 깡촌!~ 오지에서
일만 죽으라고 하다가 쪽박 차고 쫓겨 나는 신세가되어 버렸다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었고
사장은 협박 반 회유 반으로 배째라!~하여 걱정이 태산 같을 때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옆홍이와 그 일행은 나를 보자 마자 그렇게 울기만 했었다.
이런 씨부랄 놈 같으니라고!~~ 눈에서 불이 번쩍!~ 화가 불끈 솟아 올랐다.
이 사장 놈 어딨어? 망했으면 아주 쫄딱 망할 것이지 일 시켜 먹고 월급을 안 줘? 말도 안 돼는 소리!~
가자! 옆홍아!~ 사장놈에게 가자!~ 오빠가 때려 죽여서라도 받아 줄께 가자!~
성질이 있는대로 다 나서 손목을 잡고 일으켰더니 모두 그러지 말라고 말린다.
지금 사장은 없단다.내일 온단고 한다.
그렇게 자초지종을 다 들어 주고, 화가 나서 한바탕 소란을 떤 후에야 그녀 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함평 군청에 전화를 걸었다.
" 우리도 안타까울 뿐 도와 드릴 방법이 없네요!~"
광주에 있는 중국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어쩌구 저쩌구 씨부렁 씨부렁!~~~)지랄!~~~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물으니 시내가 보고 싶단다.
한국에 와서 한 번도 외출을 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 그럼 가자!~ 내 차에 타라!~
"끼야악!~~~~~~"수심에 가득차던 얼굴은 금방 어디 가고 소풍가는 아이들 마냥 좋아 한다.
그래서 그녀들을 태우고 광주에 있는 후배의 도움을 받아
광주 시내의 밀레오레와 재래식 시장 백화점등을 관광시켰다.
그녀들은 신기한 듯, 다른 사람들을 고려 하지 않는 중국인 특유의 시끄러움으로 재잘 거렸다.
그 날 저녁 숙소에서 사장을 만났다.
한 푼도 주지 않겠다던 사장은 친구들을 동원해 묻어 버리겠다는 협박에 10만원씩을 지불 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헛소리 하지마라!~ 내일 공항 가기 전까지 전액을 내 놔라!~
너 이왕 망한거 완전히 쫄딱 망하고 말아라!~ 직원들 월급을 다 주고 인심이나 얻어라 그게 옳은 것이다."
서투른 중국말과 옆홍이의 통역으로 회유와 협박을 하다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잠 잘 자리가 없어 광주 친구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다시 함평으로 갔다
이미 그녀들은 짐을 다 꾸려 놓았고 사장과 막 판 협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예기가 잘 되고 있으니 가만히 계셔도 된다는 말을 듣고 상황을 지켜 보기로 했다.
다시 중국 영사관에 전화를 했다.
(뚜뚜뚜!~ 계속 통화 중이다!~ 써그랄 놈들!~
한국 땅에 있는 중국영사관 놈들이나 중국 땅에 있는 한국영사관놈들이나 다 똑 같다, 개 자식들 골프 치러갔나 부다......)
그들은 저녁9시50분 비행기였다.
그들이 공항까지 가는 계획은 함평에서 광주로 버스로 이동!
그 후 광주에서 공항버스로 인천공항까지 이동! 하는 것이었다.
그럴려면 협상은 적어도 오후2시까지 완료 되어야 계획대로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협상도 아닌 협상이 고무줄 늘 듯 주욱 주욱!~ 늘어 진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한 것이 오후 1시가 되어도 끝났 줄을 모른다.
개별 접촉과 단체 교섭을 번갈아 하기를 수십번 한다. 만만디!~ 만만디!~
2시가 지난다!~
3시가 지난다!~
나는 마음이 급해 졌다.
"옆홍아!~지금 너희들 출발 하지 않으면 비행기 놓친다.
비행기 놓치면 다음 비행기 값은 너희들이 사야 한다. 지금 뭐라고 하냐?"
"조금 더 받기로 했어요!~ 개인당 5만원 정도!~"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 해 봐도 쫄딱 망한 사장에게 더 받을 것은 없다고 판단 되었다.
4시가 다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이미 그녀들은 광주까지 갈 수가 없었다.
한 푼도 받지 못던 상황에서 그나마 반액 정도 받게 된 것에 不太滿足하게 되었다.
시간이 없어서 사장에게 그녀들이 광주까지 갈 차비를 나에게 달라고 하였다.
시간이 없으니 내가 직접 태우고 공항까지 가야겠다고 했다.
막판에는 사장도 불쌍해 보였다.
그래서 25만원 중에 15만원만 받은 후에 그녀들을 봉고 차에 태우고 인천 공항으로 향하였다.
공항 가는 내내 그녀들은 잠을 잤다!~
잠든 그녀들의 얼굴에는 "한국행의 부푼 꿈!~"도 없었고, 삼개월 간의 "벅찬 기쁨과 보람!~"도 없었다
피곤에 절은 모습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악쓰고 소리지르고 울다가 퉁퉁 부은 모습뿐이었다.
심정이 복잡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금 일찍 찾아 올껄 그랬다 하는 자책이 스멀 스멀 기어 올랐다. 쩝!~~~~~~~~~
새치기하고 갓길을 달려 휴식없이 다섯시간 걸려 공항에 간신히 도착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걱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공항에 도착하여 각자 집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하던 그녀들은 경악을 하였다.
서안에는 아직도 여진이 남아 있어 집들이 흔들린다는 소식이었다.
특히 그녀들이 사는 집들은 열악하기가 그지없는 낡고 헐은 집들이어서
친구들과 부모들이 모두 도로가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지 오래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들이 돌아 가도 집으로 들어 갈 수없고 길거리 노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넋 나간 모습으로"住 不了!~", "怎么办?"만 되 뇌이고 있었다!~
에휴!~~~~~~~~~~~~~~
한숨만 나왔다.
그녀들이 시간만 있다면 모두 집으로 데려가 대전역에서 꼬치도 먹이고 후워구어도 먹이고
민속촌도 구경시키면서 삼개월간의 힘듬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다 되어 들어 갈 시간이 되자 그 와중에도 그들은 감사하단 말을 수없이 되뇌이었다.
착한, 그리고 무지 선량한 70년대 똑순이들!~
그녀들은 그렇게 중국의 길거리로 돌아 갔다.
돌아 오는 내내 그녀들이 마음에 걸리고 또 눈에 밟혔다.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와 마늘님!~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 했다.
그리고 나서
"여보!~ 아무래도 서안에 한 번 가야 될 듯 싶다. 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해야 겠어!~"
그랬더니 외박도 모자라 돈만 쓰고 왔다고 타박 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는 없고
그래도 가만 있자니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 보다가 한다는 말이
"오지랍도 넓어요!~~~" "막내 토플 시험 본다는데 등록이나 해 주고 오세욧!!!!!!!" 흐미!~ 기죽어!~~~~~~~~~~~~
첫댓글 좋은 일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사전에 공지라도 하시면 좋았을텐데 아쉽군요. 다행히 그들끼리의 문제라...
사장도 불쌍하게는 되었지만 참으로 대책이 없는 오너 였어서 조금 흥분 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일 하셨습니다.먼 타국에서와서 얼마나 고생들 많이 했겠습니까.더우기 지진피해까지 있다니 걱정이 됩니다.
예!~ 고생하고 돌아 갈 곳이 길바닥이었다는 것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할 말도 없고요. 한국이나 중국이나 자국민 보호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광주에 있는 중국영사관 정말 전화 통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일 일과 시간이었는데도......
*^^*
서안에서 소매치기 당했을 때 도움을 주던 호텔에서 일하던 현지인 젊은 아가씨가 생각납니다. 정말 좋은 일 하셨네요.
중국에도 좋은 사람들 선량한 사람들 참으로 많지요
일은 일대로 하고 월급 못 받는 것처럼 서러운 게 없는데, 더구나 이역만리에서... 게다가 집은 지진으로 못 쓰게 됐다니, 참 딱하군요. 그래도 님이 도와주셔서 월급을 어느 정도 받은 게 불행 중 다행이네요.
예!~ 안타까웠던 사실을 제대로 요약을 해 주셨군요 ㅎㅎ
"한국 땅에 있는 중국영사관 놈들이나 중국 땅에 있는 한국영사관놈들이나 다 똑 같다, 개 자식들 골프 치러갔나 부다" 부분 너무 웃겼습니다. ^^
아후!~ 영사관에 전화를 100번도 더 했을 것입니다. 이틀 동안요.....
믹키님, 한국 사람으로서의 할 도리를 다 하셨군요. 진작 여기에 소개해 주셨다면 중여동 형제들이 두 팔 걷고 도와주었을텐데 아쉽네요. 믹키님, 복 많이 받으실겁니다.
와우!~ 정망 말씀이라도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안타깝네요... 제가 5월 16일 함평나비축제장에 갔었댔는데 바로 다음다음날이 그들의 운명을 얄궂게 만든날이라니... 그 똑순이 아가씨가 누구일지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서글서글한 말씨에 적당한 몽골처녀 몸매같은 ... 그리고 요리사복장의 남자들과 기념품판매원 남자들 너댓명.... 제가 갔던 5월 16일은 날씨가 흐렸지요...그래서인지 관람객이 의외로 적었답니다. 그래서 중국관에도 역시 사람이 너무 없구나 라고만 생각했었답니다. 뭐 하나 살게 있을까... 하고 둘러봤지만 중국을 여러차례 다녀온 제겐 특별히 구미가 당기는 물건도 없었고 현지에서의 가격을 대충 고려해 볼 때 선뜻 살만한 물건은 없었답니다.
게다가 요리는 사천요리였던가요? 하긴 시안이라고 했으니 그럴수도 있겠네요. 중국현지에서나 먹을수 있을 것 같은 모양이더군요. 중국에서 볼 때는 그렇게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던 것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웬지 저런 식이면 사람들이 안 찾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더군요. 그리고 아는 처지의 제 눈엔 값 역시 만만찮았구요... 하기사 중국관 말고 다른 곳도 뻥튀기 하기는 매 한가지지만.... 그래서 그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이거 얼마예요?" 라고 묻는 한국사람들의 말을 "'한 개'가 아니고 '저으거' 예요" 라고 알려주면서 웃어주기만 했답니다.
순박한 얼굴의 그들이 썰렁한 행사장에서(중국관은 꼭 중국에서처럼 넓은 부지에 아주 단순한 조형물과 함평군에서 전혀 돌봐 준 흔적이 없는 것 같은 썰렁한 모양이었음) 하도 안돼 보여서 뭔가 하나 팔아주면 좋겠다 싶었지만 가족들을 좇아가다보니 그냥 지나쳐버렸지 뭡니까... 그리곤 다음날 제 아버지께서 함평나비축제장에 가신다기에 그래 잘 되었다. 분명 중국관에 들르실텐데 내 못해준 일 해 주고 오면 그나마 맘이 편하겄다... 했더랍니다. 사실 제 아버지와 지금 같이 살고 계시는 분이 한족이시고 아마도 서로 적적하던 차에 말숨통이나마 틔겠다 싶었지요... 하~! 근데 이게 웬일! 17일 비가오지 뭡니까?
아버지 왈 ~ 못갈란갑다. 그렇게 함평 중국관의 기억을 뒤로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메일을 읽고보니 너무 마음이 안좋아 이렇게 구구절절 장황하게 씁니다. 지진까지라니요... 아뭏튼 좋은일 하셨습니다. 복 받으실거예요. 그 아가씨랑 중국 머스매들도...
예!~ 바로 보셨습니다 함평군의 무성의도 원인 일 수 있지만 그 오너의 상업 마인드가 문제 였습니다. 바로 님이 지적하신 한국화 되지 않은 길거리 음식과 조악한 기념품!~ 그리고 터무니 없는 품질 대비 높은 가격!~ 등등!~ 전체적인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한 것이 문제 였습니다. 직원 월급뿐 아니라 근처의 마트에도 외상값이 있었고 함편군청의 임대료도 완납을 하지 못했답니다. 제가 그 사장을 패 주려 했지만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오히려 그 사장이 더 불쌍 하더라고요!~ 함편군청은 머리를 참으로 잘 쓴 편이지요!~
시안이라면 말라를 넣은 정말 매운 국수가 유명한데요. 기념품 보다는 시안의 국수를 만들어 2000원씩에 팔았다면 큰 돈 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다행히 불법체류 되지 않고 중국으로 모두 복귀 했다니 정말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상식과 의리가 있는 중국분들 인것 같습니다. 앞으로 시안를 방문한다면 잘 해 주시길......
음식도 팔았다면, 분명 시안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 맛이 있었을텐데요.. 싸구려라고 국수는 취급치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한가지 함평이라면 조금은 시골지역으로 아는데요, 채소 위주의 음식이 발전한 시안의 요리는 시골분들에겐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건강을 생각하고 유기농을 찾는 사람들에게 홍보를 했어야지 그냥 시골 분들은 갈비나 곱창 삼겹살 등등에 관심이 있으시지 이국땅에서 즐겨 먹는 향채 냄새 나는 채소 요리를 드실리 만무 하죠.
제가 98년 처음 시안을 갔을때는 정말 한국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조선 식당도 없었고, 중국식당에 조선 아주머니가 있어 김치를 얻어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시안 요리 정말 입맛에 맞더군요. 아침에 일어나서 길거리에서 파는 매운간장에 비벼 먹는 국수는 최고급 일식당에서 먹는 자루소바 보다 최소한 10배는 맛있었습니다. 가격은 1원(150원)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하니까요.
서안에 대해서 애정이 깊으시군요!~ 그들은 불법체류를 할 줄 모르는 정말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국수도 유명 하지만 본래 서안은 지아오즈!~ 물만두의 고장이지요!~ 즐거운 날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