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종주국 프랑스에서도 가죽과 라벤더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 지방의 그라스.
가죽의 악취를 덮기 위한 향기, 마을의 운명을 바꾸다
그라스의 향기로운 역사의 시작은 16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세기 중반, 그라스는 가죽 무두질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무두질은 동물의 원피에서 가죽 제품을 만들기 위한 피혁을 분리해내는 공정으로 살점이 붙은 원피를 끓이는 과정에서 악취를 동반했는데 무두질을 마친 가죽에도 여전히 악취가 배어 있었지만, 질 좋은 가죽옷과 장갑, 부츠를 얻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것쯤으로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장인이 절묘한 해법을 내놓았습니다. 무두질 장인인 갈리마르(Galimard)는 마을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식물 염료 추출법을 응용해 향을 품은 오일을 가죽 장갑에 뿌려봤습니다. 이 장갑 한 켤레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이자 프랑스 신구교 내전의 중심에 있었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보내졌다.
향기 나는 가죽 제품에 대한 소문은 유럽의 왕족과 상류층 사이에 빠르게 퍼졌고 주문도 폭주했습니다. 가죽 공방과 무두질 장인들은 저마다 조향사를 고용하기에 이르렀고, 더 좋은 향을 만들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라스가 세계 최고의 조향지이자 세계 향수 및 아로마 산업에 향기로운 혈액을 공급해주는 심장으로 자리매김한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땀과 노력으로 빚어낸 자연 그대로의 명품 향기
가죽 가공 산업은 중세를 지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더 품질 좋은 가죽을 생산하는 경쟁 도시들이 등장했고, 가죽에 붙는 높은 세금의 무게를 견디기에 그라스의 가죽 산업은 영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향사들은 실업자로 전락하지 않고 저마다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죠. 그간 갈고 닦은 향수의 원액(에센셜 오일) 추출 기술로 그들만의 전문 영역을 구축해나간 것입니다.
조건은 완벽했습니다. 그들에겐 기술이 있었고, 그라스 주변의 여러 지역들에는 라벤더와 미모사, 제비꽃, 튜버로즈, 장미, 재스민 등 조향에 필요한 꽃과 허브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햇살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향이 달아나지 않도록 새벽에 들에 나가 꽃과 허브를 일일이 수확해야 했지만, 가죽 공방과 무두질 공장에서 일하던 주민들은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라스에 가면 소설 '향수'의 좁은 골목과 마을의 고풍스러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현대에 이르러 화학 원료로 만들어진 향수가 대량 유통되면서 그라스의 향수 산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듯했는데 위기를 벗어난 비결은 ‘자연 그대로의 방식에 충실하기’였습니다.
풍성한 향을 머금은 그라스의 천연 에센셜 오일은 명품 브랜드들을 만족시켰고, 샤넬과 니나 리치 등은 이곳에서 세계적인 향수 라인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샤넬 NO.5의 본적지도 바로 그라스다.
프로방스로 떠난 향기 순례자들의 종착지
그라스에는 향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방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여행자들이 향에 흠뻑 취하기 위해 그라스를 찾습니다. 여행자들은 보통 도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당과 대주교 저택을 중심으로 중세부터 조성되어온 마을 길을 찬찬히 걸어가며 여행을 시작합니다.
마을 곳곳에서 향수와 아로마 제품, 말린 라벤더와 비누 등을 파는 가게들을 흔하게 마주할 수 있는데 적지 않은 가게들이 자신만의 비법과 전통에 따라 만든 향수와 아로마 제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마을의 규모가 작은 탓에 그라스 여행은 반나절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소요 시간’은 마을의 크기만을 따졌을 때 산출되는 시간일 뿐, 중세를 지나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그라스의 오랜 사연을 더듬어본다면 공기 중에 은근히 스민 향기 한 줌도 예사로이 지나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향에 사로잡힌 이들이 마치 홀린 듯 그라스를 향해 떠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