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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슈타인을 아십니까 ?
역사를 돌이켜 보면 위대한 장군들의 영웅담이 나오고는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지만 대부분은 승자에 대한 기록만 전해내려 오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하나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전투에서 패전을 하였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는 승장이 되지만, 그 반대인 경우는 敗將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이죠.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해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역사에는 패장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도 패하였다면 그나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터인데 기록으로 나타난 패장이라면 사가들도 안타깝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 가장 안타까운 패장 한니발 ]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는 위대한 패장이라면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역사나 밀리터리에 아무 관심도 없는 마눌님이 애가 보는 위인전집중 ( 그것도 만화 ) 한니발에 관한 글을 읽고 불상하다고 눈물을 글썽 거렸을 정도였으니까요.
[ 정치적 희생양이 된 롬멜 ]
밀리터리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께 인류 최대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생각나는 장군을 말하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맥아더, 아이젠하워, 패튼, 몽고메리등의 승장들을 언급 하실 것 입니다. 독일 장군으로는 사막의 여우라는 롬멜이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죠.
[ 인기를 바탕으로 대통령까지 된 아이젠하워 ]
물론 이들 대부분이 전공이 뛰어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의 연예인처럼 매스컴이나 언론매체를 통하여 일반 대중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특히 맥아더나 아이젠하워 같은 경우는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였다는 것이 중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냉전의 선두에 있었던 관계로 소련의 상승장군이었던 주코프같은 공산권 장군에 대해서 알려져 있지 않았었고, 패전국 독일의 장군들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 조국을 수호한 상승장군 주코프 ]
그렇지만 밀리매니아나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 제2차대전 최고의 장군을 손꼽으라면 일반인들에게는 금시초문 일수도 있는 인물이 항상 선두에 들고는 합니다. 그는 후대에도 물론 이지만 독일뿐만 아니라 연합국에서도 당대 최고의 장군으로 인정하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 위대한 패장 만슈타인 ]
기동전의 대가로 불리는 독일의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 Erich von Manstein 1887.11.24 - 1973.6.11 ) 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 1906 년 초급장교 시절 ]
프러시아귀족이었던 포병장교 레빈스키장군의 10번째 아들로 태어나 친척인 만슈타인 장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군사학교를 졸업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군 생활을 시작 합니다. 그가 본격적인 지장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좌천이 되면서부터 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낫질작전
對폴란드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독일에게 있어 이미 선전포고를 한 프랑스와 영국은 장차전의 상대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떠한 행동도 먼저 취하지 못하고 서로 간에 으르렁만 될 뿐이었습니다. 훈련 중 포탄이 상대편으로 날아가면 " 미안하다. 방금 것은 연습 중 실 수였다 " 라고 방송을 하였을 정도였으니까요.
[ 제 1차대전의 서부전선은 서로에게 되새기고 싶지않은 악몽이었습니다 ]
사실, 독일이나 프랑스 모두 20 여년전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지옥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맞붙는다면 끔찍했던 과거가 재현 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양측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마지노선에 안주하였고 독일도 섣불리 이를 돌파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 제 1차대전 당시 슐리펜 계획에 의한 침공계획 ]
독일의 제 1차대전 실패는 초기 진격이 마른에서 저지당하였기 때문인데, 그 이유가 기동력의 부족과 열악한 통신 인프라로 인한 전선의 단절 때문이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때문에 독일육군최고사령부 OKH 는 이런 교훈을 거울삼아 쉴리펜계획을 보완한 프랑스 침공계획 ( 이른바 황색계획 ) 을 수립하였고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판단하였습니다.
[ 마지노선에 막혀 결국 같은 곳으로 침공하려 하였습니다 ]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 또한 그런 예견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독-불 국경이야 마지노선으로 인하여 독일이 침공 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원정대는 강력한 예비를 프랑스-벨기에 국경에 포진하고 있다가 독일의 주공이 벨기에로 진입 할 경우 즉각 대응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만슈타인은 배후를 돌파할 것을 제안 하였습니다 ]
당시 A 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의 참모였던 만슈타인 소장은 적도 충분히 예상하는 이런 뻔 한 스토리의 황색계획을 강력히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작전계획을 제시하였습니다. 만슈타인의 주장은 프랑스 영토내의 프랑스군과 영국원정군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주공을 북부의 B 집단군이 아닌 룬트슈테트의 A 집단군으로 변경하고, 기갑세력을 이곳으로 집중하여 급속 돌파를 함으로써 적의 주력을 대포위 섬멸하자는 것, 이른 바 낫질작전 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더장군이 이끄는 독일 참모본부는 비록 폴란드의 경험이 있었음에도 기갑부대의 집중운용과 쾌속성에 대해서는 여전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주력 기갑부대를 산림이 무성한 벨기에 남부 아르덴숲을 통과하여 세당 인근을 돌파한다는 것에 대해 불가능 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할더는 분노하여 만슈타인을 좌천 시켜버립니다 ]
당시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만슈타인이 황색계획 수정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계속 제출하자 마침내 격분하여 만슈타인을 후방에 위치한 제 38군단으로 좌천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이 좌천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 만슈타인은 군단을 때마침 방문한 히틀러에게 자신의 계획을 직접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직접 설명 할 기회를 얻습니다 ]
만슈타인의 계획을 들은 히틀러는 이를 전격적으로 채택하고 독일은 프랑스 침공을 개시 하였습니다. 공병들이 미리 닦아 놓은 아르덴숲의 전차이동로와 교량을 이용하여 독일의 기갑부대가 진격하여 프랑스-영국군 주력의 배후를 차단하자 그것으로 사실상 프랑스전역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 히틀러는 꿈에 그리던 파리에 입성합니다 ]
만슈타인은 제 38군단을 이끌고 독일육군 중 최초로 센강을 도하하여 파리로 돌진하여 들어갔고, 이 공로로 중장으로 진급하게 됩니다. 이로써 만슈타인은 유능한 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가진 야전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 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전격전의 신화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전격 침공합니다. 당시 대장으로 승진한 만슈타인은 레브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예하 제 4기갑군 ( 회프너상급대장 ) 의 선봉인 제 56장갑군단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소련 북부의 요충지 레닌그라드를 향하여 부대를 진격시킵니다.
[ 독소개전 당시 북부집단군 사령관 레브원수 ]
* 독소전은 강철과 강철이 충돌하였던 인류사 최대의 재앙이었습니다. 유럽의 해방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끈 연합군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냉전시기에 보이지 않게 음으로 양으로 세뇌를 당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제 2차대전 유럽전역에서 전체 독일군의 80 % 가 넘는 대부분을 상대하였던 것은 사실 소련이었습니다. 또한 전후 소련의 사망자 ( 사상자가 아님 ) 가 2,000 만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참혹한 전쟁이었는지 한마디로 대변하여 주고 있습니다. *
만슈타인은 제 8전차사단, 제 3차량화보병사단, 제 290보병사단을 거느리고 개전 후 4일 만에 무려 320km를 전진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과시합니다. 이것은 무주공산의 대지를 달려만 간 것이 아니라 첩첩히 방어막을 치고 있던 소련군들을 괴멸시키면서 이룬 놀라운 진격이었습니다. 만슈타인의 초기 돌격은 프랑스전 당시 구데리안의 아르덴돌파와 더불어 전사에 길이 남는 독일군의 전격전의 신화로써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 프랑스전선에서 독일의 승리를 위해 결단을 내렸던 히틀러가 독소전부터는 자만감에 가득 차 군부의 작전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스몰렌스크, 민스크, 키에프등에서 大 포위 섬멸전을 펼쳐 비록 전술적 대승을 이끌기는 하였지만, 이는 여러 장군들의 진언을 묵살하고 애초 목표인 모스크바를 향한 진격을 늦추어 이룬 승리였을 뿐이었습니다.
[ 진격 도중 몇 번의 우회를 하여 시간이 지체 되었습니다 ]
쓰나미처럼 곧바로 모스크바라는 전략적 목표물을 점령하여야 함에도 전의를 상실하여 고립되어 있는 소련군을 소탕하기 위해 주공의 진격로를 우회시킨 결과 시간이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미쳐 동계전투용 장비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10월말부터 독일의 전광석화 같은 진격이 서서히 둔화됩니다.
[ 만슈타인은 독소전 참전 중 원수로 진급됩니다 ]
이러한 전선의 정체와중에 1941년 9월 만슈타인은 룬트슈테트가 지휘하는 남부집단군 예하 제 11군사령관에 임명됩니다. 그 이유는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보내고 난 후 독일이 모스크바라는 정치적 목표물보다는 코카서스의 자원을 염두에 두고 주공을 남부로 바꾸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독일 지휘부는 만슈타인에게 다시 한번 독소전 초기 같은 신화의 재현을 바랐던 것입니다. 1942년 히틀러가 주도한 하계공세를 위해서 남부집단군을 A, B 집단군으로 나누었고 제 11군은 A 집단군에 소속돼 공세에 참여하게 됩니다.
[ 크림반도 전투 작전도 ]
* 독소전 초기 독일의 놀라운 전과는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월등히 많은 병력과 장비로 무장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개전 당시부터 전쟁 내내 독일은 소련에 비해서 병력 및 장비 ( 성능상 일부 장비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 가 열세였습니다. 항상 3~5 배의 소련 전력을 상대로 독일은 전쟁을 벌여 왔습니다.
이런 전력격차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무려 2,000 Km 의 진격 ( 물론 나중에 2,500 Km 의 후퇴를 하였지만 ) 을 하였다는 것은 개전초기 소련군 지도부의 무능함도 이유이겠지만 만슈타인을 비롯한 독일군 지휘부의 전술이 뛰어났었기 때문입니다. *
[ 세바스토플 공략도 ]
작전기간 중 만슈타인은 소련군의 방어를 물리치고 크림반도를 제압하였고 1942년 7월 세바스토폴과 케르치 반도를 함락시켜 흑해연안을 독일의 수중으로 만들어 버림과 동시에 소련군을 우크라이나 밖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티모센코원수가 지휘하던 소련군은 30개 사단이 분쇄되고 소련군 제 6군과 제 57군은 사령관까지도 전사하게 됩니다. 이 뛰어난 공로로 만슈타인은 원수로 진급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그들을 구하기 위해
1942년 11월, 30만 명의 독일 제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됩니다. 그 유명한 제 2차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던 스탈린그라드전투였습니다. 제 6군의 고립과 주변전력의 붕괴로 전력이 와해된 독일 B 집단군을 대신하여 스탈린그라드 작전 지구를 관할하는 돈 Don 집단군 이 창설되고 만슈타인은 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만슈타인이 지휘하던 돈집단군에 하달된 임무는 단 하나,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제 6군을 구원 하는 일 이었습니다.
[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슈타인이 나섭니다 ]
만슈타인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부대를 가지고 창설한 돈집단군을 지휘하여 전선을 박차고 나와 볼가강변에 고립되어 있는 제 6군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을 개시합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고립시킨 소련은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시켜 놓고 전선을 계속 서쪽으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코카서스까지 남하한 독일 A 집단군까지 고립 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 열세한 병력으로 소련군을 밀어내고 35 Km 까지 접근하였습니다 ]
만슈타인은 제 1친위군, 제 2친위군, 제 5전차군, 제 5충격군등의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구성된 남서전선집단군을 밀어 붙이는 괴력을 발휘하여 스탈린그라드 서쪽 35 Km 까지 접근 하였습니다. 이틈을 타서 A 집단군이 코카서스로부터 탈출에 성공하였고,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파울루스에게 서쪽으로 탈출하여 전선을 연결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현지고수 명령을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파울루스의 거부로 천재일우의 탈출 기회가 무산됩니다.
[ 파울루스(右)의 오판으로 구원의 기회가 상실 됩니다 ]
사실 만슈타인에게 가해진 제약은 너무나 컸습니다. 히틀러가 제 6군에게 현지 사수를 엄명한 관계로 전략적 후퇴가 불가능 하였고, 때문에 지휘관 파울루스가 서쪽으로 돌파하여 돈집단군과의 연결을 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돈집단군이 서류상의 집단군이었지 제 4기갑군의 一部로 구사일생 포위를 모면하여 탈출에 성공한 호트의 기갑집단 ( Hoth Panzer Group ) 외에는 마땅한 전투부대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만슈타인에게는 허접한 동맹국군대 밖에 없었습니다 ]
변변한 기갑부대나 장비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만큼 만슈타인 조차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만한 방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시적으로 돈집단군에 밀렸던 소련 남서전선집단군은 병력을 대폭 증원하여 지쳐 있는 돈 집단군을 다시 서쪽으로 밀어 붙이고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꺾어버립니다.
* 최근에는 제 6군의 현지 사수로 인하여 카프카스로 진격하였던 독일 A 집단군이 안전하게 후퇴 할 수 있는 길을 확보 할 수가 있었고, 만슈타인이 이런 전략적 이유 때문에 제 6군 구원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당시 여건에서 만슈타인이 가용 할 수 있던 자원이 없었다는 것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 카프카스까지 진격하였던 A 집단군이 탈출 합니다 ]
개전초기 소련군은 무려 500 만명이 넘는 병력과 장비가 독일에게 죽거나 잡혔는데, 스탈린그라드의 30만 독일군 피해는 이와 비교 한다면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기점으로 독소전의 균형추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이 그만큼 소련에 비해서는 절대적인 열세였다는 증거입니다. *
[ 만슈타인은 부대를 이동하여 재정비합니다 ]
1943년 2월 파울루스의 제 6군이 항복한 이후 긴급 편성 되었던 돈집단군이 해체되고 인근 A, B 집단군과 합하여져 새로이 남부집단군이 창설됩니다. 그리고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의 지휘관이 되어 하르코프 서쪽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복수의 칼날을 준비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남부집단군을 지휘한 만슈타인은 1943년 3월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소련군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여 하르코프와 벨고르드를 재점령하고 뽀뽀프의 전차군을 포함한 무려 20 여개 사단으로 구성 되어진 4개 군 규모의 소련군을 붕괴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올립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멸된 독일 제 6군에 대한 복수를 소련은 즉시 되돌려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 소련은 만슈타인에게 다시 한번 참패를 당합니다 ]
순식간에 소련군 주력 4개 군을 박살내고 하르코프와 벨고르드가 독일 수중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쿠르스크지역이 돌출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곳만 독일이 재점령하면 전선을 축소시키고 더불어 전력을 회복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독일 우위로 전황을 재역전 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만슈타인의 승리에 도취된 히틀러는 또 다시 지나친 참견을 합니다.
[ 히틀러의 간섭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
바로 치타델작전으로 불리는 쿠르스크전투였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기록 된 쿠르스크 전투를 준비한 만슈타인은 이왕 소련과 결전을 벌이려면 소련의 준비가 갖춰지기 전인 지금 즉시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는데, 히틀러는 신무기인 5호 전차 Panther 의 배치가 완료된 이후 하자고 고집피우는 바람에 소련군에게 전력을 증강 할 시간을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최후 예비전력이라고 할 만한 90 만의 병력과 2,500 여대의 기갑장비로 무장한 독일군과 150 만의 병력과 3,500 여대의 기갑장비를 준비한 소련이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벌이게 되었고, 간첩에 의하여 독일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던 소련이 철통같은 방어막을 형성하여 놓은 후, 공격을 먼저 개시하면서 장대한 전투는 시작됩니다.
[ 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
작전 초기 소련의 선제공격과 충분한 대응태세로 독일이 돌파구를 형성 하는데 난항을 겪었으나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차츰 진격이 속도를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가 다시 한번 딴지를 걸어 주요부대를 이탈리아로 철수시켜 버립니다. 이때 만슈타인은 철수를 강력 반대하며 히틀러에게 말했습니다.
" 지금 쿠르스크에는 소련의 모든 병력, 기갑전력, 포병화력이 집결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이것을 분쇄해야 합니다. 이런 기회란 절대로 다시 오지 않습니다. " 하지만 똥고집의 화신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말을 듣지 않고 병력을 철수시키고 작전을 철회시켜 결국 쿠르스크전투는 독일의 패전으로 막을 내립니다.
[ 독일은 돌출부를 절단하려 하였으나 소련이 방어에 성공합니다 ]
*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쿠르스크 전투가 과연 소련군의 승리였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소련의 피해가 더 컸었고, 알려진 것보다 독일군의 피해는 경미하였다고 사료에 나와 있습니다.
만슈타인도 자신의 저서에 쿠르스크 전투의 백미인 프로호로프카의 大 기갑전은 잃어버린 승리라고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독일이 히틀러가 작전을 철회함으로써 소련의 방어망을 뚫지 못한 상태로 종료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공세가 아닌 수세로 몰리게 되었고 만슈타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전선의 상태악화로 히틀러의 히스테리에도 불구하고 그해 9월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을 드네프르강 연안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철수작전 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으로 소련군을 다시 한번 포위 섬멸한 후 후퇴하는 괴력을 발휘하여 적을 황당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 고집불통 바보는 명장을 해임하여 버립니다 ]
1944년 2월 중순 만슈타인은 재차 철수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패전과 전략적 후퇴를 구별하지 못하는 히틀러는 1944년 3월 30일 계속된 후퇴의 책임을 물어 만슈타인을 해임하고 종전 때까지 재기용하지 않습니다. 아마 전쟁 중 전사하였다면 롬멜을 몇 배 능가하는 전설이 되었을 만슈타인은 이로써 전사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모범을 보여 부하를 이끌다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가 만슈타인을 2차대전 중 가장 유능한 장군이라고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군사이론가 리델 하트 ( Liddell Hart ) 는 만슈타인 원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 연합군에게는 가장 두려운 천재였다. 그는 제 2차대전의 모든 지휘관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이후 공세를 취하는 소련군의 대병력을 유인하여 포위 섬멸시켰으며,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고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승리가 따랐다. 만일 히틀러가 그의 작전에 관여를 하지 않았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
[ 최고의 군사이론가 였던 영국인 Liddell Hart 입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저서가 독일의 전격전 택스트가 되었습니다 ]
하지만 그것만이 만슈타인의 모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슈타인은 승리의 명장이었지만 상당히 겸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점령지에 거처를 꾸밀 때, 부하들이 인근에서 노획 ( 사실상 약탈 ) 한 고급가구와 집기를 가져 올 경우 불호령으로 꾸짖었다고 전하며, 항상 야전침대와 작전을 연구 할 책상 외에는 일체의 사치를 거부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야전의 병사들과 같은 종류의 식사를 함으로써 부하들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 전선에서 검소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
하지만 군인이 지켜야 할 군율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독소전쟁 중 부하 장병 2명이 부녀자를 강간한 것으로 조사되자 피해자가 보는 앞에서 지체 없이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슬라브인들을 인간이 아닌 하류민으로 여겨 학살을 밥 먹듯 하던 분위기를 생각 할 때 그의 도덕성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독소전에서 학살은 일상사였습니다 ]
그는 또한 예하 부대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병사에 대한 집행은 반드시 자신의 결재를 받도록 명령하였습니다. 4명의 병사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죄목이 전투 중 소련 전차의 진격에 진지를 이탈하여 동료들의 희생을 가져왔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슈타인은 모두에게 집행을 유예시킵니다. 그 이유로 해당 병사들이 처음전선에 투입된 신병들이라서 극도의 공포감에 짓눌려 있었고, 그런 사태에 익숙하지 못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항상 최전선을 직접 살피고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
야전에서 그를 믿고 따르면 항상 승리를 이끌어 왔고 야전의 병사들을 기준으로 모범을 보이며 생활하던 지휘관을 부하들이 본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에리히 리핀스키 폰 만슈타인 ( Erich Lipinski von Manstiein ) 은 1945년 전범으로 체포돼 1949년 영국군사법원에서 1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953년 석방됐고 1955년 회고록을 출간합니다. 일설에는 소련이 영국에게 만슈타인을 넘겨 달라고 난리부르스를 떨었다고 합니다.
[ 1971 년 서독군을 방문한 말년 모습 ]
만슈타인의 저서를 보면 ' 훌륭한 병사와 그렇지 못한 병사 ' 를
1. 부지런하고 유능한 병사
2. 부지런하지만 무능한 병사
3. 게으르지만 유능한 병사
4. 게으르고 무능한 병사
의 4 단계로 구분 하였습니다. 만슈타인은 지휘관으로 가장 적합한 형태가 ' 게으르지만 유능한 병사 ' 라고 하였습니다. ' 부지런하고 유능한 병사 ' 는 훌륭한 병사이지만 참모 스타일이어서 지휘관의 자질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 게으르고 무능한 병사 ' 는 그냥 두면 피해를 주지 않으므로 오히려 ' 부지런하지만 무능한 병사 ' 보다 괜찮다고 합니다. 혹시 어디에 해당 되십니까 ?
[ 뛰어난 지휘관 일 수록 이들의 목숨을 많이 구할 수 있습니다 ]
장군 한사람의 명성은 사병 만명의 피로 이룬 결과다라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만, 이순신과 원균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같은 병사와 장비를 가지고도 승리를 이끄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 위대한 장군 한사람이 사병 만명의 피를 구 할 수 있다가 맞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일방적인 후퇴에서도 뒤 돌아서서 소련군을 곤혹스럽게 하였던 만슈타인은 비록 전쟁에서는 패하였지만 전투에서는 승리하였던 위대한 敗將 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그를 평가함에 있어
만슈타인의 회고록과 전사에 기록된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놀라운 전과와 지휘능력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이러한 뚜렷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의 업적이나 처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충분히 후퇴를 할 수도 있는 독일 제 6군을 고립시킨 것은 만슈타인 본인이라는 의견입니다. 즉 파울루스가 제 6군의 서남부를 봉쇄한 소련군에 돌파구를 내어 돈집단군과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는데 만슈타인이 오히려 제 6군에게 현 위치를 사수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 포로가 된 스탈린그라드의 제 6군 ]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만슈타인이 일단 제 6군의 현지고수를 명하였을 때는 그가 지휘할 구원군인 돈집단군이 전투준비를 제대로 완료한 시점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제 6군이 탈출을 하였다면 사실 죽도 밥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준비되지 않은 성급한 탈출 작전은 코카서스로 깊숙이 남진하였던 A 집단군마저 고립 시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전 기간 내내 스탈린그라드 현지사수를 엄명한 것은 히틀러였습니다. 구출 준비 완료 후 작전을 막상 실행 하였을 때 정작 제 6군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던 유일한 인물이 히틀러였고 만슈타인, 파울루스 뿐만 아니라 OKH 까지도 모두 잘못된 지시인 것을 알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 크루스크 전투의 한 장면 ]
그 외에도 쿠르스크전투에서 만슈타인의 주장을 히틀러가 거부하여 소련의 주력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회고록에 쓰여 있지만 사실 독일이 최후의 일격을 가할 만큼의 충분한 예비를 이미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리였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 히틀러가 악인이어도 국가 수반이었습니다. 만슈타인도 이를 무시 할 수 없었습니다 ]
또한 본인이 나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부인은 광신적인 나찌 신봉자였었다. 소련군 포로 대학살에 관여는 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방임하였다 등등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고 결국 그가 쓴 회고록은 잘된 것은 자기 탓 안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자화자찬 수준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까지도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먼저 이해하여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짧은 바이마르공화국 시기가 있었기는 하였지만 제 2차대전 종전 때까지 사실상 독일은 국민이 주권을 행사해 본 경험이 없는 전제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런 이유에다가 특히 귀족출신이 많은 독일 군부의 지휘관 중 권위적인 최고 지도자의 명령을 함부로 거역할 사람은 더더구나 많지 않았습니다.
[ 히틀러조차도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굴종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난중일기가 자기중심으로만 전사를 기록하였고 이순신 장군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전투에만 골라서 참전하였기 때문에 충무공의 100 % 승리가 알고 보면 별것 아니며 무능한 선조를 주군으로 모셨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결국 눈치를 보았다라고 함부로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만슈타인에게 비록 일부 흠결사항이 있다하여도 그의 군사적 업적을 절대로 깎아 내릴 수 없습니다.
이순신도 살아생전 뛰어난 전과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받았을 정도인데 사실 만슈타인의 업적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가 적군은 당연하겠지만 아군에게도 없었을까요 ? 생과 사를 구분 지어야 하는 전투에서 그것도 독소전과 같은 엄청난 전장에서 항상 소수로 다수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만슈타인의 업적을 능가하는 지휘관이 있었습니까 ?
물론 판단을 그르쳐 실기한 작전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찌의 폭정이나 학살극에 소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후회와 회한의 기록을 남길 수 있고 변명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인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앞에서처럼 언급 되어지는 것과 같은 지휘관으로써 그의 업적은 이러한 결점을 덮고도 남을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패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승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해 본적도 없으면서 남들의 업적을 칭찬하기 보다는 무조건 " 알고 보면 그것 별거 아니야 " 하는 식으로 쉽게 남의 업적을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 쳐놓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그동안 남의 장점이나 업적을 보기 전에 약점이나 흠집을 먼저 보려고 애쓰지는 않았나요 ? [ august 의 軍史世界 ]
P.S 출처는 http://blog.chosun.com/blog.screen?userId=xqon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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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슈타인의 회고록은 언제쯤이면 국내번역될까요?
기대하려면 플래닛미디어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예전에 책세상에서 밀리터리클래식 시리즈라고 전쟁서적등을 번역했었는데, 다시 한번 이런 기획을 기대하는 수밖에..
전 그런거 기다리다 지쳐 그냥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음 롬멜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관심히 있어 알았는데 만슈타인에 대해서는 전격전 밗에 몰랐는데 전략 전술 능력이 장난이 아니신 장군이시군요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저도 동부전선 읽으면서 이해가 안되는게 히틀러의 사수명령으로 파울루스가 고립되었다고 하는데 만슈타인은 누구의 명령으로 구원군을 이끌고 갈수 있었느냐? 아니면 히틀러가 만슈타인에게 파울루스를 탈출시키라는 명령을 햇지만 통신상태 불량으로 파울루스에게는 전달이 안된건지? 그리고 본문글에는 만슈타인이 파울루스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만슈타인이 파울루스에게 지휘권을 발동해서 명령할수 있는지.....-_-
월동 준비도 안됬고 공군을 통한 보급도 실패한 상황에서 6군단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을겁니다. 얼어죽거나 로스케들 총에 맞아 죽거나 둘중 하나였으니.. 총통도 전황을 보다가 만슈타인에게 군대를 긁어모아서 포위망을 뚫고 6군단을 구출하란 명령을 내렸겠디요. 글리코 뭐 어떻게 포위망을 돌파했는지는 모르디만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만슈타인만 믿고 함부로 움직였다간 포위망이 좁혀지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고 그랬다가는 구출작전이 실패하고 만슈타인도 포위될 위험이 있으니 파울루스에게 스탈린그라드에서 조용히 몸 사리고 있으라는 뜻에서 만슈타인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수도
사수와 탈출 모두 히총통의 명령으로 이뤄어 졌지만 탈출명령은 파울루스에게 전달이 안된것 같다는 의견이시군요
11월 19일 소련 공세가 시작되고 파울루스가 후퇴의견에, 20일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는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과 만슈타인에게는 구조대를 구성해서 포위를 뚫고 6군과 육로 접촉을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23일 포위망이 완성되고,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이 준비되어 공격들어간게 12월 12일. 뚫고 들어가다 만슈타인이 포기하고 후퇴하는게 24일로 나와있네요. 만슈타인이 파울루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린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만슈타인에게 당시로써는 6군 구출할 최선의 방안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그 성공확률은 차차하고..)
하지만 파울루스는 만슈타인에게 좀더 가까이 와줄것을 요청한걸로 아는데, 파울루스 입장에서 보급도 거의 없이 한달동안 포위망에서 버틴 상황에서 30여km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는건 불가능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만일 만슈타인이 6군까지 도달할수 있었다면 히틀러의 6군 사수, 만슈타인 돌파는 가장 안전한 구출방법이었겠죠.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8만(1월 중순까지도 소련군은 포위망에 많아봐야 독일군 8만쯤으로 예상을... 실제로는 25만)에 대항해서 포위망에 100만을 우겨넣은 소련군의 승리이죠..(그리고 50만명 사상..-_-;;) 진정한 휴먼 웨이브의 진수..-_-;
좋은 글입니다.
제가 본 ebs2차세계대전사에서는 그에대해 "그는 순종적인 사령관이었을 뿐이다."라고 폄하했지만,
귀족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독일 장성들 중 히틀러에게 대들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의문스럽네요.
이 걸 보면 새삼 히틀러는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만한 아집덩어리였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네요.
그게 참 다행이죠ㅋㅋ 만약에 히틀러에게 똥고집이라는 속성이 없었더라면....끄응;;
'히틀러의 장군들' 책의 논조 형식이네요. 아니, 어쩌면 이 글을 쓰진 분이 낸 책일지도?
정말 우수한 장군이긴 했는데, 최고의 장군인지는 약간 이견이 있기도 합니다. 독일군 군단급 지휘관들 중에 워낙에 뛰어난 지휘관들이 많아서 말이죠.(...저 유명한 롬멜이 군단급 지휘관 중에서 중하급 평가를 받기도 한단 말을 듣고는 벙쩠던 적이 있지요.)
말 그대로, '어지간한 지휘관들이 죄다 본좌급이니 누가 최고본좌인지 알기 어렵다' 라고.(...)
그래도 개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최고라고 하니까, 뭐.
만슈타인은 독일군의 그 무수한 명장 중에서도 거의 첫 순위에 꼽히는 명장입니다. 롬멜은 아프리카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주로 싸웠기때문에 서방세계에서 유명했고,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측면이 있습니다. 거기다 무수한 삽질의 영국군이 자신들이 못난게 아니라 롬멜이 우수해서 발렸다 드립의 영향도 큽니다.
아ㅋㅋ '히틀러의 장군들'을 쓰신 분이 맞아요. 그분이 운영하시는 블로그에서 퍼온 겁니다.
독일군 장성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만슈타인과 모델인데, 언제 두사람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아직도 못쓰고 있네요. 귀차니즘이 사라리지 않고 있...
오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전에 '히틀러북'에서 봤는데,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현지를 사수하는 지휘관들조차 패배의 책임을 물어 처형 또는 해임시켰으니까요. 만약, 파울루스가 후퇴를 결심했다면 바로 참모들에게 사살당했을겁니다...
이 분 블로그에 가보니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라고 해서 30편으로 연재한 분량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ebs다큐멘터리보다 훨씬 상세하게 나와 있더군요.
그 기록을 보고 제가 할 말은(벌써 몇번씩 언급하지만)아돌프 히틀러는 전사에서 유례없는 뻘짓을 명령한 지도자로 열손가락안에 꼽힐 인물일 겁니다.
다만 영화 "enemy at the gate"에 나온 스탈린그라드 볼가강 사수 장면을 언급하는 부분은 좀 옥의 티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급박하긴 했지만 그렇게 무식하게 전장에 투입은 안 했다고 합니다. => 영화적인 과장이죠.
그리고 제2차 대전의 10대 명장 좀 뽑아주세요~~~
위에서 말씀드렸다 시피 명장급이 '너무 많아서' 못꼽습니다. 독일군 '기갑전 본좌'만 꼽아도 구데리안(기갑전만 따지면 구데리안이 최고 본좌), 클라이스트, 호트, 발크 등등... 거기다가 다른 분야까지 꼽으면 그야말로 수두룩. '독일군 명장' 만 꼽아도 열명이 아니라 3,40명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군만 꼽으면 쥬코프, 바실레프스키, 로코소프스키로 대표되는 소련군의 명 지휘관들도 있고... 미국도 우수한 지휘관이라면 상당히 많죠.
독일만 쳐도 당장 떠오르는게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모델, 롬멜등..
소련도 쥬코프나 로코소프스키, 코네프외 기타등등...
워낙 스케일 큰 전쟁이니 10명만 꼽기가 뭐한듯
이... 이런 그렇게나 많이... (스크랩이 안되요!!)
정말 히틀러가 고집을 꺽고 만슈타인의 의견을 제대로 들었다면 독소전의 향방이 많이 바꼈을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