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물건도 갖다가 받치고..여기까지 얘기하면 짜증나죠..약소국의 비애라고 할 수 있고...
근데 이게 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조공이란게 당시의 무역 행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은 자신들에게 조공을 받치는 나라들에게 무역을 허용했습니다. 물론 흉노나 금나라같이 물리적인 힘이 쎈 국가들에게 조공을 갖다 받치고 무역을 하긴했지만요...
당시 조공은 다른 나라에게 행한 무역허가권과도 같은 것이었습죠...
우리나라에서 조공하러 중국에 가면 상인들도 줄줄이 따라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드라마 상도 아시죠? 그것처럼요...당시 사무역은 금지되어있었습니다.
중국쪽에서는 조공을 받치지 않는 나라에게 무역을 허가하지 않으려는 이유와
우리쪽에서는 공무역을 통해 특정집단이 이익을 독점하여 다른 사람들이 무역을 참가하지 못하게 위해
사무역을 금지시켰습니다.특히 조선시대때 얘기죠..양쪽에서 사무역을 금지 시켰죠..
조선의 상인들이 공무역을 통해 중국에서 물건 띄어다가 조선에서 따블로 이익남겨
국내에 팔고 따따블로 이익을 남겨 일본에 가져다 팔았습니다..
엄청난 이익이었죠...유교사회라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중개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상인집단이 나타나게 됩니다..
청나라 시대 얘기인데 중국에서 아편으로 중국사람들이 취해 돌아다닐때 고려인삼이 아편중독을 치료한다고 소문이나 고려인삼이 미친듯이 가격이 올라가 조선시대 상인들이 많은 이익을 봤습니다...
당시 아편의 다량유입으로 중국에 은이 빠져나가 엄청난 재정손실을 야기하였는데 조선의 인삼 구매에 중국의 은이 조선으로 대량으로 빠져나가 중국을 더욱 버겁게 만듭니다. 이로인해 중국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증가하고....
우리는 이렇게 중계무역과 청시대 인삼무역으로 엄청난 흑자를 볼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송나라때는 여진족과 거란족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가 견제파트너로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에 엄청난 무역특혜를 가져다 줬는데 이것이 재정손실을 초래하고 안그래도
여기저기 전쟁배상금갚는데 바쁜 송나라를 더욱 버겁게 많들었죠..송대 유명한 문인은 소동파는 고려를 무지 싫어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특혜는 얻어가고 거란족하고 여진족은 지대로 견제안하고 말이죠...
그보다 조공으로 확실히 중국이 손실을 입는 것은 조공 의전때문입니다..
자......우리가 중국에 조공품을 가지고 갑니다. 황제에게 갖다가 처먹이죠..
근데 그때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은 유교였습니다. 서열이 분명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무언가 더 주어야 장자행세를 할 수있었고 명분이 되었습니다. 상국 체면에 제후국이 선물 가져왔는데 돌아갈때 빈 손으로 가게 할 수 없었죠. 체면 문제 때문에 조공국에 배가 되는 선물을 안겨주고 돌려 보냅니다..
이쯤되니 우리쪽에서 신난거죠. 그래서 껀수있을때 마다 조공을 하러 갑니다. 추석때 설날때
황제 생일때 황제 마누라 생일때 황제가 이름도 모르는 자식 생일때 조공하러 갑니다..
이젠 중국에선 점점 근심이 쌓입니다. 얘들 왔으니 그냥 돌려보낼 수 없고, 자주 안왔으면 좋겠고....실제로 이것땜에 재정에 자주 빵구가 났습니다.
그래서 조선조때는 중국에서 자주 않왔으면 하는 제스처를 보냅니다.
이때 생겨난 말이 일년 일공 삼년 일공(이거 정확한 명칭은 모릅니다.아시는 분계시면 정정을 ...일년 삼공 삼년 삼공이었나?)입니다...일년에 한번씩 오지 말고 3년에 한번씩만 와라 이거죠..
아쉬운 것은 당시에 화폐 본위 경제가 아니고 미곡을 본위로 하는 경제였습니다..
당시 부유하다는 기준은 쌀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관건이었죠..
그래서 경제적 이익이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경제적 이익(화폐나 다른 재화)이 생겨도 쌀이 생겨나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당시 우리나라 경제에 큰 보탬이 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경제적 이익이 과소 평가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조공을 받쳤다는게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질서가 중국에 달려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지금의 미국처럼) 우리는 그 흐름을 타서 경제적 이익과 실리를 얻은 것입니다..한마디로 니 형해라 나 니돈 가져갈께랑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후세에는 일부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못난짓 했다고 하지만 현실 속에서 대안을 찾고 지혜
롭게 대처한 우리 조상들이 전 자랑스럽습니다. 자존심은 잃었지만 실리는 잃지 않았던 거죠..조공에 대해서 자존심 상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닙니다. 이제부터 조공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십습니다...
(아 몽고 원나라 시대는 예외로 하죠. 몽고애들은 당시 약탈경제가 시스템화 되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동생이 와도 돌아갈때 더 많이 준다는 개념이 없던 애들이 었죠...)
조공무역 체계가 확실히 잡힌건 명나라때부터 인데 주원장이 그런 방식을 선호 했지요! 원나라때는 일종의 안전보장 개념이 강했습니다! 원나라가 이룩한 거대한 네트워크에 접속할수 있는 권리와 함께 말이죠! 덕분에 우리나라는 당시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베이징 개성으로 이어지는 거대 네트워크 속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할수가 있었지요! 당시 고려의 유물들을 보면 엄청 화려하고 귀족적인것을 알수가 있는데 그런 무역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개경에는 항상 아라비아 상인들이 상주 했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의 회교 사원도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지난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징기츠칸이 꼽혔겠습니까! 동서의 교류를 증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조공무역 체계가 확실히 잡힌건 명나라때부터 인데 주원장이 그런 방식을 선호 했지요! 원나라때는 일종의 안전보장 개념이 강했습니다! 원나라가 이룩한 거대한 네트워크에 접속할수 있는 권리와 함께 말이죠! 덕분에 우리나라는 당시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베이징 개성으로 이어지는 거대 네트워크 속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할수가 있었지요! 당시 고려의 유물들을 보면 엄청 화려하고 귀족적인것을 알수가 있는데 그런 무역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개경에는 항상 아라비아 상인들이 상주 했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의 회교 사원도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지난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징기츠칸이 꼽혔겠습니까! 동서의 교류를 증
진시킨 공로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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