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먹었다’는 표현은 이때가 가장 바람직한듯 싶다. 봐야지 봐야지 하다 기회를 놓치고 3년이 지난 뒤 TV에서 본 ‘박하사탕’에 대한 느낌이다. 이창동과 설경구, 그리고 내무반 침상위에 짓이겨진 박하사탕까지도 소름끼칠 지경이다.
영화를 보고 얼른 몇몇 평들을 뒤적여 본다. 그 가운데 감독의 말 하나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영화란다. 그렇다. 아니 그럴 것이다. 되려 그것이 감독이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79년부터 시작되는 한 인물의 삶은 - 물론 영화구조에서 79년은 시작이 아니라 끝이다. - 한국 현대사의 왜곡된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쉽게 재현해내기 어려운 80, 90년대의 사회를 큰 줄기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 - 감독의 말마따나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를 찍을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또 자칫 오버페이스하면 TV드리마 ‘모래시계’의 전처를 밟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5월 광주의 모습이 나온다하기에, 또 어떤 이는 광주를 그린 영화라 하기에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은은하게 전해오는 박하사탕의 느낌처럼 영화는 내게 다가왔다.
주인공 영호는 공장 노동자의 삶으로부터 5월 광주에서 총에 맞는 군인으로, 다시 운동권 학생을 고문하는 형사로,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바람을 피우는 가구점 사장으로, 그리고 끝내는 사채업자와 증권회사에 돈을 다 털리고 동업자에게는 배신을 당하며, 아내에게 버림받는 낙오자로 치달아 간다. 운동권의 투쟁의 역사로 쓰기엔 거부감이 클 것 같고, 평범한 소시민의 이야기로 끌어가면 밋밋할 것 같은 사회상을 흠잡을 데 없이 전시해놓은 것이다. 이렇게 엉킨 삶이 있을까 의문도 들 수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 현대사의 굴곡은 거칠고 험했다. 영호는 ‘모래시계’의 태수도 우석이도 범접할 수 없는 그 질곡의 시대의 대표선수인 것이다.
영호의 삶과 함께 한 20여년의 시대가 큰 줄기라면 다른 한 줄기는 아내, 남은 한 줄기는 ‘수님’이라는 첫사랑이 쥐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구조 또한 영호가 겪은 시대와 그렇게 닮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사랑과 아내라는 설정은 순진한 청년과 왜곡에 찌들어가는 한 인간이라는 대비구조와 너무도 잘 들어 맞는다. 결국 영호는 ‘나 돌아갈래’를 외친다. 첫사랑에게로, 그리고 꿈 많고 순수한 청년의 모습으로다. 하지만 과연 돌아간다면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영화는 1979년의 가을로 마무리를 했지만 다시 돌아간들 이후 20년을 또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거늘... 지난 20년이란 세월동안 동시대인들 모두가 피해자였고, 영호는 단지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과연 이 영화 스토리는 어떻게 구상한 것일까? 난 처음부터 이 스토리가 거꾸로 쓰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9년 가을, 자살을 하려는 남자가 있다. 우리는 그를 모른다. 그는 왜 죽으려는 것인가? 그것으로부터 그 궁금증을 추리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는 그것을 지난 20년의 시대에 접목시켜 놓는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원래의 스토리를 뒤집어 놓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과거를 추적해보고 싶다. 우리들의 지난 세월을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싶다. 기차는 뒤로 선로를 따라가며 거꾸로 가는 자동차와 - 김광석의 노래가 생각난다. - 손수레를 몰고 뒤로 가는 할아버지,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 순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고, 또한 어떤 과거를 살아왔으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줄곧 영화를 보며 드는 생각이었다.
영호는 눈물을 흘린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심장박동수를 빠르게 하다가 기차의 기적소리와 함께 흘러버린 그 눈물은 심장은 물론 폐와 간장 모두가 쭈쭈바 빨리듯이 달라붙는 느낌을 주었다. 아직껏 나처럼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꼭 권하고 싶은 영화다. 박하사탕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