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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보름날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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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우선 주목할 점이 있다. 둘째 구 '단군의 터전'이 쓰러져 가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가 '단군'을 언급했다는 것은 민족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로 보인다. 당시 유림 의병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여주는데 중화의식.척사정신, 주자학을 중심사상으로 내세우던 유림들과 달리 신돌석은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신돌석 의병장이 월송정에 올라 이 시를 읊던 1904년은 일본이 우리 땅을 점령하다시피 하면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때로 우리 땅 전체가 전쟁에 휘말려 고통받고 있었다. 이때 신돌석이 단군을 애타게 찾고 부르짖은 것은 그의 가슴에 민족혼을 보존하려는 뜨거운 불길이 녹아 있었던 때문 일 것이다.
신돌석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는 그의 사상과 신념을 전해주는 유일한 작품이다. 이것 말고는 그가 의병진을 이끌고 다니다가 남긴 짤막한 시 한 수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자료가 지니는 가치는 더 큰 셈이다. 벼랑 끝에 매달린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며 방책을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피 끓는 젊은이의 모습을 이 글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절망감과 울분이 눈에 선하게 잡히지 않는가?
▣신돌석 의병장,“축지법을 썼다..독주마시고 암살(暗殺)되는 비통한 죽음”
경북 동해안지방의 민족적 영웅인 신돌석 의병장은 일제의 계략과 재물에 눈이 먼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영덕군의 기록에 따르면, 신돌석 의병장은 후일을 기약하고 지품면 눌곡리 외가의 동생들인 김상렬, 상태, 상호 형제를 찾아가 은거했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이 준 독주를 마시고 도끼로 암살되고 말았다 한다. 이 사건은 1908년 음력 11월18일 일어났다. 그 때 장군의 나이는 31세였다.
이후 일제 해방기를 거쳐 1962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고 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됐다. 99년 신돌석 장군의 혼이 어린 이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이 조성되고 그 기념관이 세워졌다.
영덕군 눌곡 송정 마을은 신돌석 의병장과 관련된 이야기가 몇가지 전한다. 그가 "송정 앞마을인 지당(地唐)의 참물덩게에 돌다리를 놓을 때 장정 몇명이 달라붙어 돌을 올려놓으려 하는데, 마침 신돌석이 지나다 보고 혼자 이를 번쩍 들어올려 다리를 놓았다. 박상진의 당숙인 박시봉 집 디딜방아를 놓을 때에도 역시 혼자 힘으로 놓았다. 또 송정에 피신해 있을 때는“축지법을 썼다”는 이야기가 박상진의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 신돌석 의병장은 이 무렵 경주 최준(崔埈)의 집에도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마음에 맞는 인물을 찾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만난 인물은 손병희(孫秉熙)ㆍ박상진ㆍ민특무(閔特務;민긍호,미상.1908)ㆍ이강년등이었고, 특히 박상진과는 의(義)로서 마치 형제처럼 지내며 시사를 논하다가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을 전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된 부분이나 왜곡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료를 통해 당시 신돌석 의병장이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나 교분을 쌓고, 한편으로는 일본 매국노들을 상대로 분을 풀면서 훗날 항일 의병장으로서 우뚝 설 기초를 다졌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