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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과 삶도 맹물같이 의미없고 존재감이 없는 삶에서 포도주처럼 달콤하고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10년 20년 신앙생활하였음에도 성품이 변화되지 않은 원인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참된 기쁨과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비법을 배우고 큰 은혜받아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행복한 사람, 기쁨이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첫번 제자들을 부르신 날로부터 사흘되던 날이었습니다. 갈릴리 가나라는 작은 마을에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미 그곳에 가 계시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아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혼인잔치에 데리고 가시자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혼인잔치는 신랑 신부에게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유대 혼인잔치는 오늘날과 달리 몇시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1주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혼인잔치는 고달픈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혼인 잔치집에 웃음꽃이 만발하고 기쁨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포도주가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잔치 집에서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줍니다(시 104:15; 전 10:19).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기쁨이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기쁨을 얻고자 술을 마십니다. 주로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즐거움을 술에서 찾고자합니다. 술이 없으면 허탈감에 시달립니다. 요즘 배우 유아인에 대한 보도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주로 마약이나 포르포졸 혹은 음란물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좀 고상한 사람은 독서나 음악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순간적인 기쁨 후에는 반드시 허무나 참담한 결과가 뒤따르는 것을 봅니다. 이런 삶의 결국은 파멸입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마음이 원하는대로 다 즐겨 본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사람들은 세상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언제나 허무의 물만 길어 올릴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기쁨의 동산인 에덴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혼인 잔치 집의 흥은 깨어지고 이로 인해 크게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지금 생기고 있는데 누구하나 이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코로나 여파로 성도들이 믿음의 대열에서 떨어져나가고 다음세대들은 완전히 떨어지고 있는데도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가 나서서 걱정하는 분들이 적습니다. 우리 또한 신앙의 기쁨이 떨어져 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고 삶의 의미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삶에서 기쁨이 떨어지고 믿음이 떨어진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이런 한국교회를 보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런 것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는 먼저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하나님 중심,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고자 애쓰기 때문에 모임에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 기도하더라도 자기와 자기 가정만을 위해 기도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문제를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문제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들고 갔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주인이 어떻게 준비했기에 포도주가 떨어지냐 불평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조용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께 들고 가서 아뢰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어딜 가나 방관적인 자세나 비판적인 자세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부족한 것을 살피고 적극적으로 섬깁니다. 기도란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 문제를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누구 때문인가를 따지고 서로를 비난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손님들은 주인이 포도주를 적게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주인을 비난하고, 주인은 손님들이 염치없이 포도주를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고 손님들을 원망합니다. 이렇게 하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발견하고 비판하기는 쉽지만 이를 위해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영적 기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조차 자기와 자기가족들만 안정되고 편안하고 여유있게 살기를 바라지 말씀을 가르치거나 전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말씀의 포도주, 복음의 포도주입니다. 이것이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문제를 예수님께 고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여자여”라는 말은 무례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존칭어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에 따라 움직이시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나름대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때를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이에 마리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이 즉각 응하여 주시지 않고 오히려 거절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들어주면 어디가 덧나냐” 하며 삐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조용히 예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쉽게 응답되지 않으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의 때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5)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든 안되든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때를 기다리라 한다고 해서 막연히 앉아 있지만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역사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그 뜻대로 쓰실 수 있도록 하인들을 순종의 사람들로 준비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들을 귀히 쓰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머리가 명석하고 능력이 많아도 불순종하는 자를 쓰신 적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순종하는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사람을 키울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함을 배웁니다. 마리아가 하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와 줄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 자신이 순종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38). 불순종의 사람이 결코 순종의 사람을 낳을 수 없습니다. 순종의 사람만이 순종의 사람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사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자녀들을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대의그룹 회장 채의숭장로님 어머니는 목사님에게 순종하라고 늘 가르치곤 하였기에 장로가 되었어도 부목사님에게까지 순종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도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이해가 안되더라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자녀들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간구를 들으시고 조금 있다가 일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마침 그곳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습니다. 결례란 식사 전후와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손발을 씻는 정결 예식을 말합니다(막 7:3,4). 때가 되자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7a). 이 말씀은 하인들이 순종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약 세 드럼통이나 되는 많은 양의 물을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야 했기 때문에 순종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능력의 역사를 행하고자 하실 때 언제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어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그 순종의 표시로 할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창 17장).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도 엉뚱하게도 언약궤를 메고 성을 돌도록 하는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수 6:1-5).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무덤에서 돌을 옮겨놓는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요 11:39,40).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든지 순종하든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불순종은 반발심과 쓴뿌리를 갖고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소극적으로 무관심하고 뒤로 물러가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문이나 불평 한마디 없이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귀까지 채우니”라는 말씀은 그들이 전적으로 순종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성경말씀으로 머리에 채우라, 교회에 영혼들로 채우라”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이 말씀은 첫번째 명령보다 더 순종하기 힘듭니다. 여기에는 모험과 위험이 따릅니다. 이처럼 순종에는 불이익과 아픔과 오해와 희생과 위험이 따릅니다.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순종하는 것이 참된 순종입니다. 하인들은 이번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세대들은 ‘순종’이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낍니다. 어딘지 모르게 우리를 얽어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과수원을 재배하는 주인이 그의 친구에게 “나의 과수원으로 와서 내가 재배한 사과를 맛보게” 하며 초청했습니다. 주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 번 친구를 초청했으나 친구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나의 사과를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자네가 나의 사과를 맛보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자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이미 자네의 사과를 맛보았네. 하루는 내가 길을 가다가 자네 과수원 담 너머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었지. 그런데 내 생전에 그렇게 신 사과는 처음 맛보았네. 나는 더 이상 자네의 사과를 먹고 싶지 않네.” 그러자 주인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러나 자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네. 변두리에 있는 사과들은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서 키운 것이네. 나는 아이들이 내 사과를 맛보고 훔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도록 세상에서 가장 신 종류의 사과를 골라서 과수원 주변에 심었네. 그러나 만일 자네가 내부에 들어온다면 최상품의 사과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놀랄 걸세. 그 사과는 꿀처럼 달콤하고 너무 맛있어서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버린다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변두리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 이를 마치 신 사과처럼 생각하고 인상을 쓰며 힘들어합니다. 그들은 신앙의 세계는 온통 신사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세계로 들어오기를 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만일 조금만 깊은 세계로 들어가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가장 감미로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하인들의 순종은 예수님의 순종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순종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의 십자가였습니다. 순종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몇 번 해보고 잘 안되면 나는 체질적으로 순종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배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5:8절은 말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화학적인 변화로서 본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맹물같았던 사람이 포도주와 같이 감미로운 사람으로 본질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러했고 루터가 그러했고 죠지 뮬러가 그러했습니다.
아무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교사가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변화의 능력자 예수님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 순종하기만 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분 한 분이 순종을 통해서 변화되시고 우리 자녀들도 변화시키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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