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와 이곳의 사이는 없고 환상이라고 하면 환상이 이미 환상이 아니다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을 지독하게 혐오했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 새 한 마리도 바라본다 나도 그곳을 바라본다 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이 거기 있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꽃을 물속에 두었다 누가 밀어 넣었을까 누가 밀어 올렸을까 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내가 혐오하는 말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 내 얼굴을 스쳐 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혐오한다 치욕스러웠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웹진 《님Nim》 2023년 7월호 ---------------------- 이승희 /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7년에 《시와 사람》신인상으로, 1999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